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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1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제1독서 : 호세 11,1.3-4.8ㅁ-9
제2독서 : 에페 3,8-12.14-19
복 음 : 요한 19,31-37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강론 원고를 프린트하려는데 인쇄가 되지 않습니다.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보기도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유를 찾다가 너무 간단한 이유를 찾았습니다. 잉크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 간단한 이유부터 점검했어야 했는데, 이 점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프린터나 컴퓨터 본체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원인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알았음에도 인쇄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여분의 잉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필요한 부품도 시간이 지나면 갈아줘야 합니다.
프린터만이 아닙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그 밖의 많은 가전제품이 그렇습니다.
아~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각자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단순히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종합검진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점검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면이 황폐해졌는지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황폐해질수록 주님과 함께 할 힘이 없어집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더욱 공경하며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 거룩한 마음은 바로 겸손과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겸손과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주님의 나라에 초대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제때 점검하지 못해서 황폐해진 내면으로 주님께 나아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이제 버리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주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 될 때,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인 오늘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사제 성화의 날’을 지냅니다.
사제 생활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을 정한 것입니다.
사제들의 인간적인 부족함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보셨으면 합니다.
이 사랑을 보게 될 때, 사제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또 사제들도 교우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힘찬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 성심聖心의 사랑
- 하느님 사랑 -
이수철 프라니스코 신부
우연은 없습니다. 저에겐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 은총처럼 믿어집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앞서 어제 받은 유형 무형의 사랑의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예수 성심 사랑의 선물이라 믿습니다.
수녀원 미사 때 강론 서두의 언급에 수녀님들 모두가 웃었습니다.
저에겐 잊지 못할 웃음의 선물입니다. 두가지 예를 소개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어떻게 매일 그렇게 강론을 쓸 수 있겠느냐?’ 묻기에
‘매일 목숨을 걸고 씁니다’ 답변했습니다.”
“‘절박한 쪽이 이긴다. 삶은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해야 한다’란 글이 생각납니다.
저에겐 매일 강론이 참 절박합니다.
제가 꿈이 거의 없습니다만 가장 많이 꾸는 꿈이 강론 쓰는 꿈입니다.
강론을 다 썼다 기뻐하며 잠을 깨니 꿈이었을 때 얼마나 허망하던지요.”-
이 두 예화에 수녀님들 모두 웃었고 저에게 참 고마운 예수 성심의 선물이었습니다.
어제 오전 수녀원 미사후 귀원하던중 아름다운 장면도 즉시 사진에 담았으니
이 또한 저에겐 예수 성심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 마르코 수사와 박응표 세례자 형제간의 사랑의 우정이, 형제애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다정한 형제 같습니다.” 말했더니 박 응표 세례자 요한 형제는
“우리는 형제인걸요.”웃으며 화답했습니다.
두 분은 농민대학에서 만났고 두 분 다 농민대학에서의 가장 큰 보람이자
선물은 두분간의 만남이라 주저 없이 고백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우정의 선물입니다.
박응표 세례자 요한의 수도원을 위한 사심없는 사랑의 봉사와 선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런 아가페 사랑의 우정일 것입니다.
예닮의 여정중에 예수성심과의 아름다운 우리의 우정도 날로 깊어지리라 믿습니다.
또 어느 자매로부터 예쁘고 소박한 캘리그래피 선물을 받았고,
다른 자매로부터는 수도원 형제들을 위한 이중 날 면도기 100개도 선물 받았으니
저에겐 이 모두가 예수성심 사랑의 선물처럼 믿어졌습니다.
이렇듯 예수성심의 사랑은 곳곳에서 아름다운 우정의 꽃과 열매로 드러남을 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더불어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제들이 성화은총으로 예수성심을 닮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지냈던 모든 대축일이 요약되는 예수성심대축일입니다.
특히 지난 주일의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혈 대축일과는 분리할 수 없는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 예수성심대축일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활짝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마침 수도원을 아끼고 사랑하는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도 생각나며 축복을 비는 마음 가득합니다.
수도원이 곤경중에 있던 시기인 2004년 중반에 시작됐으니 무려 17년 역사가 되었고,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예수성심형제’회도 생각나며 역시 축복을 비는 마음 가득합니다.
코로나로 모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지가 2년째 되니 안타까운 마음입니다만
곧 백신이 완료되면 모임도 재개되리라는 희망을 지닙니다.
