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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3954년(1621) 인도양 심해
408잠수함이 인도 고아항에서 3일째 매복해 있다가 고아항을 떠나는 포르투갈의 상선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인도양에 진출한 400잠수함 전대는 모항을 자카르타에 두고 인도양 심해를
돌아다니며 포르투갈선박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목표가 항로를 변경합니다. 바람을 옆에서 받고 해류를 이용하려는 듯 합니다.
아프리카 해안으로 접근합니다.”
포르투갈 상선들이 북위 15도 금방에서 방향을 남쪽에서 서쪽으로 틀어 홍해쪽으로 움직였다.
이곳 바닷길에 정통한 선장이 타고 있는 듯 상선들은 범선이 낼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이동했다.
바람과 해류를 이용하며 항해를 하는 표적은 범선 항해의 교과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증속 9노트.”
상선대가 408함에서 멀져지자 거리를 좁히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해안가로 붙으면 생존자가 해안가로 떠밀려갈 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 해치운다.”
함장은 자신이 목표로 삼은 상선대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408함은 탄두 50킬로그램의
경어뢰 피라미 15발과 중어뢰 5발을 탑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피라미는 유럽의 범선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어뢰로 개발되었다.
충격신관을 장착한 무선유도 피라미 어뢰는 사거리가 3킬로미터를 넘지 않았다.
범선을 잡는데 중어뢰를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중어뢰는 적 항구를 공격하는데 안성맞춤인
어뢰로 파괴력이 피라미의 8배고 사거리도 10킬로가 넘었다.
“현재시간은 ?”
“17시30분 입니다.”
“증속 13노트 089방향으로. 심도 100미터. 적들을 우회하여 예상지점에서 기다린다.
앞으로 두시간 후 공격한다.”
함장의 명령에 함이 방향을 남서쪽으로 틀어 수심 100미터까지 내려갔다.
408함이 상선대 바로 밑을 통과하여 앞질러 나갔다.
“잠망경 올려”
408함이 공격지점을 정하고 상선대를 관찰하기 위해 잠만경을 올렸다.
목표물에 등불을 달았는지 불빛이 출렁이며 점점 408함으로 다가왔다.
“부상.”
뜻밖의 명령에 부장이 함장을 쳐다보았다.
밖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육안 관측이 될 수도 있었다.
“함장님 부상하면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 확실한 공격을 위해서 눈으로 보고 공격하겠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 견시병을 배치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하지.”
408함이 수십초만에 본체를 수면위로 들어내자 해치가 열리고 수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명의 수병이 25미리 기관포를 선체에 부착된 거치대에 거치하기 위해 들고 달려갔고
탄 박스를 든 수병이 그 뒤를 따랐다.
선체에 올라온 지 불과 일분만에 25미리 기관포가 조립되어 설치되었다.
25미리 기관포는 포신,포체, 포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잠수함 선체에 부착된 판에 포반을 연결하면
360 회전이 가능했다. 기관포가 설치되고 장전이 되자 선임자 인듯한 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25미리 기관포는 최대 사거리 5킬로 유효사거리 2킬로미터를 자랑하지만
해군에서는 표적이 일킬로미터 이내에 들어오지 않으면 발포하지 않았다.
육지와는 다른 환경 때문에 유효사거리 2킬로를 충분히 활용할 수 없었다.
“포장완료.”
기관포 설치를 기다리던 부장이 포장완료를 함장에게 보고하자 함장이 무장과 함께 올라왔다.
“이쯤에서 공격하는 것이 좋겠군. 1번에서 8번까지 피라미 어뢰 장전”
수평선 너머로 너울거리던 불빛들이 제법 가까이 다가왔다.
“발사관 주수 후 대기.”
“주수 완료.”
“무장 항로 계산해서 잘 해보라구.”
함장은 무장에게 이번 공격권한을 넘겨주었다. 무장이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적 상선과의 거리. 예상 항로를 예측하여 적정 공격방위를 설정했다.
“좌현으로 2도 수정”
무장의 명령에 함이 약간 움직였다. 가늠자와 비슷한 자를 꺼내 다시 한번
발사방위를 확인한 무장이 어뢰 발사명령을 내렸다.
“1번 발사”
“펑”
잠시후 좌현에서 어뢰가 튕겨나오더니 긴 항적을 만들며 헤엄쳐 갔다.
“2번 발사, 우현 1도 수정. 5번 발사”
“펑펑펑”
순차적으로 5발의 어뢰가 발사되었다. 견시병들이 어뢰가 만들어내는 항적을 쫒다가
표적과 합쳐지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바닷속에서 터진 어뢰는 목표물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 한 듯 보였다.
수초후에 다섯 발의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와 함께 함이 가볍게 떨렸다.
