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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유럽
스페인 지중해 남부 도시
디에고 안드레스 팔미에리 발렌시아 대주교는 호세 가바리신부의 변론에 종교재판장이 술렁거리자
경비병에게 손짓을 했다. 대주교의 신호를 받은 경비병은 들고 있던 창을 바닥으로 세 번 내리 찍었다.
“쿵 쿵 쿵”
금속과 대리석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재판장의 소란을 잠재웠다.
“예순살이 넘은 저 가련한 여인네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힘든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가 어떻게 고해성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
지난 5년 동안 이 불쌍한 노예는 고해성사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발되었다면 저는 노예의 주인된 자를 고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바리신부는 스페인 각지를 돌아다니며 변론을 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변론을 해주는
떠돌이 신부였다. 우연히 발렌시아에 들른 그는 이사벨이라는 여인이 부당하게 재판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재판장에 달려갔다.
“파티마 ?”
팔미에르 대주교가 앙상한 뼈만 남아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노인을 불렀다.
노인은 파티마란 소리에 고개를 들고 대주교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는 파티마라고 부를 때는 대답을 하고, 위대한 기독교식 이름인 이사벨이란 이름에는
대답하지 않은 죄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무어인들을 선동하여 이슬람식으로 살자고
외친 혐의를 받고 있다. 인정하느냐 ?”
이사벨과 파티마라는 두개의 이름을 가진 여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죄인을 바라보던 팔미에르는 가바리 신부에게 경멸에 찬 눈빛을 보냈다.
“주인이 너에게 분명히 말하였는데도 너는 음식을 만들기 전 손을 씻었다.
이것은 아직도 네가 이교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느냐 ?”
가바리신부는 도대체 왜 음식을 만들 때 손을 씻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교회의 규정은 규정이었다. 이슬람식 이름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거나 무어인을 선동했다는 것은
충분히 반론을 할 수 있었지만 음식을 만들기 전 손을 씻었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존경하는 대주교님. 이사벨은 이미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달게 받겠다는
서약을 했습니다. 이 서약이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
이사벨은 결코 이단이나 마녀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바리는 어떻게든 이사벨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도록 노력하였지만 지금까지 수백차례의 재판에서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듯 이번에도 가바리는 한숨을 쉬며 교회를 나와야만 했다.
대주교가 내린 형벌은 수십만명의 마녀들을 죽이는 데 이용되었던 화형보다도 더 가옥한 것이었지만,
대주교는 자신의 인자함을 청중들에게 내비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죄인은 오직 교회안에서만 악귀로부터 자유롭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만 죄인의 몸에는
자그마치 100개의 악귀가 스며있어서 이렇듯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죄인의 옷을
찢어버리고 태형 100대를 가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죄인의 몸에 있는 마귀들을 쫒아내고
다시는 악귀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교회 감옥에 영원히 수감하도록 한다. 죄인의 참회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죄인을 부활할 수 있도록 한 대주교인 나와 하나님의 권능에 감사하라.”
필립은 스페인제국의 황제답지 않게 궁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필리핀을 잃어버리고 파나마마저
대한제국에게 빼앗겨버린 지금 스페인은 경제적 궁핍함에 시달려야만 했다.
거기다 7년 전에 동아시아로 파견한 원정함대가 몰살당한 후에는 해군력의 급속한 감소로
지중해에서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터키제국과 영국의 직접적인 위협 그리고 대한 제국의
지속적인 압력에 맞서기 위해 필립은 총신 올리바레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느스한 형태의 연합제국을 좀더 강화시킬 방법을 강구하게 할 필요성을 느겼다.
올리바레스는 필립의 명령에 따라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아라곤 왕국,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 도시들을
순방하고 있었다. 올리바레스가 이번 연합에 성공하지 못하면 스페인 제국의 앞날은 거의 희망이 없어
보였다. 제국의 제정을 카스티야에서만 담당하기에는 이미 한계가 보이고 있어다.
상업 왕국인 아라곤의 협력이나 네덜란드의 제정지원이 절실했다.
하지만 필립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초겨울에 카스티야로 돌아온 올리바레스는
암울한 표정으로 스페인제국 황제를 대면해야만 했다.
“오 ! 올리바레스 ! 그대가 왔는가 ?”
오랜 기다림에서 오른 기대감이 가득찬 필립의 목소리가 기다란 복도를 타고 메아리를 만들며
퍼져나갔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은 필립이 물었다.
“그래 갔던 일은 잘 되었겠지 ?”
올리바레스의 안색을 살피던 필립은 그의 총신이며 스페인 제국 재상의 어두운 표정에서 불길한
기운을 읽어 나갔다. 올리바레스는 무릅을 꿇은 체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 천천히 운을 떼었다.
“포르투갈은 이번 연합군 제안에 찬성하고 있습니다만 그외 아라곤과 네덜란드 시실리와
나폴리등이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필립은 자리에 몸을 깊숙이 누인 채 올리바레스의 말을 들었다. 네덜란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라곤이 반대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라곤이 왜 ?”
“지금까지 제국의 군대는 저희 카스티야에서 전적으로 부담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게
제국의 황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매년 연합국으로서 일정량의 세금을
지불하고 있는데 다시 연합군을 창설하여 재정을 분담시킨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필립은 아라곤 왕가에 주어진 특권을 진작에 박탈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의 아버지가 그토록 수정과 압력을 가했음에도 아라곤은 고유의 행정과 정치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다 시실리와 나폴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긁어 부스럼을 만든건가 ? 우리의 재정이 고갈상태로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 아니냔 말야. 불손한 네덜란드가 독립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 마당에
아라곤마저 나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거야. 올리바레스 ?”
올리바레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노여움과 살기가 뒤섞인 필립의 목소리에 올리바레스가 고개를 들었다.
“네. 폐하”
“지금 당장 동원 가능한 친위군은 얼마나 되나 ?”
필립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실행에 옮기고 싶어했다. 이번 기회에 아라곤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아라곤 왕가의 특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지중해 중부의 아라곤왕가의 지역을
자신의 직접 통치지역으로 편입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소왕국들에게 아직 자신이 건제함을 보여주고,
휴전 상태인 네덜란드에게 위협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카스티야 근위대 일만명이 폐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방 영주들에게 소집령이 떨어지면 한달 안에 십만의 병사를 모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아라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 않그런가 ?”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이번 기회에 대략 이십만 정도의 상비군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독일 내전에 터키가 끼여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중해 전체가 전쟁이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아라곤부터 처리하도록 하고 그 사이에 상비군건을 처리한다. 지금 당장 아라곤에
근위대를 파견하고, 포르투갈에 병력지원을 요청하도록 하고. 지방 영주에게는 소집령을 내리도록.
그리고 프랑스 내 사위와 교황에게 특사를 보내서 터키와 그 이교도놈들의 동맹국인
대한제국의 침략성을 부각시키도록. 참 다음 교황은 누가 될 것 같은가 ?”
지금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질문에 올리바레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다음 교황이라니’
“이탈리아에 가보았으니 당연히 들은 게 있을 거 아닌가 ? 로마를 장악하면 좀더 유리할 텐데 말야
아라곤과 전쟁중에 로마가 딴마음을 품으면 곤란하지.”
“아. 네. 들리는 말로는 마패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유럭합니다.”
“이번에도 이태리인이란 말이지. 마패오는 생각이 다른 사람인데 !”
필립은 마패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를 간접 지배하는 스페인으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누구에나 약점이 있듯
마패오 역시 약점이 있었다. 필립은 마패오가 교황이 된 이후를 머리속으로 열심히 그려 보았다.
서울 법무부 청사
행정부산하에서 줄곧 법의 제정과 집행에 관한 조언을 해오던 법제원이 행정부로부터 재판권을
정식으로 이양 받아 법무부로 승격되었다.
민정이 이루어지는 모든 지역에서 재판권을 행사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부산한 가운데
초대 법무장관에 내정된 선대유는 청사 앞에 걸어놓을 현판을 직접 써내려 갔다.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업무가 시작되기 때문에 올해 안에 각지에 재판소를 만들고
재판관을 내려보내야 했다.
“강강약약”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 선대유는 흐믓하게 넉자의 글씨를 바라다 보았다.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겐 약하게 적용하라는 것인지, 강할 땐 강하게 약할 땐 약하게
하라는 것인지 알쏭달쏭한 글자를 바라보던 선대유가 비서를 호출했다.
“이거 가기고 가서 잘 좀 파달라고 해”
선대유가 집어준 화선지를 건네 받은 비서가 종이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매만지고는
바로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 그래 ? 뭐 할 말있나 ?”
“장관님 ?”
“왜 ?”
“저. 괜찮으시면 오늘 좀 빨리 퇴근 하고 싶습니다만”
“집에 무슨 일 있나 ?”
“오늘 장인어른 기일이십니다. 처가가 서울에서 좀 멀어서요”
“그런가 ? 그럼 그렇게 하게. 이것만 맡기고 바로 퇴근해”
“감사합니다.”
유교적인 남성 권위주의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조선은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풍습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집안의 제사를 꼭 장남이나 아들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위와 딸 집에서 지내는 것인데 이런 풍습으로 인해 남녀가 똑 같은 재산 상속권이 주어져 있었다.
어느 지방에서는 시집간다는 표현보다 장가든다는 표현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단기3955년(1622) 늦가을 나오곶
나오곶에 세워진 전망대는 바야돌리도에 주둔중인 카스티야 군대가 사라고사를 향해 출발했다는
소문이 전달되면서 연일 긴장감에 휩싸였다. 스페인의 최대 군항인 카디즈나 빌바오에 있는
스페인 함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라곤 왕 페르난도는 매일 나오곶에
전령을 보내 주변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아울러 발렌시아에 바르셀로나 함대중 일부를 파견했다.
발렌시아에서 파견된 정찰선인 소형 갈레온선들이 발레아레스 제도 주변을 돌아다니며
북상할 수도 있는 필립3세의 숨은 함대를 찾아 다녔다.
“카디즈에 있던 라미로가 움직였다 이거지 ? 그것도 화려한 출정식까지 하고.”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스페인함대가 요란하게 출정식까지 하고 카디즈를 출항했다는 보고를
곤살레스는 믿기 어려웠다. 친절하게도 라미로는 충분히 자신에게 보고가 들어갈 수 있는 시간까지
주면서 출항 3일전에 카디즈가 떠들썩 할 정도로 요란한 출정식을 했다.
황당하게도 라미로는 자신의 움직임을 훤히 곤살레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은 바르셀로나와 사라고사에 보고서를 올려야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자신감이 넘친다 해도 적에게 함대의 이동상황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빌바오에서도 함대가 움직였다고 봐야 하는 건가 ?”
곤살레스는 일단 짧은 보고서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령관에게 보내고 전 함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카디즈에서 발렌시아까지는 기껏해야 3일이면 도착했고 늦어도 오늘 밤이면 라미로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전투를 버릴 생각을 하니 온 몸에 힘이 솟았다.
곤살레스는 이번 기회에 카탈루냐 함대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 함대에 알린다.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려라.”
곤살레스의 바람과는 다르게 라미로는 함대를 살짝 보여줬다가 내뺄 생각이었다.
라미로가 필립3세에게 받은 명령은 단지 견제만 하라는 것 뿐이었다.
필립3세는 아라곤이 가지고 있는 함대를 부술 생각이 없었다.
