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천점산 봉영사
@남양주 봉영사(奉永寺)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로 봉선사와는 가까운 위치인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의 천점산(泉岾山) 기슭에 있다. 천점산은 천견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해발 393m로 나지막한 산이다. 봉영사의 창건은 신라 진평왕 21년인 599년에 도선이 암자를 이곳에 개설하고 봉인암(奉仁庵)이라고 부른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한동안 절이 황폐해졌다가 1737년(영조 13) 태전(太顚)과 해청(海淸)·치학(致學)에 의해 중창된 것이다.
좌측 기둥의 글 <천점산봉영사> 우측기둥의 글<무량원력도량>
1755년에는 인근에 있는 선조의 후궁이며 인조의 할머니인 인빈 김씨의 묘 순강묘소가 순강원(順康園)으로 승격되자, 이때 봉인암이 인빈의 원찰로 지정되어 인빈과 신성군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 되면서 조선 왕실과 관련을 갖게 되었다. 절 이름도 입구에 있는 순강원을 "오래도록 받는다"라는 의미로 봉영사(奉永寺)로 개칭했다. 조선 말엽에는 고종의 백부인 이최응이 큰돈을 내놓아 중수하기도 했다. 1920년 여름 경신 대홍수로 수해가 크게 발생했을 때 봉영사도 큰 피해를 입어 폐사 직전까지 갔다가 재건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일주문 우측에 조성된 관음보살상) 서울근교에는 원당이 많다. 그 이유로는 불교국가였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는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을 일관되게 지속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하는 자로(子路)의 죽음에 대한 물음의 대답으로 공자가 말했듯 유교는 현실정치에는 불교보다 돋보였지만,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 대한 해답은 주지 못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이 극락과 같은 좋은 곳으로 가게하고, 자신들의 복을 빌어줄 곳은 불교밖에는 없다고 여기는 백성들은 불교를 계속 신봉하게 되었고, 또한 왕실이나 양반들도 개인적으로는 원찰을 만들어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신의 복을 빌게 되었던 것이다.
(이 포대화상 아래 유명한 천점산 약수터가 있다.)
옛 한양을 기점으로 오늘날 서울근교에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왕실의 원찰(願刹)로 꼽히는 서울의 봉은사, 안성의 청룡사, 화성의 용주사, 남양주의 봉선사와 흥국사 등이 있다. 원찰(願刹)이란 다른 말로 원당(願堂)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원(願)을 빌어주는 곳을 말한다. 남양주의 봉영사도 이와 같은 원찰에 속한다. 봉영사 입구에 보면 순강원(順康園)이 자리하고 있다. 이 순강원은 훗날 인조(仁祖)의 할머니가 되시는 선조의 후궁 인빈(仁嬪) 김씨의 묘소이다. 이렇게 순강원의 원찰로 지정된 봉영사는 절 이름까지도 봉인암(奉仁庵)에서 “순강원을 오래도록 받든다”라는 뜻으로 봉영사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한다. 두개의 돌탑이 천왕문을 대신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연못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연못 위의 전각은 산신각 중앙 본당은 무량수전이고 좌측은 관음전, 우측은 지장전이다. 관음전이다. 편액은 천점산 봉은사로 되어 있다. 봉영사의 본당격인 무량수전 @남양주 봉영사 아미타불도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불화이다. 아미타불이 앉은 불단 좌우로 대세지보살과 관음을 비롯한 6대 보살과 사천왕이 서고, 상단부 광배 좌우에 2위의 타방불과 가섭·아난존자 등 10대 제자, 용왕과 용녀, 코끼리 탈을 쓴 복덕대신과 사자탈을 쓴 호계대신이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정연한 구성과 주황색과 녹색 위주의 조화로운 채색이 돋보인다. 〈남양주 봉영사 아미타불도〉는 1853 제작된 것으로, 비단에 채색, 206.4×228.3㎝,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양주 봉영사 신중도 두흠(斗欽)의 작품으로,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다. 신중도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들, 즉 신중(神衆)을 그린 불화로 전각을 수호하는 기능을 한다. 화면 상단 중앙에 갑옷을 입고 깃털 장식 투구를 쓴 위태천이 앉아 있고 왼쪽에 풍성한 모란꽃 가지를 든 제석천, 오른쪽에 합장한 모습의 범천이 배치되어 있다. 구름으로 구획된 하단은 위태천이 이끄는 천룡팔부중의 세계이다. <구성 및 형식을 보면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들(神衆)을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그려진다. 봉영사 신중도는 화면을 이단으로 나누어 좌우로 대표적 호법신인 제석천과 범천의 세계를 그린 그림이다. 세로 177.0㎝, 가로 191.6㎝의 면 바탕에 채색을 베푼 불화로, 2011년 5월 2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7호로 지정되었다.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을 그린 신중도는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제작되었던 불화이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조선 시대 신중도는 18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신중도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과 같은 주불전 또는 보살이나 나한을 모신 부속 전각에 봉안하여 전각을 수호한다. 남양주 봉영사 신중도의 제석천과 범천은 거의 같은 모습이지만, 오른쪽(향좌측)의 존상이 풍성한 모란꽃 가지를 들고 있어 제석천임을 알 수 있고, 범천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합장하고 있다. 