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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의 부흥 11:19~26
19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안디옥 교회 11:27~30
27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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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헬라인에게도 예수님을 전하는데,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니 많은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파송한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가르칩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다. 흉년이 들자 제자들이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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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의 부흥 11:19~26
스데반의 순교 후에 일어난 박해는 복음이 확장되는 계기가 됩니다. 흩어진 제자 중 일부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릅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만 전도하다가 그중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머물던 사울을 데려와 함께 1년간 가르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수고로 안디옥 교회는 양적·질적으로 성장합니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리스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더 깊은 묵상
바나바와 사울의 동역은 안디옥 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내가 필요로 하는 동역자는 누구며, 그와 어떤 일을 함께하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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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안디옥 교회 11:27~30
안디옥 교회가 부흥해 갈 때 몇몇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옵니다. 그중 아가보가 천하에 큰 흉년이 들 것이라고 성령으로 예언합니다. 이 일은 실제로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주후 41~54년 재임) 때 있었는데,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주후 46년 전후에 흉년이 든 것으로 봅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에 사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부조(구제 헌금)를 모아 바나바와 사울 편에 보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는 주후 47년경으로, 사울에게는 두 번째 방문입니다(갈 2:1~10).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면서 이방 선교는 활기를 띠게 됩니다. 성도의 선행과 구제는 믿음과 구원의 증표입니다.
●더 깊은 묵상
안디옥 교회는 흉년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어떻게 도왔나요?
나는 어려움에 처한 성도 혹은 교회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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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받는 그리스도인
제 이름에는 ‘착할 선’(善) 자가 들어 있습니다. ‘관’(寬) 자는 너그럽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착하게 자라기를 원하신 모양입니다. 착함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원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 상태가 착함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그 본질 속에 담긴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착함이 드러납니다. 착한 삶은 착한 일을 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될 때 가능합니다. 가시만 돋아 누군가를 찌르던 나무가 열매 맺는 좋은 나무로 바뀌는 것, 그것이 참된 착함입니다.
그럼에도 착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은 교회에만 열심히 나옵니다. 착하지 않아서 더 열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회개해야 하고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하니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착한 삶으로 세상에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높이시고 사용하십니다. 귀한 그릇으로 쓰셔서 하나님 나라를 펼치게 하십니다. 목사가,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그리스도인이 착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일상에서의 삶을 착하게 살아갈 때 세상이 박수하며 그리스도인을 칭찬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착한 삶으로 증명됩니다(롬 14:18).
내 몸이 성전입니다 / 김관선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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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 19~20절
스데반의 죽음은 성도들을 흩어지게 하는 환난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신자들을 각지로 흩으셨고, 그들을 통해 복음의 확장이라는 선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삶의 고난이 성도의 마음을 흩어지게 할 수는 있지만, 흩어진 마음은 이내 신앙의 성숙함과 온전함이라는 복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복으로, 흩어짐을 확장으로 바꾸시는 전능자십니다.
자신의 삶과 소유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성도는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 폴 트립
오늘의 기도
하나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았던 안디옥 교회의 생명력이 저와 저희 교회를 통해 드러나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김으로 함께 주님의 몸을 세워 가는 아름다운 동역이 있게 하시고, 영혼을 향한 하나님 마음으로 선교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08 내 주의 나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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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더 많은 이들에게 주 예수를 전하게 하시고,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성실히 잘 감당해 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 그리스도인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의 자녀답게 세상 속에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 나가고, 온전히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만을 올려 드리는 삶이 되도록 하자
스데반의 순교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핍박으로 사람들이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이들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방인을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안디옥에 흩어진 크리스찬들입니다.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로 사용하십니다.
(안디옥 교회의 형성)
19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요즘에 목자님들 중에 테니스에 일가견이 생긴 분들이 있습니다. 테니스의 기본 자세를 익히는데 일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을 익히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회의 기본을 보여주는 좋은 모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원시적으로 실천한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의 기본적인 영성을 배우고자 합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1200리 떨어진 수리아 땅입니다.