배도 배려니와 선원들이 필요했던 필립3세는 가능하면 아라곤이 움직이고 있는
카탈루냐소속 전함과 수병들을 고스란히 스페인으로 병합하고 싶어했다.
“꽝”
흑색화약이 터지며 주변을 온통 연기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라미로함대가 만들어낸 함포소리와 연기는 멀리 있는 곤살레스 함대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라미로가 미쳤나 ? 아님 사거리 시험이라도 하는 건가 ?”
곤살레스는 족히 20마일은 떨어져 있을 라미로 함대에서 쏘아댄 함포에, 라미로 함대가 출항시에
보여주었던 행동에 가지고 있던 의구심이 점점 더 커져 갔다.
“라미로가 이끄는 함대가 몇 척이나 되는 것 같은가 ?”
“대략 20척 이상인 것 같습니다.”
마스트에 올라가 있던 자의 보고가 입을 통해서 곤살레스에 전해졌다.
곤살레스는 20척이란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함대는 기껏해야 완전한 군선이라 할 수 있는
갈레온선은 10척이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상선을 급히 개조하여 임시로 무장을 강화한
소형선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함포사격에 가담하지 않은 함을 감안하면 더 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면 해볼 만 하다.”
초기의 가졌던 호승심이 반감되긴 했지만 곤살레스는 최소한 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단 바다에 나온 이상 곤살레스는 이곳 해협에서 라미로의 북진을 막아야 했다.
이곳이 뚫리면 아라곤의 제1의 무역항인 발렌시아가 그대로 공격을 당하게 되고
바르셀로나 함대가 구원오기 전에 초토화 될 수 있었다.
“베르세오님에게 지원 요청하고, 갈레온선은 전방을 향해 함포 발사”
라미로 함대에서 뿜어져 나온 함포에 행여 수병들이 겁을 먹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
곤살레스 역시 이쪽에서도 함포를 발사하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꽈 과광”
"명청한 놈들”
팔라우 마누엘 포르투갈 함대 사령관은 기함인 갈레온 1급함 리스본호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25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는 정서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스페인 군함들은 모두 항구를 떠나지 않고
대기 중이었다. 대신 리스본에 정박중인 포르투갈 함대가 마요스카섬을 크게 우회하여
바로 바르셀로나로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리스본에서 오일이면 당도할 거리를 거의 15일이나
걸려 현지점에 도달했다. 마누엘은 지금쯤 나오곶에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을 카탈루냐 함대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부관 바르셀로나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
“대략 50마일 정도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사령관님”
펼쳐진 해도를 바라보던 부관이 바로 대답했다. 마누엘은 이쯤에서 전투준비를 해 놓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50마일이면 해안가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언제라도 바르셀로나에 있는 베르세오 함대와 부딪힐 수 있었다.
“명령 즉시 함포를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도록. 전방에 정찰선을 투입한다.”
100톤이 약간 못 되는 스쿠너선 하나가 마누엘 함대 진영에서 앞으로 쭉 나갔다.
아라곤 왕국의 수도인 사라고사에 있어야 할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막강한 근위대가 사라고사를
향해 움직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왕궁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거처를 옮겨왔다.
육군이 변변치 않은 아라곤으로서는 사라고사가 고립될 경우 페르난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우려한 그가 선택한 곳이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에 아라곤 왕이 기거하면서
아센시오 수비대장은 하루도 마음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더군다나 오늘 아침에는 항구를
지키던 베르세오 함대 마저 발렌시아로 움직여서 그는 좀 채로 잠을 이루질 못했다.
항구가 바라다 보이는 집무실에 앉아서 바라보는 항구는 조용하기만 했다.
“항구에 대규모 함대가 나타났다.”
언제 선잠이 들었던지 아센시오가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문이 열리더니 오반도가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
게슴츠레 눈을 떴던 아센시오는 비몽사몽간에 오반도를 바라보았다.
“리스본함대가 항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대략 30척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오반도는 탁자에 놓여진 물잔을 들어 컵에 물을 가득 채워서 아센시오에게 넘겨주었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신 아센시오가 의자에서 일어나 두 손을 높이 쳐 들었다.
새벽녘에 선잠을 자서 그런지 온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급한 명령을 기다리던 오반도의 마음과는 다르게 아센시오는 느긋하기만 했다.
“해안포를 준비시키고 수비대에 비상을 걸어 놓도록. 사거리에 들어오면 명령 없이도
무조건 발포해서 한 놈도 바르셀로나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도록 해.”
아센시오는 해안포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할 것 해야했다.
진정한 싸움은 상륙후 벌어질 것이고 그때까지는 시간이 충분했다. 페르난도가 대동하고 온
기병만으로도 상륙군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거기에 아센시오의 명령을 받는 수비대가
이천명이 넘었기 때문에 만약 리스본 함대가 상륙을 시도한다면 몰살시키고도 남을 전력이
바르셀로나에 있었다.
마누엘은 바르셀로나 항구의 지형을 살펴보면서 함대의 진입 대형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는 해안포를 숨길만한 지형이 거의 없다. 양안이 없는 지역의 성격상, 바르셀로나는
상륙전을 펼치기에는 안성맞춤인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돛을 내린다”
횡대로 천천히 해안가에 다가가던 마누엘 함대에서 돛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펑 펑 펑”
성급한 해안포가 불을 뿜었지만 거리가 함대에 훨씬 못 미쳤는지 포탄이 허무하게 바다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리스본호에 붉은 색 깃발이 솟아 올랐다. 4척씩 무리를 지은 함선이 일제히 해안가를
향해 캐논포를 발사하자, 방렬된 해안포를 향해 포탄이 날아갔다. 서너 차례의 함포와 해안포가
서로 포탄을 주고 받자 해안포가 하나 둘씩 파괴되기 시작했다.
“날아온다. 피해라”
해안포대를 지휘하던 올란도는 함대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바라보며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주변에 떨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엔 거의 명중탄이 나올 확률이 높았다. 뒤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하늘 높이 떠서 날아오는 포탄은 여전히 자신을 따라오는 듯 했다.
죽어라 앞으로 내달리던 올란도는 숨을 헉헉거리며 오른쪽으로 구십도 방향을 꺾어 달렸다.
“꽝”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일 없었을 올란도는 포탄의 탄착점으로 이동하면서 스스로 명중탄을
만들어 냈다. 올란도의 불운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던 리스본 함포장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주변을 정리하고 항구를 봉쇄한다”
혹시 있을지 모를 선상화재를 대비하기 위해 포 옆에 쌓아놓은 물통들이 한쪽으로 치워지고
갑판으로 수병들이 올라왔다. 마누엘은 상륙을 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빌바오 함대가 올라오면 그때 상륙해도 늦지 않았다.
일진 일퇴의 탐색전이 벌어진 나오곶 주변 해역은 베르세오 함대가 증원되면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베르세오는 바르셀로나에 리스본함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귀환하지 않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어차피 귀환하기에는 시간상으로 늦어 있었다. 항구 파괴를 막지 못할 바에야 라미로함대를 격멸하고
곤살레스 함대와 합쳐 리스본 함대를 격파하는게 더 좋을 듯 싶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 갑판에 모래를 더 뿌려라.”
며칠 동안 양쪽 함대는 어느 누구도 적극적인 전투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베르세오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지 마침내 전 함대에 전투명령을 내렸다. 정상적인 해상 전에서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점하기 위한 기동작전이 선행되어야 했지만 이 해역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북쪽에 위치한 베르세오 함대가 바람의 잇점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은 북으로 이동하는 해류의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쪽이든 장단점이 있어서 완변하게 유리한 지점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건가 ?”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어도 라미로는 베르세오가 전투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뜻 언뜻 보이는 갑판원들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필시 모래와 물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핸드 캐논 준비하고 한번 붙는다. 돛을 내려라.”
역풍을 피하기 위해 함대의 돛을 내리고 해류에 배를 맡겼다. 라미로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찍부터 들어온 카탈루냐의 실력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양 함대가 급속도로 가까워 졌다.
베르세오 함대가 숫자는 많았지만 총 함포 수는 라미로 함대가 많았다.
“발사”
순풍을 달고 단종진으로 내려오는 베르세오함대에 맞서 라미로함대는 이열 횡대로 함대를 진영을
구축했다. 단종진의 가장 앞에 선 발렌시아호를 향해 포탄이 날아갔다. 그에 맞서 발렌시아호에서
포문을 열고 대기중이던 함포가 불을 뿜었다.
“꽈광”
“함포를 선두함에 집중시키란 말야”
라미로가 방방떴다. 선두함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어야만 적의 진영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는데
발렌시아호가 두번 함포를 교환하는 사이 후열까지 파고들었다. 발렌시아호가 경미한 피해를 입고
후열을 거의 빠져나가자 라미로 함대가 양분되는 듯 보였다. 단종진에 노출된 측면에 위치한
라미로함대의 함에서 불길이 솟았다. 순식간에 서너척의 배가 반파되어 갔다.
“반전. 적 기동 차단.”
라마로는 함대가 양분되는 것을 우려해서 함대를 혼전으로 몰아갔다. 횡렬진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해 볼만 했다. 제일 먼저 반전을 한 라파엘호가 단종진으로 뛰어들었다. 라파엘호의 비크해드가
발렌시아호 뒤를 따르던 기엘호 측면을 뚫고 들어갔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마스트가
휘청거리자 마스트 꼭대기에서 저격을 준비 중이던 사수가 바닷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빠빠빠빠방”
충돌의 충격이 체 가시기도 전에 양쪽에서 연신 함포가 터져 나왔다. 함포 배열상 불리한 라파엘호가
두세배의 함포를 더 얻어맞아 좌현이 걸레조각처럼 찢겨져 나갔다. 머스켓 총을 든 병사들이 엄호하는
틈을 타 라파엘호 선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기엘호로 타고 넘어갔다. 연신 터져 나오는 함포를 맞은
라파엘호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침몰하기 시작했다.
단종진의 중앙으로 치고 들어온 라미로 함대에 의해 진격로가 막히자, 베르세오는 함대의 급속 변침과
고속 기동으로 대응하며 일열 단종진을 이열 단종진으로 변환시켜 나갔다.
측면 함포에 노출된 상대함은 좁은 해역에서 여지없이 깨져 나갔다.
“속도를 더 내라. 이탈한다.”
자칫 원형으로 포위될 것을 걱정한 베르세오가 함대 이탈을 명령했다. 2척을 침몰시키고 10여척을
반파시킨 베르세오는 그만 해역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직 빌바오 함대와 리스본 함대가 견제한
스페인에 비해 실질적인 아라곤의 주력함대를 이끌고 있는 베르세오는 여기서 더 이상 피해를 입으면
안되었다. 베르세오함대가 일제히 노를 내려 전투를 중지하고 앞으로 내 달렸다. 돛을 내려놓은
라미로 함대가 함포를 두 번 일제 사격하는 사이 베르세오 함대는 진영을 완전히 빠져 나왔다..
“돛을 올려라”
속도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하자 라미로는 내렸던 돛을 올렸다. 순풍에 돛이 팽팽해지며 기함에 속도가
붙었다. 기함 뒤편으로 십여척이 돛을 올리며 뒤따라왔지만 반파 당한 함들은 자신의 진영에 댕그라니
남아있는 기엘호에 천천히 다가갔다. 라파엘호 선원들을 몰살시키고 해역을 이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기엘호가 사방에서 밀려오는 적함에 포위당했다.
“백기를 올려라”
기엘호 함장은 더 이상 싸움이 무의미했던지 백기를 올리게 했다.
