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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창업(32) 판 뒤집은 이성계파, 고려수호파 대학살
스승의 아들까지… 자비없는 피의 숙청
정몽주와 손잡았던 이색·이숭인·이종학 등 제거
절친한 도반도 척살… 혈육 고발하고 살아남기도
▎조선 건국 과정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을 주도한 정도전.
서대문구 봉원사에 그의 친필 명부전이 있다.
1392년 4월 4일, 정몽주가 피살됐다.
이로써 4월 1일부터 시작된 고려수호파의 전면 공세가 나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래 시작된 거대한 정치변동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시작된 고려왕조 재건의 꿈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고려왕조도 474년 만에 실질적 종언을 고했다.
정몽주는 이 모든 역사의 끝자락에 서서,
그 퇴락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기둥이었다.
고려가 최종적으로 멸망한 날은 1392년 7월 16일이었다.
정몽주가 죽고 3개월 반이 지난 뒤였다. 그 사이 피의 숙청이 몰아쳤다.
이성계가 최종적으로 역성혁명을 결심한 것은 6월 말과 7월 초 사이였다.
왜냐하면 6월 27일, 문하평리 김주가 공양왕의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됐기 때문이다.
공양왕은 그때까지 중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를 보면, 이성계는 아직 공양왕 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급진파를 대표하는 정도전과 남은이 정몽주가 죽은 지
두 달여가 지난 6월 10일에야 소환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방원의 정치적 본능
▎이종학의 문집 [인재유고].
이색의 아들인 이종학은 반이성계파에 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성계가 마지못해 정몽주의 암살을 받아들이자, 이제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는 아직 명확한 방향이 없었다.
그러나 정몽주 피살에 따르는 조치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첫째, 반이성계파의 무력 반격에 대비해야 했다.
이성계의 분노가 한풀 꺾이자,
이방원은 “이제 휘하의 군사를 소집해 불시의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즉시 장사길(張思吉) 등을 불러 휘하 군사와 함께 이성계의 저택을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장사길은 의주의 토호이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이성계에게 발탁돼 심복이 됐다.
반격에 대한 대비는 이방원다운 조치이다.
이방원의 뛰어난 정치적 자질 중 하나는 사기(事機), 즉 타이밍을 본능적으로 포착하는 재능에 있었다.
그런 사례가 많다.
1388년 위화도회군 소식을 듣고 즉시 철원 전장으로 달려가 가족을 피난시킨 것,
1392년 4월 2일 벽란도에 유숙하려는 이성계를 설득해 심야에 개성으로 귀환시킨 것,
그리고 4월 4일 병문안 온 정몽주를 격살한 것이 그렇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사례는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일 것이다.
그때 이방원은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반대파의 예측을 뛰어넘어 한발 앞서 행동하고, 지휘부를 선제공격하여 무력화시켰다.
둘째, 정몽주의 피살을 정당화시켜야 했다.
그러자면 정몽주파 대간에 의해 축출된 조준 등의 죄상이 무고임을 밝혀야 했다.
이튿날 이성계는 황희석(黃希碩)을 공양왕에게 보내,
“정몽주 일당이 죄인을 비호하면서 은밀히 대간을 꾀어 충량한 신하들을 모함하다가,
이제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조준과 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사실을 조사해 밝히게 하소서”라고 고하게 했다. ([정몽주전])
당시 조준은 김진양의 탄핵을 받아 수원옥에 갇혀 있었다.
반이성계파가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몰랐다.
이방원은 “일이 급하다”고 말하고, 이자분을 밀사로 파견해 조준을 즉각 소환시켰다.
이방원다운 민첩함이었다. 왕명이 있기도 전이었다.
황희석은 시중 황유증의 후손이고 부친은 판서 황천록이다.
본래 불문에 출가했다가 환속해 무장으로 활약했다.
위화도회군 때는 이성계 휘하에 예속됐으며,
1391년 초 이성계 휘하 가별초의 도진무(都鎭撫)로서 복무했다.
