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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대미
3953년(1620)년 가을 서울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던 한 자그마한 기와집에는 새벽녘이 다 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단아하게 꾸며진 방안에는 아들내외로 보이는 남녀가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머리맡에 정갈하게 앉아있었다.
“철민아. 아직 토끼를 잡지 않았더냐 ?”
철민이라고 이름을 불린 사내가 할아버지 귀가에 입을 갔다 대곤 뭐라 말을 하였다.
“그럼 그렇지. 잘 된 일이야. 철민아 내일 아침 일어나거든 내 머리맡에 있는 편지를
내 친구(親舊)에게 전해주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
“네 아버님”
“그만 나가보거라. 이제 쉬고 싶구나”
그가 눈을 감자 김철민은 자신의 부인과 함께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다음날 아침 70세의 일기로 초대 천인단장이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
이미 세인들은 그가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어느 한적한 곳에 은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 무리가 없어보였고, 그의 사망이 불러올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의 죽음은 세상에 공표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일기장을 100년이 지난 다음에 개봉할 것과 자신의 유체를
신대륙 중앙에 안장해 줄 것을 당부하는 짧은 유서를 남겼다.
“내가 미국이나 영국 아니지 그저 카나다에서 만이라도 태어났다면 난 박애주의자요,
평화애호주의자요. 열렬한 민주주의 신봉자가 되었을 걸세. 하지만 내가 태어난 이땅에서는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었네. 난 골수 민족주의자이고 싶었다. 국수주의자 이고 싶었네.
그래서 만약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다면, 난 아무리 욕해도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리칠 걸세.
난 골수 수구 국수주의자다.
몇백년이 흐른뒤 우리의 제국이 어떻게 바뀌어 갈지 모르지만 우리가 세운 제국이 영원하길
죽어서나마 기원하겠네. 다시는 약속민족이 겪어야 했던. 그래서 우리의 아들 딸들의 피를 흘려야 했던
우리의 어머니가 저들의 손에 끌려가 능욕을 당해야 했던 그런 일들을 다시는 이땅에서 벌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게끔 해준 분에게 감사드리네.
마치 그것이 숙명인냥 교육받아온 우리의 자식들이 원수를 구세주로 믿고 살지 않았던가.
내가 죽거든 꼭 신대륙에 내 무덤을 만들어 주게나.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우리 후손들이 신대륙 경영을 소홀히 할 지 모르니. 나라도 그곳에 묻혀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 ?
먼저 가는 나를 용서하게나. 내 먼저가서 자네 자리를 잡아놈세”
조준옥 천군부장관은 자신의 영원한 동지이자 親舊인 김영철 천인단장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나이도 이미 고희가 눈앞이었고,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천군부장관직을 내놓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쩌면 그 일을 위해
김영철이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끝까지 나를 부려먹는 구만”
천인단 건물 최상층 귀빈실에 모처럼 대한제국 최고 권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대 천인단장과 천군부장관 그리고 천군부 최고위원회 부의장 이렇게 세사람이 모인 이유는
천군부장관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워졌다.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다.
“다들 짐작하시리라 생각됩니다만, 고인이 그토록 원하시는 일이니.
고인의 유체를 그곳에 안치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유가족들 역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조준옥장관이 말을 열었다.
“그럼 그래야지요. 무엇보다도 고인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2대 천군부장관인 김규현은 이견이 없었고 부의장 송기환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토와 너무 멀었다. 관리하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 그거야 그렇다하지만, 그곳 관리하는데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겠습니다. ”
“ 그렇지요. 그래서 이렇게 두분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 말씀하십시오. 장관님 무슨 복안이 계신지요.?”
“ 우리의 20년 계획이 작년의 내란을 종점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향후 50년 계획이 짜여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인은 그 계획에 자신을 이용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제게 보내왔습니다.”
조장관이 그러면서 편지한장을 내밀었다. 두사람은 번갈아가며 편지를 읽고는 말없이 내려놓았다.
편지를 뱓아든 조장관은 라이터에 불을 켜고 태웠다. 그의 행동에 놀란 김규현이 얼른 불을
끄려했으나, 조장관이 말렸다.
