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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留王(유류왕)
辛巳 七月 東夫餘公主禮氏生孺留于柵城 名曰類利 者肖月之意也 壬辰 彈雀而誤中汲婦 婦罵曰 “無父之子 無禮如此” 於是自警 學禮于叔父解素太子 學射于屋智 書數於勾鄒 藥農於都祖 而精熟然後 請禮氏同往父處 禮氏知芻牟有召西奴而難容 乃曰 “汝父去時 藏物於七岺八谷石上松下曰 搜此而來者來吾子也” 類利乃行山野 尋之不得 成病將死 忽有聲自柱礎間出 就而見之 有斷釰挾在其間 乃喜 而進其母 禮氏無可止之術 議於解素 解素曰 “嫂勿慮 時至矣 阿兄欲行母后大祭 密遣松義 而作聖母像 吾見此人 可作大事 且其母亦柵城人也” 禮氏大憙 與類利隨義而來 解素授黃金百斤 曰 “以此悅其民衆然後 謁父可也” 乃與屋智勾鄒都祖等 問民疾苦 治人疾病 施以衣食洽 得人心 然後謁鄒牟 而卽東宮位 沸流溫祚皆不敢爭 而唯陜夫仇都烏干等 以爲國本 不可動 與召西奴 退于牛壤 溫祚謂其母 曰 “妻當從夫 子當從父 弟當從兄 臣當從君 有此四可從之義 而不從而退 將安往吾不敢從母” 召西奴然之 乃復入宮 芻牟謂上 曰 “吾子雖多 唯沸流溫祖最可 汝其三分天下 而治之可也” 上受命而卽位 於鸞坮 改元光明
신사(B.C.40) 7월 동부여(東夫餘) 공주 예씨(禮氏)가 책성(柵城, 동부여의 도읍)에서 유류(孺留)를 낳았다. 이름을 유리(類利)라 하였는데 달을 닮았다는 뜻이다. 임진(B.C.29)년 참새를 쏘았으나 잘못하여 물 긷는 아낙을 맞추었다. 아낙이 욕하여 말하기를 “아비 없는 자식이 무례함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스스로 경계하여, 숙부 해소(解素)태자에게서 예(禮)를 배우고, 옥지(屋智)에게서 활쏘기를 배우고, 구추(勾鄒)에게서 글과 셈을 배우고, 도조(都祖)에게서 의약과 농사를 배워, 정숙(精熟)하여진 연후에 (어머니) 예씨에게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같이 가기를 청하였다. 예씨는 추모(芻牟)에게 소서노(召西奴)가 있어 용납되지 않을 것을 알고 이에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떠날 때 칠령팔곡(七岺八谷)의 소나무아래 돌 위에 물건을 감추며 말하기를 이것을 찾아서 오는 자가 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이내 산과 들을 (뒤지며)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병이 되어 장차 죽을 것 같았다. 문득 기둥과 주춧돌사이에서 저절로 소리가 들려와서, 마침내 그 사이에서 부러진 칼이 끼여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에 기뻐하여 그 어머니에게 가져가니, 예씨는 막을 방법이 없음을 알고 해소와 의논하였다. 해소가 말하기를 “형수는 걱정하지 마라. 때가 이르렀음이다. 우리 형이 모후의 제사에 송의(松義)를 은밀히 보내어 성모상을 만들려고 하니, 우리는 송의를 보러가서 큰일을 이룰 것이다. 또 송의의 어머니는 책성(柵城)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예씨가 크게 기뻐하며, 유리와 함께 (송)의를 따라왔다. 해소가 황금 백 근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그 민중을 기쁘게 한 연후에 아버지(추모)를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옥지, 구추, 도조 등과 더불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듣고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고 옷과 음식을 흡족하게 베풀어 인심을 얻었다. 그런 연후에 추모를 만나 동궁의 자리에 나아갔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다투려 하지 않았으나, 오직 협부(陜夫), 구도(仇都), 오간(烏干) 등은 국본(國本, 태자)을 바꿀 수 없다하여 소서노와 더불어 우양(牛壤)으로 물러갔다. 온조가 그 어머니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부인은 남편을 따르고, 자식은 부모를 따르고, 아우는 형을 따르고, 신하는 임금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정도의 올바른 따름이 있으니 따르지 않고 물러나며,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어찌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그러한 연유로 다시 입궁하였다. 추모가 왕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자식들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오직 비류와 온조가 가장 뛰어나니 너는 천하(天下)를 삼분하여 다스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命)을 받아 난대(鸞坮)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광명(光明)으로 고쳤다.
元年 壬寅 九月 阿爾妃生子都切
원년 임인(B.C.19) 9월 아이(阿爾)비가 아들 도절(都切)을 낳았다.
十月 封溫祚爲汗南王 禮氏爲皇太后 召西奴爲皇后阿爾妃溫公主亦爲皇后
10월 온조溫祚를 한남왕汗南王으로 봉하고 예씨禮氏를 황태후로 삼았다. 소서노(召西奴)를 황후로, 아이(阿爾)비와 온(溫)공주를 또한 황후로 삼았다.
≪견해≫ 삭선된 부분은 백제왕기와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남당이 혼란을 느껴 삭선한 부분이다. 삭선을 한 분이 남당인지 아닌지는 저본이 있어야 확인할 수 있다.
十二月 黃龍王于仁殂 烏伊代之 以摩離爲卑離國王
12월 황룡왕(黃龍王) 우인(于仁)이 죽어 오이(烏伊)를 대신하게 하고, 마리(摩離)를 비리(卑離)왕으로 하였다.
二年 癸卯 正月 再思太輔 陜夫左輔主民大加 扶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太子主宮大加 屋智主穀大加 仇鄒主刑大加 都祖主樂大加 松義主賓大加
2년 계유(B.C.18) 정월 재사(再思)를 태보로, 협부(陜夫)를 좌보 겸 주민대가로, 부분노(扶芬奴)를 우보 겸 주병대가로, 고루(高婁)태자를 주궁대가로, 옥지(屋智)를 주곡대가로, 구추(仇鄒)를 주형대가로, 도조(都祖)를 주악대가로, 송의(松義)를 주민대가로 하였다.
三月 大閱水陸軍於河濱 勞漢人來歸者千人
3월 하빈(河濱)에서 수군과 육군을 사열하였다. 한인(漢人) 일꾼 1,000명이 돌아왔다.
九月 與皇后觀稼西河 如溫湯 獲白獐而還
9월 황후와 더불어 서하(西河)에서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보고, 온탕(溫湯)에 갔다. 흰 노루를 잡아 돌아왔다.
十月 神鸞又集新宮之庭 皇后生女珍
10월 신조 난새가 또 신궁(新宮)의 뜰에 모였다. 황후가 딸 진(珍)공주를 낳았다.
≪견해≫ 진(珍)공주는 아이(阿爾) 혹은 소서노(召西奴)의 딸, 해명(解明)의 처가 됨.