“꽝 꽝 꽝”
“6번부터 8번까지 연속 발사”
폭음이 들려온 것과 동시에 3발의 피라미가 연속 발사 되었다.
어스름한 저녁무렵 모두들 저녁을 먹고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있던 선원들은
갑자기 선체 밑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피라미 공격을 받은 배는 바닥이 침수되어 침몰하기 시작했다.
10척의 상선대를 이끄는 선임 선장 브란다오는 세인트 프린세스호 갑판으로 나왔다.
주위는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든 선원들이
브란다오가 있는 함으로 헤엄쳐 왔다.
“보트를 내려서 조난자를 구조하고 함을 사고지점으로 빨리 몰아.”
브란다오는 선단 앞쪽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거대한 암초가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 길을 지나다닌지 벌써 5년이 넘은 그로서는 그럴리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주위의 다른 배들도 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프린세스호에서 내린 보트가 사고지점에서
조난자를 끌어 올릴 무렵 다시 한번 3번의 폭음과 함께 물기둥이 솟구쳤다.
“이런 이건 누군가가 우릴 공격하는 거다. 전투배치. 전투배치.”
브란다오는 남쪽에서 다가오는 긴 항적을 발견하곤 소리쳤다. 한동안 정신이 없던 선원들이
브란다오의 명령에 갑판과 하갑판에 있는 포를 끄집어 내 장전을 서둘렀다.
총 30문의 포가 장전을 마치는 데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정작 발사할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포 주위에서 발사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포수들이 브란디오를 바라보았지만
그도 뭐가 뭔지 알 수 없기는 마찬 가지였다.
단기 3955년(1622) 5월 여의도
공군성은 자체적으로 여의도의 모래벌판을 완전히 정리하여 약 이천만평의 부지를 마련하였다.
이 부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우주항공을 연구하는 대단위 연구센터를 건설했다.
아울러 공군성을 여의도로 이전했다. 새로운 항공기 설계 및 제작, 통신위성, 발사체 연구,
탄도탄 제어 연구등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한쪽 귀퉁이에 항공기상청 연구소가 자리잡았다.
여의나루에 항구가 건설되어 오천톤 이하의 선박이 접안 할 수 있었고, 마포대교가 놓여져
서울과 연결했다. 상주인원 삼만명이 불철주야 연구와 연구만을 거듭했다.
고속엔진 연구소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연구소는 새벽까지 불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좀 쉬었다 하자. 벌써 몇 일째야 이거 미치고 환장하겠네.
야 나 이러다 각시한테 소박맞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아님 너랑 바람난 줄 알겠는데.”
이제 겨우 27살인 소찬기 연구원은 새벽까지 자신과 공기 흡기구에 대한 실험을 제어하기 위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소미 동기를 바라보며 농을 걸어왔다.
“말 나온 김에 우리 바람이나 피울까 ? “
이소미가 어깨 끈을 살짝 내리며 유혹하는 몸짓을 해 보였다.
“아서라 그러다 줄 초상난다. “
“하긴 대머리를 누가 좋아한다고. 있을 때 마누라에게 잘해라.
그 나이에 주변머리도 없으니 소박맞으면 누가 구제하겠냐 흐흐흐”
내려진 어깨끈을 들어 올리며 그녀가 소찬기를 놀릴때면 항상 쓰는 단골 메뉴인 대머리를 들먹였다.
“그러는 너는 그 나이 될 때까지 연애한번 해봤냐.
못생긴 것이 까불고 있어 웃음소리는 꼭 오뉴월에 서리 내릴 것 같아 가지곤.”
“너 말 다했어 ? 나 그냥 가버린다.”
이소미가 눈을 치켜뜨며 협박하자 금세 소찬기가 살살 빌었다.
이소미가 없으면 자신의 연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안. 미안. 미안 요놈의 입이 문제지”
소찬기가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소미의 눈치를 살폈다.
이쯤하면 풀릴만도 한데 반응이 없었다.
“흥! 그래도 어림없다. 나 간다. 혼자서 열심히 해봐라”
이소미는 소찬기 꼬임에 빠져서 4일째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연구에 매달려 있었다.
울고 싶은 데 빰을 때리니, 때는 요때다 하곤 연구실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삼만 마력의 출력을 내는 엔진을 개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벌써 소찬기팀장을 비롯한 10명의 팀원이 일년동안 매달렸지만 이제 겨우 고속엔진에서
가장 요구되는 3가지 성능 중 하나만을 해결했다. 그나마 공군성에서 연구용으로 헤리어기에서
떼어낸 엔진을 제공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공군성에서는 그들에게 엔진의 추력이 중량에 비하여 클 것, 전면(前面) 면적당 추력이 클 것,
연료 소비율이 적어야 할 것등 아주 구체적인 요구를 해왔다.