도진무란 장군의 막하에서 실무적인 군사업무 전반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당시 이성계는 정치에 환멸을 느껴 동북면으로 귀향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가신 김지경과 함께 강비에게 정도전 등을 제거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이 이성계에게 귀향을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정도전전])
하지만 이성계파의 진로를 놓고 강비에게 직접 진언할 정도로,
황희석은 이성계 가문에서 핵심적 인물이었다.
구체적으로 김지경이 이성계의 가사를 총괄하는 집사였다면,
황희석은 이성계의 군무를 관장하는 무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는 왜 하필 무장인 황희석을 공양왕에게 보냈을까?
아마도 일종의 무력시위였을 것이다.
즉, 이성계 휘하 군대의 의사를 대변하는 대표자로서 보낸 것이다.
실제로 이후 황희석은 이성계 휘하의 장군 유만수,
윤호와 함께 “정몽주의 집을 적몰하고 아울러 그 당을 치죄하라고 청”했다.([김진양전])
하지만 이성계의 지시를 들은 그는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여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궁궐에 들어가면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성계의 친군을 관장하는 무장이 두려워할 정도로 당시의 사태는 험악하고 엄중했다.
뒷날 이성계는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시기”라고 회고했다. ([태조실록] 1년 10월 3일)
셋째, 정몽주·이색 등과 함께 이성계파를 공격하는 데 앞장선 대간들을 처벌해야 했다.
그런데 황희석의 말을 들은 공양왕은 “대간은 탄핵을 당한 사람들과 맞서서 변명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장차 대간을 밖으로 내어 보낼 것이니, 경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요컨대 지금 당장 취할 조치는 없다는 것이다. 완강하게 버틴 것이다.
사실 표면적으로 정몽주가 죽은 것 외에 반이성계파의 전선에는 어떤 손실도 없었다.
공양왕이 버티자 이방원은 즉각 이화 등 이른바 4인 위원회와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이방과를 공양왕에게 보내 “만약 정몽주의 당을 신문하지 않으면 신등을 죄주기 청한다”고 말했다.
양자택일하라는 협박이자 최후통첩이었다.
어쩔 수 없게 된 공양왕은 대간을 순군옥에 하옥시켰다.
하지만 “외방으로 귀양보낼 것이니, 국문할 필요는 없다”고 지시했다.
일단 바로 귀양은 보내겠지만, 사건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그들의 수족을 묶어 두는 것은 이성계파의 특기였다.
공양왕은 이런 상황이 다시 반복되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공양왕의 버티기
▎이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문원서원. 충남 서천군 기산면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공양왕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듯하다.
정몽주의 피살로 귀결된 이 사건은 기존의 사건과 성격이 달랐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이성계는 물론 그 일파를 모조리 제거하려다 실패한 것이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수많은 역모 사건이 발생했지만, 대부분 그 진위가 확실하지 않았다.
대체로 이성계파에 의해 확대되거나 조작된 경우가 많았다.
정몽주가 이성계파로부터 이탈해 반이성계파의 선봉에 서게 된 것도, 이런 일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정몽주라는 당대 최고의 정치가가 직접 공세의 전면에 나섰고, 진위가 분명했다.
어쩌면 이성계파에 대한 최초의 공격다운 공격이었다.
그리고 정몽주가 피살됨으로써 반이성계파의 정치적 힘은 완전히 소진됐다.
이 결정적 국면에서 그들은 어떤 반격도 가하지 못했다.
이성계파의 무자비한 공세에 질린 것일까?
사실 백주에 대로에서 정몽주 같은 인물을
공공연히 살해한다는 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명백한 경고였다.
상황이 이러했지만, 공양왕의 대응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4월 5일, 양부(兩府, 문하부와 밀직사)가 대궐을 방문해 국문을 요청했다.
정몽주가 주도하던 양부도 이제 이성계파 손에 넘어간 것이다.
공양왕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대간에 대한 국문을 지시했다.
심문관은 판삼사사 배극렴, 문하평리 김주, 순군제조관 김사형으로서, 모두 이성계파의 원로들이었다.