참 아름답고 소중한 예수성심신심입니다.
수도원 십자로에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는 분도 예수성심상이며,
가톨릭 성가집에도 12편의 예수성심 성가가 나옵니다.
참으로 신심 깊은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예수성심 신심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 사랑의 절정은 교회의 성사입니다. 바로 예수성심은 사랑의 샘, 생명의 샘입니다.
여기서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의 성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표징이 되는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라는 성구에서
예전 교회의 교부들은 예외 없이 교회의 성사임을 알아챘습니다.
피는 성체성사를 물은 세례성사를 뜻함을 알아챘던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한 미사경문 중 다음 아름다운 감사송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감사송인지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의 바오로 사도의 고백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예수성심 영성의 대가인 바오로 사도의 가슴 벅찬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은혜롭습니까! 그대로 미사은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바로 예수 성심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의 중심 안에 정주의 뿌리가 날로 깊어지면서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된 우리 교회공동체의 모든 형제자매들입니다.
무지와 허무라는 마음의 병의 근원적 처방의 치료도 예수성심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한 결 같이 충실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 주제는 ‘배신당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죄짓은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배신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다음 호세아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얼마나 감동적인 지극한 인내의 사랑, 한결같은 사랑, 하느님의 사랑, 예수성심의 사랑인지요!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결코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예수성심의 사랑이자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 성심 성월에 끊임없이 피어나는 수도원 경내의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자연이 그대로 우리 위한 예수성심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예수 성심의 사랑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요한7,37-38). 아멘.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입니다. 곧 사랑의 대축일입니다.
이는 마치 물줄기를 찾아 올라가, 산꼭대기의 높은 곳에 있는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맑은 샘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곧 우리가 마시고 있는 사랑의 강줄기의 발원지인 그 원천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화답송>입니다.
<화답송>에서 이사야는 바로 이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그렇다면, 그 사랑의 발원지인 구원의 샘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심장, 곧 예수님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열쇠는 “심장”(마음), 곧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응석받이 아기에 비유하여,
간장을 태우는 어머니의 절실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전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들은 이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고, 끊임없이 배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밝혀지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주게 하셨습니다.”(에페 3,9)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러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최상의 증거를 십자가에서, 곧 당신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늑방과 심장에서 흐르는 물과 피’!
이는 ‘가나안의 혼인잔치’(요한 2,1-12 참조)를 반향해 줍니다.
곧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던, 정결례에 쓰던 여섯 개의 항아리는
마침내 예수님의 몸인 일곱 번째 항아리에서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로 이 갈바리아의 혼인잔치에서 신부인 교회와,
죄를 씻어내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늑방과 심장에서 흐르는 물과 피’는
여인이 깨트린 옥함(요한 12,1-8 참조)을 반향해 줍니다.
값진 옥함을 부수고 남김없이 쏟아 부은 향료가 온 집안으로 번지듯,
감춰진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그리스도의 부서진 몸에서 흘러나온 사랑이
온 세상을 기름칠하고 번져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휘장을 찢고(루카 23,45 참조),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담은 성전을 부수고(요한 2,19 참조),
온 세상에 아버지의 사랑을 내어주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은 축성되고 새롭게 탄생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이 찔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는 바로 아버지의 심장이었고, 마음이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부어주신 피와 물로 우리를 씻으십니다.
그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있습니다.
결코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 말입니다.
바로 오늘이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 마음”이 우리에게 선사되는 은혜로운 날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주님!
당신께서는 휘장을 찢고 가로막힌 모든 것을 치우셨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물과 피로 우리의 영혼을 씻으셨습니다.
온 누리를 새로 지으시고 아버지의 향기를 가득 채우셨습니다.
사랑의 옥함인 당신 몸을 부수어 사랑의 향유로 온 세상을 기름칠하셨습니다.
오늘,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 사랑에 제 영혼이 뛰놀며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교구에서는 ‘사제성화의 날’이면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강의를 듣고, 함께 기도하고,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교구장님과 함께 미사로 피정을 마쳤습니다.
20년 전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저에게 ‘사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하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본당신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선배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제가 생각하는 사목에 대해서 발표하였습니다.
오늘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면서 20년 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사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산보를 하고 있지만 20년 전에도 산보는 제게 유일한 운동이었습니다.
산보 중에 있었던 기억입니다.
점심을 먹고 산보를 가려고 사제관을 나서는데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서는데 초등학교 2학년인 진성이가 성당으로 왔습니다.