“같이 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은 소찬기가 연구실 문을 나서자 연구실 문이 저절로 잠기며 안의 불이 꺼졌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소찬기는 마포대교를 걸어서 넘어가야 했다. 여의도에 주거지역이 마련되어
있긴 했지만 그의 부인은 여의도에서 사는 걸 극구 반대했다.
건물을 나오자 이소미가 삼발이 자전거에 시동을 거는 것이 보였다.
“같이 가자”
“다리에 힘좀 길러라. 그래야 사랑받지”
이소미는 달려오는 소찬기를 뒤로하고 자전거를 출발시켰다.
달려오던 소찬기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소미는 자전거 엔진소리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대륙에 걸쳐있는 광대한 제국, 터키제국이 1617년 아흐메트 1세가 죽자
격렬한 권력 쟁투에 휩싸였다. 무스타파 1세와 훗날 무라도4세가 되는 그의 어머니간에 벌어진 내전은
터키제국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더욱 심화 시켰다.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 모든 이슬람국가의 맏형을 자처하던 터키제국은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면서
발생한 기독교도와 이슬람간의 종교분쟁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무라도 1세때 기독교도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창설된 신군(新軍) 예니체리가
언제나 그 내란의 중심에 있었다.
터키제국에 정복된 기독교도 중에서 장정을 징용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엄격한 훈련을 실시한
다음 술탄의의 상비 친위군에 편입시킨 것이 시초가 된 예니체리는 결혼 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시켰으나, 높은 금료를 받고 고위 ·고관에 영전하는 등용문이었으므로 자기 자식을 지원시키는
기독교도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는 예니체리의 모든 장병들이 기독교도의 자식들로 채워졌다.
이전 세기의 정복전쟁에서 많은 무공을 세워 투르크병의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그들의 존재는 궁정 친위 군단으로서 제국의 술탄이 되고자 하면 꼭 장악해야만 하는
핵심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어 버렸다.
이스탄불의 어느 저택 안
“어머니 전 두렵습니다.”
“무엇이 두려우냐 너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이 어미가 다 알아서 할 것이야.
걱정하지 말아라. 일이 잘되면 넌 대한제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거라.
네가 돌아왔을 쯤이면 모든 것이 다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
“하자만…”
이제 겨우 10살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내아이는 인자하게 생긴 젊은 연인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눈과 마주치자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그때 하녀가 들어왔다.
“마님 무할라비장군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귀빈실로 모시도록 하여라.”
“네 마님”
“애야, 너는 너의 방에 들어가서 코란을 읽고 있도록 하여라”
하녀가 총총히 사라지자,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다정히 말했다. 무할라비장군은 응접실에서
하녀가 내온 야체쥬스를 마시다 말고 응접실로 들어서는 술타나 타르한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부군을 잃고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몇 년을 산 그녀의 온 몸에서 정숙함과 함께
요염함이 베어 나왔다.
“축하 드립니다. 장군 이번에 예니체리를 맡으셨다 들었습니다.”
타르한이 얼굴에 함박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다 뒤에서 힘써주신 덕분입니다.”
그는 앞에 있는 타르한의 야심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끊임없는 왕권 다툼으로 무스타파 1세가 즉위한지 4년만에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고
다시 정권을 뒤엎은 해가 올해였다. 그 쟁투속에서 타르한은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술탄 칼리프에 오르게 하기 위해 가문의 전재산을 쏟아 부어 유력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였다. 대한제국에서 그녀를 밀어주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하였지만 자신도 그녀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라 허물을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장군께서 그저 터키제국을 키워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황제께서는 안녕하십니까 ?”
“요즘 심기가 편치만은 않으십니다. 아직 정국이 어수선하고 지방에서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어서 한시도 웃으시는 적이 없습니다.”
무할라비의 말에 타르한은 야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군께서 궁전 친위군을 맡으셨으니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
제 방에 음식을 마련하였으니 올라가시지요. 드릴 말씀도 있고”
아무리 과부라지만 외간 남자를 침실로 들이는 것은 상식을 뛰어먹는 일이였으나 무할라비는 아무런
거림낌 없이 타르한의 뒤을 따라갔다. 오래 전부터 당연하게 그래 왔던 것처럼.
소년은 코란을 읽고 있다 어머니가 방으로 올라가시는 소리를 듣고는 자신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가끔 집에 찾아오시던 아저씨 한 분이 어머니 뒤를 따라 올라갔다. 어머니는 무엇이 좋은지
마냥 웃으셨다.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던 환한 웃음을 어머니는 연신 그 아저씨에 보내고 있었다.
