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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비·방원 ‘계모자 동맹’ 역성혁명 이뤘다
정몽주 암살 등 고비마다 강비가 막후 조정하고 방원이 실행
강비, 단순한 내조자 넘어 혁명동지… 이후 정치투쟁마다 승리
▎정릉 흥천사. 이성계가 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공민왕 말기와 우왕 초기에 강비의 둘째 오빠 강순룡은 고초를 겪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오해와 무고 때문이었다. 그
만큼 가문의 영향력이 약화해 있었다.
강비는 공민왕 말기에 이성계와 혼인한 듯하다.
이것은 강비 가문의 운명을 결정한 최대 사건이었다.
이 결정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 뒤, 이 가문은 권력의 최정점에 섰다.
하지만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몰락했다.
1402년 강비와 이방석의 복수를 천명한 조사의의 난으로 다시 몰락했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강비의 언니(신귀의 처)의 사위이다.
강비의 사촌 오빠 강윤충의 아들 강현도 함께 거사했다.
그 뒤 곡산 강씨는 시조 강윤성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로 영락했다.
공민왕이 암살되기 직전 강비의 둘째 오빠 강순룡은 역모죄로 오해받아 잠시 구속된 적이 있었다.
우왕이 즉위한 뒤에도 다시 유배되는 수난을 겪었다.
새 집권자 이인임이 친원정책의 책임을 뒤집어씌웠기 때문이었다.
1374년 공민왕 암살 직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발생했다.
우왕의 출생을 의심한 명덕태후와 경복흥은 우왕의 즉위에 반대했지만,
이인임은 공민왕의 유지를 강조함으로써 우왕을 추대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이인임은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우왕의 치세 14년간 고려의 실질적 지배자는 이인임이었다.
그런데 이인임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명나라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누군가 이인임에게 그 점을 상기시켰다.
“옛날부터 나라의 임금이 시역을 당하면 재상된 자가 먼저 그 죄를 받는 것이다.
황제가 만약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으면 공이 반드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공민왕대의 대명 관계는 양호했다.
1368년 원나라가 중국에서 축출되고,
1369년 명나라 사신이 고려에 입국하자 공민왕은 즉시 명과 사대관계를 맺었다.
당시 원명 간 승부가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명은 공민왕의 친명 사대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 공민왕이 갑자기 죽었으므로,
명은 고려의 정치 상황에 의혹을 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지적을 들은 이인임은 갑자기 불안에 빠졌다.
이 조언자는 다시 “그러므로 원과 화친하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이 무렵 고려를 방문했던 명의 사신 임밀, 채빈이 이미 귀국길에 올랐다.
시간에 쫓긴 이인임은 찬성사 안사기를 급파해 호송관인 밀직부사 김의에게 사신들을 죽이도록 했다.
그런 다음 고려 정부는 명은 물론 북원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공민왕의 부고를 알렸다.
이 조치는 대외정책상의 변동을 의미했다. 정몽주,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유신들이 일제히 이에 반대해 큰 정쟁이 발생했다.
궁지에 몰린 안사기가 자살했다.
그러자 이인임은 김의와 밀통한 죄를 찬성사 강순룡, 동지밀직 성대용 등에게 전가해 유배시켰다.
이들이 친원파로서 일찍이 원 조정에서 벼슬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듬해 1376년 도당이 이들을 석방하고자 했으나, 최영이 서명을 거부했다.
강비가 정확히 언제 이성계와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성계가 무장으로서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하고
최고 지휘관으로 성장한 공민왕 13~20년(1364~1371) 사이라는 견해도 있다.
강비가 1356년 출생했다면 이 시기에 9~16세였을 것이다.
고려인의 평균 결혼 연령은 남자 20.7세, 여자 16.3세였다.(김용선, [고려 금석문 연구])
1371년이면 이성계는 37세다. 둘 다 연령상 문제는 없다.
강비의 소생 중 이방번은 1381년, 이방석은 1382년 탄생했고, 경순공주는 알 수 없다.