“장관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 이건 어차피 고인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고인의 생각을 이해하시든 아니든 그건
아무 상관이 없지요. 이 나라를 이끌어가시는 분은 고인이나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하지만 한번쯤 숙고해야 할 만한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 “
“ 잘 알겠습니다. 장관님”
두사람은 조장관의 숨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인의 편지는 자칫 잘못하여 유출되면 자신들을 옭아맬 수 있었다.
“이제 그만 좀 나가주시겠습니까 ? 잠시만 혼자 있고 싶습니다.”
모두들 나가자 조장관은 창가에 놓여져 있는 카세트에 다가갔다.
주머니를 뒤지던 그가 테이프 하나를 꺼내 카세트에 끼웠다.
오랜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있는 카세트에 손가락을 대고 힘겹게 눌렀다.
카세트에서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부치지 않은 편지/ 정호승 시(?), 백창우 곡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천인단과 천군부는 한참을 고심한 끝에 고인의 영정을 록키대간 동쪽 아래에 모시기로 했다.
록키대간의 4319미터의 고봉을 뒤에 병풍처럼 두르고 앞에는 강이 흘렀다.
그 지점에 거대한 석릉을 건설하고 주위에 마을을 만들었다.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1군 소속 119기병사단을 파견했다.
모든 북대륙은 5군 관할이였지만 이곳 석릉만은 1군에서 관할하기로 내부 규정을 따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지휘부는 항상 석릉을 기억하게 되고,
신대륙 동부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1621년 봄
극비리에 추진된 석릉 건설에도 불구하고, 초대 천인단장이 우화등선 했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지가 벌써 4년째다. 치우천황이 붕어하신이후 한차례도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기 좋아하는 세인들은 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했다.
수에즈운하 준공식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아서 더욱더 입소문의 힘이 강해졌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거취를 공식 언급하지 않았다. 더불어 서울 동대문에 있던
그의 장자 김철민과 그의 식솔들이 극동부로 이주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대한매일일보의 황보기자입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
이사준비에 여념이 없던 김금주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황보기자라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
“혹시 소문 들으셨습니까 ? 시아버지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던데요 ? “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였기에 적절한 답변을 생각하느라 김금주는 약간 뜸을 드렸다.
“ 큰 며느리도 모르는데 기자양반이 어찌 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실없는 소리 하려거든 그만 가시지요 “
“ 극동부로 이사하신다는데 사실입니까 ?”
“ 네 그렇습니다. 시아버님이 그곳을 많이 말씀하셨지요.
아마도 그곳에 계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이만”
김금주는 황보기가와의 면담을 그만 끝내고 싶어했다.
거짓말 하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황보기자는 몇가지 질문을 더 해댔으나.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자신을 일만 하는 김금주를 바라보며
아쉬운듯 대문밖을 나섰다. 그날 아침 대한매일일보엔 특집면에 세간의 입소문을 다른 기사가
나갔지만 김철민 일가가 서울을 떠나면서 점점 잊혀져 갔다.
(끝)
사화(士禍)
사화 - 조선시대에 정치적으로 반대파에게 몰리어 신하 및 선비들이 참혹하게 재화를 입은 사건
계유사화, 병자사화(癸酉, 丙子士禍)
1453년(조선 단종 1년)부터 1456년(세조 2년)에 걸쳐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절개있는 신하들에게 화를 입힌 사건이다.
12세의 어린나이로 단종이 즉위 하였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은 왕위찬탈의 야심을 품고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의 중신들을 살해하는 한편, 친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 마저 사약을 내려 죽이고 전권을 장악하여 재위 2년만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게 되었다. 이에 분게를 느끼고 '하나의 태양 아래서 두명의 왕을 섬길수 없다'는 절의파인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단종복위운동이 일어 났다. 세조는 이를 사전에 알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참형하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보낸 후 뒤에 사약을내려 죽게 하였다. 단종은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년)에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이다.
당시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사관(史官)이었던 김일손이 훈구파의 비행과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올렸는데, 이전부터 갈등을 느껴오던 훈구파의 유자광과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것을 문제삼아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해 바쳤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문하의 수많은 사림파(士林派)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연산군 10년)에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성종의 비)의 복위 문제로 연산군이 일으킨 사건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는 평소에 질투가 많아 폐비(廢妃) 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여기에 많은 선비들이 관련되어 있다. 이에 야심많았던 임사홍(任士洪)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잔존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 사건을 연산군에게 고해바쳤다.
