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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명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메시지
명제: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문이 되어 주시고, 특별한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개인적 적용
1. 우리를 불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도록 하자
2.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시고, 그들이 주님께 나아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 주도록 하자
3.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고,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성실히 감당하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그 크고 놀라운 일들 모두를 가슴 깊이 간직할 수 있도록 하자
우리는 쉽게 사람을 판단하며 정죄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이해할 사람과 거부할 사람을 쉽게 구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유대인처럼 선민으로 생각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끔 우리가 괜찮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착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가 판단하고 정죄했던 자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는 절대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부르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에 맛보게 하시길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치며
우리를 사용하시어 복음을 전할 대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7월15일 청라호수공원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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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여러분 복음이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도 전파되었다면 칭찬할 일입니까? 아니면 비난할 일입니까? 당연히 칭찬할 일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시면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두고 예루살렘에 있던 할례자들이 비난합니다.
여기서 할례자들이란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난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반대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비난하다고 하는 것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상대방을 격력하게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할례자들이 베드로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비난했습니까?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어떻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구약성경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는 절대 식사하지 말아야한다는 율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했다는 것을 가지고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비난합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당시 랍비들에게서 내려오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만 아니라 그들에게 내려오는 전통들이 있습니다. 그 전통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는 절대 식사하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왜 이방인과 식사를 했느냐를 가지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베드로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무엇이 더 중요한지 덜 중요한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없습니까?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경을 쓰지 않고,
인간이 만든 율법적인 규칙을 더 중요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지 덜 중요한지를 구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23장 16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마22: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에 계신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헌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있는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 있는 금이란 하나님을 예배할 때 드려지는 헌금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헌금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 헌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헌금을 가지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다음 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23: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에 계신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헌금)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23: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중요하냐) 그 예물(헌금)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에 계신 하나님)이냐
여러분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더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이 더 중요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보다 당연히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방인인 고넬료가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이방인인 고넬료와 식사를 했느냐가 중요합니까?
이방인인 고넬료가 예수를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이방인 고넬료가 예수님을 믿은 것보다 이방인과 식사를 했다는 것 때문에 비난한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여러분 여기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없습니까?
옛날의 베드로였다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화를 내었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힘이 들게 복음을 전하다가 왔는데, 왜 너희들은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 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는 전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는 오직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함으로 예수님의 온유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어떻게 된 일인가에 대해서 차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5절-16절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과 어떻게 고넬료를 만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고넬료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게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성령)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리고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보다 왜 그들과 식사를 했느냐를 가지고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12장에서 상한 갈대도 걲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이때 상한 갈대는 문맥상으로 보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왜 병자를 고치느냐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상한 갈대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다투지도 않고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루 몇 천 명씩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것만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도 성령 충만 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잠잠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도 성령 충만 입니다.
우리도 성령이 충만하여 더 온유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와 사도 베드로의 만남은
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와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에게
각각의 환상을 보여 주셨고 또 만나게 하셨고, 이방사람 고넬료의 가문에
복음이 전해지고 이방인 최초로 세례도 받게 하셨다.
이 모든 과정을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다 들은 모양이다.(1)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돌아올 때에 힐난을 한다.(2)
비난하는 이유가 참 우스꽝스럽다.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었다는 것이다.(3)
할례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에게 행해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표징으로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으로, 백성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겠다는 약속의 상징이였다.(창17:10~14)
안식일에도 할례는 시행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일이였다.(요7:22)
그런데 어느덧 이 할례가 엄청난 편견의 장벽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있는 할례한 유대인들은
무할례자인 이방이들과는 식사도 함께하면 안된다는 무서운 편견으로 변질되어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먼저 구원받고 선택 받았으면
이 아름다운 복음의 소식을 함께 나누어야지 하나님을 독점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유대인의 편견과 아집과 독선이 보인다.
베드로를 비난 한 사람중에는 극단주의 자들일수록 더욱 심하게 비난 했을 것이다.
극좌적인 좌익집단도 문제이지만 보수 극우적인 집단도 바로
이런 편견과 고집과 아집에 진리에 눈멀수가 있을 것 같다.
주여 나에게도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색안경을 벗을 수 있는 안목을 주옵소서. 아멘.
베드로가 차례되로 설명을 한다.(4)
1. 욥바에서 기도 할 때에 본 환상을 이야기 한다.(5)
큰 보자기에 땅에 네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 보이고(6)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렸다.(7)
주여 먹을 수 없습니다(8) 대답하자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9) 하신다.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하늘로 올라갔다.(10)
2. 환상을 보고 궁금해 하던 바로 그 때에 가이사랴에서 사람이 왔다.(11)
성령님이 아무 의심 말고 함께가라 해서(12)
6명의 형제와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갔다.(12)
3. 고넬료의 집에서 고넬료에게 들은 말도 전한다.(13)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했고(13)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14)고 했다.