“호호호”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게 되자 소년은 방문을 닫고 읽다 만 코란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딴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는
아저씨를 친 아버지처럼 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른 침을 삼킨 소년은 탁자 위에 놓여진 물병을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다 마셨는지 물병에서 두어 방울의 물이 떨어졌다.
“하짐 ? 하짐 ? “
소년은 시종을 불러 물을 가져오게 시킬 참이었지만, 몇 번을 불러도 하짐이 나타나지 않았다.
평소엔 항상 곁에 있었는데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집에 어머니를 찾는 손님이 오시면
하짐은 어김없이 사라지곤 했던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 내려가서 하산에게 물어봐야겠다.’
소년이 일어났다. 그의 방은 일층 응접실 맞은편 보도 맨 끝에 있었다.
그의 침실은 이층에 있었지만 잠을 잘 때 말고는 항상 일층에 내려와 있었다.
일층 방은 하인과 하녀들이 들락거리는 후문과 가까웠고, 그만큼 어머니 몰래 밖으로 나가기도 쉬웠다.
“ 하산 ? 하산 ? “
응접실까지 나온 소년은 침실을 청소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이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밟고 올라 갔다.
어머니방이 열려 있는지 어렴풋이 사람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너무 작아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소년은 조심 조심 계단을 올라가 어머니 방에 다가갔다.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지만 그 작은 틈으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침대는 창가에
놓여져 있었고, 방문이 완전히 열려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빼꼼이 열려 있는 문틈 반대편에
눈을 갖다 대자 완전하진 않지만 침대의 일부분이 보였다. 소년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등에서 땀이 흘러나와 입고 있던 옷을 적셔 몸에 달라붙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방안을 바라보던
소년은 어머니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자 살금 살금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10살짜리가 이해할 만한 일이 아니였지만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는 생각에,
어둠 속 저편에서 밀려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코란을 펴놓고
알라신을 부르며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관구장인 파올로 사르피는 요하네스 캐플러에게 온 편지를 읽는 갈릴레오의
목소리에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귀를 기울였다. 캐플러가 쓴 “우주의 조화”라는 책을 읽고
감명 받아 캐플러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제사 답장이 온 것이다.
“존경하옵는 관구장님. 저의 미천한 저술에 편지를 보내주시다니 저로서는 무안한 영광이오며
로마 교황청에 맞서 싸우니 베네치아에 신의 은총이 깃들길 비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저의 모든 책을 다 불태워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전 우연히
브레멘에서 왔다는 선장이 가지고 있던 행성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보는 모든 별들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행성의 공전 주기와 공전 궤도에 관한 저의 미천한 생각은 그것에 비하면 정말로 미천하고
미천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행성표는 아랍상인에게서 얻었는데 그 아랍상인은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나라의 사람에게서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미개한 나라에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참에 러시아를 거쳐 대한제국이라 불리는 나라에 한 번 가볼 생각입니다.
존경하옵는 관구장님. 이곳은 단 하루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발렌슈타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신교도들은 하나 둘씩 고향을 등지고 떠나고 있습니다.
이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이교도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저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해 주십시오”
칠십이 다 되가는 사르피는 힘겹게 노구를 일으켰다. 갈릴레오는 자신을 후원하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인 사르피의 얼굴에 죽음이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캐플러라는 사람은 지구가 돈다고 하는 자네만큼이나 황당한 사람이군.
자네는 대한제국에 대해서 들어봤는가 ? 갈릴레오”
“상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피렌체 공화국과 비슷한 면이 있는 나라라고 하던데요.
몇 년전에 유럽 연합함대와 싸워서 크게 이졌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상인들에게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 교황청에서 대한제국에서 들여오는 모든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고 있어서
안타깝군.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캐플러와 함께 갔을 텐데. 자네는 가볼 생각 없는가 ?
가겠다면 내가 힘써보지.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임무 중 하나인데.”
사르피는 하나님을 말할 때마다 목에 걸려있는 염주를 매만지며 성호를 그었다.
“저도 이제는 긴 여행을 하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관구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대리고 있는 아이를 보내볼까 합니다.”
“그것도 괜찮겠지. 난 이제 얼마 못 살 것 같군. 피렌체가 걱정이야.”
사르피는 피렌체에 있는 교회들이 교황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랬다.
공화국의 법률에 의게해서 모든 교회와 수도원은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신축이나 증축을
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교황청은 끊임없이 피렌체 공확국이 가하는 교회에 대한 재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해왔다. 북부도시의 힘이 점점 약해지면서 교황청은 더욱 노골적으로 피렌체를 협박했다.