스데반 핍박 후에 성도들이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왔습니다.
성도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헬라인에게 주 예수를 전파한 사람들)
20,21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의 사람 몇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로운 지성인이었습니다.
안디옥 교인들 몇몇은 지성인들에게도 어리석게 생각되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의 주님이라고 전하였습니다.
이름없는 몇 사람은 고정관념을 깨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방인에게 주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는 것과 같은 큰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창조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자 허다한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이들의 이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영웅이었습니다.
이들은 열 평 정도 되는 동굴에서 모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지시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처음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개척되었습니다.
생명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화려한 교회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을 때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를 통하여 세계를 정복하였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울대를 개척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계선교에 지원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모든 캠퍼스와 선교지가 믿음으로 개척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구원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 우직한 순종의 역사입니다.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서 상대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캠퍼스 선교는 어렵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신 성령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단순우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와 협력하는 예루살렘 교회)
2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안디옥 교회에 일어난 복음역사가 예루살렘에 전하여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을 통하여 이방인 선교를 마음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하여 돕고자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를 지지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가장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열린 마음의 사람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습니다. 아주 잘한 결정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연합하는 안디옥교회)
23,24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안디옥 교회에 파송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균형 잡힌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안디옥교회도 바나바를 영접하고 말씀의 종으로 세웠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개방적인 교회였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인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권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왔으면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이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붙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습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으려면 강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나바의 위로를 통하여 큰 무리가 주님께 더 돌아왔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연합하는 열린 교회였습니다.
(사울을 데리고 온 바나바)
25절을 보십시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안디옥에서 다소는 며칠 걸리는 거리입니다. 사울이 고향 다소에 가서 10년 이상 있었습니다.
사울은 헬라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헬라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능통한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에 교회를 핍박한 사울의 과거를 보고 사울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 고정관념이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현재와 미래를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사울을 소개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은 십 년이 지났습니다. 바나바는 지금 안디옥교회을 도와주다 보니 사울이 생각났습니다.
사울이 이곳에서 말씀을 가르친다면 잘 가르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믿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위대한 사도바울이 역사의 현장에 나왔습니다.
바나바는 믿음의 영웅을 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영웅을 알아보는 사람이 믿음의 영웅입니다. 바나바는 나중에 마가도 영접하고 마가도 키웁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소개시켜주고 자신의 이름은 점점 소멸됩니다. 그래도 바나바는 좋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시기하고 끌어내립니다.
이순신 장군도 시기를 당하여 백의 종군하였습니다.
다윗도 사울왕에게서 시기를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를 버려야합니다.
잘하는 사람을 박수쳐주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양성하고 사람을 키울 줄 알아야 합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선교를 지원할 뿐 아니라 본인이 직접 세계선교에 뛰어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크게 축복하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안디옥교회)
26저을 보십시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는 산을 넘어서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에 왔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바나바가 주가 되고 바울이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세우고 그와 함께 동역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가르쳤을 때 안디옥 교인들이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났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성숙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입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모셔야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천하에 든 흉년)
27-28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안디옥은 구제하는 교회입니다. 그들은 이제 막 개척된 교회입니다. 물질이 많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아가보라는 사람이 성령으로 천하에 흉년이 들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과연 글라우디오때에 로마가 다스리는 모든 세계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대땅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흉년이 든 것을 들었습니다.
