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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간에 가장 중국사에 조예가 깊어 보이는 듯 한 중은우시 란 분의 글부터 보시겠는데...
서태후 장례식 기사랍니다.
그 서방기자가 애초부터 왜곡을 의도하고 쓴 것인지...
후대의 해석자들이 중요한 부분은 고의적으로 뺀건지...사진과 기사글이 모순이 됍니다.
전 후자로 보입니다.
글: 헨리 보렐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의 방대한 영구(靈柩)가 가마꾼들에 의하여 보렐이 서 있는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금황색의 비단이 영구를 덮고 있는데, 거기에는 푸른색 봉황과 붉은색 구름무늬와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영구의 윗부분에는 금색 원구가 상감되어 있었다. 도로의 건너편에서는 외국공사관의 경비들이 영구가 지나갈 때 차렷자세로 경례를 하였다.
1908년 11월, 경성에는 의론이 분분했다. 황제와 태후가 둘 다 죽었다는 것만 알았고, 죽기 전에 수천년간 내려온 전통에 따라, 만조의 문무백관들이 보는 가운데 고독하게 죽어갔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 위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죽기 전의 황제와 태후의 성체에는 손을 댈 수 없는 전통 때문이다. 어쨌든 자금성의 높은 담장은 이처럼 견고하고, 신비는 바깥에서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몇 개월전, 광서황제는 북경에서 4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청서릉(淸西陵)에 묻혔다. 그곳에는 옹정황제, 가경황제, 도광황제등 청나라 황제가 잠들어 있다. 지금은 서태후의 장례에 관한 보도가 넘쳐나고 있다.
자희태후는 현대과학문명이 이미 중국에 들어온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의 장례식에서 연출되는 것은 여전히 수천년 역사를 지닌 고래의 의식이다. 일찌기 8월에 이미 대량의 종이로 만든 명재(冥財)를 불사른 바 있다.이런 것들은 그녀가 좋아하던 재물을 상징하는데, 아주 정교하고 진짜처럼 만들었다. 여기에는 시계, 화장대, 담뱃대 및 종이로 만든 사람까지 포함되어 있다. 종이로 만든 사람은 사후에 자희태후를 모시기 위한 것이다.
종이로 만든 현대적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열을 지어 만들었다. 이는 장례가 거행되기 이틀전에 자금성에서 궁문중의 어느 한 곳에서 불태워졌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먼저 저승에 가서 준비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문의 어느 보도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처럼, 만일 공자와 맹자가 저승에서 이런 현대적인 복장의 군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또 그들이 부장품으로 불태워진 것이 조상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가마가 아니라, 우아한 유럽식 브로엄차를 보았을 때 무엇을 생각할 까. 자동차바퀴와 유럽식 차등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
금황색베로 뒤덥힌 태후의 영구는 천천히 그리고 장엄하게 북경의 회색토지위를 지나고 있다. 그안에는 자희태후의 시신이 누워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숭배하던 여인이며, 가장 위대한 여황제이며, 생활과 권력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여인이다. 그녀가 영구에 숨어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모자를 벗어 예를 표했다. 나는 이 날을 잊을 수 없다. 1908년 11월 9일. 바로 음습한 겨울이었다.
새벽 6시, 하늘에서는 뼈를 에이는 삭풍이 불었다. 나는 가죽옷을 걸치고, 구형 황포차를 차고 넓다란 거리를 달려, 동직문으로 갔다. 동직문 바깥의 한 언덕위에는 외무부 관리들이 각국 공사관의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의 지붕이 있는 관람대를 만들었다. 동직문내에는 정자도 있었는데, 이곳은 각국 외교관, 고귀한 귀족 그리고 신문기자들을 위하여 마련한 곳이었다. 나는 원래 암스테르담 텔리그라프의 기자로서 그 곳에 자리가 마련되었으나, 동직문내에서는 일반 백성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성밖에서는 일반백성들을 모두 내쫓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북경에서 청동릉(淸東陵)까지는 75마일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벽이므로 북경의 거의 모든 주민들은 계속하여 동직문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동직문밖에서 장례를 보내는 행렬을 보는 것이 더욱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물론 장례식에 참석한 외국대표들과 섭정왕을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동직문내의 정자에 있을 것이지 더 나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례가 거행되기 몇개월전에, 청동릉으로 가는 길은 이미 수리가 완료되었다. 청동릉안에는 순치황제, 강희황제, 건륭황제, 함풍황제와 동치황제등 청나라 황제들이 잠들어 있다. 서태후의 능묘는 광서황제가 묻힌 청서릉이 아닌데, 이것이 절대 우연은 아니다. 도로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증기압로기가 동원되었고, 친왕과 고관들도 도로상황을 순시했다. 사람들은 모든 노력을 다하여 자희태후를 위하여 이 길을 마련했고, 금색으로 뒤덮힌 금황색 영구가 장엄하고 순조롭게 이 길을 지나가도록 배려했다.