그런데 1387년 이색이 쓴
‘이자춘신도비’에 따르면, 경순공주는 이제에게 이미 출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목은집])
경순공주가 가장 먼저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경순공주가 당시의 습속대로 15~16세에 출가했다면,
늦어도 1371~1372년 사이에 강비는 이성계와 혼인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우왕대를 강비와 함께 보낸 것이다.
당시의 습속에서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실과 첩을 엄격히 나눈 조선 시대와 달랐다.
고려의 전쟁 영웅 이성계
▎권근이 이성계의 지시를 받고 흥천사 조성 경위를 기록한 글.
우왕대에 이성계는 단순한 무장을 넘어 정치가로 성장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구와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1380년(우왕 6) 황산대첩에서 승리하면서 일약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사상 최대 규모인 2만여 병력과 대결해
이성계는 2000여 명의 친병만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 가장 감격한 것은 최영이었다.
이성계가 개성으로 회군하자,
최영은 백관을 거느리고 개성의 동쪽 교외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지어 영접했다.
거국적인 전승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천수사는 개성의 나성 동남쪽 장패문으로 흐르는 사천 주변에 있었다.
이성계는 최영과 백관의 모습을 보자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최영에게 나아가 두 번 절했다.
최영도 두 번 절하고, 앞으로 나와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치하했다.
이성계는 머리를 숙여 감사드리고, 겸양의 뜻을 표했다.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에서 이긴 것이지, 제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국가의 안위를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감격한 최영은 다시 이성계의 전공을 찬양했다.
“공이여! 공이여! 삼한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 번 싸움에 있는데,
공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이처럼 최영은 이성계를 국가의 주석으로 인정했다.
이색도 이성계의 전공을 기리는 시를 헌사했다.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충성은 백일(白日)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은 청구(靑丘)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
출목연(出牧筵)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
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 새로운 시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
청구는 고려, 출목연은 당 태종이 공신 초상을 그려 걸어놓은 전각,
능연각은 당나라 개국공신 24명의 초상을 걸어 둔 누각이다.
최영과 이색은 고려 말 무신과 문신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높은 추앙을 받은 것은 이성계가 이들을 잇는 국가적 인물로 부상했다는 의미였다.
1356년 개성으로 올라온 뒤 이성계가 받은 최고의 영예였다.
이것으로 끝났다면 이성계는 최영과 같은 충신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인임은 이성계의 정치적 위험성을 알아차렸다.
무력을 갖춘 자가 명예까지 얻는다면,그 다음의 과정은 무엇일까?
이인임은 이성계가 왕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고려 말의 정치가 중 권력과 인물에 대한 이해에서 이인임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이인임은 최영에게 이성계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를 제거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최영은 이를 거부했다.
이것이 인간 최영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보통의 무장이라면 질투 때문이라도 이성계를 공격했을 것이다.
최영의 애국심이 질투심을 이겼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가 최영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했다.
이인임의 충고를 따랐다면 그가 충성을 바친 고려왕조는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영은 위화도회군 뒤 요동공벌의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다.
처형장에서 최영은 이인임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인간적 선은 반드시 정치적 선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성공적인 인물일수록 비인간화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는 인간과 야수의 경계선에서 있다.
애국심이나 인류애 또는 공공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정치는 인간을 타락시킨다.
이성계가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는 데는 강비의 조력이 컸다.
1396년(태조 5) 강비가 죽자 이성계는 한양의 취현방(지금 정동)에 정릉을 조성하고,
그 옆에 강비를 추모하는 흥천사를 대대적으로 축성했다. 흥
천사가 낙성되자 권근에게 그 내력을 기록한
‘정릉원당 조계종본사 흥천사 조성기’(貞陵願堂曹溪宗本社興天寺造成記)를 쓰도록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잠저에 있을 당시 중외의 일에 근로할 때나 화가위국(化家爲國)할 때에
오직 신덕왕태후의 내조가 실로 많았고,
모든 정사에 임할 때에도 또한 충고하여 돕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바로잡아 주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되니,
어진 보좌를 잃은 것 같아 내가 매우 슬프다.