(구제하는 안디옥교회)
29,3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제자들이 각기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이 똑같이 헌금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형편에 따라서 헌금하였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 장로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예루살렘 교회에 그들은 물질을 전달하였습니다. 구제는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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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중심 무대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주시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안디옥 교회를 세우시며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그 일들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큰일을 하시기 전에 바나바와 사울로 하여금 복음을 가르치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반응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어려움이 발생하자 그들은 구제 헌금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는 것은 기초가 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깊이 파야 합니다. 단단한 기초 없이 큰 건물을 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아감으로 튼튼한 기초를 세우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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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안디옥교회가 세워진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그리스도인
스데반의 순교 때에 많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특히 중요한 곳은 안디옥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Ac 11:19–20)
안디옥에 온 그들은 처음에는 그곳에서도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몇 사람이 순수한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곧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앞서 에디오피아 사람과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으나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소위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는 유대인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게다가 에디오피아 관리에게 전해진 복음이 개인에게 전해진 것이고 고넬료에게 전해진 복음이 집안 차원(가이사랴라는 도시의 특성상 복음이 확장되는 데 많은 제약이 있있을 것임)이었다면 이번에 안디옥에서는 이제 조금 더 큰 차원으로 교회차원의 이방인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였던 이들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Ac 11:21)
유명한 어떤 사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안디옥 교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소문을 듣고 이번에도 역시 일꾼을 파송하였습니다.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이르러 하나님이 안디옥 교회에서 하시는 일을 보고 기뻐하며 그들에게 이제 복음을 더 배우는 것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소로 가서 사울을 설득하여 함께 안디옥에서 가서 가르쳤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Ac 11:26)
일년간 열심히 가르쳤을 때에 안디옥 교회는 든든히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모이면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그들은 황제의 이름도 아니고, 귀족의 이름도 아닌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의 이름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어쩌면 조금은 멸시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은 것은 이제 교회 안에 유대인과 헬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인지 헬라인인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또한 유대교와도 구별하는 이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오신 메시야를 여전히 믿지 않는 과거에 메여있어 유대교가 되버린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2.예루살렘 교회를 도움
안디옥 교회는 둑건하게 세워져갔습니다. 안디옥은 이 당시 로마제국내에서 3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인구가 50만 정도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안디옥 내에서는 참으로 초라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이후에 이방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마 누가는 이곳에서 사도행전을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울은 안디옥에서 파송함으로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참으로 안으로 향하는 교회이기보다는 밖으로 향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바나바의 가르침을 잘 순종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으로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Ac 11:28–30) 유대지역(천하라는 표현은 로마제국내의 한 지역을 의미할 수 있음)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에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하지 않고 힘을 모아 도왔습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입니다. 이전에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하여 복음을 잘 가르쳤고 이제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의 경제적 어려움을 보고 경제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교회는 하나됨을 유지하여야 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돕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불모지였던 안디옥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잘 배웠고 또한 잘 나누어 주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사명을 아주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됩니다. 지금은 비록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안디옥 교회 가 중심이 되어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안디옥교회 같아야 합니다. 열심히 잘 배우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다른 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습니다. 그것처럼 오늘날 교단이라는 이름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앞에서 녹아져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교회의 이름이 녹아져 서로 다른 교회를 내교회처럼 돕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공교회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공교회성을 회복해야합니다.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공교회의 회복을 위해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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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사단은 스데반을 죽임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사단은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오히려 복음이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몇 가지 지명이 등장하는 데 이곳들은 상당히 의미 있는 지역들입니다.
첫째, 구브로입니다. 구브로는 지금의 키프러스입니다. 키프러스는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아름다운 섬나라이며 세계에서 가장 바다가 깨끗한 섬 중의 하나로 유명한 관광도시입니다. 이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 전도여행지가 바로 구브로였습니다. 바나바의 고향이었기에 그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하지만 복음 전파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레네입니다. 구레네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넘어지셨을 때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막 15:21-23). 하필이면 바로 그때 옆에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리비아 수도인 트라폴리 지방인데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먼 곳입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인 그는 그 먼 곳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한 달 이상을 걸어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우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결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한 구속 사업의 참여자가 된 것입니다(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그의 영향을 받은 구레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4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복음 전파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구레네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시몬은 잠시 졌던 십자가로 인해 큰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지는 십자가는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에 비하면 잠시 잠깐의 고통입니다.
셋째는 안디옥입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동양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수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이곳 안디옥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는데, 헬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폴로 신을 숭배하는 다프네 신전이 있어서 제사 때 성적 음란행위가 행해지는 곳으로 도덕적 타락이 심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 결과입니다.