내가 거주하는 대사관구역에서 황포차를 타고 동직문으로 오는데에는 1시간이 걸렸다. 앞의 반시간은 합달문(哈達門, 지금의 숭문문임)의 길을 따라 달렸는데, 거리에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동직문 오른쪽의 작은 거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체 거리는 무장한 군인과 보병으로 꽉 차 있었다. 일본군인복장을 모방한 중국군인들은 기운차 보였고,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다. 마차, 당나귀차, 말, 황포차가 서쪽과 북쪽에서 계속 몰려들었다.
동직문 부근에서 나는 아주 밀집되어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만일 유럽이었다면, 나는 아주 무서웠을 것이지만, 이 때는 아주 태연자약할 수 있었다. 쿠리(苦力), 차부(車夫)와 기자(騎者)의 고함소리와 말과 당나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황포차안에 조용히 앉아서, 편안하게 시가를 하나 꺼내 물었다. 폭력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나의 목 근처에 말 머리가 하나 나타났다. 좀 있다가 온순한 작은 당나귀를 거의 껴안을 뻔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동직문의 문루로 다가간 것이다. 4방형의 옹성(瓮城)에 도착했더니 중국군인들로 꽉 차 있었다. 전루(箭樓)를 통하여 성문바깥의 넓은 공터로 갔다. 그곳에는 수백수천의 당나귀차가 성바깥의 사람들을 싣고 산넘고 물건너 이 곳으로 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과 고비사막의 모래속에서 반시간을 걸어올라서, 마침내 장례행렬을 구경할 수 있는 관람대에 올랐다. 외무부의 입구에는 아주 엄숙하고 영어를 할 줄 아는 관리가 손님을 맞이하고 초대권을 받고 있었다. 공사관에서 발급한 입장권이 없이는 들어가서 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정자의 앞에 있는 도로에도 사람이 꽉 들어찼다. 그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렇다고 무례하지는 않게 자기들이 "번귀(番鬼)"라고 부르는 서양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장례행렬이 나중에 이 곳을 어떻게 통과할 지도 큰 문제로 보였다. 왜냐하면 도로는 벌서 꽉 막혔기 때문이다. 7시 늦어도 7시반이 되기 전에, 모든 손님은 다 도착해야 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도로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7시15분이 되자 장례행렬은 자금성을 출발했다. 그런데 10시반이 되도록 정자안의 관람대에서는 여전히 장례행렬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순식간에 이 도로를 정리할 것인가?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로 보였다. 현대군복을 입고 몽고말을 탄 병사들이 이 곳으로 왔다. 그리고는 마법을 시전한 것처럼, 도로의 수천수만의 구경꾼들은 언덕위로 밀려났다. 무슨 다툼이나 몸싸움은 없었다. 유럽같으면 아마도 최소 반시간은 소요되었을 것인데, 이곳에서는 순식간에 해결했다. 경찰들은 작은 말을 타고, 도로위를 편안하게 달렸으며,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도로를 깨끗이 정리했다고, 모든 사람을 언덕위로 몰아냈다.
성에서 출발하면 장례행렬이 지나는 길은 대부분 내리막길이고, 도로 양쪽은 모두 얕은 언덕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정자에서는 장례행렬을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제일 앞에는 현대군복을 입고 긴창을 든 경기병들이었다. 복장도 깔끔하고 동작도 절도있었다. 이어서, 시종들이 손으로 일렬종대의 작은 말들을 끌고 나타났다. 그 뒤에는 바로 홍색비단옷을 입고, 모자에도 노란색 깃털을 단 시종들이었는데, 개략 수백명이었고, 이들이 돌아가며 영구를 맸다.
이어서 또 한 무리의 긴창을 든 경기병이 나타났다. 그들의 긴창에는 붉은 색의 긴 깃발이 나부꼈다. 뒤에는 마창기병(馬槍騎兵)이 나타났다. 그들은 황실금위군이었다. 몸에는 붉은 색을 새긴 회색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 뒤에는 다시 붉은 옷을 입은 시종들이었다. 녹색, 홍색, 자색, 황색등 각종 색깔의 만장과 낮게 드리운 비단폭을 들고 있었다. 이들 선명한 만장과 시종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치 그들이 황궁안의 깃발은 모두 들고 나와서 태후를 보내는 것같았다.