하지만 동료함인 라파엘호의 침몰을 지켜보았던 미구엘 함장은 기엘호의 항복을 받기를 거부했다.
“전 함포를 집중하여 기엘호를 침몰시킨다”
살아남은 함포들이 기엘호를 향해 불을 뿜었다. 10척의 반파된 함에서 발사된 포탄에 노출된
기엘호에 불꽃이 튀었다. 백기를 내걸고 갑판에 앉아있는 수병들이 사방으로 튀는 나무 조각에 맞아
피를 흘렸다.
“꽈광”
기엘호가 또다시 두번째 포격에 노출되면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라파엘호와 충돌로 생긴
선체 침수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기엘호의 선두가 들려지더니 그대로 침몰했다.
추격전 끝에 양 함대가 다시 합쳐지며 포격전이 전개되었다. 나오곶에서 알리칸테까지 내려오면서
해상전은 베르세오 함대를 중앙에 두고 양옆에 라미로함대가 위치해서 함포전을 해나가는 양상으로
변해갔다. 해전이 횡대 함포 전으로 진행되자 단위 함당 함포 수에서 밀린 베르세오 함대의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화포탄 발사”
베르세오가 가지고 있던 비장의 무기인 화포탄이 묶여진 화살이 갑판으로 이동되었다. 머스켓 포수들이
활을 들어 화살을 재고는 적선의 돛을 향해 화살에 불을 붙여 발사하기 시작했다. 불화살를 응용한
화포탄이 돛에 박히며 폭발하자 돛이 불타올랐다.
“돛을 내려라. 물 준비”
중간중간의 배들이 속도를 줄여 버리자 라미로함대의 속도가 일시에 죽었다. 그 사이에 베르세오
함대는 해역을 빠르게 이탈했다.
“젠장. 다 잡은 놈을 놔 주다니”
라미로가 고물에서 멀어져가는 베르세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다 잡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피해선박으로 보면 라미로함대의 참패였지만 도망가는 쪽은 베르세오였다.
“누가 불화살을 쏠 줄 알았습니까? 요즘 같은 때 불화살을 쏘다니.
하지만 이로서 아라곤 함대는 끝장난 것 아니겠습니까 ?”
“그건 불화살이 아냐 ? 언제 저런 걸 만들었을까 ? 서둘러 예비 돛을 이용해 추격에 나선다.”
라미로는 쫓아가 누가 죽든 끝장을 내고 싶었다. 꼬리를 확실히 자르지 않으면 언제나 뒤가 구리게
마련이었지만 그의 명령은 바로 취소되었다. 일항사의 말대로 아라곤 함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함대도 수리가 필요했다.
“젠장. 발렌시아로 들어간다. 저 놈들은 갈 곳이 없지 !”
라미로 함대 중 4척이 침몰하고 10척이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반면 베르세오는 그보다 많은
열척이 침몰했지만 그 중 대형전함은 한 척에 불과했다. 질적으로 완패에 가까웠다.
페르난도는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가 스페인 함대에 의해 봉쇄당하고, 믿었던 베르세오 함대가
참패하여 도망쳤다는 소식에 서둘러 다음 일을 진행시켜나갔다. 아라곤 왕국이 가지고 있는 육군은
지금 바르셀로나에 와있는 기병대가 거의 전무나 마찬가지였다.
지방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돌볼 만큼의 가병만을 유기하고 있을 뿐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는 필립3세가 이끄는 카스티야 군대가 대외적인 군사력 투영을
대신 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블라스코이바데스는 사라고사를 지킬만한 병력이 없습니다..”
아센시오는 사라고사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바르셀로나도 그리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리스본함대가 상륙을 하지 않고 항구를 봉쇄만 하자 실망한 아센시오는 필요병력을 남기고
사라고사로 가는 것을 건의하고 나섰다.
“사라고사는 괜찮아. 성이 견고하기 때문에 몇 달은 버틸 수 있다.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충분하다고 그 안에 대책을 강구해 내야하는데…”
내년 봄이 문제였다. 파종시기를 넘겨 파종을 못하면 아라곤은 식량난에 빠질 수 있었다.
페르난도는 자신이 손을 벌릴 곳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베르세오는 당연히 나폴리나 시실리로
움직였을 것이고 그곳에서 병력을 모아 올 것이지만 그밖에는 없었다.
필립3세를 거슬리며 자신을 도와줄 왕국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자네가 아비뇽에 다녀와야겠어. 그곳에 계신 황후를 만나서 도움을 청해봐.
일이 잘되면 나중에 우리도 황후를 도와주겠다고 하고”
페르난도는 아라곤왕국의 총신인 마그느스 드 라 가르디를 바라보았다. 가르디는 아비뇽에 있는
황후가 누구인지 생각해 냈지만 자신이 알기로는 지금 황후는 그곳에 없었다.
“마리 드 메디시스 황후께서는 지금 마르세이유에 계십니다.
하지만 그 분께서 선뜻 도와 주실지 의문입니다.?”
“가르디 !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알겠나 ?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라곤은 사라진단 말야.”
물론 가르디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아라곤을 도울 수 있는 곳은 그곳 밖에 없었다.
영국은 아라곤을 도울 이유가 없었고, 그렇다고 이교도 국가인 터키나 대한제국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힘을 가진 사람은 루이13세의 어머니밖에 없었다.
그녀도 아들에게 강제로 궁정에서 쫓겨난 후부터, 파리로 재입성하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둘이 힘을 합친다면 둘 다 원하는 바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난 여기서 재상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소. 잊지 마시오.
지금도 우리의 백성들이 필립3세의 기병대에 의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시베리아 횡단열차
오일에 한번 출발하는 천인성발 의주행 증기기관차가 천인성역을 출발하기 위해 기적을 울려댔다.
기적소리에 화차에 실려있는 손님들이 움찍거리고 자꾸 객차 벽을 차는 바람에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있는 승무원들이 곤혹스러워 했다.
“참내. 저놈의 얼룩이 때문에 고생께나 하겠네”
종풍영이 맡은 특별한 손님은 젖소들이었다. 우량한 놈들만 골라서 매입해온 홀수타인종 젖소 30마리가
화차당 4마리씩 들어 있었다. 새끼부터 어미소, 숫놈까지 다양한 놈들로 조선에서 일차 정착을 하고,
10년 에 대만이나 호주쪽으로 종자를 퍼트릴 계획이었다.
일차분 30마리를 시작으로 일년동안 총 300마리를 수입하기로 한 축산국은 직원을 네덜란드와
스웨덴으로 파견하여 우수한 종자들을 사들였다. 화차 안에는 매서운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특수 난방장치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각 화차를 연결하는 부위에 커다란 보일러에서는
뜨거운 물을 계속해서 화차안으로 순환시켰다.
“호강이야 호강”
종풍영이 보일러에 기름이 떨어졌나를 확인하면서 연실 투덜댔다.
“삐익 삐익”
기적소리가 두번 울리더니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흘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종풍영은 하늘을 바라보며 폭설로 길이 막히지만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종풍영이 옷에
소똥 냄새가 배지 않았나 싶어 연신 킁킁대며 화차문을 닫고 승무원 전용칸으로 옮겨탔다.
/// 질문에 대한 답변 ///
1. 유선반장님 질문 :
대한제국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단기 3947년에 공표된 종교법에 대한제국의 종교에 대해
기술되어 있습니다. 대종교를 국 교로 해볼까도 생각했었는데 아는게 있어야죠 ?
2. 카이로스님 질문
이른감이 없지않아 있지요? 님께서 지적하셨듯이 당시엔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약했다고
보여져서 설정했습니다.
반조선 감정이나 민족감정을 지양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이 모색될 것입니다.
폴란드의 다음 왕이 지금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병합할지 자의로 합칠지 고민중입니다.
단기 3955년(1622) 늦가을
메세타고원을 넘어온 이트르비가 이끄는 기병 보병 혼성부대가 사라고사 도시를 향해 진군을 계속했다.
필립3세의 근위대가 시시각각 사라고사로 몰려온다는 소식은 사라고사주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라곤 왕국은 겉으로는 페르난도왕의 지배를 받는 듯 보였지만 그 속에는 지주연합조직과
도시 상인 조합간의 암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페르난도를 후원하던 도시 상인조합은
모두들 사라고사로 몰려드는 반면 지주연합 조직은 이트르비를 반기는 행태를 보여 주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탕게르에 도착한 근위대는 탕게르 영주로부터 융성한 대접을 받았다.
“이트르비 장군.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라고사를 없애버리심이
좋을 듯 합니다. 페르난도왕도 폐위 시켜서 멀리 쫓아 버려야겠지요 ?”
도시 상인들의 기세에 눌려 기득권을 대부분 상실한 지주들은 과거가 그리웠다.
지금의 영주 할아버지대만 해도 아라곤 왕은 지주 귀족을 권리를 보호할 것을 맹세하는 의식을
치루고 나서야 왕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칼탈루냐의 상인과 결합한 왕이 맹세를 깨고 지주귀족들을 속박해 오자
내란이 한차례 벌어졌고 지주귀족 군대는 금력에 움직인 용병단에 무차별 깨져나갔다.
그 이후부터 지주귀족은 아라곤에서 제2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이지요. 당연한 말씀을… 요즘 모리스코나 콘베르소들은 어떻습니까 ?”
이트르비는 필립3세로부터 온 새로운 명령서를 접고는 영주가 채웠던 술잔을 들었다.
필립 3세는 피해를 최소화하며 안정적으로 아라곤 자치 지역을 흡수해야 한다는 요구를 해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아트르비는 이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다.
“교구장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골치 아픕니다. 교회에 나올 때만 기독교행세를 하고
뒤돌아서면 이교도 생활을 합니다. 콘베르소놈들은 유대인 비밀집회를 하고 있는 듯 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데 워낙 은밀히 움직여서 잡아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비밀집회라고요 ?”
이트르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대인에서 개종한 콘베르소난 이슬람교에서 개종한 모리스코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독교도들보다 적게 먹고 많이 일하며 저축을 생활화 했다.
그들의 자본이 상업자본으로 흘러 들어가 도시상인연합의 밑바탕이 되고 있었다.
가르디가 자신과의 면담을 요청한다는 연락에 메디시스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아들이며 정적인 루이 13세가 필립3세의 딸인 얀과 결혼을 했고,
그녀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필립 3세의 황태자와 결혼을 했다.
크림색피부에 더할나위 없는 미모로 앙리4세를 사로잡긴 했지만 불행하게도 메디치가의 후손답지 않게
머리는 텅빈 메디시스는 아무리 고민을 해도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때 리슐리외경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자문이라고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리슐리외는 파리에 다녀온다고 하고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파리에 사람을 보내서 리슐리외경을 오라고 하던지 해야지”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올리브 목욕이나 할 생각으로 메디시스는 하녀를 불러 목욕준비를 하도록
시켰다. 근 육개월만에 하는 목욕같았다. 메디시스가 욕실에서 알몸으로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할 무렵 가르디가 탄 마차가 양옆으로 곧게 뻣은 가로수가 심어져 있는 길을 따라
대저택으로 들어왔다. 늦가을이라 가로수들은 생기를 잃고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메디시스 황후폐하께 아라곤의 재상 가르디가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가르디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가 정중히 부탁을 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벽에는
앙리4세와 메디시스 일가의 초상화가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루이13세, 엘리자베스, 크리스틴의
어린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가르디는 집사의 말에 초상화에서 눈을 떼었다.