첫 심문 대상자는 정몽주와 협력해 대간을 주도한 좌상시 김진양(金震陽)이었다.
그가 자백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정몽주·이색·우현보가 이숭인·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를 보내어 신 등에게 말하기를,
‘이판문하(李判門下·이성계)가 공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데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를 보좌하는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야 도모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정몽주 등 반이성계파의 목적은 처음부터 명료했다.
이성계의 제거가 당초의 목적이었다.
끝까지 정몽주와의 연대를 신뢰한 이성계의 심리적 허점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정몽주는 이 작업을 1391년 7월부터 시작했다.
먼저 윤이·이초 사건 등에 연루된 각종 죄안을 일시에 정리하고, 다시는 거론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를 통해 온갖 탄핵과 처벌에 시달리던 반이성계파를 곤경에서 구해냈다.
반이성계파는 이런 사법적 청산작업에 묶여, 일신의 목숨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했다.
반이성계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색조차 그 아들 이종학과 함께 탄핵과 유배를 반복해야 했다.
반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정몽주는 이런 사법적 사슬을 한꺼번에 잘라 냄으로써, 반이성계파 전선을 재정비한 셈이다.
둘째 정몽주는 이성계파 내 급진파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을 유배시키거나 퇴진시켰다.
1391년 9월, 정도전이 유배되고, 10월에는 직첩과 녹권이 박탈됐다.
아들 정담과 정진도 삭탈 관직됐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전혀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정도전을 버린 것이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중흥노선을 받아들여,
고려왕조와의 공존을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성계파의 두뇌를 제거하고, 지휘부를 약화시키고,
노선에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이성계의 추종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그 전열을 점진적으로 와해시키고자 했다.
셋째, 이색·우현보·이숭인 등 반이성계파를 대거 정계에 복귀시켜, 반격을 위한 세력을 정비했다.
넷째, 세자 왕석(王奭)을 결혼시키고, 신년을 하례하는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보내 입조토록 했다.
공양왕과 세자의 정통성을 강화해 역성혁명에 대해 방어막을 만들려는 조치였다.
이 전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세자가 북경에 도착하자, “황제가 은혜롭게 대우해주고 서열을 공후(公侯)의 아래로 정해주었다.
내전에서 연회를 열어준 것이 5번이었고, 또 조관(朝官)에게 명하여 날마다 연회를 열어 위로하였다.
황금 2정(錠), 백금 10정, 단견(段絹) 100필을 하사하였고,
호종한 관리들에게는 은과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고려사] 열전)
왕석의 서열을 공후의 아래에 두었다는 것은 고려 국왕의 후계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정몽주를 반역으로 몰다
▎장형을 받는 죄인을 묘사한 그림.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을 보면, 이런 문제를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1392년 4월 이후 너무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됐고,
역성혁명 외에 다른 대안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성혁명파는 6월까지 마지막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또한 조선 개국 이후 이성계는 끝내 명의 책봉을 받을 수 없었다.
아울러 요동을 둘러싼 긴장이 강화되고,
정도전을 명에 보내라는 요구가 계속돼 조선과 명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4월 4월 이후 정몽주 등이 천명한 이성계의 죄명은
“공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한다(恃功專擅)”는 것이었다. ‘시공전천’이란 반역의 싹이다. [송사(宋史)]
열전 곽약사(郭藥師)에 보면, 곽약사가 “총애를 의지하고 공을 믿어,
역절이 이미 싹텄다(怙寵恃功 逆節已萌)”고 기술하고 있다.
곽약사는 요나라 장군으로서 송나라에 투항했다가,
뒤에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할 때 다시 금나라에 투항해 금군의 진공을 도왔다.
요컨대 이성계의 죄명이 반역죄에 가깝다는 인식이었다.
이성계 제거계획의 주모자는 정몽주·이색·우현보이고, 공범은 이숭인·이종학·조호였다.
당대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들이었다. 이색은 유종, 정몽주는 재상, 우현보는 외척이었다.