이어지는 것은 고비사막에서 온 키큰 낙타였다. 온 몸에 털이 가득하고 몸이 건장했다. 마치 고대시대에서 온 괴물과 같았다. 그들은 2열종대로 도로의 양쪽으로 진행했다. 그들의 등에는 황색비단으로 싼 장막을 건설하는데 쓰이는 물건들을 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장례행렬이 청동릉까지 가려면 꼬박 5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행렬은 얼마나 동방적인 색채를 띄고 있는가? 먼저 노란비단으로 덮히고 색깔이 선명한 가마가 있고, 나중에 흰색의 키작은 말이 나온다. 그러더니 지금은 키크고 위엄있는 낙타가 나온다. 이런 광경은 우리의 시대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던 시대의 일인가.
일시간에 장례행렬에 빈틈이 생겼다. 그러더니 다시 홍색옷을 입은 시종들이 나타나더니, 질서없게 우리 앞을 지났다. 길 중앙에는 모양이 이상한 녀석이 입에 큰 빵을 씹고 있었다. 검은색의 옷을 입은 관리들이 지나간 이후에 다시 빈틈이 생겼다. 이후에도 역시 질서없는 시종무리들이 지나갔다. 이어서 돌연 두 개의 금황색 비단장식이 나타나고, 가마꾼들이 든 가마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상당히 유럽적인 현대장례에서의 화환이 지나갔다. 그 다음에는 또 빈틈이 생겼다.
막 지나간 말과 낙타의 똥으로 더럽혀진 길은 지금 시종들이 깨끗이 청소했다. 앞에 지나간 모든 것들은 거저 길을 여는 선발대인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아직도 뒤쪽 행렬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멀리 언덕위에서 내리막길로 보일듯 말듯한 깃발들이 나타났다. 붉은 깃발이 하늘을 뒤덮었다. 기병들이 한줄한줄 우리 앞으로 향해 왔다. 더 많은 황색가마가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이 가마의 뒤에는 눈부신 금황색 화염이 있었는데, 덩치가 커서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지면에서 아주 높이 있었다. 자희태후의 영구는 아주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네모난 영구의 위에는 커다란 황금색 구슬이 있었다. 그리고 폭이 넓은 천으로 싸여 있었다. 영구는 1백여명의 가마꾼들이 길다란 대나무장대를 이용하여 들고 갔다. 머리위로 높이 들어서 아주 위엄있고 장중하게 앞으로 이동했다. 일찌기 30분전에 태양은 이미 솟아올랐고, 영구의 황금주단은 하늘에서 불타는 화염이 금색의 강물로 흘러내리는 것같았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이 황금색이 황제를 대표하는 색깔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색의 영구의 앞에는 수백개의 흰바탕에 황금색 깃발이 선도하고 있었는데, 이 깃발은 붉은색과 금색의 깃대에 높이 걸려 있었다.
이어서 가벼운 장포를 입고 모자에 황금색 깃털을 꽂은 시종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뒤에는 자홍색 장포를 입고, 위에는 장수를 비는 금색실로 자수를 놓은 "수(壽)"자가 지나갔다. 이 사람들은 손에 황금깃발을 들었다. 도처가 황금색의 물결이었다. 무수한 네모나거나 둥근 것들에는 용과 봉황이 수놓아져 있었고, 황금색, 녹색, 홍색, 남색등 각종 깃발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가마, 작은 말, 깃발, 만장의 뒤에는 다시 황금색 가사를 걸친 라마승려들이 뒤따랐다. 이들은 몽고와 티벳에서 왔다.
마지막에는 청나라의 고관들이었다. 그들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관모에는 관직을 나타내는 장식물이 있었다. 즉 홍산호와 남보석으로 된 정자(頂子), 공작우모(孔雀羽毛)였다. 그들은 청나라의 최고위 관리들이었다. 여기에는 친왕, 어사와 대신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애도의 표정을 지으며 우리의 앞을 지나갔다. 의복은 질박하였으며 일반백성들처럼 신변에 시종이 따르지 않았다.
방대한 영구는 현재 이미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지면에서 매우 높게 떨어져 있었으므로, 황색천으로 둘러싼 큰 물건은 마치 불이 붙는 것처럼 빛났고 선명한 황금색을 나타냈다. 이것은 우리가 일찌기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중국황족을 대표하고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노란색이었다. 누구든이 이를 어기면 반란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녀의 영구는 1백여명의 가마꾼들이 들고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는 길이 이처럼 어렵고 복잡하여, 황금색 영구는 마치 순금덩어리인 것처럼 느껴졌고, 영구를 덮은 천들도 금속을 사용한 것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천으로 만든 것들이다. 햇볕아래에서 이것은 황금색 폭포를 연상시켰다. 길가의 사병들은 모두 총을 들고 경의를 표했고, 외국공사의 경비들도 모두 영구를 향하여 경례했다.