진성이는 성당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어린이인데 달리기를 아주 잘합니다.
"진성아! 산보갈래!"하니까 진성이는 가방을 교육관에 벗어놓고 곧 저를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큰 찻길을 건너, 비가 온 뒤에 물이 많아진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을 지나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장날이 아니라서 시장은 한산했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진성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다시 큰길을 건너 진성이가 다니는 학교엘 갔습니다.
진성이가 우산을 교실에 놓고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개울을 건너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가,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평소보다 길게 산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진성이가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저는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시 산보를 가자는 말인가! 진성이는 "산보"라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았나 봅니다.
문득, 하느님 앞에 저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진성이처럼 하느님은 어디계시냐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고,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고,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목이라는 것도, 어쩌면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미 사제가 되었으면 어떤 사목자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사목자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꼭 많은 이야길 해야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꼭 뭔가를 가르쳐야만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천하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둘째, 사목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들어서 죄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규정을 따져서 죄를 범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잘못을 비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도록,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가라지의 삶이었을지라도 밀이 되는 것입니다.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밀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은 밀과 가라지의 경계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옳고 그름을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목이란 용서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셋째, 사목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분들과 인사도 나누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는데
건회와 진성이가 성당 문으로 뛰어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왜 뛰어올까 생각하면서 물어 보았습니다. 두 친구는 집에서 성당까지 뛰어왔답니다.
두 아이의 집은 장현리이고, 장현리는 차로도 15분은 가야되는 거리입니다.
아이들은 성당 버스를 놓쳤고, 그래서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3시간 30분을 뛰어서 성당에 도착한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찡해집니다.
뛰다 넘어지고, 그리고 또 뛰고 그렇게 성당엘 온 아이들을 생각하니,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을 내는 저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졌습니다.
건회는 현지라는 동생이 있고, 진성이는 민정이라는 누나가 있습니다.
현지와 민정이는 뛸 수가 없어서 장현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건회와 진성이와 성당차로 장현리 건회의 집으로 갔습니다.
두 아이들을 이 저를 보고 너무 반가워합니다.
우리는 함께 성당으로 왔고, 아이들은 2시 30분 군종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그렇게 저에게 감동을 줍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성지 주일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어느덧 주님께 모욕을 주고, 어느덧 주님을 모른 체하고,
어느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목이란 한 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목이란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이 모를 심었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 그리고 반성을 통해서 결실을 맺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심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영성체송)
그분이 곧 생명의 물이십니다.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우리 인간의 실존을
예수님 친히 겪으셨고 또 친히 살아내셨지요.
우리의 갈증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복음은 우리를 예수님 죽음의 슬픈 장면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미 숨을 거두신 그분께서 한 번 더 날카로운 창으로 헤집어지는 처참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상처로 벌어진 그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복음사가가 증언합니다.
세상을 향해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는 주님의 또 다른 입술입니다.
예수님의 실제 입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발설되었다면,
이제 옆구리의 열린 입(상처)에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발설됩니다.
피와 물은 교회를 지탱하는 성령과 교회의 지향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애끓는 뜨거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4)
사랑의 예언서인 호세아서의 이 대목은 아버지요 신랑이신 주님의 모습을
모성적인 사랑의 행위들로 표현합니다.
창조 때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입맞춤하셨던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에게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애정을 퍼붓듯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내내 인간을 향해온 그분의 입맞춤은
연민의 사랑이 응축된 그분 심장에서 흘러나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신도들이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닫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8-19)
세상의 눈에 예수님은 실패자에 불과합니다.
설교와 기적으로 반짝하고 사라진 이상주의자나 망상가로 보일 수도 있지요.
당신 상처로(입으로) 피와 물을 다 쏟아내시어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한 사랑을 깨닫는 은총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의 중심인 심장, 사랑으로 펄펄 끓는 그분 심장을 열렬히 갈망하며
지치지 않고 달아드는 이에게 그분은 당신 상처(입)을 활짝 열어젖히십니다.
그리고 피와 물의 근원인 심장을 드러내 주시지요.
그분 심장에 가닿으려면 그 아프고 슬픈 상처를 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화답송)
그럼에도 우리는 기뻐하며 주님의 심장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은 우리의 의혹과 불안과 두려움의 갈증을 씻어줄 구원의 샘입니다.
