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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切頭山) 탄식
久聞楊花蠶頭峰(구문양화잠두봉)-오래전부터 양화진의 잠두봉(蠶頭峰)을 들어 왔는데
今時始訪切頭山(금시시방절두산)-오늘 비로소 절두산(切頭山)을 찾아왔다
蒼波漢江東西流(창파한강동서류)-푸른 한강은 동서로 흐르고
三角冠岳南北立(삼각관악남북립)-삼각산 관악산은 남북으로 서 있네
自然似舊我白髮(자연사구아백발)-이렇게 자연은 옛 그대로인데 나는 백발로 변했고
歲月幾度夕陽紅(세월기도석양홍)-세월은 흘러 노을은 몇 번이나 붉게 물들었으랴 !
老病身望和統一(노병신망화통일)-늙고 병든 몸이 바라는 것은 이 나라 평화통일뿐이고
每日每時讀書樂(매일매시독서악)-매일 매시 즐거움은 책 읽고 글 쓰는 일인데
北核戰準此現實(북핵전준차현실)-북핵의 전쟁준비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니
切頭峰倚吐歎息(절두봉의토탄식)-절두산(切頭山)에 의지하니 탄식만 나오네!
농월(弄月)
한국 불행은 양화진(楊花津)이 절두산(切頭山)으로 피 흘린 역사다 !
오늘 필자는 마포구 토정로 6(합정동, 2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 위치한
≪절두산(切頭山) 천주교순교성지(天主敎殉敎聖地)≫를 찾았다.
이곳은 당산역 한강변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한강변에서 보면 한강건너편에
합정동이 있고 당산철교가 지나는 옆에 깎아지른 절벽(絶壁)이 보인다.
마치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오(吳)나라 적벽(赤壁)”과 흡사한 절벽이다.
절벽 봉우리에 가톨릭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봉우리의 이름은
〈양화진(楊花津)〉-버들과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나루터라는 이름
〈잠두봉(蠶頭峰)〉-누에머리처럼 생긴 산봉우리란 뜻의 이름
〈덜머리(加乙頭)〉-누에가 대가리를 치켜든 것 같다
〈용두봉(龍頭峰)〉-용(龍)의 머리를 닮은 봉우리
〈절두산(切頭山)〉-사람의 머리를 칼로 자른 산(山)이라는 이름
등으로 변하여 왔다.
양화진(楊花津) 나루터라 이름한 이곳은 지금은 “양화대교”가 있는 곳이다.
필자가 서울에 처음온 1960년대에는 “한강대교”와 “제2한강교” 두 개의 다리만 한강에 있었다. 제2한강교가 지금의 양화대교다.
나루터라 함은 지금의 양화대교 입구에서 한강 하류로 조금 내려간 지점까지를 말하며,
서울 행정구역 변경 전에는 그곳이 경기도 고양군에 딸린 나루터였다.
이 나루터 근처에 “조개우물(蛤井합정)”이라는 우물이 있었으므로 동네 이름을
합정동(蛤井洞)이라 하였다.
현재 합정동(合井洞)의 어원(語源)이다.
*합(蛤)-큰 조개합(얼마나 멋있는 이름인가)
일제 강점기에 “합정동(合井洞)”으로 한자(漢字)를 바꾸었는데 지금까지 일본이
바꾼 “합정동(合井洞)”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일본이 “합할 합(合)”자를 쓴 것은 “대한제국과 일본”이
내선일체(內鮮一體)라 하여 “대한제국과 일본은 한몸(一體)”라 주장하여 합(合)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합정동(蛤井洞)”으로 아름다운 우리 이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인데 정부는 왜 “합정동(合井洞)”을 그대로 사용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양화진(楊花津)은 양화진(楊花鎭)이라고도 한다.
*진(津)-나루터이고, 진(鎭)-해군의 군사기지다.
그 이유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漢陽서울)의 수도방위를 위하여 조선 조정은 한강 주변에 송파진(松波鎭), 한강진(漢江鎭), 양화진(楊花鎭)의 삼진(三鎭)의 해군 기지를 두었다.