“지금은 목욕중이십니다. 목욕이 끝나면 말씀드릴 테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러지요”
메디시스의 목욕을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가르디는 얼마를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주위에 어둠이 내려 앉으려 하자 기다림에 지쳐있었다.
“아 가르디 재상께서 오셨군요”
이층에서 청랑한 목소리를 내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메디시스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목욕을 마치고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하느라 몇 시간을 보낸 것이 무색하지 않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49세의 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가르디는 일어나 무릎을 꿇고는 메디시스의 손등에 가겹게 입을 맞추었다.
“평안 하셨습니까 ? 지척에 계시는데도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잘 지내고 있지요. 못난 놈 때문에 휴양이나 하고 있으니 갑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만나려 오셨나요 ?”
“페르난도왕의 전갈을 가져왔습니다. 저희 아라곤 왕께서 황후폐하께 드릴 부탁이 있으십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도와 주시면 기필코 은혜를 갚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호호호. 저 같은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어야죠? 그래 페르난도왕이 무엇을 부탁하시던가요 ?”
메디시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툴롱에 있는 함대를 잠시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툴롱함대라는 말에 메디시스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껏해야 프로방스지역의 기병대를 보내달라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다.
“툴롱 함대는 글세요… 아 목욕을 했더니 배가 고프군요.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 하지요”
고진영은 몽마르뜨 언덕을 오르면서 연신 고개를 내둘렀다. 이제는 좀 적응될만도 한데 파리는
너무나 지저분했다. 길거리는 아무렇게나 버린 쓰레기로 넘쳐 났고, 돼지들이 싸놓은 배설물들로
가득찼다. 하수구가 없는지 파리 시민들은 길거리에 집에서 나오는 온갖 오물들을 쏟아내었다.
여름에 파리 뒷골목을 걷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해야만 할 정도로 심한 악취가 진동했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옆자리에 앉은 고진영 소령의 투덜대는 소리에 최우석이 파리 생활 선배로서 한마디 조언을 해 주었다.
“앞으로 계속 그럴 테니 빨리 적응하십시오. 지금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여름에는 아주 죽이죠. 그땐 마차밖으로 나가기도 힘들지요”
여름이란 말에 고진영은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지금이 겨울 초입인 데도 이러는데 여름이라면 쉽게 상상이 갔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지요”
고진영과 최우석이 마차문을 열고 내렸다. 순교자들의 시체를 쌓아놓았다는
이 언덕은 몽블랑이 들어서기 전까지 파리 귀족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만년설을 간직한 몬테 비안코산 그림이 몽블랑을 방문한 두사람을 반겼다.
몽블랑 살롱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퀴데리양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몽블랑은 스퀴데리양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대한제국에서 파견된 이유정이 스퀴데리를 움직였다.
“띵띠띠딩”
친숙하지만 파리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야금 소리가 울려퍼지자,
고진영의 눈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아갔다.
“마리 ? 손님 오셨어요 ?”
스퀴데리양이 소리치자 마리라고 불려진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이유정의 눈과 마주치자 고진영이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퀴데리. 손님을 2층으로 모셔”
스퀴데리의 안내를 받아 이층 맨 끝방으로 들어간 두 남자는 이유정이 들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전용방인지 방안은 서울에 있는 한 가정집 안방을 옮겨놓은 듯 했다.
“오랜 만이네요. 별일 없죠 ? ”
이유정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우석도 몽블랑을 방문한지가 한 달은 넘은 것 같았다.
“별일이 있겠습니까 ? 인사하시지요 ? 여기 이분은 이번에 4군에서 파견된 무장관 고진영소령입니다.
그리고 여기 아리따운 아가씨는 몽블랑 주인이시며 파리지구 정보 수집 담당자이신 이유정입니다.
여기서는 마리로 통하죠. 주인이지만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죠.”
“반나서 반갑습니다.”
이유정과 고진영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자자. 앉자요. 이러다 두분 눈 맞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최우석은 첫 대면에 서먹해 하는 두 사람을 위해 농담을 했지만 더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
이유정은 정보계의 베테랑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새로운 남부 소식이 있습니까 ?”
“알고계시겠지만, 필립3세가 아라곤을 공격했습니다. 그 일로 복잡합니다. 올리바레스가 루이 13세를
만나고 갔다는데 프랑스가 간섭하는 것을 염려한 것 같습니다. 메디디스의 사자가 리슐리외경을 만나고
갔고, 영국 황태자와 루이 13세의 누이와의 결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말로는 필립3세의 근위대가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는군요.
대량 학살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는데도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런 것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더군요.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고 오히려 옹호하는 쪽이 더 많습니다.”
유럽의 제국들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스웨덴 공국들은 모두들 결혼을 통환
혈연관계로 얽히고 설켜 있어서 계보가 복잡했다. 제국의 왕이나 이름있는 제후들은
모두들 한 집안 식구나 다름없었지만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리슐리외경이 조만간에 파리를 떠나겠군요. 그전에 한번 만나봐야 되겠습니다.”
이유정이 말한 내용은 대부분 최우석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메디시스가 리슐리와경을 호출했다는 소식은 금시초문이었다.
“집안을 뒤져라”
아라곤왕국 내륙 도시인 세고비 들어온 스페인 군인들이 한 허름한 집안으로 들어가
안에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모두 내밀고 구석구석을 수색해 나갔다.
길거리로 쫒겨난 사람들은 어른 애들 할 것 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 무릎을 꿀려졌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것들이 있나 잘 찾아보고, 이상한 물건이 있으면 다 끄집어내라”
책임자 인듯한 자가 소리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이 사방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지만
별 특이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책임자는 가슴에 왼손을 집어넣고는 뭔가를 꺼내더니, 오른 손에 들린 도끼로 바닥을 찍어 내렸다.
방바닥이 움푹 파지자 가슴에서 꺼낸 것을 떨어뜨렸다.
“이건 뭔가 ?”
책임자가 바닥을 가르키며 소리치자, 한 병사가 책임자가 떨어뜨린 것을 들어 올렸다.
쌓여진 가죽을 펼치자 안에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문서가 여러 장 있었다.
책임자 눈빛을 살피던 병사가 소리쳤다.
“찾았다.”
“뭔가 ?”
문서를 받아 든 책임자는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는 종이 한장을 들어 올렸다.
“잘 했다. 병사. 이만 가자. 이거면 충분하다. 너는 지금 즉시 발렌시아 주교님에게
이걸 전해드리고 병력을 더 끌고 와서 여기에 쓰여 있는 자들 모두를 잡아들여라”
천천히 밖으로 나온 책임자는 몰려있는 군중들을 향해 다른 종이들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보시오. 여기 있는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무엇을 했는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에서는 선량한 기독교인들 처럼 행동하면서 집에서는 이교도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수하고 선량한 기독교인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러운 피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격리되어야 마땅합니다. 저 놈들을 성당으로 끌고 가라. 종교재판에 기소해야겠다.”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책임자는 랍비로 의심되는 자를 기소할 수 있게 되어 너무도 기뻤다.
사무엘은 자신의 집에 저런 것이 있을 리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등뒤에서 가해지는 매질에 입에서는 비명소리만이 나왔다.
단기 3955년(1622) 겨울 신시.
을지소는 초대 천인단장이 잠들어 있는 신시에서 초자연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천인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이 연구소는 수송선단이 어떻게 이 시대로 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으며, 김철민이 신시로 이사 오면서 연구소 소장직을 맡았다.
김철민은 이름을 을지소로 바꾸는 것이 싶지는 않았지만, 천인단에 처음으로 청탁을 넣어 관철시켰다.
항상 따라다니는 아버지에 대한 수식어는 김철민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어서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유롭고 싶어했다.
“들어오세요”
방문을 두드린 비서가 녹차 두잔을 들고 들어왔다.
지금 을지소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해서 모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쥬신 대륙엔 언제 돌아왔나 ?”
“한달 되었습니다.”
“이제 뭐 할건가 ?”
“글세요. 생각 중입니다. 그래서 상의 드리러 선생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한 칠년되었지 ? 아버님께서 많이 기뻐하시겠군. 아버님은 건강하신가 ? 못 뵌지 오래 되었군”
“올해 영혼의 안식처에 계곡에 들어갈까 하십니다.”
을지소는 깜짝 놀랐다. 세월의 힘은 무서워서 아무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이 있듯, 이제 쥬신대륙은 앞에 있는 청년에 의해 한바탕 개혁의 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벌써 ?”
“아버님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선생님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
은하이는 을지소보다 나이가 두살이 더 많았지만 은하이는 을지소를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을지소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엄청난 돈을 지불 하면서까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만큼 베풀어야겠지.
뭐 지금처럼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지 않겠나 ?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으면 사라지는 게 역사의 법칙이야. 무슨 소리를 듣고 싶은가 ?”
을지소는 모든 것을 솔직히 말을 해주고 싶었다. 은하이가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 지 알만 했다.
“노친네들은 지금 이대로 살기를 원하고, 젊은이들은 대한제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길 원합니다.
두 부류다 대한제국과 통합하는 것은 반대하고 있고요. 하지만 대한제국은 그럴 것 같지가 않더군요.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되겠습니까 ? 선생님 ”
“어려운 이야기군”
을지소는 찻잔이 차갑게 식어버리자 비서를 불러 다시 뜨거운 차를 주문했다.
“분명한 것은 대한제국은 자네 부족이 군대를 가지는 것을 원하진 않을 걸세.
무리하게 그걸 추진한다면 군대를 동원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군대만 가지지 않는다면, 지원을 받을 수도 있을 거야 굳이 대한제국과 통합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지.”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비판이 일지 않겠습니까 ?”
“그건 자네가 결정해야 할 일이지. 그리고 이 대륙 동쪽에 있는 도둑놈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거야.
물론 대한제국도 자네들 입장에서 보면 도둑놈일지 모르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진 몰라도.
자네는 비교적 선량하지만 도둑임에는 틀림없는 대한제국과 위험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네.
뭔가를 얻어 내려면 말야. 이게 자네 스승으로서 이야기 해줄 수 있는 거네. 그리고 난 이 대륙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만을 바랄 뿐이고, 자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만 어떨지 모르겠군.
부디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찾아보게나.”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은하이는 을지소가 며칠 쉬었다 가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날 저녁 신시를 떠났다.
을지소가 내어준다는 자동차도 마다한 은하이는 자신을 따라온 전사들과 함께
오랜만에 광활한 대륙의 밤을 만끽하며 극동으로 이동했다..
단기 3955년(1622) 겨울 이스탄블
“땡땡땡”
오랜만에 무스타파의 하렘에 금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렘에 있는 세계 각지에서 사드리거나
자발적으로 들어온 여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렘의 주인을 알현할 준비를 서둘렀다.
“폐하 납시오”
환관의 우두머리가 외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무스타파가 모후와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렘으로 들어섰다. 황금 양탄자가 깔려있는 길을 따라 들어온 무스타파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여인들 사이를 말없이 돌아다녔다. 여인들은 양손을 가슴위로 올려놓은 채
무스타파의 간택이 떨어지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하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황제의 간택을 받아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을 해야만 했다. 그렇치 않으면 죽을 때까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 하나 찬찬히 뜯어보던 무스타파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천천히 모후에게로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뭐라 했다. 모후는 무스타파의 말에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무스타파가 고른 여인을 찾았다.
