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음악에 심취한 한 한국 여성이 ‘음악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니컬러스 쿡을 찾았다. 쿡은 그녀를 반갑게 맞았고 여성은 말의 포문을 열었다.
“‘여성이 있을 곳은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주방이다.’ 과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요?”
그녀는 ‘세상과 인간을 연구하는 경제학의 관점이 좀 더 페미니즘의 영역을 확대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는 인물이다. 정치, 경제, 사회가 양성평등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때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부여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쿡이 말한다.
“음악계가 다른 어떤 문화세계에서 불가능한 성차별을 조장하며 특권지대를 형성했던 사실을 당당히 인정합니다. 음악인들이 과거와는 완벽히 다른 환경을 조성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요. 나는 그런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만드는 데에 많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여성은 쿡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자신의 견해를 국제적 조류로 뒷받침하려 한다.
“유엔(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5번을 상기해봅니다. 이는 성평등 달성과 여성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합니다. 모든 국가의 모든 여성과 여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철폐해야 합니다. 과거 결혼한 직장 여성은 자신을 돌볼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러한 것이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나타났고요. 남녀가 동등한 교육을 받고 여성의 창작 여건이 개선돼 성차별이 점차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아 다행입니다.”
쿡은 일하는 여성 환경을 말하는 ‘유리천장지수’가 11년째 선진국 꼴찌인 한국을 상기한다. 여성은 과거 한국 사례를 말하며 쿡에게 음악으로 화합하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성들이 진급과 성공 가도를 달릴수록 모든 것을 지원해줬던 여성의 손길이 감춰졌었어요. ‘남편은 아내하기 나름이죠’라는 광고 카피가 한국에서 유행했다고 하더군요. 여성의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하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었어요. 이런 것은 근절해야 할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여성 음악가의 자질이 발휘될 기회가 남성 음악가가 누리는 기회만큼 보장돼 있죠.”
쿡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성은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이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데에 매진하는 현모양처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으로 주입하던 시절이 과거에 있었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도 뒤따랐었다. 뒤웅박은 쪼개지 않고 꼭지 근처만 도려내어 속을 파낸 바가지다. 부잣집에서는 뒤웅박에 쌀을 담아뒀다. 가난한 집에서는 여물을 담아뒀다. 뒤웅박이 어떤 집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듯 여자 팔자도 어떤 남편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쿡이 말한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의 역사는 사실상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방식의 변화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페미니즘’이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정치권에 소환되는 것도 현실이죠. 한국 정치권이 ‘남혐·여혐’ 논란에 먼저 종지부를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음악을 비롯해 문화는 그런 평등을 지향하는데 나는 남녀평등이란 단어조차 없는 세상을 생각합니다.”
여성은 쿡에게 이해득실에 따라 젠더 갈등에 편승하고 혐오를 방관하는 한국 정치상을 힐난했다. 쿡은 하트 모양을 만들며 남녀의 화해를 강조한다.
여성이 말한다.
“‘82년생 김지영’의 고단함이 있다면 한국 20대 남성에게는 군대도 가고 직업도 가져야 하는, 음, 아버지 세대를 보며 ‘아내와 자식을 부양해야 한다’는 전통이 그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도 있어요. 내게 남동생이 있는데 ‘남성이라서 차별받고 있다’는 목소리를 낼 때면 ‘97년생 김민준’의 불안한 눈빛이 보여요. 나는 ‘자녀 양육의 1차적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남성을 혐오해요. 마찬가지로 ‘가족 생계의 1차적 책임이 남성에게 있다’는 주장에서 여성이 벗어나야 한다고 봐요.”
쿡은 ‘딩동댕’을 외치며 분담의 규칙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런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이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나 그에게 사랑으로 다가온 여인이 10여명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열정에 타올라 창작열을 불태웠으며, 그렇게 탄생한 명곡들을 그녀들에게 헌정했다.
“아직 침대 속에 누워 있어도 난 온통 당신 생각뿐이라오. 때론 기쁘게, 때론 비탄에 젖어 있는 나. 가장 충실한 이 연인의 마음을 절대 의심하지 마오. 언제나 그대의 것. 언제나 나만의 것. 언제까지나 우리의 것.”
베토벤은 1812년 익명의 여인에게 보낸 편지 구절에서 서로 다른 두 인격체의 합일을 꿈꾸고 있었다. 쿡은 자신의 목소리로 ‘베토벤 바이러스’에 걸린 듯 편지를 낭독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는 데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과 불가능한 것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 토머스 셸링
쿡이 묻는다.