현장은 고요했다. 언덕위의 수천수만의 사람들도 개미소리하나 내지 않았다. 마치 한 여신이 그들의 앞을 지나가는 것같았다. 영구는 흔들리면서 장엄하게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한 라마가 작은 나무북을 두드려서 가마꾼들의 발걸음을 맞추었다. 나무로 양가죽을 두드리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음울한 정적중에 흘러나오는 차갑고 음침한 소리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관망대위의 모든 서양내빈들은 일어섰고, 모자를 벗었다. 방대한 영구는 이렇게 우리의 앞을 지나갔다. 남색의 봉황은 영구천위에서 날개짓하고 있었다. 붉은 꽃은 선명한 금황색을 비단위에서 내뿜고 있었다. 영구의 위에 이쓴 황금구슬에서는 태양처름 빛을 내고 있었고, 황금색의 주단은 아주 빛나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자희태후라는 기묘하고 무서운 여황제는 이처럼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그녀의 나이든 영혼은 현대세계와 비극적인 결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새로운 시대를 열 용기는 있었다. 바로 그녀가 1900년 감숙의 장군인 동복상에게 유럽의 주북경공사관을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 여인이 눈썹만 찌푸려도 총독들은 깜짝 놀라곤 했고, 한번 미소지으면 그들에게 영광과 재부가 따라왔고, 한번 화를 내면 바로 목숨을 잃어버렸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시신을 들고 북경의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회색의 언덕을 지났다. 일생동안 전설적이며,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들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가 바로 법률이었던 여인이 이제는 차갑고 메마른 시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신성하고 오래된 관념을 대표하였다. 새로운 여명이 도래하였고, 장래 세계의 일부분이 될 이 기묘한 왕국에서 그녀는 낡은 관념들과 함께 죽어버린 것이다.
신성한 황권은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믿어왔다. 그리하여 만백성이 이 반신반인의 황제를 존경한 것이다. 비록 나는 신성한 황권의 꿈이 깨진데 대하여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지만, 다른 한편 현대의 새로운 사상이 바로 이 수억인민에게 전파되면서 그들이 내심으로 모든 사람이 하늘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의 입술에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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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북경,장안가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 중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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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서...
장례행렬의 청나라 시종 및 관리들 복장을 나열하는데...
그건 우리가 흔희 알던 대부분 회색이나 곤청색 청나라 관복관 거리가 멉니다.
시종(내관?)들은 상당수가 붉은색...
여러 사람들은 알록달록 각양 각색...
여기까진... 우리가 제대로 모르던 청나라의 복식은 다양하다고만 이해하면 돼는데...
이 기사가 애초에 왜곡이던...후대의 고의적 해석 누락이던...
장례행렬의 젤 핵심인... 상주들이자 황제의 근친들 복장을 설명치 않는단 겁니다...?
밑에 다른 기록사진 보십시여...
한반도 인들이 전통적으로 장례식 때 입는단 하얀색 소복을 가마 앞뒤의 근친들이 입었습니다.
수행원들이나 병사들 중에도....
유독 삿갓을 쓴 자들의 모자는 흰색입니다...일부 고관직의 달단모자 쓴 자들만 소복입니다.
이도 한족출신이면서..키타이(청)가 아닌...달단의 관직을 가진 자들의 복장이라 해석됩니다.
우리가 아는 구한말의 청나라 삿갓은...모두가 붉은 실로 장식한 화염(?)을 늘어뜨려...삿갓이 온통 빨간색인데...
위의 사진엔 삿갓이 온통 하얀색임을 보건데...삿삿쓴 키타이(청구조선?)인들은 장례식때 흰 색을 갖추어야 했던가 봅니다.
일반 구경꾼들 중에도...삿갓 쓴 자들은 흰색이 눈에 띕니다.
이는 한반도인들과 같은 양식이기도 하고...
중원 남부의 명족들 마니교(明敎)의 영향일 듯도 싶으니...
구한말에 북경에 있던 그 삿갓쓴 토박이 청나라 인들은...한반도와 현 만주에있던 키타이(금나라)풍속을 따르던 자들이자...
새로 교체됀(?) 황실이 고종의 대한뎨국이라 가정하더라도...
이들은 중원 서남부의 명교의 하얀 소복 장례복을 계승한 자들이란 겁니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아는 달단 청나라인들은...
여전히 강시모자를 썼고...
하얀 소복은 몇 몇의 달단의 관료직을 역입한 걸로 보이는 한족들 빼곤...별로 걸치지도 않았습니다.
구한말 키타이(금나라유민,청구조선?)의 위기를 돕겠단 명분으로...달단의 관복을 입고 남명족(상승군)들이 청조에 진출하고...