그러므로 저승길에 복되기를 바라 이 절을 창건한 것이며,
또 그 혜택을 미루어 나라가 복되고 만물이 이롭게 되기를 길이 한이 없도록 하게 하려 한 것이다.
마땅히 이 뜻을 밝혀 후세에 보여야 하겠으니,
네가 그 글을 지으라.” 이성계에 따르면, 강비의 조력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이성계가 고려의 무장으로서 국사에 매진할 때,
둘째 역성혁명을 할 때,
셋째 조선 건국 뒤 국정을 담당했을 때 충고하고 부지런히 도왔다는 것이다.
최영의 후회
▎전설적 현모양처로 알려진 주나라 문왕의 정비인 태사. 신덕왕후는 이 태사로 비유됐다.
실제로 강비는 이성계의 일정을 하나하나 챙겼던 것으로 보인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세자 왕석의 귀국을 영접하기 위해 황주에 갔을 때,
강비는 무당 방올에게 행로의 안전을 점쳤다.
방올이 이성계의 낙마와 개국을 예언하자 강비가 매우 근심했다고 한다.
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권력자의 일정 조정의 권한을 가진 자가 이인자다.
이성계 자신의 술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성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한씨는 첫 번째 부인이고 정종과 태종의 생모지만,
이성계의 정치적 성장에는 직접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
권근 역시 강비를 중국의 전설적인 성왕이자
건국자인 우왕, 탕왕, 문왕, 무왕의 배필들에 비유했다.
“옛날부터 왕자가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울 적에는
역시 어진 배필이 그 덕을 내조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자의 덕화시행이 모두 내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하나라의 도산(塗山), 은나라의 유신(有莘), 주나라의 태임(太姙)과
태사(太姒)가 사책에 찬미되어 천고에 빛나는 것입니다.”([양촌집])
신덕왕후 사후 개국공신 조준과 김사형의 상언에 따르면,
강비는 “품성이 정숙하고 조행이 근신하시어 평시에도 항상 경계(儆戒)하는 마음을 두시고,
위태할 때에는 대책(大策)을 결정하는 데에 참예하여
내조의 공이 역사에 빛나서 이루다 말할 수 없다.”([태조실록])고 한다.
강비의 성격이 매우 신중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성격은 다소 과시적이었다.
그는 왕이나 지인들 앞에서 자신의 뛰어난 활 솜씨를 자랑하곤 했다.
의형제이기도 한 이지란은 이를 위험하게 여겨 그러지 말도록 충고했다.
강비, 이성계의 비선실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미륵 사상을 담고 있다.
강비는 이성계그룹이 위기에 처해 큰 결정을 내릴 때도 참여했다.
단순한 부녀자나 내조자가 아니라 일종의 혁명 동지였고, 지혜와 용기가 보통을 넘었던 것이다.
사료에 그런 사례가 두 차례 기록돼 있다.
하나는 1391년 이성계가 귀향 소동을 일으켰을 때였다.
이 해 3월, 이성계는 공양왕에게 사직상소를 올렸다.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는 1390년까지 대부분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군권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상소에서 그는 “공이 이루어진 사람은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사기] 열전에 나오는 채택의 말이다.
이성계는 실제로 짐을 챙겨 말에 안장을 얹고 동북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정도전, 남은, 조인옥 등 이른바 혁명파에게도 참소를 이길 수 없으니 귀향하겠다고 선언했다.
추종자들에게는 다소 황당한 일이었다. 이런 소동은 일종의 투정이다.
이성계에게는 정치가로서 나이브한 점이 있었다.
그는 역성혁명의 마지막 순간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도전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성계를 만류했다.