“경제학을 전공한다고 하셨죠. 요즘 경제학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정신’을 본받아야 해요.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이 곡을 완성했죠.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불협화음으로 무질서를 부르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그 혼돈을 못 견디겠다는 듯 뛰어드는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전율이 느껴져요. ‘모든 사람이 형제처럼 평화롭게 공존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메시지가 오케스트라와 합창으로 장대하게 펼쳐지면 천상을 걷는 기분이죠.”
여성은 불협화음의 현실세계를 들여다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분열된 세계화에 앞장섰다. ‘미국 우선주의’ 깃발을 앞세워 동맹관계를 악화시키고 다자주의를 걷어찼다. 그는 한국·일본과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에 미군 철수를 위협하며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까지 요구했다. 그는 파리기후변화협약과 이란핵합의는 물론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 인권이사회도 탈퇴했다. 최근 중국은 부산엑스포 유치 방해와 네이버 접속 이상, 한국 연예인의 중국 방송 출연 불허 등의 조짐을 보이며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트럼프 시기와 달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의 협력·경쟁·대결을 동시에 유연성 있게 전개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양국 간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다. 베토벤은 동시대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시(詩)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여 지구와 우주, 지상과 천상이 하나가 되는 세상을 노래했다.
여성이 말한다.
“미-소 냉전 시기에 ‘세계평화를 위해서 미국과 소련 모두가 상대 국가를 초토화할 만큼 충분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 경제학자가 있었죠. 갈등의 해소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게임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셸링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처럼 핵무기 보유로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양쪽이 잘 알고 있어야 오히려 갈등이 줄고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했어요. 셸링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고, 그 강도는 상대방이 방어할 수 없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했죠. 한국은 양국에 비해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도 어렵고 외교적 수사만으로 국익을 실현할 수 없는 처지라, 힘든 상황이죠. 지혜로운 전략을 짜야 하는데 쉽지만은 않네요.”
한국은 미국과는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중국과는 그동안 깊은 경제협력관계를 이어왔다. 약육강식의 패권전쟁 원리가 작용하는 현실세계에서 베토벤 ‘합창교향곡’의 메시지는 의미 있게 다가오지만 구체적인 해결책이 되기에는 무리다. 여성은 셸링을 생각하며 ‘우리네 삶은 전략과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전략’이란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하는데 세상이 점점 ‘합창교향곡’과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때 어떤 게임의 전략을 취해야 할까. 조급하고 어설픈 일방적 편승이나 일방적 보복을 당할 것이란 두려움에 휩싸인다면 화는 더 클 것 같다. 중국 편승은 비용이 클 뿐 아니라 시기상조다. 한미 동맹 강화를 통한 대중(對中) 무조건 견제가 절대 대안이 되기도 어려워 보인다.
여성이 쿡에게 말한다.
“‘합창교향곡’이 모든 것을 잃은 베토벤의 역설적인 ‘환희의 송가’로 들립니다. 금리는 높은데 물가 불안은 여전하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불안과 불확실성이 만연하네요. 토머스 셸링이 살아 있다면 미-중 패권전쟁이 오래가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했을 텐데요. 게임 이론과 갈등 전략에 입각해서 한국이 취해야 할 방향성을 묻고 싶은데 그가 이 세상에 없네요.”
쿡이 스마트폰에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제4악장을 켠다. 인생의 참된 구원으로서 환희의 모습이 교향곡 속에 구현돼 감동을 준다.
여성은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진영 논리를 넘어 협력과 통합의 새로운 지역질서를 만들어나가는 실용 외교는 가능할까’ 하는 상념에 잠긴다. 어려울수록 토머스 셸링의 관점에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이익을 규정하고 전략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기준과 원칙을 심도 있게 고민해 묘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적대적인 살벌한 관계에서 의사소통은 핵 보유보다 훨씬 중요하다. 냉전 시대 미-소 간 핫라인은 가공할 만한 힘을 지닌 적대세력 간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 전략적 아이디어였다. 노벨상위원회의 공식 홈페이지는 ‘토머스 셸링이 핫라인 설치에 기여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성은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것을 가위 역할로 생각한다. 가위는 종이나 천을 합심해 자르거나 재단할 뿐, 서로를 상처 주거나 베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여성은 베토벤 ‘합창교향곡’의 정신과 셸링의 갈등 전략을 오버랩하며 분열된 세계화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조원경 UNIST 교수 / 헤럴드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