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누이의 이름에는 순할 順자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일까. 성격이 참 순종적이다. 나와 종종 싸우기도 했으나 늘 누이가 먼저 포기하니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누이와 다툼이 있을 때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는 것도 누나였다. 매를 들 때도 있었는데 나는 잽싸게 도망을 쳐서 모면했지만 누이는 매를 고스란히 맞았다. 주로 부지깽이나 빗자루였다.
그때는 동네 몇 집에만 TV가 있었다. 밤이면 동네 사람들이 TV 있는 집에 모여 테레비를 봤다. 누이는 연속극을 본다고 설겆이 끝내기 바쁘게 나가기 일쑤였다.
누이는 잠도 이따금 친구 집에서 자고 아침에 왔다. 부엌에서 어머니 돕는 것은 물론이고 설겆이 해야지 빨래도 하고 물도 길러다 큰 독에 가득 채워야지 누이는 할 일이 많았다.
우물이 먼 데다 우리집이 오르막 길인 마을 맨 꼭대기 집이라 누이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글은 모르지만 눈썰미가 있어서 일도 빨리 배우고 야무지다는 소릴 들었다고 한다.
누이가 열여덟 살 되던 해 구정 쇠고 며칠 후였던가. 누이는 한동네 동갑내기 여친과 야반도주를 했다. 그해 설날 서울에서 내려온 동네 언니가 바람을 넣었을 것이다.
누이가 사라진 날 밤 어머니는 혼자 중얼거렸다. "썩을 년, 쌀을 서너 되나 훔쳐서 팔아 갔다니까."
그동안 누이가 쌀 서너 되 값만 했을 것인가. 그래도 누나가 힘을 보탰기에 쌀독이라도 조금 채웠을 것이다. 그걸 모를 리 없겠지만 도망간 딸이 무사하길 바라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해 가을 추석에 누이는 하얀 얼굴로 돌아왔다.
"누부 얼굴이 하얘졌네."
"응, 수돗물 먹어서 그래."
누이가 섞어 쓰는 서울 말이 낯설고 어색했다. 그래도 하얀 얼굴에다 깨끗한 옷을 입은 누이가 싫지 않았다. 과자며 껌이며 선물도 많이 사왔다.
추석날 밤 마을회관 앞 공터에서 노래자랑 대회가 열렸다. 콩클대회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누이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불러 상을 탔다.
1등은 아니고 3등인가를 해서 경품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노래자랑 상품으로 솥단지, 냄비, 소쿠리 같은 것을 줬다. 누이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도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두드리며 이미자 노래를 구슬프게 불렀다. 주로 동백 아가씨, 여자의 일생, 기러기 아빠, 해조곡 등 전부 슬픈 노래다.
이따금 장독대에 올라가 숟가락을 마이크 삼아 가수 흉내를 내며 노랠 부르기도 했다. 그때 관객은 나와 누렁이, 그리고 장독대 주변에 핀 봉숭아였다.
신기한 건 글을 읽을 줄 모르면서 그 많은 유행가의 가사를 정확하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명절 때마다 열리는 마을 노래자랑에서 누이는 단골 수상자였다. 1등 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명절 때마다 누이는 선물을 사서 고향엘 내려왔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자랑 같지만 나는 공부를 아주 잘했다.
늘 1, 2등을 하던 아이가 중학교 진학을 못한다는 걸 알고 담임이 교무실로 불렀다.
"누나들은 뭐 하니?"
"시집 갔어요. 막내 누나는 공장 다녀요."
"큰 형은 뭐 하구?"
"이발사예요."
"작은 형도 있는데?"
"병신(장애인)이예요."
담임은 이후 말이 없었다. 나는 중학교 진학에 대한 열망보다 어서 이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 나는 종종 의자를 들고 복도에서 벌을 서야 했다.
육성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다. 4학년 때 담임이 유독 그랬다. 수업 전에 육성회비 안 냈다고 앞으로 불려나가 머리통을 쥐어 박히거나 손바닥을 맞기도 했다.