백러시아의 기승으로 러시아에서 죄다 밀린 타타르(달단) 여진인들이...구한말엔 대거 중원으로 몰렸다가...
남명족들과 뒤섞여 청조 조정을 구성했을 가능성이 짙다 예상합니다.
아마도...순조나...철종 때 부터인듯 싶습니다.
밑에...
또다른 서태후 장례식 사진입니다.
우리가 아는 청구조선의 전통양식인...
소복입은 종친들이 v"자 대형으로 가마 앞뒤에서 줄을 잡아 가마를 인솔하고...
그 안쪽에 근친들이 곡하며 따르는 양식 그대롭니다.
서방 기자가 원 기사에 고의로 누락했던...
후대 해석가 놈들의 의도적 누락이든...
가장 중요한 종친과 근친 황족들의 소복차림을 기사에서 고의로 누락시킨 겁니다.
첫댓글 또 흑백 사진들을 왕창 올리셨군요... 한 번 분석해봅시다.
아이고 영광입니다.
토를 다셨군요... (하하하)
"겨울인데... 청(淸)나라 여름 관모라는 삿갓을 썼습니다"라고 제목을 작성하셨군요...
서태후는1908년 11월 15일 사망하였으며,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사진들을 살펴보니까, "삿갓"형 모자보다는 "강시"형 모자를 쓴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광서제 장례식 사진 중에서 첫 번째의 모습은 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1908년 11월 15일에 서태후가 죽었고, 매우 미심쩍게도 그때까지 건강하던 광서제가 바로 전날에 죽었다고 공표되었다.
서태후의 마지막 포고로 광서제의 3살 난 조카에게 황위가 넘겨졌고, 새로운 황제는 선통(宣統)이라는 연호로 즉위했다.
[출처=다음 백과사전]
위 본문에 나오는... "헨리 보렐"의 글에는,
"몇 개월전, 광서황제는 북경에서 4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청서릉(淸西陵)에 묻혔다. 그곳에는 옹정황제, 가경황제, 도광황제등 청나라 황제가 잠들어 있다. 지금은 서태후의 장례에 관한 보도가 넘쳐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광서제는 서태후 장례식 이전에 청서릉(淸西陵)에 묻혔다는 말이 되는데...
광서제가 실제로 사망한 시기를 알 수 있을까요? 광서제의 장례일은 언제이었습니까??
사실관계를 확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위 본문에 나오는... "헨리 보렐"의 글에는,
"금황색베로 뒤덥힌 태후의 영구는 천천히 그리고 장엄하게 북경의 회색토지위를 지나고 있다. 그안에는 자희태후의 시신이 누워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숭배하던 여인이며, 가장 위대한 여황제이며, 생활과 권력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여인이다. 그녀가 영구에 숨어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모자를 벗어 예를 표했다. 나는 이 날을 잊을 수 없다. 1908년 11월 9일. 바로 음습한 겨울이었다"고 합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장례일은 1908년 11월 9일이라는 것인데... 사망일 1908년 11월 15일과 차이가 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여기 까진 답변할 가치가 없는 웅엉거림 혼자말씀으로 들리니 패스합니다.
마음대로 하시길... 늘 그렇게 하셨는데요...
위 본문에 나오는 "헨리 보렐"의 글에 따르면,
"마지막에는 청나라의 고관들이었다. 그들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관모에는 관직을 나타내는 장식물이 있었다. 즉 홍산호와 남보석으로 된 정자(頂子), 공작우모(孔雀羽毛)였다. 그들은 청나라의 최고위 관리들이었다. 여기에는 친왕, 어사와 대신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홍진영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검은색 상복을 입은 관리들은 "타타르" 청(淸)나라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흰색 소복을 입은 종친들은 "키타이" 청(淸)나라 사람들이라는 것인가요??
참고로 언급하면... 현재 일본에서 상복을 "검은색"으로 합니다만, 메이지(明治) 시대 이전까지는 "흰색" 상복을 입었습니다.
"흰색" 상복이야말로 전통적인 것입니다.
에도(江戶) 시대에는 흰색 상복을 입었습니다.
일본에서 "상복은 검은색으로 한다"고 규정된 것은 1915년입니다. 일본의 일반인들에게 검은색 상복이 정착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이후입니다.
자희태후는 현대과학문명이 이미 중국에 들어온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의 장례식에서 연출되는 것은 여전히 수천년 역사를 지닌 고래의 의식이다. 일찌기 8월에 이미 대량의 종이로 만든 명재(冥財)를 불사른 바 있다. 이런 것들은 그녀가 좋아하던 재물을 상징하는데, 아주 정교하고 진짜처럼 만들었다. 여기에는 시계, 화장대, 담뱃대 및 종이로 만든 사람까지 포함되어 있다. 종이로 만든 사람은 사후에 자희태후를 모시기 위한 것이다. 종이로 만든 현대적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열을 지어 만들었다. 이는 장례가 거행되기 이틀전에 자금성에서 궁문중의 어느 한 곳에서 불태워졌다.
