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금상동 법사동마을에서 만나는 회안대군 이방간
전주시 금상동 법사동 마을에 이른다. 이 마을에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 이방간李芳幹의 묘가 있다. 법사산 아래에 있으므로 법사메, 법수미, 금상이라 불린 이곳 금상리의 법사산 아래를 두고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노서하전혈老鼠下田穴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법사산法士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법사산 자락에 있는 회안대군(懷安大君, 1364∼1421) 방간의 묘는 법사산의 남쪽 자락 끝, 산세가 완만한 곳으로 주변이 잣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군의 묘는 금릉부부인 김포금씨(金陵府夫人金浦琴氏)의 묘와 함께 앞뒤로 놓여 있는데, 일반적인 부부묘와는 달리 부인묘가 앞쪽에 있다.
묘역은 긴 장대석을 놓아 상계, 중계, 하계로 구분해 놓았으며, 묘의 아랫부분은 대리석으로 테두리를 둘러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묘주의 왼쪽으로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가 배치되어 있다. 묘 아래 오른편으로는 회안대군의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묘표와, 석양,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2005년 12월 16일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묘지의 주인공 이방간은 정종 2년인 1400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부르는 이 난의 주인공이다.
그 당시 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 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동생인 방원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는 방간에게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그 뒤 방간이 동생인 방원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자, 박포는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방간은 그의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방원이 승리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결국 방간은 토산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사형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으며, 방간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 뒤의 상황이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태종이 이숙번으로 하여금 방간에게 난을 일으킨 사유를 묻게 하니, 방간이 말하기를 “박포가 이르되, ‘정안군이 공을 보는 눈이 이상하오, 장차 변이 있을 것이니, 공은 마땅히 선수를 쳐야 합니다.” 하므로, 이에 박포를 국문하고, 공신인 까닭에 특별히 죽음을 면케 하여 매질해서 청해로 귀양 보내고, 가산을 몰수하고 자손들은 금고하였으며, 그 무리는 경중에 따라 형벌에 처하였다.
조금 있다가 박포가 함주咸州에서 죽었는데, 그때 포가 말하기를 “한 달 더 살았으니, 임금의 덕을 많이 입었습니다.” 하였다.“ <야언 별집>
수많은 사건을 치르며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뒤 과거를 회상하자 귀양살이 하는 형이 생각나서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회안대군은 거절하고 전주에서 20여 년을 계속 살다가 1417년 홍주(洪州: 현재 홍성)로 이치되었다. 세종 때에도 그의 죄가 문제시 되었지만 상왕과 세종의 관용을 받았고,천명(天命)을 누리다가 1419년에 홍주에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슬픔을 금치 못하여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서 지관을 보내 명당을 찾아 묘를 쓰도록 해주었다.
장사를 끝낸 뒤 태종은 지관을 불러 묘자리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 때 지관이 대대로 군왕이 날만한 자리라고 하자 크게 놀란 태종은 당장 맥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지관은 용의 목에 해당 되는 곳을 끊고, 맥이 살아나지 못하도록 불을 피워 뜸을 떴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을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2025년 10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