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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9,9ㄱ.11-13ㄱ
그 무렵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11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9,1-5
형제 여러분,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4,22-33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말씀전례는 참으로 하느님을 신뢰했던 세 사람, 곧 엘리야와 바오로와 베드로가 믿음의 위기에 닥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믿음이 위험에 처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사재들을 쳐 죽인 후 자신을 죽이려는 이제벨 여왕을 피하여 호렙산의 동굴에 피해 있을 때, 주님께서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 하시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당신을 찾아오시어 위로하심을 전해줍니다.
곧 믿음의 위기에서 엘리야를 건져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의 일생을 통하여 그를 괴롭힌 것이 있었으니, 자신의 동족인 유다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와 불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을 주시지 않았지만,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했을지라도 그분을 받아들일 날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신뢰와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로마 9,5)
복음은 베드로가 물에 빠진 후, 신앙의 위기에서 오히려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찾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이야기는 의심하는 습관을 지닌 한 회의주의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압도되어 혼란에 휩싸여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곧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삶에 기꺼이 도전하고, 미지의 물속으로 뛰어드는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려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둠과 위험과 만연한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배를 타고 하늘나라라는 건너편으로 건너갑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침몰하지 않으려면, 키를 제대로 잡고서 모든 위험 요소를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삶의 물살이 고요한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를 때는 믿음과 신뢰에 대한 도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물살이 암담하고 격렬하게 풍랑으로 밀어닥치면, 우리의 신앙은 베드로처럼 시험에 들게 되고 도전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신앙의 도약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는 안전한 자기 배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예수님께 와 달라고 소리쳐 부르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마태 14,19)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호수 위를 걸어가듯 교회 바깥의 거리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하기를 촉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길을 떠나지 않고서는 신앙의 도약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불투명한 미지에 던질 때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물속에 빠져 허우적댄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물은 우리를 침몰시키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걸으면 우리를 떠받쳐주고 목적지로 인도하는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신앙의 길은 예수님께만 믿음을 두는 순종을 통해서 가능해지나 봅니다.
진정 순종할 때라야 비로소 신앙이 되나 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헤맬 때, 풍랑 속에서 혼란과 혼동에 빠졌을 때, 어둠과 절망에 빠져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바로 우리 곁에 다가와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 있을 때, 오히려 당신의 손을 내미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4,27)
사실 ‘믿음’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그 사실에 대한 신뢰와 헌신(충실), 곧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문제를 성장과 단련, 그리고 배움과 도약의 기회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하여 믿음은 우리를 물 위를 건너게 하여, 마침내 예수님 품에 안기게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음’이란 '초월성이 진짜임을 인정하는(assentire) 능력', 곧 ‘삶의 이면에 실재하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하는 더 성스러운 차원을 인정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이러한 ‘인정’은 지성의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비경험적인 실재들을 인정하고 기뻐하는(assentio;박수갈채)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에는 ‘기쁨’이 동반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그분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기쁨 속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마태 14,33) 주님을 찬양하였듯이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님, ~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마태 14,28)
주님!
배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 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시고,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수도자라면 더더욱 하느님 현존 체험을 원합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할까요?
원한다고 하지만 그 갈망과 원의가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야말로 체험의 가장 근본적인 결격 사유이고, 그렇다면 왜 갈망과 원의가 약할까 다시 질문케 됩니다.
그것은 초월적 감수성이 본래 약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삶이 평안하고 안전하고 그래서 하느님 없이도 사는 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살만하면 하느님을 잘 찾지 않고 오히려 불평이 많은 법이고, 삶이 위태로워지고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찾곤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 연중 제19주일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엘리야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얘기를 전하면서 위기와 두려움 체험의 상황을 먼저 전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모두 작살낸 다음, 그로 인해 이세벨에게 쫓겨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고, 거기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풍랑으로 죽게 되었을 때 구원의 주님을 체험하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선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더 잘 체험할 것 같은데 보통 선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악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면 보통 우리가 체험하는 선들은 우리가 그 선에 주저앉고 머물게 하고 대리 만족하게 하지, 그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지혜서는 이런 통찰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 ‘아! 아름답다. 참 좋다.’라고 하지, ‘이 이름다운 꽃들을 지어내신 참으로 좋으신 주님이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워 볼 때’를 노래하면 선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 곧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악을 경험하면 그 싫어하는 악에서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제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으면 그때 그 악에서 구해줄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것을 바꾸면
"선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두려운 악에서 구하소서."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고통의 악에서 구하소서."