예수님 심장인 구원의 샘에는 하느님의 신비의 계획이 감추어져 있습니다.(에페 3,9 참조)
우리는 거기서 그 사랑의 신비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삼아 살아가라고 불리웠습니다.(에페 3,17 참조)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에서 당신 존재를 활짝 열어 불결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신 예수님께 다가가 사랑으로 친구합시다.
그분 심장에 머물러 그분께 위로를 드리고,
우리를 향해 펄떡이며 끓어오르는 열렬하고 애틋한 사랑을 들여 마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시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저를 포함해 모든 사제들이
거룩함의 여정에 지치지 않고 충실하기를 함께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랑의 불가마이신 예수 성심,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예수님 마음 : 다 주고도 미안한 마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기도 하고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는 내용입니다.
피와 물은 성사를 상징합니다. 아담의 갈비뼈와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듯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피와 물로 자녀인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나온 피와 물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부모님의 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튜브 동영상 ‘하늘 같은 든든함, 아버지’를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아버지들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어린 자녀들을 둔 아버지들에게 자녀에 대해 질문하는 설문지를 작성하게 합니다.
자녀의 사진은 얼마나 가지고 있고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이나 하고,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은 있느냐는 등의 질문입니다.
아버지들은 입에 미소를 머금고 설문지에 답합니다.
그러다 질문이 이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는 것으로 바뀝니다.
같은 질문인데 자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너무 무심했다는 미안함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미리 녹화해 놓았던 그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말씀하십니다.
“항상 미안하죠. 항상 미안해요. 잘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그게 부모 마음 아닐까요?”
“너에게 해 준 게 얼만데!”라는 마음은 분명 참사랑에서 나온 내어줌이 아닌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입니다.
미안해하는 부모님에게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에 대한 또 미안함을 느끼는 자녀.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교회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다 주면서도 미안해할까요?
그 이유는 그들도 당신들의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받지 못한다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도 많이 받은 것에 대해 덜 내어준 것 같아서 미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님 마음, 예수님 마음은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예수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거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예수님 마음을 닮은 사제,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OBS TV’의 ‘멜로다큐 가족’, ‘미안하다, 보고 싶구나’에서 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딸 둘과 늦둥이 쌍둥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만 한 아들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조그마한 카센터를 운영하는데 출근 전 새벽 4시에 일어나
평택에서 매일 새벽 충주에 있는 아들의 산소에 음식을 싸서 옵니다.
음식을 차려놓고 “그때 잘 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라며 웁니다. 그러며 그는 말합니다.
“아들 묘가 없었다면 못 살았을 겁니다.”
남은 한 명의 아들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숨었다고 합니다. 워낙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서웠던 아버지가 사실은 다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런 사랑 가득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왜 그리 아들에게 다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할까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본인도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그의 부모로부터 받았던 것에 비해 자신은 덜 주고 있다는 죄송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사제로서 예수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도 너희를 굶긴 적은 없었다.”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다면 이 말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김치도 없이 맨밥을 물 말아 먹은 적도 있고
며칠 동안 계속 라면만 먹어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우리 앞에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하게 마음이 편한 말씀이신 것이고
평생 이것을 위해 살아오셨음을 느끼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언제나 미안해하시기도 합니다.
만약 제가 매일 강론을 쓰며 신자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저는 자녀를 잃어 더는 무언가 줄 수 없는 위 아버지처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플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그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매일 강론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적어도 어머니께서 하신 이 말은 하고 싶습니다.
그런 말도 할 수 없다면 매우 후회될 것입니다.
전에 ‘판타스틱 듀오 2’에서 가수 ‘바다’ 씨는 인순이 씨와 함께
아버지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두 가톨릭 신자입니다.
특별히 바다 씨는 S.E.S.로 데뷔해서도 1년은 추워도 찬물로만 샤워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힘들게 키운 부모님께 대한 죄송함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해야 했던 아버지,
학비가 없어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던 어머니가 아직도 찬물로 샤워하는데
자신만 따듯한 물로 샤워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 따듯한 물이 나오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리고서야
자신도 따듯한 물로 샤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받은 것만큼 다 주지 않으면 편안할 수 없는 마음, 사랑을 받은 사람의 마음은 이런 것 같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만큼 내가 내어주지 못하면 후회막급일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으로부터 아드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들이야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이웃에게 내어주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도 그래도 받은 것에 비해
너무 조금 내어놓은 것에 대한 미안함. 이것이 예수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