三年 甲辰 正月 分國中爲五部 以順奴艴奴賜沸流治之 都彌鄒忽〈密山〉 以灌奴桂婁賜溫祚治之 都牛壤 涓奴上治之 兼統黃龍卑離荇人句茶諸國事 五部置沛者于台使者評者等職
3년 갑진(B.C.17) 정월 나라를 5부로 나누어, 순노(順奴), 불노(艴奴)는 비류(沸流)에게 다스리게 하고 미추홀〈밀산〉을 도읍으로 하였으며, 관노(灌奴), 계루(桂婁)는 온조(溫祚)에게 다스리게 하고 우양(牛壤)을 도읍으로 하였으며, 연노(涓奴)는 왕이 다스리며 황룡(黃龍), 비리(卑離), 행인(荇人), 구다(句茶)의 여러 나라 일을 아울러 통솔하였다. 5부에는 패자(沛者), 우태(于台), 사자(使者), 평자(評者) 등의 직을 두게 하였다.
≪견해≫ 비류와 온조가 실제로 작위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三月 納禾黍女干後宮
3월 화서(禾黍)의 딸 간(干)을 후궁으로 거두었다
五月 與太后 如海山求神仙 皇后及溫公主馬公主再思公主從之 歷鏃山鹽山而還 東明神宮成
5월 태후와 같이 해산(海山)에 가서 신선을 구하러 갔다. 황후와 온(溫)공주, 마(馬)공주, 재사(再思)공주가 따라갔다. 촉산(鏃山)과 염산(鹽山)에 갔다가 돌아왔다. 동명신궁(東明神宮)이 완성되었다.
七月 以松讓女爲妃 作離宮於鶻川凉谷之東西 與皇后溫公主居之 汗南王溫祚入朝 以牛壤挾小 請移都於尉那城〈鏡泊湖東岸〉 許之 上謂皇后 曰 “溫祚年雖十七 奏事明白 勝於沸流 南方無憂矣” 皇后曰 “沸流幼多疾病 未得敎誨故徒善而已 溫祚自幼勇壯 馬黎敎之故如此 當爲陛下之一臂” 上曰 “豈徒臂哉 渠是我而我是渠也” 皇后大喜 曰 “豈料聖恩如此哉” 溫祚歸國 皇后欲往汗南 曰 “妾容皃已衰 慚愧老牝 請赴汗舐犢” 上止之 曰 “先帝以卿遺朕 而禁殉者 欲固邦本也 卿若赴汗 朕與誰爲國 追念先帝 無使朕孤依 旧宗國無失民望” 皇后乃喜而止
7월 송양(松讓)의 딸을 비(妃)로 하였다. 골천(鶻川) 양곡(凉谷)에 동서로 이궁(離宮)을 지어, 황후와 온(溫)공주를 살게 하였다. 한남왕(汗南王) 온조(溫祚)가 입조하여 우양(牛壤)이 협소하므로 위나성〈경박호 동안〉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왕이 황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온조의 나이 겨우 열일곱이나 명백(明白, 의심할 것이 없이 또렷함)하게 상소를 올릴 줄 아니 비류보다 낫다. 남쪽은 걱정이 없다.”라고 하였다. 황후(소서노)가 말하기를 “비류는 어렸을 때 질병이 많아 배우거나 가르침을 받지 못해 그런 연유로 헛되이 착하기만 할 뿐입니다. 온조는 어렸을 때 용감하고 씩씩하고, 마려(馬黎)에게 교육을 받은 연유로 이러합니다. 마땅히 폐하의 한 팔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어찌 (한) 팔이 될 뿐이겠는가. 그가 나를 옳다고 하면 나도 그를 옳다고 여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성은(聖恩, 임금의 은혜)이 이와 같으니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온조가 (한남으로) 돌아가려 하자, 황후가 한남으로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말하기를 “첩의 용모가 이미 쇠하여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늙은 여자일 뿐이니 한(남)으로 가서 임금의 사랑(舐犢 = 舐犢之愛, 어미 소가 송아지를 사랑하여 혀로 핥아 준다는 뜻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을 알리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치게 하며 말하기를 “선제(先帝)께서 경(卿,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말)을 짐(朕)에게 남기고 따라죽는 것을 금(禁)한 것은, 나라의 근본이 굳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경(卿)이 만약 한(남)으로 나아간다면 짐은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며 선제(先帝, 추모)를 추념(追念)하리오. 짐으로 하여금 전과같이 외롭게 하지 말고, 옛날 종주국(宗國) 백성들의 소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황후가 이에 웃으며 (한남으로 돌아가기를) 멈추었다.
十月 溫公主難産而崩 春秋二十 上哀慟之減食二日
10월 온(溫)공주가 난산 끝에 죽었는데, 춘추 20세였다. 왕이 애통해하여 이틀 동안 식사를 줄였다.
≪견해≫ 백제왕기와 반대되는 기사가 많다.
十二月 阿爾后生女玄
12월 아이후가 딸 현(玄)을 낳았다.
四年 乙巳 正月 如溫湯
4년 을사(B.C.16) 정월 온탕(溫湯)에 같이 갔다,
二月 勸耕 巡視城戍
2월 농사를 권장하고, 변방을 지키는 병사를 살펴보고 어루만졌다.
四月 皇后生艴于溫湯
4월 황후(皇后, 소서노)가 불(艴)을 낳았다
七月 與后東巡 柴吉獻硨渠宝盒玉馬珊瑚莖
7월 후(后)와 더불어 동쪽을 돌면서 어루만졌다. 시길(柴吉)이 거거(硨渠, 車渠=硨磲) 보합(宝盒, 보배롭고 귀한 합. 또는 보배롭고 귀한 물건을 넣어 두는 합), 옥마(玉馬), 산호경 (珊瑚莖)을 바쳤다.
≪용어≫ 거거(車渠=硨磲) : 이매패류 중 세계 최대의 종이다. 껍데기 길이 약 140cm, 나비 약 30cm, 높이 약 60cm, 무게 약 230㎏이다. 조간대 부근의 산호초에서 수심 약 30m 되는 곳에 산다.
살은 초록색·파란색·남색·갈색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식용이 가능하고 껍데기는 수반(水盤)이나 장식에 이용되어 예로부터 칠보의 하나로 간주한다. 유럽에서는 교회에서 성반(聖盤)으로 사용했다. 단단하여 도끼나 막대기 등의 도구로 사용되던 적이 있다. 서태평양의 열대 지방에 분포한다.
八月 沸流溫祚入朝 以劉河爲蚕師敎蚕 松氏生子都助
8월 비류(流溫)와 온조(溫祚)가 입조하였다. 유하(劉河)를 잠사(蚕師)로 하여 누에치기를 가르쳤다. 송씨(松氏)가 아들 도조(都助)를 낳았다.
九月 納馬公主及鄭共女雉氏 平氏生女鱒
9월 마공주(소서노의 딸)와 정공(鄭共)의 딸 치씨(雉氏)를 거두었다. 평씨(平氏, 한소의 딸)가 딸 준(鱒)을 낳았다.
十二月 扶芬奴勾鄒北沃沮敦河平之
12월 부분노(扶芬奴)와 구추(勾鄒)가 북옥저(北沃沮) 돈하(敦河)를 평정하였다.
五年 丙午 正月 以香公主妻高婁
5년 갑진(B.C.15) 정월 향공주(香公主)를 고루(高婁)에게 시집보냈다.