"이 세상의 온갖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불안의 악에서 구하소서."
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선과 기쁨과 즐거움과 안락함은 우리를 거기에 머물게 하고 안주케 하지만, 두려움과 고통과 불안의 악들은 거기서 도망치게 하고 주님을 찾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종종 당신을 체험하도록 악의 방법을 쓰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일부러 제자들만 따로 호수를 건너게 하십니다.
당신 없이 그 두려운 풍랑을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다른 곳에선 한배에 타고 계시지만 잠자고 계시고, 풍랑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살려달라고 할 때에야 일어나시어 풍랑에서 구출해주십니다.
악의 체험, 한계 체험, 두려움의 체험을 먼저 하시고, 당신의 현존과 구원을 체험하게 하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노력하면 수영은 배울 수 있겠지만, 기도하면 물 위를 걷는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은 배 위에서 세찬 바람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도가 세상의 고난을 밟고 걸을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킴을 보여줍니다.
바다 위는 하늘 나라, 바다 밑은 지옥, 그리고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본모습을 봄으로써 자신 또한 세상의 그러한 풍파에 시달릴 존재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파도 위로 뛰어내려 밟아봅니다.
기도의 본질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하는 것은 ‘노력’입니다.
수영을 배우거나 물에 뜰 수 있는 것들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고 맙니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한공주’(2014)란 영화가 있습니다.
부모도 그녀를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성당을 다니는 친구가 외톨이 한공주에게 이유 없이 잘 대해주기는 합니다.
공주는 수영을 필사적으로 배웁니다.
자신도 자신과 함께 당하여 다리에서 뛰어내린 친구처럼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가해자들의 부모가 한공주를 괴롭히자 한공주는 도망 다니며 찜질방에서 자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공주에게 잘해 주었던 유일한 친구도 유포된 동영상을 보며 충격을 받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오갈 데 없는 한공주는 다리 밑으로 뛰어내립니다.
다시 생겨나는 살고 싶은 욕망으로 그동안 배웠던 수영을 시도해 봅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다시 물속으로 잠깁니다.
그렇게 다시 떠오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수영이나 결국 가라앉아버릴 것에 의지해서는 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배우지 말고 믿음을 가졌더라면!’
성당 다니는 친구는 그녀에게 그런 것과 상관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인정받지 못해 생깁니다.
사랑 받지 못해 생깁니다.
인정받음은 곧 자존감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부모와 같은 본성임을 믿게 됩니다.
사람의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사람이라 믿게 되고 그러면 적어도 세상에서는 살 힘을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만하다’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습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며 나병 환자촌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말씀하십니다.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어머니는 다시 살 결심을 하십니다.
나병 환자도 잘살게 해주시는 분이 어머니도 잘살 수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영화 ‘명량’(2014)에서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따르지 못하는 나머지 배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이렇게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마태 14,28)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 예수 그리스도>
이스라엘은 좁은 국토 면적을 가진 소국이지만 아주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서쪽의 지중해라는 큰 바다와 동쪽의 거대한 사막 사이에 끼어 있는데, 그래서 ‘사이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아열대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가 교차하는 독특한 기후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고산지대가 있는가 하면 바다 수면보다 수백 미터나 낮은 지역들이 있어 지역적으로 다양한 기후를 갖고 있지요.
고산지대인 예루살렘은 꽤 쌀쌀하지만, 저지대인 사해 부근은 혹독한 더위를 견뎌내야 합니다.
메마른 유다 광야에는 풀 한 포기 찾기 힘들지만, 해안가나 갈릴래아 호숫가는 푸르고 온난합니다.
갈릴래아 호수 역시 이런 독특한 지리와 기후의 영향을 받아 자주 특별한 모습을 보입니다.
평소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깜짝 놀랄 정도의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멀리 헤르몬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찬바람과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 상공에서 부딪치기라도 하면 심한 기류의 이동이 발생해 마치 바다처럼 높은 파도가 일렁거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라고 하지 않고 바다라고까지 칭할 정도였습니다.
군중을 해산시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육로로 가기는 너무나 먼 길이었기에 제자들은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지르는 배에 승선합니다.