사상계, 정치계, 그리고 왕실 등 고려의 구세력이 그야말로 총집결한 것이다.
이숭인은 이색의 제자로서, 이색의 정치 노선을 한결같이 따랐다.
그의 재종숙부가 이인임이다.
이처럼 그의 정체성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학문적으로 신진 성리학자의 일원이었지만,
혈연적으로는 최고 권문세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전자가 혁신적이라면 후자는 수구적이었다. 이색도 어떤 면에서는 동일했다.
공민왕대에 그는 개혁파 지도자였지만, 우왕대에는 중립을 지켰고,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에는 결국 수구파의 영수가 됐다.
이숭인이 이색을 추종한 것은 당연했다.
이숭인은 고려 후기 최고의 문장가였다.
그의 문장은 너무 뛰어나서, 그가 작성한 외교문서를 읽은 주원장이 감탄할 정도였다.
처음 이숭인은 정도전과 절친한 벗이었다.
1367년 이색이 성균관을 중영하고 성리학운동을 시작했을 때,
이른바 신진 사대부들이 집결해 성황을 이뤘다. 두 사람도 그 일원이었다.
권근에 따르면, 정도전은 “그중에서도 포은·도은과 제일 서로 친절하게
강론하고 연마하여 더욱 얻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정도전과 정몽주, 이숭인은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도반’(道伴), 즉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벗들’이었다.
그러나 1388년 이후 정도전과 이숭인은 적이 되었고,
1391년부터는 정도전과 정몽주 역시 적이 되었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유배시켜 죽이고자 하였다.
정도전을 공격한 명분도 “미천한 신분에서 시작해 외람되게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자,
천한 출신을 감추기 위해 본래의 주인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김진양전])
천민의 피는 정도전에게 가장 아픈 곳이었다. 그런데 옛 친구가 그곳을 찔렀다.
아무리 목숨이 걸린 정쟁이지만, 벗의 도리를 벗어난 것이었다. 인간적 품위도 상실한 것이다.
정몽주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지만, 이때는 그 선을 넘었다.
정도전의 분노는 컸을 것이다.
반(反)이성계파의 처참한 죽음
▎참형을 받는 죄인을 묘사한 그림.
조선 개국 뒤 정도전은 이숭인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정몽주가 피살된 뒤 이숭인은 전라도 순천에 유배됐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즉위교서를 반포하고 교서에 따라
죄인을 처벌하기 위해 지방에 교서사(敎書使)를 파견했다.
전라도 교서사로 판군기감사 황거정이 나주에 파견돼 이숭인에게 장형을 가했다.
그런데 1411년(태종 11) 태종의 지시에 따라 사헌부가 당시의 정황을 조사했다.
그때 장형을 집행한 나주 아전들은
“황거정이 반인(伴人)을 시켜 장목(杖木)을 두 번이나 점검하여 물리치고,
그 허리를 때리게 하고 곧 말에 실어 순천부에 옮겨 두었는데,
노상에서 두 코에서 피가 나와 죽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황거정은 허리를 때린 것은 모른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태조실록]에는 “등골을 매질하여 죽였다”고 기록했다.
이숭인은 “처음에 정도전과 친구로 삼아 종유(從遊)한 지가 가장 오래되었는데,
정도전이 후일에 조준에게 친밀히 하게 되어,
조준이 숭인을 미워함을 알고서는 도리어 몰래 험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이종학은 이색의 둘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따라 반이성계파의 선봉에 섰다.
그는 “천성이 영특하고 호걸스러웠다”고 한다.
1374년(공민왕 23)에 14세로 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과거에 합격했다.
총명이 남달랐던 부친 이색보다도 빨랐다. 그는 말에 거침이 없었다.
위화도회군 뒤 창왕이 즉위했을 때,
그는 외척에게 “군신들이 논의하여 종실을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세자를 세운 것은 우리 아버지의 공이다”라고 선언했다[이색전])
우왕,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했을 때도,
그는 “‘현릉(玄陵, 공민왕]께서 우를 강녕군(江寧君)에 봉해 부(府)를 세워주었고
천자도 우왕에게 작위를 내렸다.