三月 禾氏雉氏移于凉谷 乙豆智娶紫蒙王涉臣女皐頭來 以曼公主爲沸流妃 買東海神馬七千匹 置車騎府 乙豆智將軍 菸賈注簿
3월 화씨(禾氏)와 치씨(雉氏)가 양곡(凉谷)으로 이사했다. 을두지(乙豆智)가 자몽(紫蒙)왕 섭신(涉臣)의 딸 고두(皐頭)에게 장가들어 돌아왔다. 만공주(曼公主, 계후의 딸)를 비류(沸流)의 妃로 하였다. 동해의 신마(神馬)의 7천 필을 구입하여, 거기부(車騎府)를 설치했다. 을두지를 장군으로, 어가(菸賈)를 주부로 하였다.
五月 互市漢人 于溝婁城〈雙山〉
5월 구루성〈쌍산〉에 한인(漢人)과 호시(互市, 외국과 교역하는 시장)를 열었다.
八月 觀稼西河 勸一口十羊五豕
8월 서하(西河)에서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보며, 한사람 당 10마리의 양과 5마리 돼지를 키우기를 권장하였다.
十月 大閱滸口〈呼蘭〉 曼公主生沸流陽人
10월 호구〈呼蘭〉에서 사열하였다. 만공주(曼公主)가 비류(沸流)의 아들 양인(陽人)을 낳았다.
六年 丁未 三月 皇后生子而夭
6년 정미(B.C.14) 3월 황후가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四月 增漢舘於西河汗濱 招一技厚祿給其妻婢 築豆谷行宮 松妃居之
4월 서하(西河)와 하빈(汗濱)에 한관(漢舘)을 늘리고, 한 가지 기술이라도 있으면 불러서 후하게 녹봉을 주고, 처와 비(婢)를 내렸다. 두곡(豆谷)에 행궁(行宮)을 지어 송비(松妃)에게 살게 하였다.
七月 伐盖馬國 拔其都〈開魯〉 虜其王 命年貢羊五千牛馬各二百 阿爾后生女眞
7월 개마국(盖馬國)을 쳐서 그 도읍〈개로〉을 빼앗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매년 양 오천 마리와 소와 말 각 2백 마리를 바치도록 명령했다. 아이(阿爾)후가 딸 진(眞)을 낳았다.
七年 戊申 正月 艴太子薨
7년 정미(B.C.13) 정월 불(艴)태자가 죽었다.
四月 皇后如汗南 以勾鄒爲玄ꟙ太守 戒以守城
4월 황후가 한남(汗南)으로 갔다. 구추(勾鄒)를 현토(玄ꟙ)태수로 하여, 경계하고 수성(守城, 성을 수비하여 지킴)하도록 하였다.
≪견해≫ B.C.25년 5월에 을음(乙音)을 현토태수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을음이 소서노를 따라서 한남(汗南)으로 가게 되므로, 현토(玄ꟙ)태수의 자리가 비워지게 되었다. 이에 구추(勾鄒)를 태수로 봉하고, 을음의 아들인 연비(延丕, 소서노의 조카)가 구추의 부장(副將)으로 있다가 엄우(嚴尤)에게 살해된 듯 하다. 백제왕기와 기년차이가 있다.
五月 松妃生解明于豆谷 上如汗南 迎皇后而歸 禾氏生稻公主
5월 송비(松妃)가 두곡(豆谷)에서 해명(解明)을 낳았다. 왕이 한남(汗南)으로 가서 황후를 맞이하여 돌아왔다. 화씨(禾氏)가 도(稻)공주를 낳았다.
八年 己酉 五月 柴吉死 子昌特立 納翊公主
8년 기유(B.C.12) 5월 시길(柴吉)이 죽어 아들 창특(昌特)이 섰다. 익공주(翊公主, 소서노의 딸)를 거두었다.
九年 庚戌 四月 田于箕山七日 得眞珠於桂后陵 返凉谷 雉氏禾氏所逐 上追至樹下 作黃鳥詞
9년 경술(B.C.11) 4월 기산(箕山)에서 7일 동안 사냥을 하다가 계후(桂后)의 무덤에서 진주를 얻어 양곡으로 돌아왔다. 치씨(雉氏, 정공의 딸)가 화씨(禾氏, 화서의 딸)에게 내쫓김을 당하였다. 왕이 뒤따라가다 나무아래에 이르러 황조사(黃鳥詞)를 지었다.
八月 素奴女可治妻羊太子 皇后生萱公主
8월 소노(素奴, 비리국왕)의 딸 가치(可治)를 양태자(羊太子, 황룡국 보득의 딸 화소비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황후가 훤공주(萱公主)를 낳았다.
十年 辛亥 正月 松妃生女穆 涉臣請其子婚 答以公主幼 怒失和 再思薨 沸流太子太輔
10년 신해(B.C.10) 정월 송비(松妃)가 딸 목(穆)을 낳았다. 섭신(涉臣, 자몽국왕)이 그 아들의 혼인을 청하였는데, 공주가 어리다고 답하였다. 화를 내어 화목을 잃었다. 재사(再思)가 죽어 비류태자(沸流太子)를 태보(太輔)로 하였다.
≪견해≫ 비류(沸流)가 고구려의 작위는 받았을 것으로 본다.
四月 大鍊于南口 以備盖馬紫蒙 禾氏生子解術
4월 남구(南口)에서 크게 (군사)훈련을 하여 개마(盖馬), 자몽(紫蒙)국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화씨(禾氏, 화서의 딸)가 아들 해술(解術)을 낳았다.
十一年 壬子 四月 涉臣反 扶芬奴拔其上都〈昆都〉 臣南奔 臣鮮卑也 稚氏生女鄭 鵲氏生蛙
11년 임자(B.C.9) 4월 섭신(涉臣, 자몽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부분노(扶芬奴)가 그 上都〈곤도〉를 치니 (섭)신이 남으로 달아났다. (섭)신은 선비(鮮卑)다. 치씨(稚氏, 정공의 딸)가 딸 정(鄭)을 낳았고, 작씨(鵲氏)가 와(蛙)를 낳았다.
十二年 癸丑 二月 松妃生女殷 皇后生藍公主
12년 계축(B.C.8) 2월 송비(松妃)가 딸 은(殷)을 낳았다. 황후가 람공주(藍公主, 오루의 처, 대무신왕의 장모, 烏后의 어머니)를 낳았다.
≪견해≫ 1. 람공주(藍公主, 오루의 처, 대무신왕의 장모, 모본의 어머니인 烏后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소서노 혹은 그녀의 딸로 추정되며,
2. 고구려 5부중의 하나인 절노(絶奴)부는 왕비족이라 하는데, 졸본(卒本)을 말하는 듯하다. 절노(絶奴)를 남당유고에서는 불노(艴奴)라고 썼다.
十三年 甲寅 正月 阿爾后崩 金蛙老王殂 帶素立 納漢公主 以松妃爲后 溫祚立東明廟
13년 갑인(B.C.7) 1월 아이(阿爾)후가 죽었다. 금와(金蛙)노왕이 죽어 대소(帶素)가 섰다. 한공주(漢公主, 한소의 女 평씨의 딸)를 거두었다. 송비(松妃)를 후(后)로 하였다. 온조(溫祚)가 동명묘(東明廟, 금와의 사당)를 세웠다.