연산군은 평소 어머니인 윤씨 사건에 대해서 의혹이 많았던 차에 이를 알고선, 그 사건에 관련하여 많은 선비들을 처형하는 한편, 폐비사건 당시의 대신들이었던 한명회(韓明澮), 정여창(鄭汝昌), 남호온(南孝溫) 등 죽은 사랍들도 부관참시(剖棺斬屍) 하였다.
병인사화(丙仁士禍)
1506년(연산군 12년)에 일어난 무오, 갑자사화의 연장된 사화로서 그때 화를 입지않고 빠진사람들에게 죄를 가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년)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 훈구파의 재상들이 당시 새로운 혁신을 감행한 젊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사건이다.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치를 개혁하고, 패기에 넘치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성리학(性理學=주자학)을 크게 장려 하였다. 이에 조광조 등은 중종의 신임을 받아 왕도정치를 실행하고 자격이 없는 공신들의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는 등 과격한 혁신정책을 썼다. 여기에 불안을 느낀 심정, 남곤, 홍경주 등이 갖은 모략과 음모로 조광조 일파가 민중의 지지를 받아 반역을 꾀한다고 주장하여, 30대 젊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를 옹호한 대신들이 파면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신사사화(辛巳士禍)
1521년(중종 16년)에 안처겸(安處謙) 일파들이 심정, 남곤 등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이다.
기묘사화로 인하여 세력을 잃은 안당(安塘)의 아들 안처겸은 남곤, 심정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하여 이들을 제거 할것을 모의 하였다.
때마침 안처견의 모친상을 당했는데 남곤의 부하 송사련(宋祀蓮)은 여기에 방문하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이들이 대신을 해치려 한다고 무고하여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큰 옥사(獄死)가 일어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원년)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세자(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과 경원대군(慶原大君=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소윤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 졌는데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득세했다.
정미사화(丁未士禍)
1547년(명종2년)에 을사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사건이며, 일명 벽서의 옥(壁書獄)이라 한다.
전라도 양재역 벽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등이 권세를 농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것인가' 라는 낙서가 발견되어 정권을 잡고있던 이기, 정명순(鄭明順) 등이 을사사화 때 제거하지 못한 반대세력들을 고발하여 수백명의 연루자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을유사화(乙酉士禍)
1549년(명종 4년)에 이홍남(李洪男), 이홍윤(李洪胤) 형제의 난언(亂言)을 상주(上奏)하여, 이홍남이 역모죄로 몰려 아우 이홍윤 등이 능지처참 되는 한편, 이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계축사화(癸丑士禍)
1613년(광해군 5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몰아내기 위하여 대북파(大北派)인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일으킨 사건이다.
경상도 문경새재(聞慶鳥嶺)에서 강도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이이첨 등은 이 사건이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의 외숙부) 등과 관계가 있다고 고발해, 영창대군이 서민으로 폐봉되어 강화도에서 죽음을 당하였으며,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기사사화(己巳士禍)
1689년(숙종 15년)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들 사이에서 정치적 야욕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의 송시열(宋時烈) 등은, 장희빈의 아들(후에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가 빠르다고 반대했는데, 이를 계기로 실각 중이던 남인들이 왕을 충동하여 서인들이 축출당하는 큰 옥사가 일어났다.
신임사화(辛任士禍)
1721년(경종 1년)에서 1722년(경종 2년) 사이에 일어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대립으로 신축, 임인년 2년에 걸쳐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하며 임인옥(任寅獄)이라고도 한다.
심신이 허약한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파 김칭집(金昌集) 등의 건의로 왕세제(王世弟) 연잉군(후에 영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왕대신 정사를 돌봄)을 실시하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소론파의 김일경(金一鏡) 등은 노론측이 왕의 신병을 조작하여 발설하였다하여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건명(李健命), 이이명, 조태채(趙泰采)를 탄핵하고 유배를 보내는 등 옥사를 일으켰다
첫댓글 감사해요~~~^~
즐독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