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5315.html
[시론] 괜찮아, 도와줄게, 같이 해보자 / 이승욱
이승욱 ㅣ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코로나의 성동격서인가? 코비드19의 창궐은 짐작하지 못한 곳에서 비극을 만들어...
www.hani.co.kr
코로나의 성동격서인가? 코비드19의 창궐은 짐작하지 못한 곳에서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격리 상태를 감수해야 했던 시기에 특히 여성의 자살률이 현저히 늘어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 상태로 간다면 올해 안으로 여성 단독 성별 자살자 증가 숫자만으로도 코로나 사망자를 넘어설 수도 있겠다. 헛갈릴 수 있는 설명이니 수치를 말하자. 작년 3월과 4월의 여성 자살자는 각각 295명, 285명이었다. 그런데 올해 3월과 4월은 346명, 336명이니 두 달 모두 50여명씩 늘었다. 그러다 다시 6월에 40명 정도 증가하는데, 남성 자살자 수는 1월부터 계속 꾸준하게 감소하고 있다.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아직 올해의 7월 이후 통계 수치를 발표하지 않아서 더 지켜봐야겠지만, 코로나의 확산 추이에 따라 여성의 자살 증감이 연동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코로나를 제외한 다른 특별한 사회적 주제가 없는 상황에서 특정 집단의 자살 증가율이 전년 대비 17%를 넘는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같은 동유럽 나라들 덕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의 오명을 잠시 넘겨줄 수 있었으나, 그들은 계속 자살자 수를 줄여 나갔고 어느새 한국을 다시 자살률 1위 국가로 만들었다. 이 나라에서는 매년 적어도 1만4천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지난 9개월간 모두가 사력을 다해 코로나에 대항한 결과, 사망자를 400명대로 막았다. 그런데 자살로 열흘에 400명을 떠나보내는 셈이다.
모두들 짐작하다시피 자살자의 유가족들은 어디에서도 쉽게 망자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인을 숨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은폐되기 십상이다. 국가 입장에서는 감사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거리에 들고나와 떠들지 않으니, 그냥 이대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 여성의 자살 문제에 집중해 보자. 세상의 모든 험한 곳, 그 밑자리에는 여성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밑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장애인 밑에 여성 장애인이, 성소수자 밑에 여성 성소수자가 있다. 존 레넌은 “여성은 세상의 깜둥이다”라고 했다. 그 ‘깜둥이’ 밑에도 여성이 있다. 일상은 비대면의 정상화로 모두 격리되고, 일자리와 미래, 인간관계는 모두 흔들리는 불편함으로 잠자리를 깨운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세상, 그곳의 가장 밑자리에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취약함을 죽음으로 드러내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 명했다. 절망은 필연적으로 외로움과 소외라는 요건을 포함한다. 우리가 분명 기억해야 할 것은, 외로움으로 인한 상처는 말 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발생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이 인류의 재난 앞에서, 국가와 어른들이 해야 할 임무가 하나 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힘들고 두려운 이들을 모두 지키고 보살피는 보호의 임무다. 재난의 순간에도 보호자는 필요하다. 그리고 보호받아야 하는 이들은 선별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보호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국가는 사회보장제도를 더 조밀하고 세심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이들이 국가에 남기는 유언이다. 코로나바이러스만큼이나 코로나 블루, 코로나 자살에도 국가가 더 많은 관심과 예방 대책을 세워달라.
그리고, 이 고난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말 한마디가 무엇인지 적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의 바람을 모아 보니 이 세 마디였다.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해 보자!” 힘겨워하는 모두가, 모두에게 이 말을 전하자.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5434
참세상 :: 영원한 지금을 바라는 이들에게
통념을 더욱 단단히 굳히려는 교육 곁에서는 다만 생명을 도구 삼아 체제를 유지하려는 재생산만이 가능할 뿐이다. ‘생명’들에게 아무런 자리도 내어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재생산이란 말 그대로의 재생산, 그러니까 지금의 반복일 뿐이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내일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지금만이 욕망된다.
www.newscham.net
“사회통념에 맞는 교육”
지난 8월 초, 몇몇 초등학교에 ‘외설적’이고 ‘반사회적’이며 ‘포르노 같은’ 책들이 들어갔다. ‘나다움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의 사업으로 여성가족부가 민간 기업, 단체와 함께 배포한 책이다. 그 일부를 문제 삼아 사업 폐기, 여가부 해체, 장관 사퇴 등을 외친 이들은 외설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했지만 실은 이미 널리 읽히고 호평 받는, 또한 여러 차례의 심의를 거쳐 선정된 성교육 도서들이었다. 이들은 성관계나 자위를 묘사하거나 성별에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다고 쓴 대목을 트집 잡았다. “동성애 자체, 동성혼 자체를 미화하고 조장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어서 많은 우려가 있다”는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 김병욱 의원과 보수 단체들의 항의에 여가부는 빠르게 해당 도서들을 회수했다.