오늘날 자유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안디옥처럼 우상이 난무하며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이 복음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그러므로 이 땅은 복음에 빚진 곳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이 잘나서 그곳에 복음의 전초기지가 세워진 것이 아니듯이 이곳 조선 사람들이 잘나서 오늘날 복음의 전초기지가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더욱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개척한 인물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평가는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의 자격 조건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 지도자의 첫 번째 조건은 믿음에 앞서서 올바른 인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의 첫 번째 자격조건은 인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지도자의 기본 베이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인품이 결여된 사람이 지도자로 섬기는 조직은 참으로 불행한 집단이 되는 것은 북한의 김정은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역사와 현실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지도자의 조건은 인품과 능력이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인품 외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믿음입니다. 믿음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이 있는 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드러나는 때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입니다(벧전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도 자신의 믿음이 어떤지 알려면 고난 가운데에서 자신이 어떠한 선택을 했었는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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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일로 인해서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했다는 이유로 베드로를 비난했다.
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성령님이 고넬료의 집에 임한
사건들의 이야기를 차례되로 상세하게 설명을 했었다.
모두가 듣고 비난하던 자들이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교회의 탄생에 대한 말씀이 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사도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행8:1)
이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도를 전했다.(19)
오늘날로 말하면 레바논에 해당하는 베니게와 구브로 섬과
그리고 수리아 안디옥까지 북쪽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한다.(20)
주의 손이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21)
박해와 핍박이 나쁜것 만은 아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 터이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고난이 축복이란 말씀이 이런 경우에 합당한 말씀인가 보다.
고난과 핍박이 심한 사람은 배짱도 그만큼 늘어나나 보다.
지금까지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한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복음이란것이 문을 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열려지면 홍수처럼 밀려가는 특성있나 보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것이 어려웠지
유대인에게만 전하던(19) 복음이 헬라인 에게도(20)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으로 물밑듯이 복음이 북진을 하고 있구나.
예루살렘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낸다.(21)
내가 좋아하는 바나바가 또 등장한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24)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24)
나도 바나바와 같은 사람 되길 소망한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간다.(25)
다소는 지금의 터키지방이다.
소아시아 남동쪽 지중해 해안에 있던 길리기아의 수도이다.
바울의 고향이기도 하다.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부터 족히 몇백 km는 간것 같다.
사울을 찾아서 안디옥으로 데려온다.(26)
바나바와 사울 둘이서 1년간 교회에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26)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26)
한 사람을 선택하려고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다소로
찾으러 가는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고
만나서 안디옥에서 1년간 동역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자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21)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울과 바나바가 동역하는 1년만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지금까지는 '제자들', '성도들', '형제들' '믿는 사람들'이라는 단어로 불렸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쟁이란 말과 비숫한 의미이지 않을까?
예수쟁이란 말을 들어 본지 오래인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의미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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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19절은 8:1절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이에 지리적, 문화적으로 복음이 어떻게 확장되는 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오늘날의 레바논에 해당하는 베니게와 구부로 섬, 그리고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퍼져나갔고 문화적으로는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 사울의 회심, 베드로를 통한 고넬료의 회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에 전해진 복음(19-20절)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인해서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8:1절에 의하면 이 때 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흩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행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교회는 문제가 없었고, 사람들은 모여서 행복했습니다. 사마리아와 땅 끝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터졌습니다. 교회는 큰 박해의 회오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교회에 떨어진 박해의 폭탄은 교회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복음의 불길이 폭탄처럼 퍼져나가게 했습니다.
도처에 산불처럼 번져나가는 복음의 불길은 사마리아, 에디오피아 내시, 이방인 고넬료,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박해는 이들을 실족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복음의 불을 품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들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의 10-11장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깨지고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탁교제를 나눈 사실에 대해서 할례자들이 힐난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감옥의 견고함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 베드로를 통해서 유대인 할례자들을 잠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또 뭐라고 합니까? 그 때 흩어진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에 흐르고 있는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의 감옥을 탈출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말씀 앞에 생각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탈출합니다.