그 삼진 중 하나인 양화진(楊花鎭)은 나루터로 사용하면서 외국 침략이나
국내에 반정부 반란에 대비하여 상비군(常備軍)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절두산(切頭山)이란 이름은 본래 없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그 봉우리의 생긴 모양이 마치 누에가 대가리를 치켜든 것 같다 해서
덜머리(가을두加乙頭) 또는 잠두봉(蠶頭峯)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 용(龍)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두봉(龍頭峰)이라고도 했다.
어떤 이름 있던 간에 이 절벽위 봉우리는 한강 일대에서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필자 나이의 사람들은 옛날에 봄철이 되면 왕버들이나 산버들에 물이 오를 때,
이 버들가지의 속대를 뽑아내고 껍질로 버들피리를 불었던 기억을 할 것이다.
“양화(楊花)”란 이름도 아름다운 버들이 유명하여 붙은 이름이라 생각된다.
이곳은 경치가 좋아 풍류객들의 놀이터로 많이 찾았는데 옛 기록에
노량(鷺梁), 용산(龍山) 마포(麻浦)등에 한강을 따라 고관(高官)들이 뱃놀이로
여흥(餘興)을 즐겼다고 하였으며,
세종 32년 명(明)나라 사신이 이 봉우리에 올라가 구경을 하다가
“이 경치는 적벽(赤壁)이나 다름없다. 참으로 가관(可觀)이로다” 하면서,
본국에 돌아가서 까지
“조선의 덜머리는 천하 절승지(天下絶勝之地)”로다 라고 감탄했다는 기사가 있다.
전동아일보편집국장 고(故) 김영상(金永上)씨가 쓴 역사자료책 “서울육백년”에서도
“양화나루 동쪽 강변에 우뚝 솟은 잠두봉(蠶頭峯)과 그 서쪽의 망원정(望遠亭) 및
맞은편의 선유봉(仙遊峰)이 한데 어우러진 양화나루 일대의 경치는 동방 제일이라는 칭송을 받아 명(明)나라 사신(使臣)들이 오면 으레 이곳을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볼 때 이 양화진(楊花津) 일대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아름다웠던 잠두봉(蠶頭峰)이 어찌하여 사람의 목을 자른다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의 이름이 되었을까?
이 “절두산(切頭山)” 이름이 대한민국의 비참한 현실의 불행과 역사적 맥락(脈絡)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은 꼭 알아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다.
1866년 병인(丙寅)년 이 해에는 전쟁을 방불 하는 두 번의 변란(變亂)이 있었다.
하나는 평양 대동강 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토마스(R J Thmas)선교사가 미국 상선을 타고 와서 천주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殉敎)한 사건으로 “병인평양양선사건(丙寅平壤洋船事件)”이라 한다.
또 하나는
천주교 신부가 학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 함대가 보복하기 위해 강화도와
한강에 침입한 사건으로 우리가 잘 아는 병인양요(丙寅洋擾)다.
이중 병인양요와 “절두산(切頭山)”이름은 깊은 관계가 있다.
갑자(甲子)년 1864년부터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조선 침략을 꾀하기 시작했다.
1866년 즉 병인(丙寅)년 1월에는 원산 앞바다에 군함이 와서 통상과 거주권을 강요했다.
이에 대원군(大院君)이 크게 고민하고 있을 때 천주교인들은 이 기회에
선교(宣敎)의 자유를 얻을 계산으로
“러시아의 침략을 막으려면 프랑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대원군(大院君)에게 건의 했다.
조선에 선교(宣敎)로 와 있는 프랑스 신부들에게 부탁하면 그들이 프랑스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능히 러시아 함대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대원군이 처음에는 귀가 솔깃해져서 프랑스 신부들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 군함들이 곧 물러가고 말았다.
그때 청국(淸國)으로부터
“청국에 있는 모든 서양 사람들을 죽였다”는 헛소문이 들려오자 일찍부터 천주교를
미워하던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반대파인 벽파(僻派)의 영수(領袖)인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은 조대왕대비(趙大王大妃)를 등에 업고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인 탄압을 강력히 촉구하게 되었다.
이에 못 견딘 흥선대원군은
고종 3년인 1866년이 시작되면서 천주교에 모진 박해를 내리게 되었다.
대원군 주변에는 천주교인들이 많았다.