같은 달 말, 울산시 교육청은 성희롱·성폭력 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번에는 그중 하나로 제시된 성교육 패러다임 전환, 국제 표준에 부합하고 실효성 있는 포괄적 성교육 실시 계획이 트집거리가 됐다. 울산시교원총연합회(울산교총)는 포괄적 성교육이 “동성애 행위를 정상의 범주로 가르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했다. 울산교총은 “정제되고 사회통념에 맞는 교육으로 실시해야 하며 (…) 초, 중등 시기에는 성에 대한 인성교육에 초점을 두어야 하고, 성인에 가까워지는 고등학교 시기에 구체적인 성에 대한 내용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반사회적이지 않은, 사회통념에 맞는 교육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그들은 지금의 사회를 어떻게 경험하고 상상하고 있는지 말이다. 울산 교육청의 종합대책은 울산의 한 초등교사가 학생과 동료 교사들에게 성희롱 발언 등을 일삼아 온 것이 알려진 후 마련됐다. 그 토대가 된 실태조사에서는 울산시 교직원의 10% 가까이가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으며 그 절반이 참고 넘어갔다는, 공식적인 문제제기는 3%에 못 미친다는 결과가 나왔다. 내가 아는 한 지금의 사회란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통념을 바꾸어야 할 사회다. 교총과는 정반대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울산지부는 논평을 통해 종합대책 수립을 “성비위 사건을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지 않고 자성과 변화의 계기로 삼은 것”이라 평했다. 또 성폭력 예방 및 처벌 강화 조치는 물론 “우리 사회의 공고한 성차별과 성폭력적 문화를 거부하며 ‘한 명의 소수자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교육”으로서의 포괄적 성교육에도 환영과 지지의 뜻을 밝혔다.
교육과 재생산
꼭 이런 사건과 통계를 들지 않더라도, ‘사회통념에 맞는 교육’이란 언제나 의심스럽다. 지금껏 이 세계를 거쳐 간 그 누구도 이상적인 사회를 살아본 적 없음으로, 사회는 언제나 조금씩 변화함으로, 교육은 필연적으로 사회통념을 벗어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얼마만큼을 벗어나건, 적어도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교육이라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 본령일 것이다. 어떤 변화와 어떤 실험을 시도할지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는 있다 하더라도, 무작정 사회통념에 맞아야 한다고―혹은 미화된 과거를 회복해야 한다고―말하는 것만큼은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뜻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두 가지다. 교육에 관심이 없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지금의 사회가 너무도 마음에 들거나.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올바른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이러한 위험한 방향성에 대해 울산교총은 강력히 반대를 표명한다”는 말에서, 둘 중 어느 쪽을 읽어내도 어색하지 않다.
이런 말들 곁에 “가족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성교육”에의 요구가 나란히 놓인다. 한편으로는 임신·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쾌락을 추구하는”) 성관계를, 다른 한편으로는 곧 존치 시효가 끝나는 형법 낙태죄 조항을 염두에 둔 말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더 나은 삶을 위한 교육에의 관심이 일천한 것과 마찬가지로, 태어났거나 태어날 이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고 짐작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통념을 넘어 비로소 가닿을 수 있을 안녕에 관심을 두지 않고서 삶을 소중히 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어떤 이들의 불행을 묵살하고자 하는, 어떤 이들의 고통을 그저 거름으로 삼아 굴러가고자 하는 사회에서 생명은 비천한 곳에 머문다. 통념을 더욱 단단히 굳히려는 교육 곁에서는 다만 생명을 도구 삼아 체제를 유지하려는 재생산만이 가능할 뿐이다. ‘생명’들에게 아무런 자리도 내어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재생산이란 말 그대로의 재생산, 그러니까 지금의 반복일 뿐이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내일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지금만이 욕망된다.
영원한 지금을 바라는 이들에게
사회통념에 맞는 올바른 가치관으로 지금의 사회를 지탱하는 이들, 출산하는 가족만을 도모하는 이들이 누락하는 것이 있다. 지금의 영원한 반복만을 도모하는 이들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는 오히려 지속에 반대하는 이들, 반복을 거부하는 이들에게서만 가능하다. 이곳에 미래가 없다면 그것은 건전한 풍속이 무너져서도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서도 아닐 것이다. 지금에 반대하고 다른 삶을 모색하는 시도들을 차단했기 때문, 낡은 풍속만을 지켰기 때문, 출산으로든 이주로든 혹은 변화에의 다짐으로든 이곳에 새로 등장한 이들에게 아무런 자리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새로 나타날 이들은 어차피 내어주는 자리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므로, 어떻게든 무너뜨리고 새 터를 닦을 것이므로, 영원한 지금을 바라는 이들은 상상하지 못할 미래를 우리는 마주할 것이다. 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일굴 미래다. 이 글은 쓰고 있는 지금은 9월 28일 국제 ‘안전한 임신중지의 날’(International Safe Abortion Day)을 며칠 앞둔 시점이다. 2017년 이날 한국에서는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출범했다. 여전히 ‘낙태를 조장’하고 ‘생명을 경시’한다는 비난을 받는 이들이 당시 출범 기자회견문을 맺은 문장들을 다시 한 번 새겨 본다.
“진정 생명을 그토록 소중히 여긴다면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과 태어날 아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일에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