고난을 뛰어 넘어
여러분! 이 사람들은 현재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8장의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은 이랬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흥왕하고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만 갔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만히 해결되었고 주님 안에서 사람들은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을 요구했지만 사람들은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박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이들을 강제로 흩으십니다. 사람들은 준비된 상태에서 스스로 판단해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다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피해서 그 동안 자신들이 일구어 놓았던 삶의 터전 전부를 포기하고, 심지어 직장과, 친구들까지도 뒤안길로 하고 도망친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아직 젊은이도 있었을 것이고 인생의 중반을 달리면서 안정권에 접어든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그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실향민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그렇게 흩어져서 내가 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신앙도 포기하고 인생도 포기한 채 황폐한 인생을 살았다면 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질도 직장도 거기다가 인생을 지탱해줄 확신도 없는 그야 말로 완전히 공허한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비록 환경은 사람들이 보기에 불쌍한 처지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가장 힘있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도란 지금 자신들이 처해져 있는 상황에 대해서 비관적이지 않고 지금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대해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음에 대한 반증이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전도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에게만 전했을 망정 이들의 믿음은 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아주 큰 것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 오히려 이들은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 믿으세요. 여기 참된 인생의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참된 메시아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가장 어려워야할 때 가장 힘 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저는 감히 이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삶의 자세를 견지했을 때 이들에게는 편안한 안주함이 주는 안락함 대신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이 기쁨을 아십니까? 주님은 그렇게 어설프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나바의 눈
21절에 의하면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증언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냥 몇 사람이 믿고 마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안디옥 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자초지종을 파악하기 위해서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에서는 아직 헬라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달가운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헬라파 유대인이라면 별 문제이지만 이들은 헬라인들입니다.
고넬료 사건 때도 이것이 비난 자들의 비난꺼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가 진상 조사 위원으로 파견된 것은 사실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파견 되었다기 보다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사실 때문에 파견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안디옥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가장 황폐한 시기를 맞이할 뻔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고
그 결실이 맺혀져 있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리고 그들과 함께 마음껏 기뻐했습니다.
무슨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지도자라고 그들에게 권위 의식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문제꺼리를 찾자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바나바는 문제꺼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저는 이것이 바나바의 위대함이라고 봅니다.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요, 은혜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바나바의 눈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상황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비판하고 불평하고 한담하고, 시기하고 하는 것은 스스로 인생을 황폐하게 만들어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고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은 삶의 평안을 구가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바나바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세상은 소망이 있고 내가 해야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다른 말하지 않았습니다.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굳은 마음은 확고한 믿음을 말합니다.
붙어 있으라는 말은 거하라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것 말한 것이 아닙니다. 확고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 거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참으로 바나바는 얼마나 긍정적이고 은혜로운 사람이었는지요.
저는 이런 바나바의 긍정적 사고방식이 그를 격려 자가 되게 하였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그의 이런 시각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외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입에 발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눈! 그의 사고방식이 긍정적이었습니다. 은혜를 보는 눈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의 강권함을 받아서 비록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생애는 좀더 긍정적이고 좀더 격려자의 눈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은 나와 다른 사람을 다 행복하게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인재를 보는 눈
그러나 바나바의 눈은 그렇게 격려의 눈, 긍정적인 눈과 함께 다른 눈도 있었습니다. 이 눈은 앞의 긍정적이고 격려자로서의 눈을 가졌기에 보였던 또 다른 눈입니다.
본문 25-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바나바가 혼자도 사역이 잘 되었습니다. 큰 무리가 주께 더했습니다. 목회는 순탄하고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25절에 의하면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다는 것입니다.
이미 바울이 다소로 내려 간지 근 10여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뇌리에 이미 사울이라는 이름은 잊혀진 이름입니다. 아무도 철저한 유대 주의자에서 극적인 회심을 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불태우는 사도 바울을 기억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는 너무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다소로 낙향한 사울은 잊혀진 인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 사람들이 많아지자 바나바는 사도 바울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소까지 내려가서 바울을 데리고 올라왔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바나바를 통해서 그를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다소에서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안디옥 교회가 흥왕하고 동역자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사울이었다는 것이지요.