단기 3955년(1622) 여름 모스크바
러시아 행정관 안드레이 고드노프는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비서관인 야로뽈끄가 서류들을
챙겨들고 고드노프를 따라 나섰다. 고드노프와 야로뽈끄는 마차에 올라타 시내를 벗어났다.
“참 기쁜 날입니다. 모스크바에 고등학교가 세워지다니 꿈만 같습니다.”
야로뽈끄는 모스크바 고등학교 입학식장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오늘 고드노프가 할 연설문을
읽어보며 수정을 하고는 고드노프에 넘겨줬다.
“말이 고등학교지 제국의 중등학교 교과과정을 가르친다니 기대에 못 미치는 거야.
서둘러 대한제국의 신지식을 배워야 할텐데.”
“꼭 그렇게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행정관님. 작년에 큰 반란이 있었던 명에도 올해에 겨우
고등학교 설립인가가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 그거에 비하면 러시아는 10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명색이 고등학교인데 조만간에 이름에 걸맞는 과정이 만들어지리라 보입니다.
교육부에서도 다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 지금 당장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면 이해할 학생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
고드노프는 야로뽈끄의 말을 듣고 나니 그도 그럴 것 같았다.
“자네는 나보다 더 제국을 잘 이해하는 듯 하구만.”
고드노프의 말에 뼈가 있지나 않나 싶은 야로뽈끄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관심을 돌리기에는 가족 이야기가 가장 좋았다.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 참 니꼴라이가 아주 똑똑하던데요. 나중에 큰 인물이 되겠습니다.
그 아버지도 휼륭하신 분이구요”
고드노프는 아들을 얻지 못한 게 아쉬웠다.
두 딸을 낳고 그 후로 몇 번을 시도했지만 끝내 아들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나타샤가 손주녀석을 낳자 고드노프는 그녀석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장교를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에 손자의 출세에는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렇지. 니꼴라이 그놈이 참 똑똑해. 벌써 러시아말과 제국말을 다 말할 줄 안다니까 !
신동이야! 신동!”
올해로 7살인 니꼴라이는 정식이름은 문재민이었지만 고드노프는 손자를 언제나 니꼴라이라고 불렀다.
어느새 마차가 학교 정문에 도착했는지 멈춰 섰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고드노프가 먼저 내렸다.
미하일가의 저택을 통째로 보수해서 만든 학교 앞에는 모스크바 고등학교라는 현판이 걸렸다.
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신입생들과 하객들로 북적였지만 야로뽈끄가 앞에서 길을 열었다.
“이어서 교육부에서 특별히 가장 휼륭하신 분으로 엄선해서 파견해주신 선생님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호명되신 분은 단상으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강영미선생님”
학생들과 함께 있던 한 여자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자 단상에 올랐다.
강영미는 평소에 잘 입지 않는 한복을 차려 입고 천천히 단상 중앙에 서더니
학생들과 하객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강영미 선생님은 수학과 자연과학을 담당하십니다. 다음은 을지덕 선생님”
차례로 선생님들이 소개되었지만, 4군 사령관 대신으로 참석한 강삼호는 멍한 표정으로
계속 강영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명색이 4군 사령관 부관인 강삼호는
지금까지 동생이 모스크바로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식장에서 보게 되었다.
“강소령, 오랜만이야 ?”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쳤다. 몸을 돌린 강삼호는 언젠가 만났던 “만의류” 러시아 담당 총관
정경일을 보고는 반가움에 그를 껴안았다.
“언제 돌아왔나 ? 한 두어달 못 본 것 같군. 제수씨는 잘 계신가 ?”
“하나씩 물어보게. 그럴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지. 대충 식도 끝난 것 같은데”
“그럴까 ?’
강삼호는 단상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선생님들은 다 내려가고 텅비어 있었다.
학생들도 교실로 들어갔는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떴다.
강영미는 특별반이라 쓰여진 교실문을 열었다. 특별반은 유럽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을 위한 반으로
30명이 이번 학기에 입학을 했다. 총 300명에게 초청장이 발송되었지만 그 중 열에 하나가
초청에 응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 입학식장에 인사드렸지만 저는 강영미라고 합니다.
수학과 자연과학을 맡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은 강영미의 인사에 모두들 시쿤둥했다.
모두들 남자로만 구성된 학생들은 여자에게서 뭔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 강영미는 출석부를 들고 학생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부르면 자신의 오른 손을 들어 주십시오. 베이라”
“제 이름은 안토니오 베이라입니다.”
열 대여섯먹은 아이가 손을 들고 자신의 이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길 바랬다.
강영미는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고는 살짝 웃어 주었다.
“안토니오 베이라, 우리엘 아코스타, 카지미에슈 바자, 므나세 벤 이스라엘, 요하네스 캐플러…..”