복도에서 의자를 들고 있을 때는 울기도 했다. 팔이 아파서도 그랬지만 동무들 앞에서 가난을 증명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국민학교 다니는 동안 나는 육성회비를 제대로 낸 적이 없었다.
나는 국민학교 졸업 후 동네 부잣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밥을 먹었다. 맨날 신김치에 꽁보리밥만 먹다가 그 집의 밥은 정말 맛이 있었다.
그 집에서는 언제나 한약 달이는 냄새로 가득했다. 무슨 병을 앓는지는 몰라도 수염 덥수록한 삼촌(?)이 당신 심부름꾼으로 나를 고용한 것이다.
그는 어깨를 주무르거나 요를 깔고 엎드려서 내게 허리를 밟으라고 했다. 그 집에 있는 책을 읽게도 했다. 그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또래 아이가 있었다.
비록 몸종 비슷하게 고용했지만 그는 종종 맛난 것을 숨겨 놨다 주기도 했다. 그가 나의 첫 인생 스승인 셈인데 나중 이 양반에 관한 얘기를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점심 후엔 지게를 지고 소 두 마리를 끌고 산으로 갔다. 나는 소가 풀을 뜯는 동안 꼴을 벤 후 책을 읽었다. 각종 위인전과 톰소여의 모험, 로빈슨 크루소, 플란다스의 개 등이다.
열네 살 눈물 많은 소년은 플란다스의 개를 읽으며 펑펑 울었다. 그때 읽은 책과 무덤가에 핀 할미꽃도, 멀리 내려다 보이는 저수지의 노을빛도 모두 선생이었다. 나의 문학수업 태동기였다.
그해 추석에 집에 온 누이는 어머니와 크게 다퉜다. 우리집은 명절이든 집안 대소사든 모였다 하면 싸움이 일어나는 뼈대 있는 콩가루 집안이다.
누이는 막둥이까지 자기처럼 일자무식으로 만들 작정이냐며 엄마와 큰형을 싸잡아 비난했다. 명절 쇠고 나는 누이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누이도 나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누이는 나에게 우선 신문배달 같은 것을 하면서 지내다 내년에 중학교에 가면 된다고 했지만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때 누이는 인천의 형광등 공장에서 일하는 공순이였다.
처음 야반도주 할 때 같이 갔던 친구는 영등포에 있는 해태(롯데?) 과자 공장으로 이직을 했으나 글을 모르는 누이한테는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가방끈 자체가 없는 누이는 평생 주로 남자들이 일을 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형광등 공장, 주물 공장, 도금 공장 등 힘도 들고 작업 환경이 열악한 곳이다. 그곳에도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형광등 공장에서 일하던 누이는 나를 데리고 올라온 해인 열아홉 살에 임신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성폭행이다. 아이 아빠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13살 연상의 키 작고 못생긴 남자였다.
누이는 어쩔 수 없이 결혼식도 하지 않고 그 남자와 동거에 들어 갔고 거의 연년생에 가까운 두 살 터울로 아들을 낳았다. 스무 살에 첫 아이, 스물 둘에 둘째를 낳은 것이다.
*중간에 내 얘기가 들어가서 글이 조금 길어졌다. 그때 누이와 나는 한몸이나 마찬가지라 어쩔 수 없었다.
첫댓글 불우햇던 유년시절
엿군요. 누이는 그 시대의
희생물처럼 애처럽게
보여지기도 하구요.
인생을 살면서 어떤
계기가 큰 전환점이
되기도 하고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는데 그런게
운명처럼 흘러가더군요.
누이도 그렇구 현덕님도
저도 그랫던거 같네요.
글이 원체 부드럽게 막힘
없이 쓰여져서 단숨에 읽어
내려 갓네요.
정리도 아주 깔끔하게
하신거 같고요.아름문학상
에 한번 올려보셧음 좋겟네요.
금박님처럼 저도 살아오는 동안 희비가 엇갈리는 전환점이 여러 번 있었지요.
다행히 바닥을 길 때면 누군가 나타나는 운명적 만남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글이 막힘 없이 매끄럽게 읽힌다면 오직 PC로만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제게 스마트폰은 문자나 카톡 외에는 전화 통화 용도밖에는 사용할 줄 모르거든요.