다소의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이방인들이 많은 도시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을 찾아간 것은 얼마나 탁월한 판단이었습니까? 더구나 바울은 자신에게 비하면 얼마나 뒤늦게 예수를 영접한 사람입니까? 이 겸손과 판단력이 바울을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만들어진 시기는 바로 이 안디옥에서의 1년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안디옥에서의 아름다운 결실이 바울을 교회로 하여금 선교사로 파견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좋은 인격과 사람을 보는 탁월한 안목까지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목은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긍정적인 바나바의 시각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 사고방식이 사울이 가진 놀라운 은사를 보게 한 것입니다. 만약 바나바가 편협하고 독선적인 사람이었다면 결코 사울을 불러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 어떤 눈으로 상황을, 사람을 보느냐 하는 문제는 바나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끄는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사고방식이 준 선물
우리는 여기서 관찰을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바나바의 시각이 낳은 결과들을 좀더 묵상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24절과 26절,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4절에는 큰 무리가 더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설명할 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바나바의 눈은 단순히 그의 사고에만 머물러 있는 사변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삶이었으며 인격이었으며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바나바의 눈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바나바처럼 긍정적이고 격려의 말을 하는 사람으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할 때 그와 함께 있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하고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만나기를 꺼려할 것입니다.
26절은 뭐라고 합니까?
바울은 바나바를 통한 부르심에 응답하고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1년 동안 섬겼습니다. 가르쳤다는 단어를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사울이 다소에서 아무런 준비 없는 허송세월을 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찾습니다. 가르침이란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 본래적인 배경들에 주님을 아는 지식을 더 깊이 연구하고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안디옥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성심껏 교회를 섬겼습니다. 말씀을 신실하게 가르쳤습니다. 저는 이들이 한 사역을 한 마디로 가르쳤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에 주목합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사역이 중요합니다.
그런데요? 이제 막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한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은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저 입만 열면 예수 예수하니까 예수의 도당,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호칭이 생겼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안디옥 교회 사람들의 순수함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살았습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난 것은 이들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때 묻지 않은 배움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9절에 의하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이 어느 덧 성장했습니다. 얼마나 성장했습니까? 어려운 지체들, 형제들에게 물질의 도움을 펴는데, 힘대로 도울 수 있을 만큼 삶이 세워졌습니다.
이 사역의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저는 이 모든 결과의 시발점에 은혜를 보고 기뻐하는 바나바의 긍정적인 모습이 있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흩어진 사람들의 전도를 보면서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눈을 통해 긍정을 보고 격려할 줄 아는 눈을 배웁니다.
인재를 알아보고 세워주는 귀한 눈을 발견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자신이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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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 이후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로써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이방 선교를 위한 토대가 마련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0~24절 안디옥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적극적으로 지원하십니다. 복음은 한 사람에서, 한 집안으로, 그리고 더 큰 무리로 뻗어 나갔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브로 출신 사역자 바나바를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 바나바의 사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심중에 품으신 교회의 모습이 복음에 헌신된 일꾼들을 통해 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뿌리는 그 어떤 작은 걸음도 결코 묻히는 법이 없음을 기억합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9,20절 선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 박해의 중심지로 변하자, 신자들은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생명의 위기를 경험한 그들이었지만, 결국 신자는 복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가운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관행을 깨고,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후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탄생을 통해 작은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열매를 맺고 번성하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25,26절 안디옥 교회가 더욱 부흥하자 바나바는 바울과 공동 목회를 시작합니다. 그 결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의미 있는 결실도 거두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완벽한 자가 없고, 교회 역시 불완전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를 인정하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간다면 선을 이룰 것입니다. 올 한 해도 공동체 안에서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도록 힘씁시다.
27~30절 안디옥 교회는 큰 흉년이 오리라는 아가보의 예언을 지나치지 않고, 십시일반 힘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 합니다. 구제에 동참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려운 공동체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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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되어가는 하나님 나라...-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갑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가 세워집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하여 더욱 굳건하게 하며, 다소에 있던 사울을 불러와 함께 사역을 해 나갑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안디옥의 성도들이 각각 그 힘대로 부조를 보내기로 하고, 바나바와 사울을 보냅니다.