4. 그래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를 했다.(15)
성령이 동일하게 임했다.(15)
요한의 세례로 부터 설명을 하고(16)
예수님의 사역, 십자가, 부활, 심판, 성령에 대해서 전했다.
라고 베드로가 차근차근 차례되로 조목조목 비난하는 유대인에게 설명을 했다.
결과가 참으로 아름답다.
1. 이 모든 말을 듣고 비난하던 모든 자가 잠잠하여지고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3.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다(18) 한다.
베드로의 차근차근한 설명의 요약은
한 마디로 성령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비난하던 자들에게는 큰 충격이였을 것이다.
비난하던 그들은 모두가 잠잠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성령충만이란? 성자나 사역자나 자격있는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령님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초청하는 모든 자에게 충만히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님 나에게도 오셔서 충만하게 하시고
내가 해야 할 말, 해야 할 행동들을 통제하여 주옵소서.
베드로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상세하게 예루살렘 교회에서 증거하였습니다.
과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세례를 경험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의 방해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합당하다고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이제 성령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역사를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오히려 반대할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 베드로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 곧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음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는 그들의 세계관이 열리며 이제 어느 곳이든 나가지 못할 곳이 없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고 이후로 수많은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열방을 향하여 뻗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주님의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 기도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깊은 영혼을 매일 새롭게 하고 채워가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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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사도들과 형제들 그리고 할례자들이 비난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차례로 설명합니다. 성령이 자신을 가라 하셨고, 자신들이 처음에 경험했던 그 성령이 똑같이 그들 위에 임하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끝으로 회개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_ 하나님 하시는 일을 비난하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1~3절).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기 전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더 묵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베드로는 할례자들에 의해 비난(2절)을 받게 됩니다. 할례자들은 배타성이 강하였고,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비난한 내용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3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에 대해 비난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식사와 관계된 율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새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야 할 판인데, 오히려 그들은 비난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생명을 내걸고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옛 관습의 벽속에 갇혀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것을 마치 본질로 착각하여 내가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방식을 나의 삶에서 여전히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은 구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과 존재 이유 또한 구원입니다. 복음이라는 본질로 다시금 돌아가는 교회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가치를 깊이 있게 깨달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형제들 그리고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_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4~10절).
베드로는 비난하는 그들에게 ‘차례로 설명’합니다(4절). 옛날 베드로의 성격이었다면 대판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바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습관, 성질, 버릇등을 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나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들어내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때도, 내 감정대로 말하고,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침착하게 차근차근 설득해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비난에도 결코 흥분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일에 대해 차례로 설명을 했습니다. 10절까지의 내용은 앞장 10장에서 소개된 내용을 리플레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만큼 고넬료의 회심과 성령 강림이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들 안에 남아 있는 부정적 편견을 없이하고, 이방인에게 선교에 대한 정당성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있던 사실대로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내 감정을 보태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만 전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는 것을 내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이 베드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었습니다. 아무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 전하기만 하는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난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그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우리는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_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아서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11~18절).
‘성령이 내게 명하사..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12,15절). 베드로와 고넬료가 주어가 아니라 바로 성령님이 주어가 됩니다. 이는 곧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신 분인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이 성령은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던 성령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역사하시는데 감히 그 어느 피조물이 하나님을 막을 있겠느냐(17절)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큰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체험을 한 후에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말씀이 보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나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18절).