제 글의 힘은 폰맹인 아날로그 정서에서 나온다는,,^^
그이도 어릴적 참
고생을 많이하고 자랐지요
청도 골 깊은 골짜기에서요
님의 글 읽으면서
읽어 주었습니다
진학을 못할만큼은 아니었지만
큰시누님의 고생도 컸었는데
작년 돌아가시고ㅠ.ㅠ
그시절 돌아보면
아플것 같은데
담담히 풀어내는 능력이 참 대단하세요
맞춤법 하나하나 잘못된것도 없이 정갈한 느낌을 받습니다
누이이야기 이후도 기다리겠습니다
고생하신 옆지기의 아픔을 잘 이해하고 계시는 정아님의 착한 마음씀이 전해옵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는데 저는 상처 많은 사람에게 늘 마음이 먼저 갑니다.
맞춤법은 쓸 때부터 신경을 쓰지만 올리고 나서도 한번 읽으면서 폭풍점검을 하지요.
그래도 나오는 오타는 어쩔 수 없다는..^^
가난 때문에 국민핵교만 나와
17살에 식모살이까지 했던 내 누나 역시
18살부터는 수원으로 가서 '선경합섬'에 다니며
공순이로 통했지요.
그 누님이 내 중학교 학비를 대 주어서
저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는 내 스스로 벌어서(아르바이트)
다녔지만
가난은 숙명처럼 나를 따라다녔지요.
님에게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순탄치 않은 길을 잘 헤쳐왔기에 지금의 님을 있게 했을 겁니다.
가난이 숙명처럼 따라 다녔다는 말에 왠지 동지 만난 기분이 듭니다.
동병상련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요.^^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일은 아니고
단직 불편할뿐입니다
그래도 어릴때 읽으셨던 여러가지 책들이 정신적인 성장을 쑤욱 만들지않았나
싶어요
흔히 있었던 일이나 새롭게 오버랩 되는 어린시절의 아픔 이 저려옵니다
그러나 역경을 딛고 더 굳세어진 결심들이 지금 우리를 더욱 용맹스럽게 살아가게했고 지금도 살아가고있지요
지금 은 불행히도 가난이 대를 물리는건 큰 슬픔입니다
우리 세대가 그 나마 회복할수있었던 시절이였죠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글을 잘 쓰시네요 천부적이십니다
아침구름님 말씀이 맞습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자랑할 일도 아니지요.^^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이 제 정서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때 저를 채용했던(?) 그 삼촌이란 분과의 만남을 운명이라 생각하네요.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지만 저는 용이 되기보다
개구리처럼 열심히 뛰면서 살려고 합니다.
님의 댓글이 길어서 저의 답글도 길어졌습니다.^^
가슴아픈 이야기를
다 풀어내는 유현덕님의 글에
한 참을 서성입니다
어쩌다 신내림 하는 무당처럼 술술 풀어놓게 되었습니다.
잘 하면 작두 타는 일도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20달러 가지고 이민 간 모자의 고생에 비하면 저의 고생은 새발의 피네요.
저도 한때 이민자의 몸이었기에 정착한 사람들 사연을 들으면 눈물겹더라구요.
배부르게 먹기 위해서였다는 말에 가슴이 턱 막힙니다.
행여 나도 나도 하면서 공감하는 분이 있다면 글 쓴 보람이 있겠네요.^^
아 슬픔이 오네요.
네, 슬름은 오기도 하기만 왔다 그냥 가기도 한답니다.^^
그시절 그때가 생각나
가슴이 아리네요~~
누구나 돌아보면 지난 세월은 가슴이 아리지요.
그 시절은 모두가 가난했기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슬프기도 아련하기도
담담히 써내려간 지난시간들
우리들의 자화상 같은 이야기
공감 입니다 ^^
공감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어쩌면 그 아련한 슬픔이 우리를 살게 하는 에너지원이 되기도 합니다.