먼저 그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가 천주교인이었고 아들인 고종(高宗)의
유모 박마르다도 독실한 신자였다.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의 박해를 그리 원치 않았으나
완고한 원로대신들의 강요에 못 이겨 천주교인을 잡아들이는 악행의 문서에 결재를 하고 모든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흥선대원군도 천주교를 탄압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권을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신약성경에 유대주재 총독인 빌라도(Pilate)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해오자 예수가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하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천주교인들이 조선에 아무런 해(害)를 입히지 않았는데도 정치의 반대파가 천주교를 빌미로 도전을 해 오니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 억울한 천주교인들을 죽인 것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게 된 원인은 병인교난(丙寅敎難)때문이었다.
병인교난(敎難)이란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는데,
고종(高宗) 3년 병인(丙寅1866)년에 천주교도를 박해(迫害)한 사건(事件)이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러시아로부터 통상(通商) 요청을 받았을 때, 대원군(大院君)이
천주교(天主敎)를 이용하여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견제하려 하다가,
뜻대로 안 되자
서양 학문(學問) 배척(排斥)의 명을 내리고, 천주교도인 남종삼(南鍾三),
홍봉주(洪鳳周) 등과 프랑스 선교사(宣敎師) 베르네 등을 죽이고 팔도에 영을 내려
천주교도를 학살(虐殺)했다. 이로 인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운현궁(雲峴宮)안에는 천주학쟁이들이 출입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게 되었다.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그리하여 조대비이하 주요 직책에 있는 대관들은 노골적으로 천주교도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원군(大院君)의 처지는 매우 난처해 졌다.
대원군(大院君)은 주위 측근자들의 후원이나 천주교도들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포기하고 천주교도 탄압에 앞장을 서게 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끔찍했다.
대원군(大院君)이 자기를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사람 베르뇌 장 주교가
잡혔다.
그때 대원군(大院君)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모든 재상들이 대감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참말 딱하다”라고 탄식하고 박해를
주장하는 재상들을 원망하면서 “반드시 우리 아들(고종)에게 해로울 것이다.
외국 신부가 조선과 저들에게 잘못한 일 없고, 또한 조선의 왕인 우리 아들 고종이
재상들에게도 무슨 나쁜 일을 한 적이 있더냐?”
반드시 외국 군대가 신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조선을 치러 와서 우리 아들 고종임금을 죽일 것이다” 라고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대원군 부인의 그러한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박해는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천주교 박해로 인해 프랑스 선교사 12명중 9명의 선교사가 학살당했다.
이어서 불과 수개월 동안 전국의 천주교도 약 23만명 중 8천여명의 신도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어떤 천주교도들은 산중으로 쫓겨 다니다가 지쳐서 죽고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은 신도들도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이런 난리 속에서 천주교 신도가 아닌데 까닭 없이 잡혀 죽은 양민들도 허다했다.
이것이 병인교난(丙寅敎難)이며 이로 인해서 뒤따라 일어난 사건이
병인양요(丙寅洋擾)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병인교난(丙寅敎難)때 잡히지 않고 요행히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간 프랑스인 리델 신부등 세 명의 신부들이 프랑스 정부에 고발하여 터진 난이다.
리델 신부는 당시 중국 텐진(天津)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드디어 본국으로부터 “조선 정복”의 명령이 떨어지자 로즈 제독은 1866년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때 안내인은 리델 신부와 세 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도였다.
1866년 9월 23일 한강 입구에 닿은 프랑스 함대는 한강 물줄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갔다.
세 척중 두 척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도중에 조선의 작은 쪽배들과 뗏목의 저지를 받고 양쪽 강 언덕에서 조총의 공격을
받았으나 몇 방의 대포로 이들을 간단히 저지했다.
이리하여 프랑스 군함은 2척은 양화진(楊花津) 도착했다.
1866년 9월 26일이었다.
나머지 군함 한척은 서강(西江-지금의 마포구 신정동)까지 올라가 탐색했다,
프랑스 군함은 24시간 동안 양화진(楊花鎭)에 정박하여
조선 왕실의 반응을 엿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는 프랑스 함대에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었다. 외국(프랑스) 함대가 나라의 수도 코밑까지 들어와 있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니 그 당시 조선의 국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 백성은 혼란과 공포에 떨었다.