그날 밤 무려 4백명 중에서 선택된 한 여인이 황금장식으로 휘황찬란한 기다란 복도를 지나
무스타파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여인을 따라온 환관장이
오늘 날짜를 장부에 기록했다. 만약 임신을 한다면 출산일을 예측하고 그 아이가 오늘 황제에 의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에메, 11월 25일”
무려 4년 동안 매일 목욕을 하며 피부를 가꿔온 여인은 일명 사랑의 학교라는 곳에서 온갖 기교까지
연마하고 오늘을 기다려왔다. 그 결실의 순간을 맞이한 여인 못지않게 침실에서 여인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무스타파 역시 오늘 밤은 유독 설레었다.
라마단 기간이 끝나고 그가 처음으로 찾은 하렘이었다.
“왜 이렇게 안오는 거야 ?”
방안을 왔다 갔다 하던 무스타파는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떨구고 여인이 들어오자 곧바로 다가가
우악스럽게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오랜 기다림에 비해 너무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밤을 생각하며
자리에서 여인은 살며시 일어나 앉았다. 여인은 침실로 들어온 빛 자락을 어루만지며 자고 있는
무스타파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오십도 넘지 않은 무스타파는 노인네가 다 되어 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는데. 벌써 잠이 드시다니’
아이를 갖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관계를 맺어야 할 것 같았지만 야속하게도 상대방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이는 못 속이는지 무스타파는 단 한번의 정사도 힘에 부치는 듯 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다. 오른손으로 배꼽부위를 문지르던 여인은 아들을 낳아 황후가 되는
환상에 빠져 들었다.
“꽝.따닥”
“폐하”
여인의 환상은 조용하던 새벽에 다가온 요란한 소리들과 황급히 달려와 외치는 환관장의 소리에
무참히 깨져 나갔다.
“폐하. 일어나십시오”
황급한 목소리는 무스타파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여인은 마침내
무스타파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깨워야 할 것 같았다.
“폐하. 일어나십시오. 환관장이 급한 용무가 있는 모양입니다.”
몇 번을 흔들고서야 무스타파가 일어났다. 잠에 취한 무스타파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짜증이 더럭 났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를 빼고는.
“폐하. 일어나십시오 ! 반란이옵니다.”
“뭐라고 ?”
“지금 뭐라 하였느냐 ? 속히 들어와라”
화들짝 놀란 무스타파가 소리치자 환관장이 허리를 푹 숙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알몸이던 여인이 급히 천을 끌어와 몸을 가렸다.
“반란이옵니다. 속히 피하셔야 하옵니다.”
“반란이라니 ? 누가 반란을 이르켰단 말이냐 ? 무할리비는 지금 어디 있느냐 ?”
항상 자신과 움직이던 친위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반란이 일어났다면 가장 먼저 달려와야 할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게. 바로 그놈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이곳을 포위하고 있어서 위험합니다.
속히 피하십시오”
환관장의 말에 무스타파는 어이가 없었다. 불과 일년 전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터키제국 술탄 칼리프자리에 오른 그가 재집권 일년 만에 다시 또 권좌에서 밀려날
운명에 처해 있었다. 두번째 맞는 위기였다.
“좋다. 이놈들. 가자”
무스타파는 일년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번과 같은 일이 있었지만, 무할리비의 도움으로 바로
반란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면 언뜻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떠오르지 않은
것뿐이다. 서둘러 옷을 입고는 하렘에 설치된 탈출구를 통해 하렘을 빠져 나갔다.
무할리비가 이끄는 반란군이 하렘에 배치된 경비대를 전멸시키고 침실로 들이 닥쳤을 때는
이미 보스포로스 해협에 배를 띄우고 있었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마르마라해는 타르한의 명령에 의해 출동한 전선들로 가득 찼다.
무스타파를 잡기위해 지나가는 모든 선박을 검문 검색하느라 해협을 봉쇄했지만
도망친 무스타파를 찾을 수는 없었다. 무스타파를 실은 조각배는 무할라비와 타르한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흑해로 들어가 있었다.
사이레 대한 제국 흑해 해군기지
수에즈에 있는 지중해 함대 사령부에서 떨어져 나온 흑해 분함대가 기항지로 삼고 있는 사이레
해군기지에는 건조 선령 15년이 넘는 증기 포함 세척이 주둔중이다. 이 기지는 터키와 조약을 체결하고
조약에 의거해서 대한제국이 만든 해군 기지로 흑해에서 발생하는 해난과 해적을 방비할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해군기지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아침을 맞이했다.
“뜨뜨 뜨뜨뜩 뜨뜨뜩”
무선 전문이 찍히는 소리가 연속해서 통신실을 울렸다. 꼬박 밤을 세운 당직사관 황태현 중위는
멀리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리에 눈을 떴다. 밀려오는 잠을 견디기 가장 힘든 시간이었지만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고 소리를 울려대는 타자기로 눈길을 돌렸다.
한참 동안 전문이 들어왔었는지 대충 10여줄 이상이 풀려있었다.
앉아있는 의자를 밀어 타자기로 다가간 황중위는 종이를 뜯어내 내용을 읽고 눈을 크게 떴다.
“일급 상황발생. 금일 새벽 천사호 발생. 전 기지에 03발령…….”
‘천사호가 뭐지 ?’ 생소한 문구에 의아해 하며, 강중위는 서둘러 기지 사령관과 연결된
직통전화를 들어 올렸다. 몇 번 신호가 가더니 반대편에서 잠에 완전히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뭔가 ?”
“충성 황태현 중위입니다. 일급상황입니다. 천사호 발생, 그리고 경계발령 3등급 조정….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언제 ?”
“오늘 새벽 입니다.”
“일단 경계발령부터 내려. 바로 갈 테니”
어느새 사령관의 목소리는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와 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야간 당직사관은 사령관의 권한을 일부 위임 받아,
사령관 부재시 곧바로 사령관 대리로 상부명령을 실행시킬 수 있었다.
황태현은 지중해 사령부에 더 이상 반복 전문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의 수신확인 전문을
보내고 나서 전 기지에 비상을 걸었다.
비상벨 소리가 작지만 충분한 소리를 울리며 다른 날보다 한시간 먼저 기지를 깨웠다.
“저긴가 ?”
“그렇습니다. 폐하. 일단 저곳으로 몸을 피하신 후 지방 제후들과 연락을 하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놈들도 여기는 들어오지 못 하겠지!”
무스타파는 가장 안전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이레 대한제국 해군 기지로 배를 몰았다.
삼선항으로 움직일까 생각하다 그곳이 타르한의 영역임을 깨닫고는 무스타파는 일단 사이레를 거쳐
내륙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터키 제국의 내정에는 관계하지 않는 대한제국이 지금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항구 내에 정박중인 배들이 시커먼 연기를 내 뿜으며 자신을 반기는 듯 했다.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 한다 ?”
무스타파는 황제가 이런 꼴로 아침 일찍 동맹국 해군기지를 사전 연락도 없이 방문하는 것에 대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을 지나가다가 들렸다고 하심이 ?”
환관장이 말을 해 놓고도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도망쳐 나왔다고 사실대로 이야기 할 수도 없었다.
사이레 해군기지 사령관인 정병선 대령은 기지 안으로 무스타파가 탄 선박이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에 이마를 집었다. 천사호 사건은 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였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터키인들끼리 알아서 다 처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스타파가 이곳에 있으면 싫든 좋든
정병선은 터키제국 쿠데타의 중심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제국의 황제신데 영접은 해야겠지. 당직사관 천사가 이곳으로 왔다고 사령부에 알리게.
젠장.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거야 ? 그리고 전 경비병력을 외곽에 배치하고 포함을 출동 시켜서
항구 외곽을 봉쇄하도록. 외박 나가 있는 애들은 내버려둬. ”
황중위는 지금쯤 따뜻한 잠자리에 들어갈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날샌 것 같았다.
정대령이 나가자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욕을 해댔다.
“이런 시팔”
“방금 사령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튼 대한제국 사이레 해군기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병선은 부두에 들어온 배위에 서있는 무스타파 황제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손을 내렸다.
환관장이 먼저 뭍으로 오르고 무스타파가 배에서 내렸다.
무스타파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를 하는 사령관의 말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처 영접 준비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상황이 상황이지 않는가?”
“이쪽으로 오시지요. 일단은 누추하지만 방 하나를 치워 놓았습니다.”
정병선대령의 안내를 받으며 기지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이층에 있는 귀빈용 객실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경비병이 경례를 하고 문을 열자 일행이 안으로 들어갔다.
귀빈용 방은 최고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풍스럽게 치장이 되어 있었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폐하 ?”
“괜찮네. 좀 쉬고 싶은데 !”
“알겠습니다.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저기 있는 빨간 단추를 누르십시오.
저와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대령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무스타파가 침대 위에 앉았다. 꿈만 같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일단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움직여야 했다. 이곳도 지금 당장은 안전할 지 모르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좀더 믿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배은망덕한 무할라비를 처단해야 했다.
정대령은 지중해 사령부에서 내려오는 다음 지침을 기다렸지만 정오가 다 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 무스타파는 잠이 들었는지 아직까지 인기척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정병선 대령은 기지 주변으로 터키 제국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외곽경비의 보고를 접하게 되자
신경질이 확 났다. 이곳에 무스타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빨리 움직일 놈들이 아니었는데도
이렇듯 상황이 급변한다는 것은 뭔가 내통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가만히 놔둬도 죽을 양반 같구만, 무슨 쿠데타는 ?”
정병선이 투덜대는 사이에도 터키 제국군은 기지로 계속해서 이동해왔다.
기지 안으로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포위당하는 것은 감내해야만 할 것 같았다.
“사령관님 ?”
“왜 ? 또 뭐야 ?”
“포함에서 연락입니다. 터키 흑해 함대가 외항에 나타났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육지와 바다로 통하는 길이 완벽하게 막혀 버렸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중해
함대 사령관인 등사평소장은 기다리라는 전문만 보내왔다. 무력 사용을 불허한다는 명령과 함께.
등사평 지중해 함대 사령관 역시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사이레 기지에 가해지는 압박은
고구려함만 움직여도 해결되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천군부와 천인단의 입장이 내려오지 않은
상태에서 쉽사리 동맹국 내정에 간여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피신해온 황제를 내 줄 수도 없었다.
등사평이 함대 출동을 꺼려하는 이유에는 고구려함의 스쿠르 결함도 한 몫하고 있었다.
기동함대의 초기 선박이 대부분 해체된 것에 비하면 고구려함은 아직도 생생해서 몇 년은
더 활약할 수 있었다. 건조 연령에 비해 기동시간이 극히 짧은 고구려함은 지금까지 한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지만 스쿠르는 그렇지 못했다.
수시로 확인하고 이물질을 제거하며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나일강에서 흘러 오는 강물과
해수가 만들어낸 천연의 자연 조건은 해조류를 비롯한 미생물을 번식시켜, 고구려함의 스쿠르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로 인해 고구려함은 그 기동성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터키함대가 사이레 외곽을 봉쇄했답니다.”
“뭐야 ?”
등사평은 사이레 기지에서 들어온 전문을 뺏어 들었다. 일이 점점 위급하게 돌아갔다.
“이스탄불이나 모스크바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 ?”
“네. 없습니다.”
“이상하군. 이상해. 어쩔 수 없지. 고구려함대의 이동을 명령한다.