하필 제자들이 배에 오르자마자 악천후가 시작되고 맙니다.
제자들의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낸 시간은 오후 4~5시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새벽녘까지 호수 한가운데서 헤매고 있었으니 적어도 10시간 가까이 탈진할 정도로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했으면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 자신들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다!”라며 소리까지 질러댔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단절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스승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정체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확신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직도 스승을 향한 제자들의 믿음이 확고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우리 각자 역시 갖은 역풍과 맞서면서 인생이란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때로 그 역풍이 너무나 커서 삶 전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때로 지레 겁을 먹기도 합니다.
파선될 것 같은 기분에 다 포기하고 바다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인생의 조각배 위로 올라오시면 아무리 큰 풍랑이라도 순식간에 잔잔해질 것이기에 무조건 참고 견디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 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당신의 현존으로 인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 6,14-15)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제자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당신이 직접 군중을 해산시키십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자들과 군중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려고 산에 가시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시고 그들을 먼저 보내신 것은 “군중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서 흥분 상태가 되어 있는 제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그 상황은 분명히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에게 시련을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괴롭힌 ‘맞바람’과 ‘파도’는 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회초리’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회초리는 제자들 자신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그 상황을 상징으로 생각하면, ‘맞바람’과 ‘파도’는 제자들 마음속에 생긴 여러 가지 의혹과 의구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임금이 되어 달라는 군중의 요구를 거절하셨을까?” 라는 의문, “예수님의 활동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의혹,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라는 의구심.
그런 의문과 의혹과 의구심 등이 마치 ‘맞바람’과 ‘파도’처럼 제자들의 마음속을 휘저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세속의 임금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분, 즉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 세속의 임금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또 얼마나 세속적이었는지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엇인가가 다가올 때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린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았을 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긴 한데, 그들의 심리 상태를 생각하면,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자기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실감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령인 줄 알았던 그 무엇이 사실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크게 안도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세속의 임금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베드로 사도는 그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라고, 즉 주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은, 아직도 그의 믿음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던 사탄이 했던 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마태 4,3).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드로 사도가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을 한 것은, 사도들이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기까지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은 주님의 권능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님처럼 자기도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지만, 제자들 쪽에서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물 위를 걸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는 말씀은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 자체를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받아주신 것은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모두 ‘믿음의 뿌리’를 튼튼히 합시다.” - 기도하라, 사랑하라, 함께하라>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시편 85,8)
오늘 화답송 후렴의 기도가 참 간절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구원 은총이 우리 믿음의 뿌리를 튼튼하게 합니다.
순수한 ‘뿌리’란 우리말이 참 좋습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뿌리가 죽으면 나무는 저절로 죽습니다.
뿌리없이는 잎도 꽃도 열매도 없습니다.
뿌리가 병들면 나무도 병들고 머지 않아 죽습니다.
푸르름 짙어가는 나무들과는 대조적으로 죽은 나무들은 보기도 흉합니다.
흉물같습니다.
뿌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병든 사회, 병든 개인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바로 뿌리가 병들었음을 뜻합니다.
나무 뿌리가 상징하는 바 믿음입니다.
믿음의 뿌리입니다.
내 믿음의 뿌리는, 내 공동체 믿음의 뿌리는 튼튼합니까?
병들거나 죽지 않고 살아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뿌리가 가리키는 바 내적성장입니다.
카눈 태풍의 위력이 여기 수도원에는 미미했지만 커다란 소나무가 뿌리 뽑혀져 넘어져 있었습니다.
거대한 소나무를 받쳐 주기엔 뿌리들은 참 허약했고 이미 많이 썩어 있었습니다.
새삼 내 삶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를, 내 공동체의 뿌리가 연상되었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뿌리살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
뿌리로 살아야지
세월 땅속에 묻혀 뿌리로 사는 거야
꽃사랑으로
피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살이 고달플 때
꽃사랑 추억으로 갈증 축이며
하늘사랑 꽃으로 피어날 그날 그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
- 1999.7.2.
수도원 여기 이 자리에서의 24년 전 시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공동체의 정주의 뿌리가 되어 큰 나무로 살아온 기분입니다.
지금까지 날마다의 강론은 집요한 뿌리내림의 표현이었습니다.
정주의 믿음, 정주의 뿌리입니다.