≪견해≫ 백제왕기에는 금와는 온조의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온조(溫祚)가 구태의 아들인지 주몽의 아들인지를 단서를 제공하는 기사다.
十四年 乙卯 正月 都切如柵城 娶帶素女
14년 을묘(B.C.6) 정월 도절(都切)이 책성(柵城)에 가서 대소(帶素)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견해≫ 1, 같은 해 2월에 백제의 소서노가 죽었다. 이 당시 동북아 국제관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백제가 비록 미제(謎題)의 사건으로 처리하였으나, 백제는 고구려를 믿지 못하게 되고, 고구려는 소서노가 도절의 사신 길을 방해한 점으로 미루어 동부여가 해코지 하였다고 의심하였다.
2. 동부여왕 대소는 고구려 왕자를 사위로 삼으려다 백제의 국모(國母)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다 보니 국제외교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七月 溫祚立柵漢山下 盖有南進之意也 上謂皇后 曰 “朕與卿西進 溫祚與再思南進 先帝之靈應有喜也” 時再思爲溫祚妃故也
7월 온조(溫祚)가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웠다. 아마도 남진(南進)의 뜻이 있었던 것이다. 왕이 황후(송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과 경이 서쪽으로 나아가고 온조와 재사(再思)가 남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선제(先帝, 추모)의 영혼이 있으면 응당 기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재사(再思)가 온조의 妃가 되어있던 까닭이다.
十月 帶素欲得松江〈通江〉 而率五万兵來侵 遇大雪七日 進退不能 凍死者十八九 不戰而退 歸謂解素 曰 “不聽汝言而致此”
10월 대소(帶素)가 송강〈통강〉을 얻고자 하여 병사 5만을 이끌고 와 침입했는데, 7일 동안 큰 눈을 만나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얼어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고, 전쟁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대소가) 돌아와 해소(解素)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너의 말을 듣지 않아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十九年 庚申 八月 託利斯卑逐郊豕 至長屋澤〈小興颽〉中斷其脚筋 上怒命坑二人 而不豫 皇后與巫謝之 以淹淲沛者武骨左輔 高婁太子右輔
19년 경신(B.C.1) 8월 탁리(託利)와 사비(斯卑)가 교시(郊豕, 제사에 쓸 돼지)를 쫓아 장옥택〈소흥개〉에 이르러 돼지의 다리와 힘줄을 잘랐다. 왕이 노하여 두 사람을 땅에 묻으라고 명하였으나, (왕이) 편안하지 못하여, 황후와 무당이 잘못을 빌고 사죄하였다. 엄표(淹淲)패자 무골(武骨)을 좌보로, 고루(高婁)태자를 우보로 하였다.
二十年 辛酉 正月 都切太子自柵城歸 未幾薨
20년 신유(A.D.1) 정월 도절(都切)태자가 책성(柵城)에서 돌아와 오래지 않아 죽었다.
≪견해≫ 도절태자의 장례에 관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비류, 해명, 해술태자의 사망기사와 비교해 보기 바랍니다.
五月 松后生豆公主 沸流太子薨 上與皇后擧哀減食 以曼公主爲都助太子妃 陜父太輔
5월 송후(松后)가 두공주(豆公主)를 낳았다. 비류(沸流)태자가 죽었다. 왕과 황후가 장례를 치루고 감식(減食)하였다. 만공주(曼公主, 계후의 딸, 비류태자의 처)를 도조태자(都助太子)의 비(妃)로 하고, 협부(陜父)를 태보로 하였다.
二十一年 壬戌 三月 掌牲薛支逐逸豕 至國內尉那岩〈烏屯河 古城南〉 見山水深險地 宜五穀多麋鹿魚鼈 勸上移都
21년 임술(A.D.2) 3월 제사에 쓰는 짐승을 담당하는 설지(薛支)가 도망간 돼지를 쫓아 국내(國內) 위나암〈오둔하 고성남〉에 이르러 산수(山水)가 깊고 험하며, 또한 오곡(五穀)이 잘되고 고라니(麋), 사슴(鹿), 물고기(魚), 자라(鼈)가 많으므로 왕에게 도읍을 옮길 것을 권하였다.
四月 畋于尉中林〈在尉那岩近地〉
4월 위중림〈在尉那岩近地〉에서 사냥하였다.
九月 如國內相都而還 有丈夫坐於沙勿澤〈湍湖〉畔石上 請爲臣 賜姓位氏名沙勿 以玄公主爲鵲太子妃 再思生多婁
9월 국내(國內)로 가서 도읍할 자리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사물택〈단호〉의 가장자리 바위 위에 장부(丈夫)가 앉아 있었는데,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위(位)씨 성과 사물(沙勿)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현공주(玄公主, 유리와 아이의 딸)를 작태자(鵲太子, 추모와 작씨의 소생)의 비(妃)로 삼았다. 재사(再思, 주몽과 예씨의 소생, 온조의 비)가 다루(多婁)를 낳았다.
≪비교≫ 고구려사초 광명대제 21년 9월 기사
九月 與皇后 又如國內〈解慕漱與柳花相逢 故曰國內〉熊心〈金山〉合歡〈吉祥〉尉那岩等地 而仍遊沙勿澤〈湍湖〉 訪隱者位沙勿 于澤畔石上 載而歸 皇后曰 “山間賤夫 何用乎” 上曰 “不然 伊尹呂尙皆此類也” 以玄公主爲鵲太子妃 再思公主生溫祚子多婁
9월, 황후(송후)와 함께 거듭하여 국내(國內, 해모수와 유화가 만난 곳인 연유로 국내라고 한다)의 웅심〈熊心,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만난 지명에 나타남〉, 합환〈길상〉, 위나암(尉那岩) 등의 땅을 살펴보았다. 이를 쫓아 사물택〈단호〉을 놀러갔는데, 은거하고 있던 사람 위사물(位沙勿)을 (사물)택의 바위 위에서 만났다. (위사물을) 태우고 돌아왔다. 황후가 말하기를 “산 속에 사는 미천한 사내를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이윤(伊尹, 湯을 도와서 夏를 멸하고 殷을 세운 재상)이나 여상(呂尙, 姜太公)도 이와 같은 사람이었소.”라고 하였다. 현(玄)공주를 작(鵲)태자의 비로 삼았다. 재사(再思)공주가 온조(溫祚)의 아들 다루(多婁)를 낳았다.
≪견해≫ 국내(國內)는 비류국 송양의 땅이다. 즉 송후의 영토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고구려 5부인 연노(涓奴)에 해당하고, 또는 고국원(故國原)이라고도 부른다.
二十二年 癸亥 十月 移居于尉那岩 徵河北河南民築城 是爲北都 作朱留新宮於銀川岺下〈鶴立〉
22년 계해(A.D.3) 10월 위나암(尉那岩)으로 옮겨 살았다. 하북(河北)과 하남(河南)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성을 지었다. 이곳이 북도(北都)다. 은천령〈학립〉 아래에 주류신궁(朱留新宮)을 지었다.
十二月 田于質山陰〈綏化〉五日不返 太輔陜父諫之不聽 罷爲司園小兄 陜夫以瓢浮海入新羅
12월 질산음〈수화〉에서 5일 동안 사냥을 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태보 협부(陜父)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작위를 낮추어 사원소형(司園小兄)으로 하였다. 협부가 표주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로 갔다.