위 본문에 나오는 "헨리 보렐"의 글에는 "장례 풍습"이 나오는데.....
i) 일찌기 8월에 종이로 만든 명재를 불태웠고... ii) 서태후 장례식이 거행되기 이틀 전에 종이로 만든 군인들을 불태웠고...
이런 행위들은 사람이 죽은 후, 곧 사후(死後)에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서태후가 사망한 구체적 시기는 언제인가요?
기록 사진 참 좋습니다...
격려 감사드립니다.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095]에는 "왕위"(王偉)라는 사람의 글이 있는데...
1908년 서태후의 영구는 제사를 마친 후에 "동릉"(東陵)으로 옮겨졌는데, 관리들을 포함하여 10만명의 인력으로 100킬로미터의 거리를 1년여동안이나 갔다고 합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규모 있는 장소에서는 법사를 행하였고, 이듬해인 1909년 10월 초하루가 되어 서태후의 영구는 비로소 "동릉"(東陵)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위 본문에 인용된 흑백 사진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복장을 분석할 경우에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특히, 그 사진들이 실제로 촬영되었던 구체적인 날짜를 알면 좋겠습니다.
기사 작성할 즈음에 사진도 같이 찍는 이치지...기사 먼저 본국에 띄우고...사진은 다음해 여름에 게재할 수도 있단 모순된 말씀이신지여...?
또한...청조의 관복은 동복과 하복을 착용하는 날짜도 정확히 정해졌단 사행록을 기록대로면 어쨋든지 통ㅇ일이 않됐단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뭐 그럴수 있다손 쳐도...
밑의 광서제 사진은 궁성에서 찍힌게 확연합니다...출발 당일날이란 것이져...
무턱대고 사진들만 올리지 마시고요.... 실제 촬영 날짜도 확인해주세요.
위 본문에 나오는... "헨리 보렐"의 글에는,
"몇 개월전, 광서황제는 북경에서 4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청서릉(淸西陵)에 묻혔다. 그곳에는 옹정황제, 가경황제, 도광황제등 청나라 황제가 잠들어 있다. 지금은 서태후의 장례에 관한 보도가 넘쳐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광서제는 서태후 장례식 이전에 청서릉(淸西陵)에 묻혔다는 말이 되는데...
광서제가 실제로 사망한 시기를 알 수 있을까요?
광서제의 장례일은 언제이었습니까??
저는 이것이 궁금합니다. 홍선생님, 답변해주세요.
"광서제의 장례일"을 정확하게 알아야 그 사진들이 촬영된 때를 알 수 있지요... 안 그래요???
그 사진들이 궁성(宮城)에서 촬영된 것은 저도 알고 있는 거고요...
모든 사람들이 동복과 하복을 동시에 교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시기적으로 다소 차이가 납니다.
清朝改歷代的朝冠為禮帽,禮帽又稱為「頂子」或稱為「頂戴」、「頂戴花翎」。
禮帽分為兩種,一種為夏天戴的涼帽,另一種為冬天所戴的暖帽,每年三月開始戴涼帽,八月換戴暖帽。
매년 3월에 여름 모자를 쓰기 시작하고, 8월에 겨울 모자로 바꾼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준이고,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그때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장례일 몇 달 전부터 종이를 태우고 어쩌고 했으니...
그 실제 사망날짜가 왜 발인날짜와도 다르고...그럼 가을에 죽었단 얘기가 되냐시는 질문 예리하셨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현 중화인들이 디미는 청나라 역사만큼은...그 년도나 날짜는 커녕...인물들의 동일인이냐도 의심을 하고 역사연구를 해야지...
현 중화인들이 처 내미는 자료로 도배가 된 위키백과 나부랭이만 절대적으로 맹신해선 않된단 겁니다.
잘 활용을 하되...
님 말씀대로...다각도에서 크로스 체킹을 해서...걸러낼 쓰레기 정보는 무시하고서 조합해야 진실에 가까워 진단 겁니다.
<위키백과>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역사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신봉의 대상이 아니라, 검토의 대상입니다.
그 내용들이 서로 모순되면 문제가 있으므로, 세밀하게 검토하면 됩니다.
위 본문에 나오는 "헨리 보렐"의 글에는 "장례 풍습"이 나오는데.....
i) 일찌기 8월에 종이로 만든 명재를 불태웠고... ii) 서태후 장례식이 거행되기 이틀 전에 종이로 만든 군인들을 불태웠고...