첫째 “공의 한 몸은 종사와 백성이 매여 있으니, 그 거취를 경솔히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더 이상 사인이 아니며, 그 점을 부정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둘째 “지금 만약 한 모퉁이에 물러가 있게 된다면,
참소하는 말이 더욱 불처럼 일어나서
재화(災禍)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끝까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방석을 후계자로 삼은 것이나, 그래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초래한 것도 그 결과였다.
그 뒤 함흥으로 돌아가 조사의의 난을 방치한 것도 그랬다.
그의 인생 말로는 슬프고 외로웠다.
한밤중에 일어나 궁궐에서 홀로 소리 내어 울었다.
조선의 건국자였지만, 정치가로서의 삶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일으킨 소동에 놀란 가신 김지경이 강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정도전과 남은 등이 공을 권고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일이 장차 그릇될 것입니다. 이 두서너 사람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고했다.
이에 강비는 이방원에게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보면 이성계의 가신그룹과 문신그룹 사이에 상당한 반목과 이견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강비와 이방원은 가신그룹을 대표하는 장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강비가 정치를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치를 단지 승패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강비는 이성계의 인간적 고뇌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물론 일상 정치투쟁에서 정치적 교양이 정치적 책략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이상주의적 지식인이 정치투쟁에서 자주 패배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강비는 죽을 때까지 모든 정치투쟁에서 승리했다.
마지막 승리는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이다.
개국 과정에서 세운 이방원의 공로를 생각하면 무리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도 강비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비극이 발생했다.
강비의 두 아들은 피살됐고, 딸은 여승이 됐으며, 남편은 비통 속에서 죽었다.
물론 강비의 처사가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다.
정치에는 어떤 불가항력적 상황이 존재한다.
모든 왕실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그
이유는 권력을 상실한 왕자는 대체로 죽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복형제간에는 더욱 그렇다.
더욱이 계승권을 장악할 힘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문제는 그런 결정을 내린 다음 마무리를 깨끗이 하지 않은 것이다.
즉, 왕위 계승의 결정까지는 권력의 논리를 따랐지만,
사후 처리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이성계의 과오다. 위대한 세종조차 그런 문제에는 서툴렀다.
그래서 단종과 세조의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강비의 전언을 들은 이방원은 김지경의 잘못된 전언을 바로잡았다.
“공이 참소하는 말에 시달려 물러가실 뜻이 있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은 이해(利害) 문제를 힘써 진술하여 그 가시는 것을 중지시킨 사람입니다.”
그리고 김지경을 책망했다.
“그 두서너 사람은 공과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 한 사람이니 너는 다시 말하지 마라.”
이방원의 일생은 잔인했다.
그러나 이런 장면을 보면 개인적 감정에 치우쳤던 것은 아니었다.
두 집단 간의 오해와 불신을 해소한 것은 이런 능력 때문이다.
즉 이성계 추종집단 내에서 가신그룹과 문신그룹의 소통과 협력을 가능하게 한 중재자는 이방원이었다.
그것이 이방원의 또 다른 역할이었다.
대부분의 정치집단에서 충성 중심의 연고 집단과 능력 중심의 전문집단은 상호 적대적이다.
이 때문에 정치적 실패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이방원이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성계의 아들이자 문신 관인이라는 복합적 위치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성계의 귀향 소동에서 알 수 있는 바처럼,
강비와 이방원은 이성계파의 중요 결정에서 가신집단을 대표했다.
그리고 문신집단과의 커뮤니케이션은 강비와 이방원을 통해서 이뤄졌다.
강비는 역성혁명 최후의 순간에도 직접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애물은 정몽주였다.
이성계가 너무 단호하게 정몽주의 제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성계그룹은 멀쩡히 눈을 뜬 채 그저 운명만 기다려야 했다.
역사 기록에는 이방원 홀로 최종 결단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정황을 보면, 이번에도 이방원은 강비와 사전 교감을 나눴던 것으로 보인다.
이지란조차 이성계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므로,
결정의 십자가를 짊어질 사람은 이방원이나 강비 밖에는 없었다.
이방원 혼자 그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벅찼을 것이다.
그래서 강비의 양해와 조력을 구한 것이다.