카나칼리까지 이동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사이레 기지가 위협 받고 있는데 사령관으로서 자위권 발동은 당연했다. 함대가 이동하는 이틀 동안
새로운 지침이 내려지길 바랄 뿐이었다. 그사이 아무런 지침이 없으면 고구려함대는 다르달라스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지만, 마르마라해는 고구려함이 움직이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고구려함대가 움직일 무렵 모스크바의 김경환대장도 4군 3군단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다.
3군단이 출동할 일은 없어 보였지만 터키쪽과 가장 가까운 부대에 비상을 걸 필요는 있었다.
볼그라드에 주둔중인 3군단은 아조프해를 돌아서 흑해를 통해 바로 터키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여러모로 흑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스탄불 황궁
어린 소년은 주위에 무장 병력들로 둘러 쌓여 황궁으로 들어갔다. 금빛 양탄자를 밟고 한발 한발
내딛던 소년은 오른쪽에서 같이 걸어가는 어머니를 올려보았지만 어머니는 앞만을 바라보았다.
양탄자 끝에 놓여진 의자에 소년이 앉자 양 옆에 타라한과 무할라비가 섰다.
“대한제국 대사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타라한은 무할라비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한번은 부딪혀야 할 사람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한참 황제 즉위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라 하시지요”
“대한제국 함대가 카나칼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크림에서 들어온 보고로는 대규모 병력이 이동 중입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충돌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타라한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즉위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번 의식만 끝나면 명실공히 자신은 모후로서 제국을 막후 섭정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나중에 적당히 구슬리면 될 것 같았다.
“내전으로 대한제국 대사를 들어오라 하시지요”
관례보다 빠르게 진행된 황제 즉위식이 끝나자, 술타나 타르한이 대한제국 대사의 접견을 허용했다.
김영일 대사가 환관들의 안내를 받아 내전으로 들어가자 새롭게 황제가 된 무라도 4세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친위대장이 그를 맞이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대사”
“무라도 4세의 즉위를 경하 드립니다.”
“대사께서는 사이레 기지 때문에 이렇게 오셨습니까 ?”
“그렇습니다. 모후 마마. 이는 조약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부디 군대를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기지 안에 흉악무도한 무스타파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의 신변을 인수해주길 수
차례 기지 사령관에게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이 역시 조약을 어긴 것 아닙니까 ?”
김영일은 무스타파가 흉악무도한 황제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누가 터키제국을 이끌던 상관이 없었다. 다만 해군기지가 위협 받는 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제가 보고 받은 바로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옵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터키제국에서는 사이레 기지를 포위하고 압박할 수 없지 않습니까 ?”
“대사?”
타라한은 김영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니 참 웃겼다. 타라한에게 무스타파가 사이레에 있다는 정보를 제공한 자도
대한제국 사람이었다. 김영일이 지시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김영일이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
“솔직해집시다. 대사? 우리는 귀국의 공식 입장을 듣고 싶소.”
“아직 본국의 훈령을 받지 못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저희 대한제국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격 받으면 그에 적절한 대응을 할 뿐입니다.”
은근한 협박이었지만 타라한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솔직해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 정말로 이러실 겁니까 ?”
“대한제국이 어떻게 해 주길 바라십니까 ?”
“무스타파를 넘겨주십시오”
“곤란합니다. 저희 입장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방도는 없겠습니까 ?”
타라한은 기다리던 대답과 질문이 나오자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김영일은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대한제국이 무스타파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무스타파가 사이레 기지에
들어간 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제국내로 숨어 들었다면 찾기도 어렵거니와 언제 어디서 치고
나올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지만 소재가 파악된 이상 관리만 잘 하면 되었다.
“양보할 수 있는 최선은 정치적 망명입니다.”
“어디로 말씀입니까 ?”
“듣기론 신대륙에 대한제국의 영토가 있다 들었습니다. 그 중 작은 섬이 어떻겠습니까 ?”
“본국과 상의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뭘 보여줘야 본국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내야만 했다. 대한제국도 체면을 깎이면서까지
터키제국에 일어난 새왕조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
서로 마지막카드를 내보였으니 이제 협상은 거의 끝나갔다.
지금까지 대한제국의 외교관행상 무리한 요구를 한적이 없었기에 타라한은 큰 걱정이 없었다.
다만 무할리비는 연신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대제국의 대사라지만
김영일의 태도는 모후를 상대할 만한 지휘에 있지 않았고, 모후를 대하는 언행이 너무 고자세였다.
“모후께서 우리의 영토를 원하시니 저희 대한제국도 그에 합당한 섬 하나를 원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료됩니다. 모니나 크레테중 하나가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협상은 끝난 것으로 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대사”
“그럼 언제쯤 군대를 물려주실런지요”
“그건 저희 군대는 지금 훈련중 입니다. 훈련이 끝나면 자연히 주둔지로 물러날 것입니다. 너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사이레에 주둔중인 대한제국군이나 민간인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무스타파가 제국을 떠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분명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 김영일은 새롭게 권좌에 오른 무라도4세를 바라보았다. 11살의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그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았다.
단기 3956년(1623) 봄 서울
정현우 천인단장은 덕수궁 수문장의 인사를 받으며 금강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궁궐로 들어갔다.
열흘마다 한번씩 있는 행사로 제국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서 중요한 일들만 정현우는 천황에게
보고를 올렸다. 열흘전 뵌 용안보다 더 헬쓱해진 금강천황이 정현우를 맞이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폐하. 태평양에 있는 하와이섬에 무스타파를 보내고 크레테섬을 할양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이레에 있던 낡은 포함 3척을 터키제국에 넘겼습니다. 하와이섬의 치안을 무스타파가 죽을
때까지 터키제국에게 이양했습니다만 원주민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금강천황은 몸을 힘겹게 뒤척였다.
“그럼 이만 물러갈까 하옵니다. 폐하”
정현우는 더 이상 금강천황을 뵙기가 민망하여 그만 자리를 일어나려 했다.
그런 정현우를 천황이 황급히 불러 세웠다.
“총리.”
“네 긴히 할 부탁이 있네. 꼭 들어주었으면 하는데.”
“경청하겠나이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다시 자리에 앉은 정현우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
뭔지 모르지만 금강천황이 뜸을 들였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정현우는 묵묵히 천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요즘 들어 할아버님께서 자꾸 꿈에 보이시는구만 아무래도 갈 때가 멀지 않았나보이.
이보게 총리 ?”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 폐하. 황립 의료원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사오니
근시일 안에 쾌차하시올 것입니다.”
정현우는 금강천황이 못내 안쓰러웠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당신 뜻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대한제국의 황제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죽기 전에 조선의 정궁을 복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네. 가능하겠는가 ?”
조선의 정궁이라 함은 바로 경복궁을 의미했다. 임진년에 일어난 외침으로 불타버린 경복궁은
천인들이 한성을 점령한 이후로 천군부 사령부가 위치했다가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 쌓인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천인들이 가져온 물건 중에서 대부분은 각각의 연구소로 이동되거나 해체되어 다른 것을 만드는데
이용되었지만 그래도 많은 쓰레기들이 방치되다시피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경복궁의 복원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조선 왕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그러하시옵니까 ?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리셨습니까 ? 소신이 신료들과 의논하여
복원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나이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고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셔”
“총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짐이 한없이 기쁘오”
“망극하옵니다.”
덕수궁을 나온 정현우는 세종로 끝자락에 보이는 경복궁터를 바라보았다.
담장은 대부분 건축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건물들은 단 한 채도 본 모습을 유지하지 않고
있었다. 새삼 바라본 경복궁은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천군부 회의실은 오랜만에 활기가 흘렀다. 대명부에서 발생한 내란이 종결되고 실질적인 군사 행동을
자제했던 천군부는 이번 터키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다음 준비를 서둘렀다. 군단 규모의 대규모 병력이
움직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천군부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천군부의 문제점 하나가 노출되었습니다. 광범위한 영토와 곳곳에 산재한
해군 기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점입니다. 만약 사이레 기지가 공격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 공격측도 막대한 피해를 보겠지만 사이레 해군기지는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발생할 여지가 다분합니다. 파나마나 동남아에서 발생할 수도 있으며,
상대적으로 천군부 군대가 소규모 파견되어 있는 어느 곳에서라도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일단 발생한다면 전멸이라는 결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전략실에서는 신속대응군의 창설을 건의하고 있씁니다.”
전략실장의 설명에 이어 그 세부 계획이 각 위원회 의장들에게 제공되고 부가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보시는 바와 같이, 출동명령 후 24시간 안에 목적지에 최소 1개 여단에서 최대 1개 보병사단을
이동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전지역을 총 6개의 대구역으로 나누고 각각 한 개의 중심 거점을
마련합니다. 각 대구역은 구역의 특성에 맞춰 소구역을 정합니다.
모든 소구역에는 일정 수준의 비행장을 건설해 유지하며, 6개의 중심 거점에서 수송기로 이동된
병력에게 최소 삼일의 보급을 책임질 수 있는 물자를 비축합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물자물목과
예상 병력수의 산출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무 많은 거 아닌가 ? 이정도면 3군이 소모하는 양과 거의 대등한 양인데.
정현우 천인단장이 곤란해 할 수도 있어 ? ”
작년 가을에 천군부 장관에 취임한 신기철이 의문을 제기했다. 서류상으로야 쉬운 일이지만
한 개의 군병력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에 주름살을 만드는 것과 같았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신설되는 신속대응군은 병력면으로 보면 5만이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현역에서 챡출해서 메우면 되고, 비축분은 몇 년동안 천천히 진행시키면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올해부터 러시아에서 징병제를 부분적으로 실시해 달라는
요구가 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역에서 빠져나간 병력을 2년 안에 보충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6개 거점에 수송기를 배치한다면, 어쩔 수 없이 수송기가 유럽의 귀에
들어갈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한 대비책이라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없습니다. 하지만 비행기는 핵심기술이 유출된다고 가정해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비행기 배치 후 보안에 신경을 쓸 필요는 있습니다.”
천군부 최고회의에서는 전략실에서 올린 신속대응군에 대한 계획을 부분 수정하여 승인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심양과 대만에 오천명 수준의 공수부대를 창설하고 순차적으로 자카르타와 모스크바 근교,
극동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나마에 거점을 만들어 운용에 들어간다.
아울러 모든 연대급 이상 육군과 해군 기지에는 올해 안에 비행기 활주로를 건설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정현우는 천군부 건물 맞은 편에 위치한 천인단 건물 3층 집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사이 결제서류가 밀려 있었는지 비서실장이 십여개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들어왔다.
“뭐가 이렇게 많아 ?”
“크레테건과 일본부 선거에 대한 최종 보고서 그리고 천군부의 협조 공문입니다.
러시아에서 일급으로 한건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거 놓아두고 자네는 지금 천황부 장관과 행정부 장관에게 내가 점심이나 같이 하잔다고 전하고
약속을 잡게. 총경에게 요주의 인물 1급 대상자들의 지난 20년간의 행적을 정리해서 내일까지
올리라고 하고”
“조선부 1급 말입니까 ?”
“그래”
비서실장은 뜬금 없이 1급 명단을 가져오라는 말이 이상했다. 자신이 알기로 1급에 해당하는 자들은
대부분 만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반도 내에는 몇 명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대부분 고령이여서
이제는 1급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했다.
비서실장이 집무실을 나가자 정현우는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책을 하나씩 들어 내용을 훑어보고는
서명을 해나갔다. 사소한 것들은 대부분이 아래에서 처리하고 있는데도 총리가 결정해야 할 일은
줄지 않은 듯 보였다. 마지막 결체 서류를 열어 젖힌 정현우는 러시아 교육감이 올린 보고서가
왜 자기에게까지 왔나 의아해 하며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아주 재미있는 애군. 당돌해 ! 폴란드에 이런 아이가 있었나 ?”