≪견해≫ 협부(陜父)가 유리왕이 사냥을 떠나 돌아오지 않음을 간하자, 직위를 낮춘 것을 유리왕의 괴팍한 성격 탓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추모가 동부여를 떠났을 때 유리의 어머니 예씨가 임신한 상태였다. 즉, 외조부인 금와가 왕일지라도 자신의 신분은 고구려의 볼모였다.
유리왕의 장남 도절(都切)이 비록 대소왕의 딸에게 장가를 간다고 하나, 도절의 아들은 동부여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유리왕의 어렸을 적 삶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유리왕도 처음엔 도절이 볼모로 간 것을 반대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도절을 볼모로 보내야 된다는 중신들의 거듭된 요청에 유리왕은 도절을 보내는 결심을 하게 된다. 도절도 마지못해 가는 사신 길에 외할머니 소서노가 나타나 도절을 막습니다. 소서노는 도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보내지 못하며 억장이 무너져 다시 미추홀로 돌아오죠.
그런데 이번엔 미추홀이 난리가 나 있습니다. 미추홀에 호랑이가 난입하였는데, 때마침 소서노가 도절의 신변보호를 위해 미추홀의 정예병을 데리고 간 터라 피해가 컸던 것이죠. 소서노는 도절의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데다 미추홀이 피해를 입은 것을 알게 되자 병이 들어 죽고 맙니다.
소서노의 죽음은 볼모로 교환함으로써 화친하고자 하였던 고구려와 동부여에 반대효과로 나타납니다. 상식적으로 상대방국가의 왕자를 볼모로 잡고 있거나 보낸 나라는 서로 전쟁을 할 수 없는 일이죠. 전쟁을 일어나면 반드시 볼모로 간 왕자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반대로 전쟁은 일어났고, 볼모는 돌아왔죠.
고구려에서는 도절의 사신 길을 소서노가 지연시킨 일이 있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동부여가 미추홀에 호랑이를 풀었다고 하고, 동부여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동부여왕 대소에게 사죄하라 하고, 대소는 못하겠다고 합니다.
동부여와 고구려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류는 소서노가 장수가 되어 다섯 호랑이를 하늘이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嫗化爲男 五虎入城). 즉, 미추홀의 호환(虎患)을 어머니의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여기에 반발한 온조가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설치하고 비류와 결별하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여와 고구려는 서로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죠. 고구려에서는 비류가 있어서 민심을 다독였으나, 동부여에서는 그렇지 못했죠. 해소가 고구려와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고구려인들이 욕질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동부여왕 대소는 고구려왕 유리의 사과라도 받아서 체면을 세우겠다는 것인데, 고구려에서는 어이가 없었죠. 동부여의 병사 5만이 쳐들어 왔으나 노략질한 기사 혹은 고구려가 대응한 기사는 없고, 7일 동안 눈이 와서 동부여 병사가 얼어 죽은 기록만 남아있습니다.
이 때에 동부여는 인적피해가 많았으나, 고구려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고구려의 백성 중에 온조를 따라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발생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백제계의 거점이기도 하였죠. 수년이 지나도 도읍의 민심이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리는 천도할 구실을 찾고 있었고, 그것이 제사에 쓸 돼지를 놓아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풀어준 돼지는 천도를 계획했던 방향과는 엉뚱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희생에 쓸 돼지의 다리를 끊고 관리 2명을 구덩이에 묻습니다.
그러나 관리들은 왕명을 받든 것뿐이고, 돼지의 다리를 끊은 것은 부정을 탔다하여 천도를 취소하려는 것이었죠. 왕이 병이 들었다고 하여 관리를 살려주죠.
한편으로 동부여에서 도절과 대소의 딸 사이에 사랑이 싹 틉니다. 도절은 대소의 딸과 사이에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볼모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식을 갖는 것을 피합니다. 그러다가 덜컥 임신이 됩니다.
대소는 이제 도절을 고구려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도절이 가려하지 않고 대소의 딸이 만류합니다. 대소는 황당하였죠. 그럼에도 대소는 도절을 억지로 보냅니다.
대소에게 떠밀려서 도절은 억지로 고구려로 보내집니다. 그런데 동부여에서는 도절의 자식을 임신한 대소의 딸 파소가 도절을 배웅 나간다 하고 사라집니다. 대소의 딸 파소는 도절과 함께 고구려와 동부여를 벗어나 동옥저를 거쳐 진한으로 남하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신라(新羅)입니다.
당시 진한에서는 나라를 맡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나라가 작은데다 구심점이 없었죠. 그런데 북쪽에서 고구려의 태자와 동부여의 공주가 내려오니, 이보다 나라를 맡기기에 적당한 사람이 없었죠. 진한의 수장들이 마음을 합하여 나라를 하나로 뭉치죠. 이 때에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혁거세왕입니다.
도절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고구려의 태보로 있던 비류가 알게 됩니다. 비류는 당시에 병약하고 마음이 여린 점도 있으나 자신이 의지했던 어머니의 죽음, 자신이 의지했던 온조가 떠나갔고, 이번엔 도절이 떠나버리자 병이 들어 들었죠.
그나마 졸본의 민심을 잡고 있던 비류마저 죽자 다시 유리가 포기했던 천도를 다시 계획합니다. 제사에 쓸 돼지가 실수로 두 번이나 도망갔으며, 그것도 아주 멀리 도망 보낸 것이 수상하죠.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돼지를 놓치게 되고, 가까이 접근했다면 잡았을 터인데 적정한 거리를 두면서 따라갔다는 것이 수상하죠.
처음엔 천도를 계획했던 것과 정반대로 동부여의 국경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돼지를 아주 잘 다루는 관리를 붙여 돼지몰이를 갑니다. 이미 점지해둔 황후(황후)의 영토로 몰아가죠. 그리고 중신들에게 천도하기 좋은 땅을 발견했다고 천도를 하자고 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A.D.5년 9월 기사에 가축을 잘 다루는 인재를 등용하는 재미있는 기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주어 부마로 삼았죠.
유리왕이 천도를 계획했을 때는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송양의 아들 송의는 자신이 동부여에 있을 때 탈출을 도왔었는데, 송의의 어머니가 책성사람이라는 배경이 작용했었고, 고구려의 창업공신 오이도 아버지가 책성태수였습니다. 그러므로 송후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겼음에도 나라가 안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리왕은 처음엔 동부여를 의심하였으나 그게 아닌 듯 했죠. 자신이 잊고 지냈던 망각했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낙랑(樂浪)과 백제의 불화였죠. 소서노가 죽기 이전에도 낙랑은 백제는 다투었고, 말갈을 부추겨 백제를 침략하게 하였으며, 소서노의 사망이후까지 계속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리왕은 동부여와의 기나긴 불화를 깨뜨릴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죠. 그것은 태보 협부였습니다. 협부의 처가 낙랑왕 시길의 딸이었기 때문이죠. 유리왕은 낙랑에게 나라를 바치고 왕이 목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낙랑을 쳐서 본보기를 보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백제본기의 기사를 보면 이때를 기점으로 낙랑이 백제를 침략하는 기사가 사라집니다. 그러자 협부는 낙랑은 마한을 두고 백제와 다툰 일은 있어도 미추홀에 호랑이를 풀어 놓은 일은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유리왕은 진실로 낙랑의 잘못이 없다면 동부여와 백제계와 화해할 계책을 세우라고 합니다.