정몽주 암살의 이면
▎궁예 미륵이라 불리는 경기도 안성의 국사암 석조 여래입상.
정몽주를 죽이고 이방원이 그 사실을 병석에 누운 이성계에게 고할 때, 강비도 옆에 있었다.
이성계의 분노가 멈추지 않자, 난처해진 태종은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라고 강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대담한 이방원으로서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 서로 다 알고 감행한 거사이고, 내가 이렇게 곤란한 처지에 있는데,
강비는 왜 입을 다물고 있느냐는 항의였다.
정몽주 암살에 대해 두 사람이 이미 동의하고 서로 조력하기로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비 역시 처음에는 이성계 앞에서 한 마디도 못했다.
이방원의 항의성 간청을 듣자, 비로소 용기를 내어
“공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반박했다.
강비는 정몽주를 반드시 죽여야 됐다고 정당성을 주장한 게 아니다.
다만 온갖 살벌한 전장을 누비고 다닌 이성계에게
그깟 일로 뭘 그리 놀라고 두려워하느냐는 핀잔을 한 것이다.
정몽주의 죽음에 내포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이성계 개인의 성격 문제로 바꿔 말한 것이다.
이 역시 강비가 높은 수준의 정치적 문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행히 이성계의 분노가 멈춘 듯하다.
그래서 이방원은 다음 단계의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됐다.
위화도회군 때 굳어진 유대
강비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조력했음을 시사하는 유물도 있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로서,
이성계가 소원을 빌기 위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 모양의 은제 사리기와 청동 그릇, 백자 그릇 일속이다.
이 유물은 1932년 10월 6일, 금강산 월출봉에서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발견한 돌상자에서 나왔다.
탑 모양의 사리기 은판에는 불사의 핵심 발원자로서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이성계 삼한국대부인 강씨 물기씨
(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三韓國大夫人 康氏 勿其氏)’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성계와 강비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다.
봉안한 시기는 1390년(공양왕 2) 3월이다. 2개의 백자 사발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다.
‘금강산 비로봉 사리 안유기(金剛山毗盧峯舍利安遊記)’라는 명문은 “신미년(1391년)
5월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1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발원자로는 강양군부인 이씨, 낙안군부인 김씨 혹은 전씨 등 귀족 여인들, 승려 월암,
영삼사사 홍영통, 동지밀직 황희석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고, 삼회(三會) 때에는 다시 열어서 부처를 예비하겠다”고 발원했다.
이제 이 유물의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이성계의 강비와 함께 발원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첫 부인 한비가 생존했을 때였다.
그녀는 1391년 9월 별세했다. 불사 넉 달 후였다.
그런데 이 발원에서는 이름이 빠졌다.
이를 보면 강비가 정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391년 7월 14일, 이성계가 공양왕을 위하여 잔치를 열 때도 강비가 참석했다.([고려사])
정치적인 모든 공식행사는 강비가 참석한 것이다.
둘째, 1만 명의 고려 상층귀족들이 이성계와 함께 미륵하생을 발원했다는 것이다.
미륵은 미래불로서, 석가모니가 입멸하고 56억7000만 년 뒤
중생이 고통에 신음할 때 사바세계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미륵신앙이 백성에게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현세에 대한 절망,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다.
나말여초에도 미륵신앙이 유행했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했다.
14세기 말 중국 홍건적의 난도 미륵신앙이 그 바탕이다.
우왕대에도 경남 고성의 이금(伊金)이 미륵불로 자칭하자,
“어리석은 민이 이를 믿고서 쌀과 비단과 금은을 시주하면서 (남들보다) 뒤처질까 염려하였다”고 한다.
이성계와 강비는 이런 민중의 열망에 부응하고자 한 것이다.
역성혁명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이다.(주경미, [이성계 발원 불사리장엄구의 연구])
역성혁명 단계에서 강비와 이방원은 일종의 파트너였다.
강비보다 11세 아래인 이방원이 먼저 파트너십의 길을 닦았다.