이성계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현릉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 우왕)을 폐위시켰는가?”라고 주장했다.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적통임을 주장한 것이다.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혈통이라는 비왕론(非王論)은 이성계파의 핵심적 명분이었다.
그런데 이종학은 이성계가 공민왕과 주원장의 결정조차 부정하면서 비왕론을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이성계파에 뼈아픈 반론이었다.
이색과 정도전 가문의 세교는 2대에 걸쳐 있다.
이색의 부친 이곡은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보다 7살 많았지만, 두 사람은 망년지우였다.
모두 향리 출신으로서 과거를 통해 입신했다.
과거 합격 전에 두 사람은 동해안 지방을 함께 여행하기도 하고,
이곡의 처가인 영해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아들 대에도 이어졌다. 이색은 정도전보다 14세 위였다.
처음에 정도전은 이색을 스승으로 섬겼다.([정도전 졸기])
그러나 윤이·이초 사건 이후 정도전은 이색의 처형을 극력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은 이종학 역시 무자비하게 죽였다.
정몽주가 피살된 뒤, 이종학은 경상도 함창(현 상주)에 유배됐다.
이성계의 즉위 후 상장군 손흥종이 경상도 교서사로 파견됐다.
태종대에 손흥종은
“그때 남은·정도전이 만일 곤장 100대를 때린 뒤에 죽지 않거든 교살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교살하였다”고 자백했다. ([태종실록] 11년 7월 27일)
처참한 죽음이었다.
실언 한마디로 거열형에 처해져
▎이존오와 송시열을 모시는 충남 공주시의 충현서원 유적.
조호(1335~1410)는 조인규의 증손자이다.
조인규는 몽골어 통역관에서 재상이 되고, 그 딸이 충선왕비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조호의 가문은 몽골 지배기의 시대적 변화에 잘 적응해 명족의 반열에 오른 대표적 사례였다.
이후 평양 조씨는 많은 고위 관인을 배출했다.
또한 명문 세족들과의 결혼을 통해 고려 후기의 대표적 가문으로 성장했다.
조인규의 차남이 조련(趙璉, ?~1322)이고,
조련의 3남이 조윤선(趙允瑄), 조윤선의 장남이 조호이다.
충숙왕의 수비(壽妃)가 그의 이종사촌 동생이다.(민현구 [조인규와 그의 가문])
공민왕대 초기의 권신 조일신은 조인규의 5남 조위(趙瑋)의 아들로서, 조호의 숙부이다
조일신과 함께 공민왕의 연저수종공신인 유숙(柳淑)은 조윤선의 처남으로서, 조호의 외삼촌이다.
유숙은 이곡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할 정도 친밀했다.
조호가 이색의 문생으로서 정치 노선을 함께한 것도 이런 인적 관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계파의 거물 조준은 조호의 백부 조덕유의 아들로서, 조호와는 4촌 형제였다.
조선 개국 1등 공신 조박도 조호의 7촌 조카이다.
조호의 행적은 이색, 정몽주 등 이른바 신진 성리학자들과는 결이 달랐다.
우왕대에 그는 환관과 토지를 다투다가 유배됐다.
조선 개국 뒤인 1400년(태종 1) 예문관태학사로 복귀했다.
그는 태종의 장인 여흥부원군 민제, 그리고 태종의 중신 하윤과 매우 사이가 좋았다.
아마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말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외삼촌 유숙의 첩 묘음이 있는 자리에서 아내에게
“이무(李茂) 정승은 신채(身彩)가 매우 아름다우니,
왕이 될 만해”라는 말을 한 대언죄로, 1410년(태종 10) 옥사한 뒤 거열형에 처해졌다.
대간의 리더였던 김진양(1353~1392)은 경주의 사족 출신이다.
어릴 때 부친을 잃었으나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합격했다. 그는 이색의 문생이었다.