_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19~21절).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과 박해로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만 전하였습니다(19절). 아직도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개방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님에 관한 복음 전했습니다(20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21절)... 이방인 선교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였다 흩어진 성도들은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참되게 살아가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아름답고, 건강하게 세워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떠들썩거리지 않더라도 묵묵히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본연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전파되어 나아갑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복음의 빚진 자로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흩어진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_ 준비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22~26절).
안디옥교회의 부흥과 특별히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냅니다(22절). 이방 종교의 중심지요, 상업의 중심지였던 안디옥에 몇몇 성도들의 복음 전파로 인하여 이방 선교의 중심 교회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 교회에 충만함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 은혜를 더욱 견고하기 위하여 권면합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23절).
사역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며 말씀과 기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며 사역을 감당해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와 성도를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은 이 현실에서 주의 은혜를 굳게 붙잡는 사람만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작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24절)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갖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신앙과 인격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사울을 데리고 와서 동역하여 교회를 세워가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25~26절).
사울은 고향인 다소로 가서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영적으로 충분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가 되어 바나바를 통해 본격적인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로 파송된 바나바가 성도들에게 권면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전도자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_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27~30절).
‘그 때에’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있을 때, 선지자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습니다(27절). 그 중에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큰 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했고,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안디옥의 성도들은 각각 자기 형편대로 헌금하여 유대에 사는 형제들을 돕기로 결정하여, 구제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 편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28~30절).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가르침에 힘입어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를 구제와 선행으로 실천에 옮김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늘 복음의 빚진 자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답게 나보다 남의 형편을 먼저 살필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 착한 행실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성숙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아가보의 예언대로 흉년를 맞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도 행함과 실천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11:19~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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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고 하면 예루살렘교회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여 하루에 수 천 명씩 주님께로 돌아오는 교회를 꿈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면 예루살렘교회 보다 더 모범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안디옥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안디옥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첫째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교회였습니다.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스데반이 순교하자 예루살렘교회에 극심한 환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빌립과 같은 경우에는 사마리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흩어진 사람들이 누구에게만 복음을 전합니까? 안디옥까지 이르렀는데,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환난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 환난 주신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이방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 즉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이 바로 안디옥교회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안디옥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안디옥까지 와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도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환난을 주시는가를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환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환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난이 있을 때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합니다.
이번 주에도 이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또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또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경과 공동체와 기도와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둘째, 안디옥교회은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온다는 소문을 듣고 안디옥에 바나바를 보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보냄을 받고 어떻게 합니까? 23절입니다.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통해서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합니다.
예루살렘교회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는 능력의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하루에 몇 천 명씩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눈에 보이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착하다고 하는 것이 단순히 인간적으로 착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착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성령이 충만한 결과로 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믿음이 충만한 결과로 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인격적인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사람의 변화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한 결과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우리는 성령충만라고 하면 큰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소위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 사역자들 중에서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진정한 믿음 충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령 충만은 그 사람의 인격에서 나타나야합니다.
진정한 믿음 충만은 그 사람의 인격에서 나타나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바나바와 같이 착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착한 사람으로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25절과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를 통하여 큰 무리가 주님께로 돌아오니까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갑니다.
당시에 바울은 회심하였지만, 초대교회에는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잘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누구를 찾아갑니까? 바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둘이 교회에서 큰 무리를 가르칩니다. 이때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여기서 보시면 안디옥교회는 토박이 성도와 새로 온 성도 간에 구분이 없습니다.
또 바나바와 바울 간에 주도권 다툼도 없습니다. 모두 함께 협력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나바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나바는 성령 충만함으로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질투하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새로운 사람이 와도 견제하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오히려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에 잘 적응하도록 곁에서 잘 도와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왜 안디옥교회에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하여졌습니까?
바나바와 같이 착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왜 안디옥교회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까?
바나바와 같이 착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람도 받아주고 그와 함께 사람들을 말씀으로 훈련하고 잘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안디옥교회에 있었던 바나바와 같은 착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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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11:19-26)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흩어진 성도들은 멈추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특히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성도들은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심으로 교회는 더욱 성장합니다.