태보 협부가 신라로 간 것은 도절을 데려오기 위함입니다. 이 때까지 고구려는 정윤(正胤,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도절이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도절이 거부했습니다. 도절은 자신 때문에 외할머니, 외삼촌이 죽었으며, 고구려와 동부여의 백성들이 많이 상하였으니 임금이 될 자격이 없고, 자그마한 나라에서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협보가 남한(南韓)으로, 고구려사초(략)에는 신라(新羅)로, 한단본기에는 다파나(多波那)로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이 아닙니다. 협보가 신라로 갔을 때는 국호가 없었으며, A.D.25년에 가서야 국호를 정하게 되고, 협보는 신라에 계속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왜(倭)로 간 것이죠. 왜(倭)의 전신이 다파나(多波那)이죠.
二十三年 甲子 二月 以解明太子爲正胤 以珍公主爲妃 置東宮 僚及領地衛軍 大赦國內 上與皇后率東宮及妃如溫湯 宴卒本戚臣沸流戚臣三十人 松后生無恤太子于朱留宮 有鶴盤回岺上
23년 갑자(A.D.4) 2월 해명(解明)태자를 정윤(正胤)으로, 진공주(珍公主, 유리와 아이후의 소생)를 비(妃)로 하였다. 동궁에 (관)료와 영지(領地, 영주가 소유하는 땅)와 호위 병사를 두었다. 왕과 황후가 동궁(해명태자)과 동궁비(진공주)를 데리고 온탕에 갔다. 졸본척신(소서노 계열)과 비류척신(송양 계열) 30명에게 잔치를 열었다. 송후(松后)가 주류궁(朱留宮)에서 무휼(無恤)태자를 낳았다. 학반회령 꼭대기에 있는 주류궁에서 무휼태자를 낳았다. 학이 고개(岺)위에서 선회하였다.
≪견해≫ 도절이 죽었다는 기록이 나타난 3년 후에야 비로소 후계자를 정했다는 기록이다. 도절이 정말로 죽었다면 당시 황후의 아들인 해명(解明)의 지위가 불안하지 않았겠으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후계자를 정하였음에도 나라가 안정되지 않고 태자의 거처에 호위 병사를 두었으며, 백제계 동궁비를 세우고, 백제계 신료들에게 위로의 잔치를 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二十四年 乙丑 九月 田于箕山 得羽人爲司園小兄 有畜戰神術 大嘉之 妻以鱒公主 賜姓名羽澤 以穆公主妻黙親 居子也.
24년 을축(A.D.5) 9월 기산(箕山)에 사냥을 나갔다가 우인(羽人, 신선)을 얻어 사원소형(司園小兄)으로 하였다. 가축으로 전쟁하는 신기한 기술을 지니고 있어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준공주(鱒公主, 유리와 평씨(한소의 딸)의 소생)를 시집보내고, 우택(羽澤)이라는 성명을 하사하였다. 목공주(穆公主, 유리와 송비의 소생)를 묵친(黙親)에게 시집보냈는데, (묵친은) (묵)거의 아들이다.
二十六年 丁卯 四月 松后生解邑朱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鱒公主生子眞
26년 정묘(A.D.7) 4월 송후(松后)가 해읍주(解邑朱)를 낳았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소(帶素)의 여덟 형제가 왕위를 다투며, 서로를 죽였다. 준공주(鱒公主)가 아들 진(眞)을 낳았다.
≪견해≫ 고구려사초에서는 이 해에 고구려가 온조에게 병사와 군량을 보내어, 마한의 정벌을 도왔다고 한다.
九月 皇后崩 春秋六十二 葬于龍山
9월 황후가 춘추 62세에 죽었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견해≫ 나이로 보면 소서노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사략의 기록이 백제본기 혹은 백제왕기와 차이가 있음으로 인하여 남당이 혼란을 느껴 삭선 한 듯 하다.
二十七年 戊辰 三月 東宮解明太子 立槍於礪津東原 走馬飛躍觸死 是年二十一 初太子好勇 烏伊獻强弓太子 折之 曰 “非我有力也 弓不勁矣” 烏伊大慙 上在北都聞之 大怒 曰 “黃龍王國之元勳也 豈可如是” 命賜釰自裁 旣而悔之 葬于東原 而立廟號曰槍原 國人哀之 曰 “勇子必死” 是年 新羅以女妻陜父云 溫祚遷都于漢山 都助太子薨
27년 무진(A.D.8) 3월 동궁 해명(解明)태자가 여진(礪津) 동원(東原)에서 창을 세워놓고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이해 나이 21세였다. 태자는 본래 용감함을 좋아하여, 오이(烏伊)가 강궁(强弓)을 바치자, 부러뜨리며 말하기를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이 튼튼하기 못하다.”라고 하였다. 오이가 부끄러워하였다. 왕이 북도(北都)에서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화내며 말하기를 “황룡왕(黃龍王)은 나라의 원훈(元勳, 나라에 큰 공이 있어 임금이 사랑하고 아끼는 老臣)이다, 어찌 이와 같이 행동함이 옳다고 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칼을 내려 자진하도록 명하였다. 끝내 자진하도록 한 것을 뉘우치고 동원(東原)에 장사를 지냈다. 사당을 세워 창원(槍原)이라 불렀다. 나라사람들이 슬퍼하여 말하기를 “용감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하였다. 이해에 신라가 왕녀를 협부(陜夫)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 도조(都助)태자가 죽었다.
≪견해≫ 해명(解明)의 자살원인에 대하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사략, 고구려사초, 본기신편열전에 나오는 기록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기(古記)의 편찬자들이 본래의 진실은 숨기고 주변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측근중의 한 신하가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정당하게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유리왕은 당시까지도 도절태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이 해에 온조가 마한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는데 유리왕이 이를 적극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해명(解明)은 백제의 싹이 자라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며 유리왕이 온조를 돕는 것을 말리려 하고, 고구려 창업공신 오이(烏伊)에게 고구려가 군사를 지원하는 것을 말리도록 청했습니다.
오이가 유리왕의 뜻은 추모왕의 유지(遺志)라 하며 따르려 하고, 해명은 자신의 강건함을 보이며 오이를 위협합니다. 워낙 강경했던 해명(解明)을 유리왕도 어쩌지 못하여 오이에게 보내고, 오이도 해명을 어려워하여 고구려로 돌려보냅니다. 해명은 강직했던 성격 때문에 죽은 것이지, 유리왕이 변덕스러워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二十九年 庚午 六月 赤蛙攻黑蛙于茅川〈葦沙河〉鏖之 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與其子多婁來朝 上命巫禱多婁福 五日歸 上親送於汗南 公主揮淚而去 新羅以陜夫爲太輔 穆公主改嫁乙芳
29년 경오(A.D.10) 6월, 모천〈葦沙河〉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여 격렬하게 싸웠다. 사람들이 대소(帶素)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 재사(再思)공주가 그 아들 다루(多婁)와 문안하였다. 왕이 무당에게 다루의 복을 빌도록 명하였다. 5일 후 돌아가자, 왕이 손수 한남(汗南)까지 배웅하였다.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신라가 협부(陜夫)를 태보로 하였다. 목공주(穆公主)가 을방(乙芳)에게 개가하였다.