서른명의 이름을 다 부른 강영미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15세부터 40세까지 다양한 연령층과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와 있는지,
왜 교육부에서는 저들을 가르치라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색다른 경험임에는 분명했다.
“오늘은 자연과학 첫시간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도움을 받고 있는 힘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모두들 교제를 펼치시기 바랍니다. 참 여기서 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시는 분은 손들어 주십시오”
강영미는 고등학교에 들어올 정도면 모두 제국 말에 능통하리라 생각했지만
특별반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다.
다행이 캐플러만 빼고는 손을 들지 않았다. 출석부를 뒤져 강영미는 캐플러의 신상을 읽었다.
캐플러는 독일에서 왔으며 그곳에서 대학 교수를 역임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좋습니다. 캐플러씨는 수업 끝나고 나중에 저를 보고 가십시오.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펼친 책을 높이 들어 올렸다 놓아보십시오. 이렇게”
강영미는 들고 있던 책을 높이 들었다 놓았다. 강영미의 손을 떠난 책은
바닥으로 떨어져 ‘퍽’ 음향을 만들어 냈다.
“밑으로 떨어지지요?”
학생들의 얼굴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가득 찼고 몇몇은 아예 경멸하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왜 그럴까요 ? 이번에는 이걸 보십시오.”
강영미는 쇠구슬과 나무구슬 두개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모두를 잘 볼 수 있게 구슬을 양손에 올려놓은 강영미는 학생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 무거운 쇠구슬과 가벼운 나무구슬이 있습니다. 이걸 놓으면 아까 책과 마찬가지로
밑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말이죠. 둘 중 어떤 것이 먼저 떨어질까요 ?
그리고 얼마나 빨리 떨어질까요 ? 아시는 분 ?”
“당연히 쇠구슬이 먼저 떨이지겠지요. 얼마나 빨리 떨어지는지는 무게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안토니오 베이라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아이가 소리쳤다.
모두들 베이라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도 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보군요.
그럼 베이라학생 이리 나와서 한번 직접 떨어뜨려봐요.
우리 모두 확인해 봅시다.”
베이라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오더니 강영미에게서 구슬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거의 같은 높이에서 구슬을 놓았다. 직접 구슬을 떨어뜨린 베이라조차 결과가
믿기지 않은 듯 여러 번 똑 같은 동작을 계속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애석하게도 여러분 모두 틀리셨습니다. 자연과학은 이렇듯 우리가 당연시 한 것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설명을 요구합니다. 무거우니까 당연히 먼저 떨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 봅시다. 그리고 그 답이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왜’ 라는 질문은 앞으로 우리가 배울 자연과학의 시발점입니다.
오늘은 첫날이고 하니 이만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여러분들은 왜 물건은 땅에 떨어지는지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찾아 오시기 바랍니다. 그럼 캐플러 학생은 꼭 오세요. 제방은 3층에 있습니다.”
강영미는 출석부와 교재를 챙겨들고 교실문을 나섰다.
강영미가 교실을 나서자 교실안은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끌시끌거렸고
이런 혼란스러움은 을지덕이 지구본을 옆구리에 끼고 교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안녕하십니까 ? 저는 을지덕이라고 합니다. 철학과 정치학을 맞고 있습니다.
저에 대한 소개는 이쯤으로 하고 바로 수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을지덕역시 간편하게 디자인된 한복을 입고 있었다.
두루마기를 벗어 옷걸이에 걸자 감청색 마고자가 나왔다.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 우리는 이 행성을 지구라고 부릅니다.
이 행성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는 하루에 한바퀴씩 돌면서
태양이라고 하는 행성을 돌고 있습니다. 이렇게요”
을지덕은 칠판구석에 태양계를 그려넣었다.
“여러분들은 밤하늘에 떠있는 별중에서 여기에 제가 적어놓은 별들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별들을 수성, 금성, 목성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뭐큐리, 비너스, 쥬피터
내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부르던 그건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이름이 다르다고 존재하는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9개의 행성과 61개의 위성, 소행성군단
그리고 수많은 물체들이 태양을 주위로 돌고 있으며, 우리는 이 그림을 태양계라고 부릅니다.
이 태양계는 은하라는 별무리의 중심을 축으로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은하의 약 일천억개 별 중 하나인 태양의 3번째 행성에서 살고 있는 것 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구요 ? 아무튼 우리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주 하찮은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올리버 롬웰 학생 ?”
을지문이 뜬금없이 롬웰을 지목하자, 올해로 스무세살이 되는 영국출신 귀족 청년에게로
학생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롬웰 학생은 이렇듯 인간이라는 존재가 미약한 존재라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에 생전 처음 대하는 장황한 설명들에 정신이 혼란하던 롬웰은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말에 강한 거부감이 생겼다.