다음 이야기 잇기 위해 부지런히 작두 타도록 하겠습니다.^^
위에 금박사 말처럼 글이 막힘없이 읽혀지는 놀라운 필력인 현덕님 잘읽었습니다
그 시절 비슷하게 연명해 왔던 삶의 모습 닮은 듯 다른 가난의 모습 심하게 공감됩니다.
놀라운 필력은 천부당만부당입니다.
오랜 기간 써온 일기처럼 그저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썼을 뿐입니다.
힌국이든 아프리카든 사람 살아온 내력은 다 비슷비슷하겠지요.
단 눈물 묻은 빵을 먹어본 자만이 더 깊게 공감한다는,,
솔직담백한 글 만남이 저의 행복입니다~
그시절 우리나이의 선후배님들 절반이상이 겪었을 일들이라 공감백배
동병상련 맞습니다..
제 글이 무거운 주제인데도 담백하게 읽고 행복하셨다니 다행이네요.
함께 겪은 일이 많을수록 동병상련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법이지요.
제가 카페 앱을 깔지 않아 댓글 반응이 많이 늦습니다.
행여 영영 반응이 없더라도 양해를,,^^
@유현덕 우리집도
저 초등시절 큰언니는 입줄일라구 월급도 없는 식모살이 갔어요.
바로 위언니는 초등학교졸업후 청계천 옷공장 시다일해서 겨우 우리집 밥굶는것 면했어요.
언니도 나도 초등학교 육성회비 못내서
쫒겨왔고 저는 중학교도 수업료 못내서 쫒겨다녔고요..
제경험도 있어서 담백하다 했습니다~
상처로 가지고 있으면 부모님 원망하게 되고....
아버지 중풍으로 빚만. 남겨놓으시고 나 10살때 6남매 두고 돌아가셨으니
그 어려운 가운데에도
고아원이나 남에게 버리지 않으신것만으로도 어머님께 감사하지요~^^
동병상련 느낄만 하겠지요....
이야기는 그시절을 격은 농어촌 출신 사람들이 함께 격은 공유기억이죠.
밥 먹고 살기위해 국민학교 졸업 후 무작정 서울로 도시로 가서 고생을 했으나
그중 똘똘하고 성실한 아이들은 야학으로 학교도 다니고 성공의 기회도 잡기도 했죠.
진솔한 글 고마워요.
네, 제 어릴 적에 야반도주하는 동네 형과 누나들이 종종 있었지요.
그분들이 열심히 산 덕에 지금의 한국이 있다고 봅니다.
유곡가인님도 그 사람들 중 한 분이라는,,^^
만나면 싸우는 콩가루 집안 빼고는 돗진갯진입니다. ^^
누나들이 보내주는 달력으로 교과서 책 표지 감싼 아이들이
부러워서 서울 간 누나에게 달력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지요.
달력은 지금도 함부로 버리지 못 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해묵은 달력인데도 말입니다.
저는 달력도 없어서 책표지를 신문지로 싸서 사용했었지요.
가끔 손에 까만 신문 잉크가 묻어나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막힘없는 글의 흐름에 순식간에
글을 읽었습니다
다음편이 기다려지네요
그때는 왜그리도 가난했을까요
시골은 더 가난했지요
마음이 아려옵니다
막힘 없이 순식간에 읽으셨다면 님의 글 읽어내는 실력 때문입니다.^^
저는 부자가 망해도 삼 년 간다는 속담을 믿지 않습니다.
몇 년 사이 그 많던 전답과 기와집까지 아버지가 탕진함으로 실력파였음을 증명했으니까요.
제가 써 놓은 것을 옮기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 편은 가능한 빨리,,^^
국민학교만 마치면 서울로 서울로......
식모살이로 공장으로......
그시절 시골에서 자란 가난한집 아이들의 이야기......
공돌이 공순이......
글을 참 잘 쓰십니다~~~~
시골에서는 중학교 나오면 그런대로 지식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더군요.
그 사람은 공장 취직도 쉽고 일자리도 편한 부서에서 할 수 있고,,
저도 한때 공장을 다니면서 학업을 했기에
공순이 공돌이에 관한 이야기를 쓰자면 끝이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