내 인생의 주어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 온전히 내 삶을 맡기고, 의지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한하지 않도록, 늘 말씀에 깨어 있으며, 성령의 임재를 날마다 간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도 성령의 민감하여 나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기를(행 11:1~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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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이 대응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베드로 입장에서 보면 할례자들을 향해 강하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그가 목회자로서 권위를 세울 수있는 기회일 지도 모릅니다. 지금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어쩌면 전에도 베드로의 하는 일에 대해 트집을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의 의견이 마치 진리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베드로를 무시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 사는 곳인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지는 않았겠지요. 베드로는 이번 일이 성령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거짓을 일삼고 있는 그들을 혼내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도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혹 성도가 잘못해도 성도와 목회자는 적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성도가 무엇을 잘못하거나 목회자가 무엇을 잘못하면 서로 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서로 항상 잘못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적이 된다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이 있어도 목회자의 심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성도의 심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는 그가 진리편에 있었으나 그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진리편에 있으면 싸워야 한다는 아주 잘못된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진리편에 있는 사람은 더욱더 넓은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예수님이 죄인을 품으셨듯이 진리는 많은 이들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화평한 길을 만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할례자들처럼 진리라는 이름으로 싸우려하고 있습니까? 화평한 길을 만드십시요. 싸움은 사탄과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끼리 싸워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화평하고, 이 땅의 성도들이 화평하여 주님의 아름다운 길을 서로 합력하여 아름답게 이루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몇몇 제자들이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간 것을 두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모든 있었던 일들을 차례차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시는 놀라운 광경을 본 것을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
그때 제자들이 자기 고집을 꺽고 잠잠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11:18)
사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집을 주신 것은 옳은 것을 버리지 말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진리도 아니고 옳지도 않은 거짓 것들을 고집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렘8:5)
지금도 많은 경우 사람으로부터 온 진리 아닌 것들을 쇠의 힘줄처럼 고집합니다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48:4)
그러나 제자들은 베드로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일을 들을 때에 즉시 고집을 꺽었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4: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도 아닌 것들을 고수하려는 제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딛1:7)
그래서 하늘로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눅20:4)
또한 사람을 위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할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대하19:6)
우리 주님은 하늘로부터입니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우리 처소도 하늘로부터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5:2)
그러므로 오직 하늘로부터 난 확실한 말씀만 따르기 원합니다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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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을 향해서(행11:1-18절)
교회는 사람을 선택해서 받아들일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나 찾아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기 어떤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백인들만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행복했습니다. 자신들은 특별한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인들만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에 비해서 우월한 사람들의 교회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만의 공간, 백인들만의 특별한 교회에 흑인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이 사람은 복음을 막 깨달은 사람입니다. 기쁨에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백인들의 교회는 그가 제발 그냥 지나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 흑인은 백인들만의 특별한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백인들은 당황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노했습니다. 왜 우리들끼리 행복한데 검둥이가 들어오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만의 공간에 왜? 상종할 수 없는 검둥이가 들어오느냐는 것이지요.
사실 이들이 처음 복음을 접할 때는 복음이 빈부귀천, 남녀노소, 인종을 뛰어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백인들이라는 우월감을 포기하기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습니다. 빈부귀천도 인정하고 남녀노소도 인정하지만 흑백이 함께 예배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인들만의 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우월감을 만끽하면서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외면하고 있는 복음! 흑인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그리스도인이며 형제라는 사실을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현실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 교회는 늘 특별하고 싶어 합니다. 차별화된 교회를 이루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는 차별의식을 갖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더 복음적인 교회이고, 우리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의 교회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들의 교회로 상징되어지는 온갖 종류의 특별한 교회를 만들어냅니다. 심지어는 문화적인 차이들까지 교리로 묶어서는 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욕망이 보편적인 교회를 자꾸만 왜곡되고 타락한 교회로 몰아세우고 특별한 교회를 찾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교회입니다. 보편교회입니다. 누구도 특권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기만 하면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교회를 추구합니다. 좀 복음대로 살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교회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특권의식!!! 나는 좀 더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 말입니다. 하나님은 초대 교회가 그런 의식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누구나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할례와 특권의식(1-3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전해들은 소식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기쁨을 소식이어야 합니까?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서는 이것이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전혀 기뻐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2절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것은 2절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
렘으로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난했습니다. 비난했다는 말 디에크리노(diekrivnw)는 아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난, 혹은 빈정대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들은 contended(다투다, 싸우다) criticized(비평하다, 비난하다, 흠을 잡다)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3절에 가면 더욱 확실해 집니다. 우리 말 성경은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그랬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의 집에 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먹었다면서요?" 하고 따졌다.는 것입니다.
이 분위기를 감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베드로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빈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수준이하의 사람들하고 식탁교제를 나누고 무 할례자의 집에서 묵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까? 할례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무 할례 자들과 구분되는 사람들로 스스로 정통파 유대인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할례 받은 것이 무슨 그렇게 특권의식을 가질만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뼈대 있는 가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자신들과 같이 취급되는 것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베드로의 변론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4-17절)
자, 우리의 주인공 베드로는 바로 얼마 전까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화평의 복음을 경험하고 진리의 복음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이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예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일 들을 자신의 생각을 약간 가미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베드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단순한 상황 설명이 아니라 확신을 가진 증거, 혹은 설득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환상을 보았으며 그것 때문에 고뇌한 이야기, 그리고 고넬료가 환상을 보고 사람을 보내게 된 이야기를 조리 있게 펼쳐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부연 설명이 붙어 있는 부분이 바로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여섯 형제와 함께 갔었다(12절)는 것입니다.