하지만 마땅이 그것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서 머뭇거렸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대로 창조하신 인간인 저희가 그렇게 하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반발력에 나온 자기 방어적인 생각에 을지덕은 빙그레 웃었다.
“저는 종교적인 문제를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그 자체. 롬웰이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쨓든 롬웰군의 생각은 일견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아주 괜찮은 생각이지 않습니까 ?
여러분.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입니까 ? 세르반테스가 애기했던 그 독사 같은
무어인들이나 가라우신부가 기쁨에 넘쳐 외쳐댔던, 장작불위에서 통통하게 부풀어 올라 죽어간
콘베르소들도 포함되는 것입니까 ?”
을지덕은 이쯤이면 되었다 싶었는지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는 수업을 마무리 했다.
“다음 이 시간까지 우리라는 것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을지덕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한참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화적 충격에 휩싸인 학생들은 혼란스런 머리를 정리하기 안간힘을 썼다.
캐플러만이 홀로 일어나 조용히 교실 문을 열고 나갔다.
“똑똑”
캐플러는 강영미라고 쓰여진 방문을 두드렸다. 몇번을 두드리고서야 강영미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방안에는 동양인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대화를 방해한 이방인을 불쾌하게 응시했다.
“미안합니다.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강영미는 유창한 독일어로 캐플러를 안내했다. 강영미의 방은 아주 작아서 책상과 책장에
서너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다탁이 갖추어진 가구의 전부였다.
캐플러는 강영미가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제가 이렇게 오시라고 한건 이걸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강영미는 두껍지 않은 책을 책장에서 뽑더니 캐플러에게 주었다.
그녀가 뽑은 책은 황립언어학회에서 출판한 사전으로 학생들을 위한 개정판인지
학생용이라는 파란색 도장이 겉표지에 찍혀 있었다.
사전을 받아든 캐플러는 몇 장을 훑어보았다.
한글과 영어 프랑스어가 혼용된 사전으로 제국말에 서투른 그에게는 요긴한 책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세요. 내일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학자의 자존심인지 천성적으로 무뚝뚝한지 캐플러는 아무말 없이 강영미 방을 나갔다.
캐플러의 등을 물끄러미 처다보던 강삼호가 고개를 돌려 강영미를 찾았다.
“그러니까 네가 여기는 왜 온거냐 ?”
“오라버니는 참 너무하세요. 임관하신 이후로 한번도 집에 찾아오지 않으시니
어머니 성화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어머니께서 오라버니 뒷바라지좀
하라고 보내셨어요. 제 애인도 유럽쪽에 나가 있어서 만나기도 쉬울 것 같고…”
“애인이라니 ?무슨 최뭐라는 놈”
강영미는 눈가에 힘을 잔뜩 주고 강삼호를 쳐다보았다.
“놈이라뇨 ? 아무튼 오라버니 때문에 내가 시집을 못가니까 빨랑 장가좀 가요. 네에 ?”
장가라는 말이 강삼호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군인을 남편으로 둔 어머니는
평생 마음고생으로 시달리다 끝내는 홀로 여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장가는 무슨 ? 나 이만 간다. 괜히 찾아와서 나 귀찮게 하지 말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잘 살기다. 알았지 ? 어머니께는 네가 잘 말씀드려라. 그럼”
강삼호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이 말을 해주고 싶어서였다.
이것 저것 간섭하기 좋아하는 동생은 어릴 때부터 무던히도 쫒아다니며 강삼호를 귀찮게 하곤 했었다.
방문을 나서는 강삼호의 등이 많이 휘어졌다.
“어깨좀 펴요. 오빠”
단기 3955년(1622) 가을 일본 대판시
대한제국의 행정조직은 이원화되어 운영되었다. 군정지역과 민정지역으로 나뉜 대한제국의 영토는
만주와 한반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군정지역으로, 군정지역이 월등히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최고 행정 조직인 천인단에서는 순차적으로 민정지역에 대한 지방자치제 확대와 군정지역의
민정지역으로의 이관을 진행시켰다. 민정지역으로의 이관은 거주하는 선거권자의 숫자에 의해서
결정되었는데 중등학교이상을 졸업한 자가 오천명이 넘었을 경우에 한해 일정지역을 민정으로
전환시켰다. 민정의 전환은 지역 주둔군의 숫자를 감소시키고, 현역불가판정을 받은
징집 대상자들의 관리가 천군부에서 천인단으로 옮겨짐을 의미하기도 했다.
“저희 대판은 내년이면 선거권을 취득한 시민이 대략 일만명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고등학교 설립 신청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현 시장이 주민들의 요구에
얼마나 무지한 가를 나타내는 단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 저는 지금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것 한가지만 약속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
그것에 항상 귀 기울이겠습니다. 모든 시정은 시민이 최우선입니다.”