1371년(공민왕 20) 3월, 이색이 과거 시험관인 지공거,
전녹생이 동지공거일 때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첫 관직은 사초를 기록하는 정9품관 예문관 검열이었다.
그는 1373년 응거시에도 권근, 김잠, 송문중, 조신과 함께 합격했다.
응거시 합격자는 명나라 과거인 제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실력을 인정받은 김진양은 이후 10년에 걸쳐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외관인 서해 안렴사로 나가서도 선정을 베풀었다.
이때 좌주 이색에게 편지를 보내며 노루고기 포육(乾鹿)을 선물로 보낸 듯하다.
이에 감사해 쓴 이색의 시가 있다.([목은시고]) 사제간 정의가 깊었던 것이다.
김진양의 가장 친한 벗은 이숭인이었다.
이숭인 스스로 “그의 가장 친한 사람은 경산(京山)의 이도은(李陶隱)”이라고 말했다.
이숭인은 “초옥의 위인이 뜻이 크고 일반 사람과 같지 않았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일찍이 “나는 선대로부터 선비의 집안이다.
거처하는 곳은 나의 일신만 담아 있으려는 것뿐이지 사치하고 화려하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하고,
초가집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초옥자(草屋子)로 불렸다. 그
의 성품은 “의협심이 강하고 남달랐다”(性慷慨不群)고 한다.([고려사] 김진양전)
김진양의 인적 교류나 인생관이 모두 이색, 이숭인 등과 부합했던 것이다.
그는 초지일관 이색의 정치 노선을 따랐다.
윤이·이초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는 동료에게 “윤이·이초의 일은 세 살 난 어린아이라도 무고인 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피바람이 불던 때였으니, 불의를 참지 못하는 비분강개형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성계파가 그를 공격했으나 공양왕은 파직만 시켰다.
1년 반 뒤인 1391년 11월, 그는 다시 정3품 우산기상시, 좌상시에 임명됐다.
축출된 고려 수호파가 대거 복귀할 때였다.
1392년 4월 1일, 정몽주가 이성계파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자 그는 대간을 주도하며 그 선봉장을 맡았다.
정몽주가 죽은 뒤 김진양은 곤장 100대를 맞고 전라도에 유배됐다.
조선 개국 얼마 뒤 죽었다.([태조실록] 1년 8월 23일)
이숭인, 이종학과 같은 방식으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곤장으로 안 죽으면 교살
김진양에 동조해 합세한 간관들은 우상시 이확(李擴),
우사의 이내(李來), 좌헌납 이감(李敢)), 우헌납 권홍(權弘), 정언 유기(柳沂)였다.
이확은 가계와 이력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회군 이후 대체로 이성계파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1390년 5월, 우사의로서 윤이·이초 사건으로 청주옥에 갇힌 이색을 국문하였다.
또한 1392년 3월 23일, 이성계의 낙마 소식이 공양왕에게 알려졌을 때,
경연에서 “제군사(諸軍事, 이성계)는 나라의 장성(長城)인데,
말을 달려 사냥하다가 만에 하나 부상을 입는다면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공양왕은 책을 덮고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주일 사이에 입장이 바뀐 것이다. 그도 정몽주가 죽은 뒤 유배됐다.
그리고 조선 개국 후 최고의 중형을 받고 김진양과 똑같이 죽었다.
이내는 이존오의 아들이다. 이존오도 경주 사람으로 조실부모했고,
“강개하여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忼慨有志節)고 한다. 김진양과 흡사하다.
그는 성리학 운동 초기의 인물로서, 정몽주·박상충·이숭인·정도전·김구용 등과 친교를 나눴다.
1366년 25세의 이존오는 정언으로서, 정추와 함께 처음으로 신돈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공민왕이 격노해 죽이고자 했으나, 이색의 비호에 힘입어 목숨을 건졌다.
장사감무로 좌천돼 공주 석탄에 은거했으나, 분노로 병을 얻어 1371년 세상을 하직했다.