어떻게 하면 날로 깊어지는 튼튼한 정주의 뿌리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공동기도는 물론이고 개인기도도 필수입니다.
고독과 침묵을 사랑했던 옛 수도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고독과 침묵중에 하느님을 찾아 날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렸던 사막의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내적 깊이의 뿌리 내림에 개인기도는 결정적입니다.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설파한 토마스 머튼입니다.
고독이 궁극으로 지향하는 바는 연대입니다.
새삼 오늘 말씀의 순서대로 하느님의 종들인 엘리야, 바오로, 예수님의 믿음의 뿌리는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세 분 공히 하느님의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우선 찾은 것이 하느님의 산 호렙이었고 여기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호렙에 있는 동굴에서 밤을 지낼 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밤은 주님을 만나라 있는 은총의 기도시간임을 깨닫습니다.
“나와서 주님 앞에 서라.”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났지만 거기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지진이 일어났지만 거기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불이 일어났지만 불 속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으니 바로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 엘리야는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섭니다.
고독과 침묵의 산에서, 외딴곳에서, 또는 내 삶의 자리에서 특히 밤시간,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소리를,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 예수님도 밤시간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깊은 관상 상태에 있었음을 봅니다.
5천명 군중을 배불리 먹여 돌려 보내시고 제자들을 먼져 떠나 보내신 후 불야불야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시어 밤샘기도에 돌입합니다.
어쩌다가 아니라 매일 외딴곳에서 밤샘 기도로 충전시킨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기전 다음 찬미가를 바칩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 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우리 수도자들은 잠자는 중에도 영혼은 깨어 주님 안에서 관상의 휴식을 누리며 내적 친교를 깊이합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자나깨나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또 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기도는 기술의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께 이웃에 더욱 깊이 사랑의 뿌리를 내리기 마련입니다.
보십시오, 바오로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지 그 사랑의 뿌리는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하느님 찬미의 사랑에 깊이 뿌리내린 이웃사랑임을 봅니다.
불교의 지장보살을 연상케하는 가톨릭의 지장보살 바오로 같습니다.
바로 지옥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기 위해 스스로 부처가 되기를 포기하고 지금도 지옥 문전에 있는 지장 보살입니다.
어제 읽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설적 기도도 생각납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저는 지옥에 남아 그들과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영혼의 자서전, 하권 424쪽)
하느님 사랑에까지 그 사랑의 뿌리가 도달한 성 바오로, 성 프란치스코를 닮은 불가의 지장보살입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초보자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봅니다.
더욱 사랑의 훈련, 습관화로 하느님과 이웃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함께입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섬겨야 합니다.
회개-친교-섬김의 순서입니다.
마음의 순결이, 자유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 더불어 섬김입니다.
섬김을 위한 자유요, 섬김을 통한 자유의 완성입니다.
홀로인 듯 하나 함께 안의 홀로입니다.
더불어와 단절된 고립단절은 환상이요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함께 안의 홀로” 성서의 위인들, 교회의 성인들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곁 관상기도중에도 영안은, 사랑의 눈은 제자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음을 봅니다.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깨어 우리를 살펴보시며 위기시 우리를 구원할 채비가 되어 계십니다.
이를 안다면 전혀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그대로 인생 항해 여정중의 제자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얼마나 위험한 인생 항해 여정중인 크고 작은 무수한 공동체들인지요!
좌초하거나 조난당한 공동체들도 많습니다.
각자도생의 비정한 사회, 온전한 공동체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래서 무수한 이들이 자살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개입을 기도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그러했습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물위를 걸어 한걸음에 달려 오시는 주님은 흡사 축지법을 쓰는 듯 그대로 하느님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곤경을 한눈에 보신 주님의 개입이 고맙습니다.
“유령이다!”외치는 제자들에 이어 주님의 감로수 같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말씀 상기하시고 흩어진 정신을 수습하시기 바랍니다.
물 위를 걸어오다 두려움에 주님 향한 눈길을 놓치고 물속에 빠져드는 베드로의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외침에 즉각 응답하여 손을 내밀어 구원하시며 베드로의 믿음 약함을 꾸짖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몇이나 될런지요?
함께의 인생항해 여정중 참 많이 깨닫고 배웠을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혼자라면 이런 주님의 체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배에 오르시어 중심에 자리 잡자 바람은 그쳤고 도래한 내적평화와 안정입니다.