이런 행위들은 사람이 죽은 후, 곧 사후(死後)에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서태후가 사망한 구체적 시기는 언제인가요?
제가 질문한 것에 답변을 해주세요.
(서태후와 광서제 장례 관련 사진들에는 촬영 날짜 표시가 전혀 없습니다.)
쌩뚱 맞으십니다...그걸 위키애들에게 따지셔야지 왜 저보고 해명하라 하시나여...?
황실의 장례는 몇개월 장이란 말을 들은듯 하다고만 하겠습니다.
여직까지의 사학자 나부랭이들은...그
저 아무것도 모르고 발인일 근처를 사망일로 정하고 3류 소설들을 씨부렸던 거겠져 뭐...
사망 연도나...구체적 사망원인...사망 당사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기재됀 것인지도 믿을수 없는 거겠져...
의문점이 많은 자료들입니다. 다시 검토해보세요.
위키백과니 뭐니에 나오는 청나라 서태후나 관서제의 사망시기가...저 위의 기사시기보다 몇달 앞선단 겁니다.
그 장례복장중에 젤 핵심인 근친들의 하얀 소복구절도..후대 해석자들의 고의인진 몰라도... 기사에 누락됐단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청나라의 역사는 철저히 왜곡됐을 가능성이 많고...그 청나라의 구한말기 역사가...황후들과 친왕들의 구도까지 조선과 판박이란 점에서..
청나라의 정체가 바로 동국조선(청구국)이 아닐지란 의심을 해 보는 것인데...
느닷없이 기존 사학자늠덜이 엉터리로 적시한 관서제와 서태후의 정확한 사망날자를 내 놓으시라니...저를 너무 크게 보시는듯해 난감합니다.
위키백과 애들은...어짜피 중원을 강탈한 현 중화족들 왜곡투성이 역사로 도배가 됐으니...너무 맹신하지 말고...
저하고 찬찬히 찾아 보자는 말씀입니다.
경찰서에 찾아가서...아무래도 우리집 족보가 도난당하고 가짜 족보책을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했더니...
그 진짜 족보책이 지금 어디 인는지 당장 입증해 보시여...않그럼 족보책 분실을 허위로 간주하겠소...허는 식의 무책임한 발언이...
서태후의 진짜 사망일자를 명기해 주시여...어서 답변하시여...하는 엉뚱함이라 하겠습니다.
<위키백과>이든 <네이버 백과사전>이든 무엇이든 간에....
서태후는1908년 11월 15일 사망하였으며,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위 본문에 나오는 "헨리 보렐"의 글과 비교해보면 그 사망일이 문제됩니다.
"광서제의 장례일"이 언제이었냐고요??? 그것을 알아야 "광서제 장례식 사진"을 분석할 수 있지요...
그 사진들이 촬영된 때도 알 수 있고요... 동복, 하복 운운 하시니까...
서태후와 광서제 장례 관련 사진들에는 촬영 날짜 표시가 전혀 없습니다.
잘 모르시면, "모르겠다"고 답변하시면 되는데요... 무슨 해명이 그러신지...
여러가지십니다...해명을 하라녀...?
기존의 사망일자가 기록사진과 어긋나니...그 정확한 사망일을 제가 해명해야 하나여...?
저는 그저 그 장례식이 겨울인데...기존 사학자애들이나 김선생님이 주장하는 하계 관모들도 상당수가 쓰고 있으니...
이는 사실은 서로 다른 정부(문화권)의 관복일 수 있다 예상했을 뿐입니다.
정확한 사망날짜가 왜 들쑥날쑥인지는 위키애들에게 따지셔야지...왜 제게 해명을 요구하시는지여...?
쌩뚱맞다 하겠습니다.
어쨋건..제가 책임질 사항은 이겁니다.
김선생님이나 기존 사학자 나부랭이들이 주장하던...삿갓은 청나라 여름 관모다...강시형은 겨울관모다...
요건 완전 틀렸단 증거...이겁니다.
그리고 왜 기사나 그 기사해석에...
청나라 황제 종친들이 우리 조선족같이 흰색 소복을 입은 아주 주목할만한 복장은 설명치 않았냔 의문이고여...
모자와 의복으로 2개의 청(淸)나라가 있었다고 주장하시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른 증거들을 더 많이 확보하시길 바랍니다.
위 기사의 장례식 발인날의 사진에 대한 설명에서...장례식 몇 달 전에 이미 종이인형등을 소지했다 함을 보건데...
김선생님 말씀마따나...위키나부랭이들의 서태후나 광서제 사망일 정보는...거의 쓰레기 정보임이 간접증명됀다 하겠습니다.