≪견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이 해 2월에 온조가 태자를 정하였다. 아마도 새로 넓힌 마한의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재사(再思)공주의 아들 다루(多婁)는 나이가 어림으로 인하여 마한의 지분을 배분받지 못함은 아닐까?
三十一年 壬申 七月 漢人田譚與索頭相爭 請救於勾鄒 勾鄒使延丕〈召西奴之侄子〉擊譚殺之 譚不遜故也 又有嚴尤者來寇紫蒙 勾鄒自將擊之 虜其將卒二千余 馬仗無數印顆十二 拓地七百余里
31년 임신(A.D.12) 7월 한인 전담(田譚)이 색두(索頭)와 싸웠는데, 구추(勾鄒)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구추는 연비〈소서노의 조카〉를 보내어 전담을 쳐서 죽였다. 또 엄우(嚴尤)라는 자가 있어 자몽(紫蒙)을 노략질 하므로, 구추가 장수가 되어 엄우를 쳤다. 엄우군의 장졸 2천여 명을 사로잡고, 말과 병장기가 무수히 많았으며, 인과(印顆, 흙덩이로 만든 도장)가 12개, 칠백여리의 땅을 넓혔다.
≪비교≫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기사 발췌
王莽初 發句驪兵 以伐匈奴 其人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 爲寇盜 遼西大尹田譚追擊 戰死 莽令其將嚴尤擊之 誘句驪侯騶 入塞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更名高句驪王爲下句驪侯 於是貊人寇邊愈甚
왕망(王莽)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하여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태수)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왕)망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이때부터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견해≫ 자몽(紫蒙)의 도읍이 구려(勾麗)성이고, 그들은 선비족이었다고 한다. 후한서에 나타나는 구려(句驪)는 자몽(紫蒙)국이며, 요서(遼西)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즉, 신(新, 왕망이 세운 나라) 요서태수 전담은 자몽(紫蒙)의 구려(勾麗)성에서 선비족을 징발하여 흉노의 색두(索頭)와 다투려 하자 자몽의 군사들이 달아났다는 것이고, 요서태수 전담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자 고구려 현토태수 구추가 연비(延丕)를 보냈으나, 무례하여 연비가 전담을 죽인 것이다.
연비는 전담의 장수 엄우(嚴尤)에게 죽임을 당했고(고구려본기 참조), 연비가 죽자 이번엔 구추(勾鄒)가 요서를 친 것이다. A.D.14년 고구려가 자몽(紫蒙)을 평정하므로, 그 때에야 구려성(勾麗城)이 고구려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十月 乙豆智妃皐頭薨 以陽公主乙豆智妃
10월 을두지(乙豆智)의 비(妃) 고두(皐頭, 자몽국 섭신의 딸)가 죽었다. 양공주(陽公主)를 을두지의 비로 하였다.
三十三年 甲戌 正月 以無恤太子爲正胤 敎以弓馬用兵之術
33년 갑술(A.D.14) 정월 무휼(無恤)태자를 정윤(正胤)으로 하여, 궁마(弓馬)와 군사를 부리는 법을 가르쳤다.
七月 以豆公主妻高婁太子
7월 두공주(豆公主, 송후의 딸)를 고루(高婁, 추모와 계후의 소생)태자에게 시집보냈다.
八月 命烏伊摩離各領二萬兵 討鮮卑梁貊 十月 烏伊拔勾麗城〈林西〉 虜涉臣而歸 紫蒙十二國悉平 摩離拔貊窟貝沙〈海拉爾 南屯〉而還
8월 명령으로 오이(烏伊, 황룡국)와 마리(摩離, 비리국)가 각자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선비(鮮卑)와 양맥(梁貊)을 토벌하였다. 10월 오이가 구려성〈林西〉을 쳐서 빼앗고, 섭신(涉臣)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자몽(紫蒙) 12국이 모두 평정되었다. 마리(摩離)는 맥인의 소굴 패사〈해랍이 남둔〉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九月 上與藍公主如溫湯 帶弗弑帶素而自立
9월 왕이 람공주(藍公主, 아이후의 딸)와 온탕에 갔다. 대불(帶弗)이 대소(帶素)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三十七年 戊寅 四月 解術溺死礪津 不得其尸 沸流人祭須得之 葬于王骨岺〈八虎力下畔向陽山〉 賜須金十斤田十頃 解術禾氏出也 性如婦女 慕解明及珍公主 而死
37년 무인(A.D.18) 4월 해술(解術)이 여진(礪津)에서 익사하여 그 시체를 찾지 못했다. 비류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아서 왕골령〈팔호력하반향양산〉에 장사 지냈다. (제)수에게는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해술은 화씨(禾氏)의 아들이고, 성품이 부녀자 같았다. 해명과 진공주(珍公主, 해명의 처)를 사모하여 (따라) 죽었다.
≪비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7년 기사
37년(A.D.18) 4월 왕자가 진(津, 나루터)에 가서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後)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았다는 것들 듣고, (왕자의) 예로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기에 이르렀다.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7월 왕이 두곡(豆谷, 송비 거소)에 행차하였다.
10월 왕이 두곡(豆谷) 이궁(離宮)에서 죽었다. 두곡 동원(東原)에 장사지내고, 호(號)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견해≫ A.D.20년에 동명묘(東明廟, 사당)를 지은 기록이 나타난다. 이는 고구려사초(략)에서 유리명왕의 죽음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七月 黃龍王烏伊薨 宝得子毛獜代之 烏伊之女婿也 烏伊柵城褥薩烏文之子也 慷慨 有大志事東明爲元勳 以解明事傷心 至是又見解術事 得疾 累夢解明羊吉而驚劇而終 年八十三
7월 황룡왕 오이(烏伊)가 죽어, 보득(宝得)의 아들 모린(毛獜)이 섰다. (모린은) 오이의 딸의 남편이다. 오이는 책성욕살(柵城褥薩, 태수) 오문(烏文)의 자이다. (성품이) 강개(慷慨,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정의심이 복받치어 슬퍼하고 한탄함)하고 큰 뜻으로 동명(東明)을 섬기어 원훈(元勳, 나라에 큰 공이 있어 임금이 사랑하고 아끼는 老臣)이 되었다. 해명(解明)의 일로 마음을 다쳤고, 이때에 이르러 해술(解術)의 일을 당하자 병을 얻었다. 누차로 해명(解明)과 양길(羊吉)의 꿈으로 심하게 놀라 끝이 났다. (향년) 83세였다.
三十八年 己卯 正月 北都大震 移于東都 默居太輔
38년 기묘(A.D.19) 정월 북도(北都, 국내 위나암)에 큰 지진이 있어, 동도(東都)로 이사하였다. 묵거(默居)를 태보로 하였다.
≪견해≫ 유리왕의 후사를 이은 분이 졸본(卒本)의 세력이라는 뜻이다.