본주에서 가장 먼저 민정이양을 앞두고 있는 대판시, 시청 광장은 운집한 사람들로 가득찼다.
내년부터 5년 동안 대판시의 행정을 책임질 시장을 선출하기위한 선거가 열흘 안으로 다가왔다.
시장 선거에 출마한 장리담울은 천인단에서 임명한 현 시장인 좌흥덕의 실정을 토로하며
표심을 끌어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좌흥덕은 단상에 마련된 자리에서 장리담울의 연설에 귀 기울이며 주위를 들러 보았다.
청중들이 술렁거렸다. 지난 5년 동안 이곳을 맡아 나름대로 잘 운영해왔다고 생각했던 좌흥덕은
이번 선거에서 절대로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뒤에는 천인단이 있었고,
선거권자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부하 직원이거나 자신과 친분이 있었다.
장리담울의 연설이 끝나길 기다리던 좌흥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장리담울의 인사에 맞절을 한 그는 단상에 서 준비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장리담울님께서 하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들이기 전에 먼저 해명을 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올해까지 저는 대판시의 행정을 맡고 있습니다만
모든 것은 다 일본부에서 내려오는 지침에 따라 행해야만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제가 재량권을 발휘할 일이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다릅니다.
우리는 자치를 할 수 있고, 그전보다 많은 권한이 밑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욕만 가지고 될 일이 있는 가 하면 일본부나 천인단과 긴밀히 협조를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설립 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겠다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 지원을 되도록 많이 타내기 위해서는
저 같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관료가 그리고 그 쪽 인맥에 밝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좌흥덕과 장리담울의 연설내용과 청중들의 반응들을 점검하는 선거관리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모든 유세장을 돌아다니며 그 지역의 주요 사안들을 기록하는 관리원들은 그 내용을 매일매일
중앙위원회로 보고서를 보냈다.
일본부 선거관리 위원회실은 각지에서 올라오는 선거관련 자료들을 집계하고 결과를 예측하느라
부산했다. 위원들과 직원들은 모두 대명부에서 파견나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선거관리위원과
출마자들간의 유대관계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모든 것을 규정대로 처리하는 위원회 직원들 때문에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현직 행정관들이 오히려 불리하다는 불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조사실장. 어떤가 ? 처음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현직 관료들이 별로 힘을 못 쓰는 것 같은데 ?”
위원장은 상황판을 둘러보며 조사실장을 불러 세웠다. 대략 50개 지역에서 선거 유세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황판은 10여개 지역에서 현직 관료의 탈락이 확실시 되고 있었고 5개 지역은
박빙의 득표전이 벌어졌다.
“그렇습니다. 일본부에서도 약간 당황하는 눈치입니다.”
조사실장 역시 의외의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몇 년 안에 대명부도 이와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텐데.”
제국내 점령지에서 처음으로 치러지는 민정 이양 선거에 제국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이번 본주와 남반도, 대마도 선거를 총괄하는 위원장은 다른 사람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선거 진행 상황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하북성을 맡고 있는 그로서는 늦어도 10년 안에 똑 같은 일이
자신의 임지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좀더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현직 관료의 실정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
경쟁자들은 그 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거기다, 현지인이 아니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고, 지식인들의 열의도 상당합니다.”
“그런가 ? 혹 현직 관료들의 선거전에 필요이상의 제약을 가하고 있는 건 아닌가 ?”
“아닙니다. 저희는 규정대로 할 뿐입니다.”
규정대로 한다니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위원장은 현직 관료를 그대로 유임시키길 바랬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조사실장이 넘겨준 파일을 들고 상황실을 나온 위원장은 임시로 마련된
집무실에 들어가 일본부 총리와 천인단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댜,
“발신 : 일본부 민정이양 선거관리위원장
수신 : 천인단장 및 국무총리
참조 : 일본부 총리
날짜 : 3955년 10월 20일
제목 : 일본부 민정이양 선거 일일 동향 및 향후 문제점
금일 일차 조사결과 대판시를 비롯한 10개 지역에서 현직 관료의 낙선이 확실시 되며, 도성을 포함한
보합지역이 5개 보여짐. 일본부에 파견된 조선인들이 현지에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초기에 형성된 일본인 지식인들이 선거를 통한 지역 행정력 확보에 지대한 관심을 보임.
향후 조선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이 나타날 수도 있음.
사민주의의 확실한 전파와 함께 지역 이동을 좀더 활발히 진행시켜가야 할 것으로 사료됨.
첨부 – 개별 선거구별 선거인 동향 및 출마자별 예상 득표수.
끝.
첫댓글 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