한편, 예루살렘 성도들도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해 지도하게 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는 이방인 성도들을
온전히 양육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된 사역자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또한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다소에 있던 사울에게 동역을 제안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한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란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다.
- 묵상 질문: 안디옥 교회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안디옥 교회의 보은(11:27-30)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들이 안디옥을 방문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사역을 보고 예루살렘 교회도
더 적극적으로 사역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박해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한 흉년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임합니다. 이 흉년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힘든 현실에 놓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은혜를 갚기 위해 ‘각각 그 힘대로’ 부조를 보냅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며(갈 6:2), 복음을 위해 더욱 온전히 세워져 나갑니다.
- 묵상 질문: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워지자,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나요?
- 적용 질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이나 기관을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요?
오늘의 기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제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모든 순간 깨어 있게 하시며,
오늘 만나는 사람들이 저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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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 강림 당시 가장 멀리 아프리카 북부인 구레(Cyrene) 지역을 포함한 각지에서 온 유대교 사람들은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였고(행 2:10) 스데반의 순교 당시 그를 대항했던 자유인의 회당에도 이와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다수(행 6:9) 회심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예루살렘의 박해가 시작되자 각지로 흩어져서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박해로 인해 다소로 피신하고,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역들을 감당하는 10여 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명을 감당할 교회를 안디옥에 세우시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로 하여금 돌보게 하였고
그동안 준비시켜둔 사울을 그곳으로 초청해 전심으로 그곳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 전역에 찾아온 기근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모교회를 돕게 되었고 복음의 물결이 멈추지 않게 하는 중요한 통로로 쓰임 받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이와 같이 멈추지 않고, 멈추게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의 열심과 구원의 역사를 새로운 곳에서 변함없이 이어가게 하십니다.
누구나 절망 가운데 놓여 어떤 도움의 손길에도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이미 먼저 역사하시고 때에 따라 은혜를 부어주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변하지 않는 생명과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성령 충만한 도구로 쓰임 받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넬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을 알게 된 제자들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안디옥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과 성령 없는 사람은 보는 것이 다릅니다
성령 없는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잠28:22)
그러나 바나바는 성령 충만하니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보였습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행11:23)
바나바는 어떤 편견도 없이, 누구도 외모로 보지 않고, 출신이 어떠하든, 병든 자든 건강한 자든 상관 없이 오직 그 사람 안에 있는 주의 은혜만 보는 영의 시력이 밝았던 것입니다
또한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안디옥에 데려 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바울 안에 있는 은혜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갈2:9)
그때 안디옥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되었고,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더욱 성숙하여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부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자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가 합력하여
복음을 온 땅에 힘 있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기 원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삼상16:7)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으로 밝아지기 원합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나이다"(시13:3)
눈이 밝아져 온 몸이 밝아지기 원합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그래서 우리의 삶이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이 항상 밝아지기 원합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눅11:35~36)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그리스도인다운 섬김” 김승수 목사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이 핍박을 당하면서 더 넓은 지역까지 교회가 세워지고 말씀이 전파됩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함께 하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복음의 생명력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고 살아 넘칩니다.
하나님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을 통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도 복음의 열정을 하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냅니다.
바나바는 그곳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큰 무리들이 바나바를 따르며 주께 더하여집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 안디옥에 데리고 옵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세우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함께 동역을 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그 곳에서 교회에서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은 비로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일컬음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자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섬김과 나눔을 이루어갑니다.
오늘 하루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으로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며 이웃을 섬기며 나누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에게 복음의 열정을 주셔서
어디에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격려하고
축복하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늘 성령으로 충만하며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게 하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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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돌보시고 이끄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굳게 붙들고
주어진 모든 일에 담대하게 걸어가는
성령 충만한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변하지 빛이 되어주심을 믿고
겸손과 충성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발걸음을 지켜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자연재해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모든 악한 것들과 불순종을 버리고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 받는
주님의 거룩한 족속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