三十九年 庚辰 三月 立東明神廟于龍山中岺〈勃利廟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 多婁正胤冠釰 以蘚苩兩公主妻之
39년 경진(A.D.20) 3월 용산중령〈발리묘령〉에 동명신묘(東明神廟)를 세웠다. 재사(再思)공주와 다루(多婁)가 문안 와서, 다루를 (한남의) 정윤으로 하여 관모와 보검을 내렸다. 선(蘚)공주와 백(苩)공주 둘을 다루에게 시집보냈다.
≪견해≫ 재사(再思)공주의 아들 다루(多婁)가 한남(汗南)에 봉하여진 기록은 고구려사초 A.D.42년 기사에 등장한다. 한남(汗南)은 본래 온조의 봉지(封地)다.
九月 田于骨句川〈黑河省 遜河〉 東宮得神馬狀如巨婁 上大喜 曰 “天賜巨婁於汝 東明之業可復興也”
9월 골구천〈흑하성 손하〉에서 사냥했는데, 동궁이 거루(巨婁)를 닮은 신마(神馬)를 얻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거루를 너에게 내린 것은, 동명지업이 부흥할 징조다.”라고 하였다.
≪견해≫ 유리의 後王이 후계자를 바꾸지 않은 원인이다.
十月 東扶餘來獻赤烏一頭二身 倂合兆云
10월 동부여(東扶餘)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두 나라가) 병합될 조짐이라고 하였다.
≪견해≫ 일두이신(一頭二身)의 기사는 백제본기에도 등장한다. 고구려본기에는 두개의 나라가 고구려와 동부여라고 하였으나, 백제와 고구려를 말한다.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의 까마귀가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살아남기도 매우 어려우며, 더더군다나 붉은 빛을 띤 까마귀가 나타날 확률도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머리가 하나에 몸통이 두개인 짐승이 나타나면 그러한 동물을 획득한 나라에서는 주변의 국가를 병합할 징조라 생각하여 상서롭다 하였다.(백제본기 참조)
동부여가 그러한 동물 혹은 상징물을 제작하여 고구려에 주었다면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하나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즉, 고구려에 온조가 즉위하였음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또 이해에 해소가 딸 갈사태후(국조왕의 할머니)를 고구려로 보내어 동부여와 고구려의 우호를 다졌던 것 같다. 갈사태후와 백제의 우보 해루는 오누이관계다.
四十年 辛巳 二月 卑離王摩離薨 年八十四 子義鹿代之 其母古王素奴女也
40년 신사(A.D.21) 2월 비리왕(卑離王) 마리(摩離)가 죽었다. (향년) 84세였다. 아들 의록(義鹿)이 대신하였다. 의록의 어머니는 옛 왕 소노(素奴)의 딸이었다.
四十二年 癸未 十一月 帶弗來侵 東宮以逸待勞伏兵 出奇大破其軍於鶴盤岺下〈鶴立同〉其兵棄馬登山而走 皆被伏兵取擒 歸者百一 上大悅而撫東宮 曰 “芻牟復來”
42년 계미(A.D.23) 11월 대불(帶弗)이 쳐들어 왔다. 동궁(東宮, 무휼)이 복병을 애써 숨겨 기다리고 있었다. 학반령(鶴盤岺) 아래〈학립동〉에서 기습하여 대불의 군대를 대파하니, 대불의 병사들은 말을 버리고 산으로 달아났다. 모두 복병에게 생포되니, (살아) 돌아간 자는 백에 하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동궁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추모(芻牟)가 다시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견해≫ 학반령(鶴盤岺)은 무휼이 태어난 곳인 주류신궁이 소재한 곳으로, 무휼이 동궁으로써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동부여는 백제와 고구려의 통합에 기뻐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온조가 무휼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것에 반대하는 뜻이 있어 무휼을 죽이기 위해 기습하여 온 듯 하다.
당시 무휼을 지키던 병사는 소수였고, 복병이라는 것은 성공했을 때는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이지만 들켰을 때는 아니함만 못하여 온조는 무휼이 소수의 병력으로 성안에서 수비하고 있었을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무휼은 온조가 자신을 지켜 주리라 믿었으며, 동부여의 병사들이 산으로 달아날 것을 예상하여 매복하여 있었던 것이다.
무휼의 예상대로 온조는 군대를 무휼에게 보내어 대불의 군대를 격파하니 이윽고 대불의 병사들이 산으로 달아난 것이다. 온조는 동부여의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을 지켜만 보는 입장이었는데 무휼이 복병으로 사로잡아 산에서 내려오니 크게 기뻐하였다는 뜻이다. 즉 온조는 “무휼 네가 나를 믿었으니 나도 너를 믿고 나라를 맡길 수 있다. 이는 곧 추모왕의 뜻이다.”라고 한 것이다.
위의 기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2년(A.D.13) 기사에도 나온다. 고구려사초(략)과는 10년의 기년차이가 있다. 무휼은 A.D.4년 출생이니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무휼이 10살 소년이므로 기묘한 계책으로 물리쳤다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四十三年 甲申 二月 上與后及太后幸東都 行東明大祭 墨居薨年八十二
43년 갑신(A.D.24) 2월 왕과 후(后)와 태후(太后)가 동도(東都)로 행차하여 동명대제(東明大祭)를 행하였다. 묵거(墨居)가 죽었는데 향년 82세였다.
≪견해≫ 태후(太后)는 본래 왕의 어머니를 말함이나, 어머니의 사망이후에는 고모 혹은 이모 등이 대신함이 있었다.
四十四年 乙酉 二月 高婁太子太輔 宋義右輔 乙豆智左輔主兵大加.
44년 을유(A.D.25) 2월 고루(高婁)태자를 태보로, 송의(宋義)를 우보로, 을두지(乙豆智)를 좌보 겸 주병대가로 삼았다.
四十七年 戊子 八月 太后崩 春秋八十五 葬於豆谷東原
47년 무자(A.D.28) 8월 (예)태후가 죽었는데 춘추 85세였다. 두곡(豆谷) 동원(東原)에 장사지냈다.
十月 皇后與上謁太后陵而還豆谷離宮 上先崩皇后繼崩 葬于禮太后陵內 上春秋六十八后八十三 東宮受宝卽位
10월 황후와 왕이 태후릉을 알현하고 두곡이궁(豆谷離宮, 송후의 거처)으로 돌아왔다. 왕이 먼저 죽고 황후가 따라 죽었다. 예태후릉에 장사를 지냈다. 왕은 춘추 68세였고, 황후는 춘추 83세였다. 동궁이 보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
≪견해≫ 송후(松后)가 여럿이므로 따라 죽은 송후가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첫댓글 책의 제명은 3대에 관한 기록이라 했으면서 실제로는 동명성왕과 유류왕의 기록밖에 없다. 처음엔 대무신왕의 기록이 미처 필사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고구려사초(략)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10년의 기년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리왕과 대무신왕과의 사이에 왕이 한 분 더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위서에도 유류왕과 대주류왕 사이에 여율이라는 존재가 있긴 있으나, 광개토태왕비문을 볼 때 적어도 고구려의 공식 입장은 아닌 듯 합니다. 북위 사신 이오는 왕실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경로로 고구려 건국 신화를 들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