공동체 제자들은 그분께 엎드려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습니다.
“스승님”이라니 “주님”이라 부름이 맞습니다.
저 같으면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장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주님이자 스승인 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 살아난 제자들입니다.
평생 믿음의 여정중에 늘 이 구원의 추억을 상기하여 분투의 노력을 다했을 제자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참으로 병들지 말아야 할 믿음의 뿌리들입니다.
늘 살펴봐야 할 내 믿음의 뿌리, 공동체 믿음의 뿌리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뿌리내리기 영성훈련의 기도가, 사랑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하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이요,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1. 기도하십시오!
2. 사랑하십시오!
3. 함께(together) 하십시오!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시편 85,11-1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80년 고등학교 때입니다.
성당 친구들과 문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문산 가는 기차는 서울역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늦게 오는 친구들이 있어서 저는 남아 친구들에게 표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저와 친하게 지내던 여자 친구를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제 친구는 저의 여자 친구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서울역에서 문산으로 가는 길에 둘이 더 친해졌습니다.
저는 나중에 문산에 도착해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알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여자 친구는 친구의 여자 친구가 되었고, 저는 둘이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는 아니었지만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43년 전 딱 이맘때의 일입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표를 전해 주었던 저를 하느님께서는 어여삐 봐 주셔서 제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제가 되는 동기는 거룩할 수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여름이면 ‘남량특집’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날이 더우니 무서운 내용의 드라마를 보여주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미호’였습니다.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한 여름의 열기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남량특집에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저는 신학생이어서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 되었습니다.
처음 3달은 잘 지냈는데 저의 부족함 때문에 성당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본부중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잔디밭에 거름을 주라고 했는데 귀찮아서 몇 군데만 주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니 거름을 지나치게 많이 뿌린 곳의 잔디는 노랗게 변하였습니다.
그 뒤로 몇 번의 실수가 있었고, 신부님은 저를 다른 곳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입니다.
신부님의 엄한 질책이 있었기에 저는 남은 군 생활을 정신 차리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제가 되어서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할 때였습니다.
저는 4시에 강의가 있었지만 1시에 미리 와서 분위기를 보았습니다.
봉사자들은 제가 미리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분위기를 대충 보았고, 성당 앞을 보니 ‘불가마’ 사우나가 있어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사우나에서 쉬고 있는데 방송으로 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사우나에 방송 시설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한편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사우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연을 들으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2시에 강의를 해야 할 신부님이 교통체증으로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제가 있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와 시간을 바꾸면 된다고 했습니다.
봉사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봉사자는 제가 성체조배하는 줄 알고 성당에 갔는데 거기에 저는 없었습니다.
제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줄 알고 성모상 앞으로 갔는데 거기에도 저는 없었습니다.
사제관에서 신부님과 대화하는 줄 알고 사제관에 갔는데 거기에도 저는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불가마에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저의 이름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부랴부랴 사우나에서 나와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한편의 남량특집 같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하느님께서는 큰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진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성공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재물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권력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깊은 침묵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면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여정 속에 자주 흔들리곤 합니다.
유혹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교만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의 바다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빠지지 않고 주님께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인생과 역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어떠한 시련에도 의연하게 맞서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화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는 10초대에서 경기 자체가 끝납니다.
그렇다면 거의 10초대에 끝나는 경기라서 이를 준비하는 시간도 짧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 짧은 순간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엄청난 양을 훈련해야만 합니다.
만약 훈련을 전혀 하지 않고 시합에만 집중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이 세상 삶을 마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자신의 준비 없음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준비 없이 우리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요?
무작정 하느님 자비에만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 경기보다 훈련에 쏟는 시간이 더 길 수밖에 없고 또 더 중요한 것처럼, 지금 주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훈련의 시간이 길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결국은 모두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물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입니다.
마침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모습에 “유령이다” 하며 두려움의 소리를 지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맞바람이 부는 거센 파도에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아보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을 알아보는 것은 편하고 쉬운 삶 안에서만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거센 파도가 이는 고통과 시련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결과만이 아닌 계속된 훈련, 즉 믿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베드로가 청합니다.
예수님의 “오너라.”라는 대답에 그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지고 맙니다.
주님만을 바라봐야 했는데, 바로 거센 바람에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도 훈련이 계속 필요했습니다.
하물며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늘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참 하느님의 아드님과 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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