기존 사학자들이나 백과 나부랭이들이 왜곡 또는 엉망으로 저지른 실수를...저보고 해명하라시는 김홍필선생님의 억지가 어의없습니다만...
발전적 토론을 위해 한가진 말씀 드리려 합니다.
황제나 왕의 장례는 최대 몇개월 장도 있단 예들이 있더군여...
정식 사망날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발인행사날만 눈으로 정확히 확인했기에...
이를 받아 적는 외국기자들도 어쩔 수 없이 발인날자를 사망일로 기재해 버리는게 아닐지 싶고...
그래도 차후엔 알 수 있을 현지의 사관애들이 이를 정확히 짚지 않았다 함은...그 청조의 사관들이 다 제거됐던지...
후세의 사가들은 청나라를 인수한 적국의 짝퉁들이였단 반증으로 전 예상해 봅니다.
위에 인용된 흑백 사진들의 정확한 촬영 날짜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어느 것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세요.
서태후는1908년 11월 15일 사망하였으며,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이것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진 자료 또한 다시 검토하여야 합니다.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095]에서 "왕위"(王偉)라는 사람의 글에 따르면.....
서태후의 영구는 10만명의 인력으로 100킬로미터의 거리를 1년여동안이나 갔으며, 1909년 10월 초하루가 되어 서태후의 영구는 비로소 "동릉"(東陵)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위에 인용된 서태후 장례 사진들이 그 기간 동안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무려 1년여동안이므로...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알 수 없으면 문제입니다.
광서제 장례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삿갓형은 여름 모자이고, 강시형은 거울 모자라는 것이 완전 거짓이라고 주장하시는데....
위에 인용된 흑백 사진들이 구체적으로 언제 촬영된 것인지 홍선생님도 잘 모르시는데, 그런 결론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최종적으로 그것을 확인하신 후에 단언하시길...
아직 논쟁이 끝난 게 아닙니다. 자료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복과 하복을 동시에 교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시기적으로 다소 차이가 납니다.
清朝改歷代的朝冠為禮帽,禮帽又稱為「頂子」或稱為「頂戴」、「頂戴花翎」。
禮帽分為兩種,一種為夏天戴的涼帽,另一種為冬天所戴的暖帽,每年三月開始戴涼帽,八月換戴暖帽。
매년 3월에 여름 모자를 쓰기 시작하고, 8월에 겨울 모자로 바꾼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준이고,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그때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清朝的官帽和其他朝代不同。官帽分为暖帽和凉帽两种,暖帽为冬春所戴,凉帽为夏秋所戴。暖帽为圆形,有一圈向上反折的檐边,多用皮呢缎布制成,多黑色。中有红帽纬,帽顶有顶珠。凉帽无檐,形如圆锥,用白、湖蓝或黄色罗为表。红纱绸为里,帽表也缀以红色帽纬。
[출처=百度知道, http://zhishi.baidu.com/zhishi/221428.html]
위 자료에 따르면, 청조(淸朝)의 관모(官帽) 중에서 겨울모자(暖帽)는 "겨울과 봄"에 쓰고 여름모자(凉帽)는 "여름과 가을"에 쓴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략적인 기준이라고 봅니다.
清朝官帽分为夏冬两种服冠:
夏常服冠 : /___\ (斗笠形)
每岁农历三月十五日改御夏朝服,本藏品属夏季帽式,夏式帽冠也称
为凉帽,夏帽冠檐并不上折而敞直,夏季官帽用的村料和尺吋多变,
绩玉草或藤丝,竹丝为质,帽表裹以罗绢,帽体呈圆形,外罩白布,
帽身覆有织网,红纱绸里,黑地织金包缘,缘上有黑带圆边,
上缀朱纬,朱纬以红丝织成,以红线缝在帽冠上,帽前缘饰有东珠一颗,
这类帽式为清朝高级官员日常戴用。
[출처=http://wenwen.soso.com/z/q173340606.htm]
冬常服冠 : \___/ (倒梯形)
每岁农历九月十五日或二十五日改御冬朝服,冬式帽冠也称为暖帽,
冠檐反折向上围著帽顶, 以薰貂、青绒或黑貂皮毛制成 (一说是
海獭、海狸或黄鼠狼皮毛薰染而成) ,上缀朱纬,朱纬以红丝织成,
但较为短小,帽体呈圆形,粗厚纸圆边为质,外罩黑布及围上青绒
在外,红纱绸里,帽胎两侧缝上系带。
[출처=http://wenwen.soso.com/z/q173340606.htm]
여름용 삿갓형 모자를 "斗笠形"(두립형)이라고 하며, 겨울용 강시형 모자를 "倒梯形"(도제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사용되는 정식 명칭이라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