3개월 뒤 신돈이 처형되자, 공민왕은 그의 충절을 기려 성균관대사성에 추증했다.
당시 아들 이내는 10세였다.
공민왕은 손수 ‘간신(諫臣) 이존오의 아들 이안국(李安國)’이라고 써서
인사를 담당하는 정방에 보내 장거직장(掌擧直長)에 발탁하게 했다.
이안국은 이내의 어릴 때 자(字)이고, 직장은 7품관이다.
이내는 공민왕과 이색에게 깊은 은혜가 있었고,
또한 우현보의 문생이었다.([정종실록] 2년 1월 28일) 그가 고려수호파의 입장에 선 것이 당연하다.
이내 역시 정몽주가 죽은 뒤 유배됐다. 조선 개국 후 그는 2등죄에 해당돼,
직첩이 회수되고 장(杖) 70대를 맞고 경주에 유배됐다. 하
지만 그해 겨울에 사유를 받고, 아버지가 은거했던 공주 석탄의 별장에 거주했다.
1399년(정종 1), 정종은 그를 좌간의대부에 임명했다.
1400년 이방원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이방간이 정변을 계획했다.
그는 이내에게 구체적 계획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이내의 어머니는 여흥 민씨 민선(閔璿)의 맏딸로서,
이방간의 부인과 자매였다. 이방간은 이내의 외삼촌인 것이다.
그러나 이내는 이방원을 옹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좌주 우현보에게 이를 상세히 알렸다.
거사 일인 1월 그믐날까지 알려주고, 이를 이방원에게 전하도록 했다.
인정상 차마 이방원에게 직접 고변하지 못한 것이다.
이방원도 우현보의 문생이었으며, 이래와 같은 해 합격한 동년이었다.
1383년(우왕 9), 이방원이 16세로 과거에 급제할 때 시험관인 지공거가 우현보였다.
이방원은 왕위에 올라서도 우현보를 ‘은문’(恩門)이라고 칭했다. ([태종실록])
이내의 고변에 따라 우현보는 아들 우홍부를 보내 이방원에게 알렸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이방원은 이방간의 여러 음모에 대비하고,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했다.
이 공으로 이내는 중신으로 성장했다.
정종 2년 의정부는 이래를 공신으로 봉할 것을 건의했다.
“이내가 의(義)를 따르고 사정을 잊고서 그 음모를 제일 먼저 고하여,
골육을 보전하고 종사를 평안하게 하였으니, 그 공이 중대합니다.
마땅히 공신으로 호를 주고 군(君)을 봉하여 세습하게 하고,
전지 100결과 노비 20구를 주어 뒷사람을 권할 것입니다.” 이는 개국 1등 공신에 해당했다.
혈육 버리고 태종 마음 얻은 이내의 처세술
태종이 즉위하자 그는 좌명공신에 봉해졌다.
이후 이내는 좌군 동지총제가 돼 군권을 잡았다.
태종은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군권을 맡기지 않았다.
이내는 대사헌이 되자 종친 중 불법한 자를 탄핵하고 잡아 가두었다.
태종이 부하인 지평 이흡을 구속하자,
이내는 태종을 만나 간쟁을 해 태종을 설복시켰다.
태종은 이내를 세자 양녕대군의 스승으로 임명했다. 그만큼 신뢰한 것이다.
“이내가 마음가짐이 단정하고 근신하고, 몸을 행동하는 것이 겸허하고 공손하고,
일가에게 은혜로 화목하고 사람을 신의로 접대하니,
임금의 예우가 심히 두터워서 서연(書筵)의 일을 이내에게 위임하였고,
이내도 또한 자임하였다”고 한다.([태종실록] 이내 졸기)
그는 1416년(태종 16)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을 사지에 몰아넣는 아픔이 있었지만,
김진양 등 반이성계파 대간들의 비극적 종말과 비교할 때 그는 행복하게 삶을 마감했다.
첫댓글 모든게 욕심에서 비롯된 숙청 ᆢ
귄력이 무섭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