이들 사이로 약간 아래쪽으로는 갑옷을 입고 깃털 장식의 투구를 쓴 위태천을 그리고 주변으로 천자 도상을 배치하였다. 하단은 구름으로 구획한 뒤 위태천이 이끄는 천룡팔부중의 세계를 그렸다. 남아 있는 묵서를 통해 밝혀진 조성 화원 두흠(斗欽)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서울·경기 지역을 주 무대로 활동한 화승인데, 이 그림의 도상 구성과 양식은 당시의 시대적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형적인 제석범천천룡도로 비록 화기가 남아 있지 않아 조성 시기를 명확하게 밝힐 수 없지만, 남아 있는 묵서명을 통해 조성 화원이 두흠으로 밝혀졌고, 그의 활동시기와 화풍상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어 그 가치가 인정된다. 안내서가 없어 이 범종의 내력을 알 수 없다. 무량수전 뒤 바위 위에 여러가지 불상과 동자상을 조성했다. 무량수전 오르는 계단의 쌍용과 그 위에 귀머거리3년, 장님3년, 벙어리3년이라는 옛 속담을 회화한 조각품이 보인다. 지장전 @지장시왕도 사후세계의 교주(敎主)인 지장보살과 시왕(十王)을 한 폭의 화면에 함께 묘사한 형식의 지장 시왕도이다. 화기를 통해 1828년(순조 28)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세로 139.8㎝, 가로 193.5㎝의 비단 바탕에 채색을 베푼 작품으로, 2011년 5월 2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지장보살도는 사후세계의 교주(敎主)인 지장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지장보살은 관음보살과 함께 우리나라 2대 보살의 하나로, ‘위로는 부처의 도를 구하며,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도를 실천하며, 천인·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하기 위해 성불(成佛)마저도 포기한 대비(大悲)의 보살이다. 화기에 ‘도광 8년 무자 10월일 ○○ 북한 중흥○○○안우중단(道光八年戊子十月日○○北漢重興○○○安于中壇)’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북한산 중흥사(重興寺)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불화의 수화승 화담당(華潭堂) 신선(愼善)은 비록 공명첩(空名帖)의 형태이긴 하지만 드물게도 정이품(正二品)인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지위에 있었으며, 『익종대왕 태실가봉 석난간조배의궤(翼宗大王胎室加封石欄干造排儀軌)』(1836) 공장질(工匠秩)에는 용주사 수화승으로 올라 있다.
신선의 철선묘는 날카롭지 않고 경쾌하며, 색상은 여성적일 정도로 깊고 은은하다. 그의 유존 작품은 거의 없지만, 1832년(순조 32) 제작된 흥천사 괘불과 더불어 그의 뛰어난 화격을 평가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주홍색을 주색으로 하고 흰색의 호분과 금박을 적절히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명도가 높은 편이다. 흰 바탕 테두리에 주홍 줄이 그어져 있는 청벽색의 관모와 그와 대비되는 부드러운 살색, 옷 주름을 따라 촘촘하게 시문 되어 있는 화려한 원문과 초화문 등은 이 불화의 화격을 높여주고 있다. 산신각 @남양주 봉영사 산신도 예운상규(禮雲尙奎)의 1903년 작품으로, 세로 174.0㎝, 가로 194.4㎝ 크기의 면 바탕에 채색을 베푼 작품으로, 2011년 5월 2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산왕(山王)으로 신앙 되었던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그린 불화이다. 깊은 산과 골짜기를 배경으로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산신을 화면 가득 크게 그리고 시중드는 동자 2인을 오른쪽에 작게 묘사하였다. 산신의 왼쪽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산신도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또 의자에 앉은 초상화처럼 그린 것이 특징이다.
구성 및 형식을 보면 산왕(山王)으로 신앙되던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그린 불화로 산신과 시중을 드는 동자 2인, 쭈그리고 앉은 모습의 호랑이를 한 폭의 화면에 배치하였다. 화기를 통해 1903년(광무 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산신은 원래 『화엄경』에서 불법(佛法)을 외호하는 삼십구위 신중의 하나인 주산신(主山神)이다. 불교가 민간 신앙과 결합,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예로부터 산의 신령으로 믿어져 온 호랑이와 주산신이 결합하여 산신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까지 내려온 산신에 대한 신앙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민간 신앙과 결합하면서 산신 신앙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사찰에는 대부분 산신각을 세워 상과 불화를 봉안했다.
이 그림은 화면에는 깊은 산과 골짜기를 배경으로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산신을 화면 가득 크게 그리고 시중을 드는 동자 2인을 왼쪽(향우측)에 배치하였는데, 산신보다 동자가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다. 산신의 오른쪽(향좌측)으로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풍채가 좋은 백발의 산신은 파도문이 그려진 병풍을 배경으로 의자에 정면으로 앉아 있는데, 붉은색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망건을 쓴 모습이다. 오른손으로는 흰 수염을 만지며 왼손에는 흰색 부채를 들고 있다. 화기에는 ‘대한광무(大韓光武)’라는 대한제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봉영사를 돌아 나온 길, 푸른 하늘과 한옥의 멋진 풍경이 눈에 들어와 잠시 둘러 보았다. 양효제라 돌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정문 가까이 가서 보니 기계유씨 사당인 것같다.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감사히 봅니다
행복 하세요_()_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