위화도회군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은 22세로서,
정5품 전리정랑(典理正郎)으로 재직 중이었다.
당시 이성계는 포천에 농장 두 개를 마련해서,
가족들을 이곳에 이주시켜 살게 했다.
향처 한씨는 함흥에서 올라와 포천 재벽동 전장에, 경처 강씨는 철현 전장에 거주했다.
한씨는 두 딸(경신공주, 경선공주)과 함께,
강씨는 어린 이방번과 이방석을 데리고 있었다.
회군 소식을 듣자 이방원은 개성의 집으로 가지 않고,
말을 달려 포천으로 향했다.
일을 보는 노복들은 이미 모두 달아나 버렸다.
할 수 없이 이방원은 스스로 두 부인을 모시고 동북면으로 향했다.
어린 동생들을 안아서 말에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말을 이끌기도 하였다.
가는 길은 매우 험했다. 양식도 모자라서, 길가의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철원관(鐵原關)을 지날 때 관리들이 잡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밤을 이용하여 몰래 갔다.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들판에 유숙했다.
마침내 이천(伊川)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 비로소 장정 100여 명을 모아 변고에 대비했다.
한충은 이성계 휘하의 가신이다.
그가 이성계를 만난 일화가 재미있다.
1383년 이성계는 동북면을 침입한 여진족 추장 호바투(胡拔都)를 격퇴한 다음 회군 길에 올랐을 때,
한충과 김인찬은 길가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그들은 이성계의 활 솜씨를 보고 탄복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이성계 휘하의 인사가 됐고, 개국공신에 이르렀다.
강비와 이방번, 이방석은 이방원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위난 속에서 동고동락했다.
두 사람의 유대의식도 이때 싹텄을 것이다.
조선 개국 후 정적으로 돌아서다
나이 차가 11년에 불과했지만, 이방원은 강비를 어머니로서 깍듯이 모셨다.
강비도 이방원의 뛰어난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과거에 합격했다.
무장 가문에서 드문 경우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가문에 학문적 소양이 부족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다.
동북면 출신의 신흥가문으로서 가격이 높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이방원에게 유학을 공부하게 했다.
이방원이 총명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가 아버지와 달리 무장으로서 적합한 신체를 타고나지 못한 듯하다.
1394년(태조 3),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한데 만 리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라고 염려할 정도였다.
이성계의 명으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방원은 날마다 부지런히 글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음이 흡족해진 이성계는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라고 이방원의 역량을 인정했다.
강비도 태종의 글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찌 내가 낳은 아들이 되지 않았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1383년(우왕 9), 17세의 이방원이 과거에 합격하자 이성계의 기쁨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성계는 대궐 뜰에 절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역성혁명 전까지 호의적 감정을 가지고 협력적 관계를 이어갔던 두 사람은
개국 후 가장 위태로운 정적으로 변모했다.
이성계 이후의 권력을 누가 차지할지에 관한 경쟁 때문이었다.
둘 다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정적이 되는 것은 운명적이었다.
강비 일족은 이성계의 정치적 성장을 돕고 조선 건국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큰오빠 강득룡의 장남 상장군 강후(康候)는 개국원종공신,
작은 아버지 강윤휘의 아들 대장군 강석(康錫)과 강우(康祐)는 선공감 강도(康圖)는 개국원종공신이다.
또한 둘째 오빠 강순룡의 딸은 개국공신 이지란의 처,
강순룡의 장남 강희의 딸은 개국공신 조영무의 처다.
넷째 오빠 강계권의 딸은 개국원종공신 대호군 이란(李蘭)의 처다.
이성계는 자신만이 아니라 의형제인 이지란도 강비 일족이 되게 했다.
처족을 통해 일종의 정치적 가족을 새롭게 만든 것이다.
강우는 이자흥의 딸과 결혼했다.
이자흥은 이성계의 큰아버지다.
첫댓글 역성혁명도 이성계의 팔자 일까요 ᆢ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