10:23절에는 욥바의 두어 형제도 같이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섯 형제가 함께 갔었고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15절과 17절에 반복되는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여섯 명의 증인들과 함께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처음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 즉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더라는 것입니다(15절). 이 부분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그들을 다르게 대하시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과 똑같은 성령을 그들이 받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씀을 듣는 중에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막1:8절)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으며 그 말씀이 생각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세례를 주기 전에 이미 성령 세례를 주신 것이라는 판단이 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마당에 물세례를 주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판단되어서 물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이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확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당신의 자녀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할례자와 할례자의 구분!! 그것은 하나님의 구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교회입니다.
인간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소외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화평의 복음으로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설계한 교회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누가 문제입니까? 사람이 문제입니다. 할례자들이 문제입니다. 뭔가 가졌고, 이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현실 교회를 분열하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말씀의 권위가 우선하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나의 생각으로 말씀을 해석하려는 사람인가?”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 나를 바꾸어 가도록 내어드리는 사람들입니다. 내 생각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본래적인 의미를 찾아내어서 그것에 내 생각의 잘못된 것을 바꿔 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은혜(18절)
그런데요? 베드로의 이런 설명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먼저는 잠잠하여 그랬습니다. 유구무언이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솔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힐난했어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급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생각의 지경이 넓어지는 축복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이들이 아름다운 것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베드로가 경험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이 더 놀라운 은혜입니다. 초대교회가 아직 순수성을 잃지 않았고 말씀 앞에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깨달음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아! 이런 부분에 나는 아직 성경적이지 못하구나!”느끼고 개안하는 기적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교회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세계관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이제 나이를 먹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문제에서 사마리아 사람들, 이제는 이방인의 문제로 점점 심화된 성경적 세계관 문제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지속되면 될수록 좀 더 깊은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것들을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사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입니다. 말씀 앞에서 여기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기꺼이 생각을 바꾸는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편견과 비난을 버리고 순종과 하나 됨으로” 김승수 목사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고넬료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자들이 베드로를 비난을 합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에 사는 사도들과 형제들은 율법에 얽매어 편견을 가지고 비난을 합니다.
우리는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난을 받은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의 환상을 본 내용을 설명해 줍니다.
베드로는 기도 중에 하나님이 네 발을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을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셨지만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잡아먹을 수 없다고 말하자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시고 모든 것을 하늘로 끌려올라 가시더라고 환상을 자세히 이야기 합니다.
아무리 이방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그를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르실 때 언제나 순종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그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가 자기만족만을 구하는 신앙을 넘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땅으로 나아가 영혼을 구원하고 생명을 살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성령님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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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이방인 선교를 향한 첫걸음은 비난에 부딪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설명하자 의구심이 해소되고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3절 가이사랴에서 이방인들에게 임한 오순절 사건에 함께한 베드로를 기다리는 건 환영이 아니라 비난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할례자들에게는 이방인들의 회심 소식보다 이방인들과의 식사 교제 사실이 논란거리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먹지 말라는 유대인의 전통을 어긴 행위를 문제 삼았습니다. 이에 관한 한 예수님도 늘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이후로도 식사 문제는 할례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골 메뉴였습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과 눈높이를 같이할 수 없는 전통과 의식은 언제든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것을 지키려다 정작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4~14절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을 시작으로 전후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나갑니다. 하나님은 정결 규례에 반하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도록 베드로를 준비시키셨고, 의심 없이 고넬료가 보낸 일행과 동행하도록 성령께서 말씀해주셨으며, 장차 일어날 일에 증인이 되어줄 여섯 형제까지 예비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여시려고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주선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 가정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자리일수록 마다하지 말고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한 해가 되도록 하십시오.
15~17절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임한 성령이 오순절에 유대인 신자들에게 임한 성령과 같은 선물임을 고백하며, 고넬료와 그의 온 집을 구원하기로 하나님이 작성하신 이상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음을 밝힙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구원 여정을 복기해보고 구원의 은혜를 묵상해보십시오.
18절 베드로가 전한 일련의 설명에 예루살렘 공동체는 주께 영광을 돌리며 이방인 신자들의 회심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늘 주의 뜻을 살피며 묵묵히 순종하다 보면, 주의 일에 동참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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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스스로 알지도 깨닫지 못하여 방황할 때
성령으로 기름 부으시고 갈 길을 선하게 이끄시는 은혜를 알기에
오늘도 안심하고 하늘의 평안을 누립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내 마음과 삶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가감 없이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오직 아버지의 뜻을 묻고 알아가는 생명의 삶 살아가도록 손잡아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축복하시고 그 가정과 사역위에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선하신 인도하심에 겸손과 순종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