“덩덩덩:
오전이 지났음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가 들려오자 정현우가 일어나 서둘러 점심 약속 장소를 향했다.
10분정도는 늦을 것 같았다. 괜히 총리 티 낸다고 장관들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정현우는 비서실장을 한번 흘겨보았다.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비서실장이 미리 귓뜸을
해주지 않은 것이다.
“금강천황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
점심식사를 하면서 천황부 장관이 상당히 놀랐다는 듯 정현우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장관께서는 모르셨습니까 ?”
“네. 전혀요”
“최근에 천황을 독대나 알현한 사람 중에 제가 알아둬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까 ?
“아니요. 없었습니다.”
천황부 장관의 대답을 들으면서 정현우는 행자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행자부 장관은 행정뿐 아니라
경찰조직을 이끌고 있어서 그 일을 알아 보도록 정현우는 우회적으로 지시하고 있었다.
“어쨓든 천황의 부탁이니 추진하는 쪽으로 진행시켜 보지요. 이 일은 다음달 국무회의에 정식으로
의제에 넣도록 하겠습니다만, 행여 불상사가 이번 일로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부디 천황부에서는 이점을 유념해 주십시오”
천황부 장관은 정현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만 했다. 조선의 정궁을 복원하고 천황이 거처를
덕수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천황이 자기 자리를 잡아간다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건 그렇고, 일본부 선거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우려되기도 합니다.
국무회의에서 좋은 해결책을 만들어 냈으면 합니다. 일본부에서도 이러면 대명부에서는
거의 완패를 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재검토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교육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인 것을 말입니다.
혹시 우리의 정책에 어떤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지 아니면 일본부에서 일어난 현상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인지 그리고 대한제국에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수정할 게 있으면 수정해야겠지요.”
정현우는 대부분의 점심시간을 이렇듯 장관들과 먹으면서 중요한 사안들을 이야기하곤 해서
주요 부처장들은 정현우와 점심제의를 받으면 언제나 긴장을 해야 했다.
즐거운 식사시간을 앗아가는 좋지 못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현우는 그런대로 천인단을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아라곤 바르셀로나
페르난도는 리슐리외의 회방으로 메디시스의 도움을 받지 못하자 기르디를 영국으로 다시 보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물에 빠진 아라곤 왕국을 도와줄 나라는 없어 보였다.
영국의 제임스왕은 프랑스가 대한제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자 스페인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칫 스페인이 약해져 대한제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면 엘리자베스1세가
심혈을 기울여 확보한 대서양의 제해권이 강력한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니 휴우”
가르디는 프랑스 남부를 거쳐 바르셀로나로 들어오는 길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난도를 볼 면목이 었었다. 아라곤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군대를 키워놓지 않은 것이 한이 되었다.
카스티야보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많았는데도 그는 군대양성에는 등안시 해왔다.
바르셀로나로 들어온 가르디는 빈손으로 페르난도를 만나야 했다.
“그렇겠지. 그 잉글랜드 놈들이 순순히 군대를 보낼리가 없겠지.
이렇게 되면 사라고사는 포기해야하는 것인가 ? 이곳 바르셀로나도 ?”
시간이 점점 흘러간다면 사라고사는 가만히 있어도 굶어죽게 되어 있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항복을 하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렇다면 폐하. 나폴리로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
아라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여기서 항복한다면 필립은 분명 페르난도를 살려두지
않을 것 같았다. 설사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한다 해도 모든 것을 필립에게 받쳐야 만이 가능했다.
“그 정도는 메디시스 황후가 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
“그렇긴 합니다만 막대한 비용을 요구해 왔습니다.”
“줘야겠지. 우리들의 목숨 값이 아닌가 ? 블라스코이반데스에게 알아서 행동하라고 전하게 항복을
하더라도 그의 명예에 먹칠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말야.
그리고 전해주게 죽지않고 살아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라고”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내일 새벽에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알았네. 방금 돌아왔는데 쉬지도 못하고. 수고하게”
페르난도는 가르디가 물러나자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카탈루냐왕국과 결혼을 통해
평화적으로 합병하기 전까지 아라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강력한 육군을 가진 왕국이었다.
그러나 카탈루냐가 보유한 상선대가 막대한 부를 창출하자 아라곤 왕국은 도시 상인들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지주층이 중앙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지주층이 담당한 강력한 육군도 쇠퇴하게 된다. 아라곤 왕국은 거의 필요도 없는
상비군을 유지하는데 비용만 많이 들어간다는 생각에 육군을 비롯한 국방을 카스티야에게 넘기고
카스티야와의 합병에 동의하게 된다. 작지만 그나마 명백을 유지하던 아라곤 육군은 합병이 되면서
해체되거나 카스티야에 흡수되고 왕국 직속 근위대만 남게 된다. 황금으로 주변국을 움직이며 안정을
구가하던 아라곤 왕가는 단 한번의 외침을 막지 못하고 서둘러 나폴리로 이동했다.
호세 가바리 신부는 팔미에르 대주교가 주도하는 종교재판을 빙자한 인종학살을 멈추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라나다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죽어가는 자들의 명복을 비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신께서 충분히 현명하고 사려 깊으신 팔미에르 대주교님과 황제폐하를 보내주셨음에도 무어인들은
그것을 전혀 감사히 여기지 못합니다. 저 독사 같은 무어인들은 전혀 신앞에 다가서지 않으려 하고
악마의 추종자들로 남아 있기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복음을 들어도 복음이 귀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찬을 먹어도 성찬이 저들의 살과 피가 되지 못합니다.
신께서는 이제 악마의 자식들을 보듬기에 내어줄 더 이상의 인내심도 자비심도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 만물을 주관하신 신께서 사제에게 주신 권능으로, 팔리에르 대주교께서는
순한 양들을 물들이는 독사를 영원히 없애버릴 것을 판결하셨습니다. 회계하십시오.
그대의 죄를 사제에게 말하시여, 사제가 내리는 죄사함을 받으십시오.”
기나긴 연설과 기도가 끝나자, 한 탁발승이 횃불을 들어 모닥불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치솟아 통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집어 삼켰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최후까지 이슬람왕국이 존재했던 그라나다는 다시 한번 100년전의 폭풍이 휩쓸었다.
발렌시아에서 시작된 이교도들의 화형식이 전 반도를 휩쓸어 버리자 그 열기는 멀리 북유럽까지
치밀어 올라갔다.
갈릴레오는 무릎 위에 두장의 편지중 어느 것을 먼저 읽을 까 잠시 고민을 했다.
하나는 캄파넬리가 보낸 것이고 하나는 캐플러가 보내왔지만 사르피 관구장에게 보냈던 것을
사르피의 시종이었던 사람이 갈릴레오에게 가져왔다.
잠시 고민하던 갈릴레오는 우선 캄파넬리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캄파넬리는 지금도 스페인에 있는
종교감옥에서 수감되어 있었고 교황청에서 특별사면을 해 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햇빛을 볼 수 없는 처지였다.
“존경하는 갈릴레오님이 옳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그것을 부정하려
들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정확한 증거를 들이대더라도 과학이란 이름의 학문은 교회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성경은 언제나 옳지만 그것을 해석 하는 자들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쪽에 발렌슈타인이 있다면 남쪽엔 팔미에르가 있다는 말이 감옥에까지 들려옵니다.
제가 감옥에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감옥안에서 들으니 갈릴레이님에게
우호적이신 바르베리니 추기경께서 다음 교황에 오르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염치스럽지만 갈릴레이님에게 청이 있습니다.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제 사면을 교황청에 부탁드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새로운 별이 발견되고 새로운 나라가 나타나고 새로운 사람이 보인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오고 있음을 알려주시는 신의 계시입니다.
저는 요즘 신의 계시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오는 날 피렌체에서 밤 하늘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이어서 펼쳐진 캐플러의 편지에는 캠파넬리가 말했던 새로운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단기 3956년(1623) 여름 모스크바
모스크바 고등학교 특별반 1년 과정을 마치고 학기말 평가가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카지미에슈 바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카지미에슈는 모스크바에 하나밖에 없는 서점에 들러 책을 읽는 것이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는 형 부아디수아프가 자신을 예수회 교회로 보내려 하자 바르샤바궁전을
도망쳐 나와 모스크바로 들어왔다. 1년 동안 그가 청취한 강의는 자연과학과 수학 철학과 정치학이
전부였지만 14살의 나이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대한 책은 없습니까 ?”
어눌하지만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오자 카지미에슈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캐플러 아저씨가 점원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의 제국말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반백의 머리는 그의 나이를 실제보다
더 들어 보이게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
“그래. 카지미에슈구나. 책 사러 왔느냐 ?”
“아니요. 그냥. 그런데 찾고 계신 책이 있으신가요 ?”
“그래. 네가 좀 물어봐 주렴. 이 아가씨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저씨가 설명을 못한 건 아니고요 ? 무슨 책인데요 ?”
“그런가 ?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말 배우기가 쉽지가 않네. 지구의 움직에 대한 건데”
케플러는 카지미에슈에게 자신이 찾고 있는 책에 대한 설명을 한 참 해댔다.
카지미에슈는 케플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대충 제국말로 점원에게 설명을 하자
점원이 카지미에슈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어쩌죠 아저씨 ? 이 여자분 말씀이 아저씨께서 찾으시는 책은 모스크바에서는
판매가 되지 않는 답니다. 서울이나 일본부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데요 ?”
케플러는 지구의 공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틈틈이 강영미 선생에게
자전과 공전에 대한 이론을 귀동냥했지만 실제로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연주시차나 광행차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가 주변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스승인 브라헤가
모아 놓은 20여년의 천체 관측 자료를 토대로 연주시차를 구하려 하였지만 도저히 연주시차를
알아낼 수 없었다. 분명히 시차는 존재하고 있었다. 만약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브라헤의 자료에서는 그걸 발견해 낼 수 없었다.
“강영미 교수는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않으니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구나 ?”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저씨는 우리가 사는땅이 그렇게 빨리 빙글빙글 돈다는 것을 믿으신가봐요 ?
다른 분들은 다 거짓말이라고 하던데요.
강영미 선생님은 그 증거를 보여 달라는데도 보여주지 않잖아요 ?”
케플러는 천진 난만한 카지미에슈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천문학을 몇 십년 동안 한 자기도 믿기 어려운 것을 다른 사람이 쉽게 믿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연주시차나 광행차 같은 것은 한번 들었다고 이해할 만큼 쉬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너를 유심히 살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구나 ?”
케플러의 말에 카지미에슈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 번 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요 ?”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 다 숨어버리지.
왼쪽으로 두번째 짧은 바지 입은 사람하고 뒤쪽에 모자 쓴사람. ”
천문학자답게 세세한 관찰력과 주의력이 탁월한 케플러는 어느새 주변 사람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카지미에슈가 방정대자 케플러의 눈에 띈 사람들이 황급히 몸을 숨기거나 책으로 눈을 돌렸다.
“다 동양인 것 같구나. 군인 같기도 하고”
“난 또. 놀랬잖아요. 형이 잡으로 온 줄 알았네. 그냥 가요.
참. 점원이 그러는데 아까 그런 책은 학교 선생님은 구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카지미에슈는 케플러의 오른손을 끌며 문쪽으로 다가갔다.
케플러가 한번 뒤를 힐끗 보고는 카지미에슈에 끌려가자 감시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치 챈 것 같습니다.”
러시아 특수 3부 소속인 추상민은 팀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팀장은 문밖으로 나가는 어른과 아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좁은 공간이었어. 그리고 확실히 연륜은 못 속이는군. 밖에서 대기중인 팀에게 연락은 했나 ?”
“네. 그렇습니다.”
“저 소년이 얀2세가 된다니. 자신은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
특수 3부는 천인단에서 내려온 명령서에 따라 카지미에슈를 위한 팀을 급조 했다.
러시아에 파견된 교육감이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대어는 천인단과 교육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다다음대의 폴란드왕이 될 가능성이 많은 소년이 고등학교 특수반에 입학한 것을
교육감이 교육부에 보고해 온 것이다.
“이번 가을엔 꼬마 손님이 한분 더 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
추상민은 터키제국의 황제가 러사아로 유학 온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 하고 있었다.
술타나 타라한은 스스로 섭정을 하겠다고 밝히고 터키제국 황제에 즉위한 자신의 아들 무라도4세를
모스크바로 보낼 생각이었다. 사이레 기지 사건 때 대한제국과 협상을 진행시키던
타라한은 무라도4세를 5년간 교육시켜줄 것과 사이레 기지 안에 있는 증기포함 3척을
무상 양도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크레타섬을 대한제국이 양도 받는 조건치고는 값싼 가격이었기에 대한제국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타라한은 무라도4세의 유학을 차일피일 미루다 내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생각했는지
금년 가을 새 학기에 입학 하겠다는 통지를 터키대사에게 해왔다.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어 ?”
팀장이 추상민을 쏘아보자 추상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들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일급비밀이야”
추상민의 가슴이 철렁했다. 1급 비밀이라면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물쭈물거리는 추상민이 수상쩍은 팀장이 다그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추상민이 떠듬거렸다.
“강소령이 그러던데요”
“누구 ? 강삼호 소령말야 ?”
“네”
“자네 왜그래 ? 왜 자꾸 강소령을 만나는 거야 ?”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이고 해서…”
추상민은 팀장의 경고가 떠오르자 구차한 변명을 해댔다.
팀장은 추상민에게 강소령 만나는 것을 경고한 적이 있었다.
천군부의 장교들과는 평소에도 잘 지내지 못하던 팀장은 강소령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강소령 참 좋은 사람입니다. 팀장님이 왜 그러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으면 특수부를 그만 두고 만나던가 하라고, 그땐 아무소리 안 할 테니.
그전에는 절대 안돼. 자네는 상관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에이. 조심해”
팀장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추상민은 문득 강소령이 어떻게 1급 비밀을 알고 있는 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4군 사령관의 부관이면 정보수집에 힘을 발휘할 수도 있었고,
4군 사령관에게 올라가는 서류를 훔쳐볼 수도 있었다.
어떤 것이든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해서 그가 1급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4군 사령부
김경환대장은 천천히 자신의 책상을 정리했다. 부관이 거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자신만의 것들을
부관에게 보이길 싫어 했다. 지난 몇 십 년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던
일하며 최근의 긴박했던 흑해의 긴장등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똑똑똑”
“들어와”
“부르셨습니까 ?”
강삼호 소령이 잘 다려진 군복을 입고 들어왔다. 김경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러시아인 징집은 잘 된다고 하던가 ?”
“네 그렇습니다. 올해에 일 만명이 대명부로 떠날 수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에 상응해서 일본부와 대명부에서 일 만명의 신병이 4군에 들어옵니다.”
“내년에는 목표가 이만명이던가 ?”
김경환은 누구에게 질문하는 것인지 애매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강소령이 머뭇거리자 김경환이 말을 바꾸었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자넨 다음 후임자가 김상태 대장이란 걸 알고 있겠지 ?
사병부터 시작해서 장성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야.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러더군.
하긴 그러니 4군을 맡겠지만 말야”
“약간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강삼호가 듣기로도 김상태는 모든 사병의 희망이었으며, 영웅이기도 했다.
“나랑 같이 극동에 가지 않겠나 ? 강요하는 건 아니고 ?”
김경환은 4군사령관 임기가 끝나자 극동군 제 5군 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이 났다.
그와 함께 4군의 군단장급 인사가 병행되었다. 1군단장 이제마 중장은 호주 군정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경환 자신이 호주에 가고 싶어했지만 군사령관이 가기에는 아직 호주는 개발이 덜 되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호주는 새로운 대륙이었다. 이제 겨우 행정도시 하나가 만들어졌지만
무궁무진한 곳이기도 했다. 조만간 파나마 공사에 투입된 러시아 포로들이 호주로 이주해 오면
호주도 제법 중요한 지역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 여기에 머물겠습니다.”
강삼호는 사령관의 제안을 잠시 생각했지만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한직으로 누가 가고 싶겠나 ? 1군 다음이 4군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가 떠나는 마당에 선물하나 주지. 어차피 자넨 더 이상 사령부에서 근무할 수 없을 테니,
후임자가 오기 전에 가고 싶은 부대가 있으면 말해보게.”
이런 날이 올 것이란 것을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던 강삼호는 생각중이란 표정을 김경환에게 보여줬다.
너무 빨리 대답해도 사령관이 섭섭해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4111사단에 가고 싶습니다.”
“그런가. 알았으니 그만 나가보게”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강소령이 나가자 김경환은 한숨을 쉬었다. 4군 1군단에서 배속된 기계화사단을 의미하는 4111사단은
발틱해에 있는 항구방어와 주변 방어 임무가 맡겨져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안쓰럽군’
십여일 후 김경환은 천인성으로 가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천인성부터는 기차를 이용해서
서울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배편으로 극동으로 움직여야 했다. 장장 두 달 정도가 소요되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4군 사령관 답지 않게 그의 환송식은 조촐하게 행해졌다.
“사령관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임지로 떠나기 전 강삼호 소령이 거수경례를 했다.
“앞으로 못 볼 사람처럼 이야기 하는 구만. 고맙네. 잘 지내게나.
그리고 김상태 대장. 앞으로 고생이 많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령관님”
김경환을 태운 자동차가 별4개를 반짝이며 사령부 정문을 빠져나가자 강삼호 소령도 작은 가방을
하나 들고 신항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에게는 사령부에서 더 이상 자동차가 제공되지 않았다.
몽고부와 러시아부의 경계를 이루는 우랄대간을 넘은 김경환은 천인성에서 꼬박 하루동안 기차를
기다렀다. 천인성은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대명부 몽고부의 접점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기위해 역사에 들어선 김경환은 날까로운 여자 비명소리와 이어서 들려오는
걸죽한 목소리에 관심이 쏠렸다. 기차를 타기위해 모여있던 군중들이 술렁거렸다.
“깍. 놓으란 말야. 이 돼지 같은 놈들아”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경호원들이 긴장하며 김경환의 주변을 애워쌓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
궁금해진 김경환이 수행원을 불렀다. 옥신각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행원이 여자와 어린아이를
대리고 김경환에게 돌아왔다.
“누구신가 ?”
“네. 극동에서 온 사람입니다. 애 아버지를 찾으러 왔답니다.
역에서 작은 시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여인이 과민반응을 보인 것 같습니다.”
“과민반응이라뇨 ? 저놈들이 내 금을 빼앗으려 했단 말이에요 ? 도둑놈들…”
여인은 남자아이 손을 꼭 잡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도둑놈. 돼지 같은 놈을 연발하던 여인은
역 경비를 맡고 있는 경비대가 우르르 몰려오자 입을 다물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려 하자 경비대는 그 자리에서 지향 사격 자세를 취했다.
“죄가 없다면 도망치지 마라”
그 한마디에 모두들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숨기 힘든 곳에서 괜히 오해를 불러이르킬 만한 행동을
했다간 총알을 맞기 딱 좋았다. 갑자기 살벌한 분위기가 주변을 엄습하자 여인이 움찔댔다.
소란의 주인공들을 한군데로 다 모은 경비대장이 김경환에게 다가왔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나 지방관쯤으로 생각했던 경비대장은 김경환의 견장을 확인하고는
부동자세를 취하며 경례를 했다.
“충성”
“수고가 많구만. 이 여인이 그러는데. 저기 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 여인의 금을 훔치려 했다는군”
여인은 한층 기가 죽어 있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
생각과는 다르게 경비대장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여인은 보따리를 두섬 두섬 풀어서 극동부에서 발행한 증명서를 내보였다.
“부관 ! 거기 계신 분들에게 자수하라고 해”
경비대장의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다섯 명이 앞으로 나섰다. 자수하는 자에게는 관대한 게
대한제국의 불문률이었다. 여인을 대리고간 경비대장은 자수하지 않은 자가 있는지를 확인하기위해
사람들을 둘러보게 했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띁어 보고는 한 사람을 더 지목했다.
“저 사람도 그랬어요”
여인에게 지목된 러시아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러시아 말을 지껄였지만,
경비대장이 손짓을 하자 경비대원 둘이 다가가 그를 붙잡았다.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하니까 부인도 잠시 같이 가주겠습니까 ?
그리고 가지고 계신 금은 제국화폐로 환전하시는 것이 안전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
여인은 김경환을 뒤돌아 보았지만, 그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수비대장은 알아서 일을 처리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충성.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비대장이 김경환에게 경례를 하고 뒤돌아 가려 하자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아니면
자신의 임지에서 왔다는 것에 호감을 느꼈는지 김경환이 한마디를 던졌다.
“잘 좀 봐주게. 극동에서 여기까지 왔다면 보통은 넘는다고 봐야 하겠는데.
러시아 첫인상을 좋게 만들어 줘야지”
“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머지 사람들이 기차에 타기 위해
짐을 들어 올렸다. 각자마다 기차를 타야만 할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서둘러 기차에 올랐다.
맨 끝 객차에 소들이 기차를 타는지 소울음 소리가 기적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몸을 실은 김경환은 차장이 가져온 막 짜낸 따끈 따끈한 우유 한잔을 마셨다.
시베리아 벌판은 벌써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지 황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근처에 천연가스 유전이
있는 지, 멀리서 지평선을 아른거리며 올라오는 연기들이 시베리아의 여름 하늘을 어지럽혔다..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는 건가 ?”
“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수행원은 김경환의 뜬금없는 말에 반문했다.
“토마스 무어가 쓴 책이야 ? 읽어 보았나 ?”
“아직 못 읽어 봤습니다. 김진경님이 쓴 ‘이상사회’는 읽었습니다만”
“그래. 이상사회가 유럽 애들 말로 유토피아야. 내용은 다르지만 인간이 바라는 이상향을 그리고
있지. 아침에 일어나 서너시간 일하고 오후에는 인생을 즐기고 밤에는 책을 쓴다.
서로 싸울 줄 모르고 내거 네거 가리지 않는 세상. 모두들 맡은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꿈 같은 세상아닌가 ? ”
“인간에게서 욕심을 버리는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이 세상을 어지럽히죠”
“욕심만 버린다고 다 되겠나 ? 증오도 버려야 되고 인간들의 마음이 신선처럼 선해지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지 않아야 하는 건가 ?”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겨 버린 김경환은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담요를 끌어다 몸을 감쌓다.
가끔 찬바람이 달리는 기차 속까지 뚫고 들어왔다. 김경환에게는 요즘 하루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첫댓글 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