프랑스 함대는 양화진(楊花津)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가
1866년 10월 12일 일곱 척의 함대가 강화도 앞 바다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10월 16일에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어찌하여 선교사를 죽였는가 선교사들을 죽인 책임자를 처벌하라 조약을 체결하자”는 요구를 해 왔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총격수 5백여 명을
잠복시켰다가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 결과 프랑스 함대는 11월 18일 중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것이 곧 병인양요(丙寅洋擾)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졌고
반대로 대원군의 콧대는 더욱 높아져서 쇄국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고 천주교 박해를 더 심하게 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근대사의 국제정세 변화의 물결에 조선조정이 어떻게
대처해 왔으며 그 결과가 현재 이 시간까지 대한민국 국토와 국민에게 행복이 되었는지 불행이 되었는지를 냉정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때 조선 군대가 강화도 전투에서 프랑스 함대에 졌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중국은 1842년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일찍이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문화가 들어왔다.
일본은 1853년 미국함대의 통상요구에 굴복하고 일본의 문을 활짝 열었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강국의 대열에 있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은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일본 게이샤 사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천지가 뒤바뀌는 문화의 변화다.
당시 중국과 일본 두 나라는 외침을 불행으로 여겼지만 뒤에 가서 그것이 복(福)이 된 셈이다.
이것이야 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오늘날 동양에서 서양 선진국 대열에 합류해 있는 나라는 오직 일본뿐이다.
중국은 정치체제가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국가주석 권한으로 국가가 운영되기 때문에 민주국가나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므로 국가는 크지만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병인양요) 대원군은 기고만장하여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조선팔도 각처 에다가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척화비(斥和碑)의 뜻은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는 뜻을 물리친다”이다.
척화비(斥和碑)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칙화 주화매국)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의 만년 자손들은 경계하라”는 내용의 기념비다.
이 척화(斥和)기념비를 세우면서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행했다.
만약 이때 프랑스 함대와의 싸움(병인양요)에서 졌으면 쇄국주의(鎖國主義)는 없었을 것이며 천주교 박해도 그 정도로서 끝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외국 군대와 싸워 진 것이 복(福)이 되고,
우리나라(조선)는 외국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이 도리어 화(禍)가 되고 말았으니
이것도 우리 국민의 팔자(八字)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조약을 맺고 첫 개항(開港)한 것이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다.
만약 병인양요(丙寅洋擾)에서 우리가 프랑스에 졌다면 아마도 1867년부터 개항(開港)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당시의 후진국인 일본이 아닌 문명국인 프랑스와 서양 제국(諸國)과의
개항(開港)일 것이며 적어도 10년은 더 빨리 개화(開化)되어 일본보다 더 선진국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1866년 병인양요와 병인교난이 있은 지 16년 뒤인 1882년에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양화진(楊花鎭)에서 일어났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1882년은 우리나라 역사상 아주 큰 변화가 온 해다.
그 내용은
1882년 4월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였다.
1882년 6월에는 구(舊) 군인의 반란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이것은 쇄국주의(鎖國主義)아래에 있던 우리 사회에 서구(西歐)의 자유화 물결이 들어옴을 뜻한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갈등의 소산(所産)이다.
신식군대에 비하여 구식군대의 처우가 열악(劣惡)한데서 발단 된 대정부 투쟁을
의미한다.
당시 신신군대라 하였지만 권력 있고 끗빨좋은 잡안 자식이나 사람들로 조직된
50~80면 안팎의 군대였는데 조정으로부터 좋은 혜택은 많이 받았다.
요즘 유한말로 “갑질 군대”였다.
원급이 1년이나 못 받고 온갖 푸대접을 받은 구식군대는 악질적인 집권자들에게 반항하는 동시에 그 배후에 일본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관원들을 때려 죽였다.
민비가 이천에 있는 장호원(長湖院)으로 도망을 가고,
대원군이 살아있는 며느리 민비의 국상(國喪)을 발표한 것도 임오군란(壬午軍亂)때
일이다.
그 난리 통에 문제의 인물인 일본 공사관 하나부시(花房義質)도 시위대에게 잡혀 죽을뻔 하다가 간신히 피신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다.
하나부시(花房義質)가 도망쳐 나간 곳이 바로 양화진(楊花津)이였다.
하나부시(花房義質) 일본 공사관은 1882년 7월 23일 새벽 양화(楊花)나루에서 배를 훔쳐 타고 인천까지 갔다가 일본군 군함을 바꿔 탔다.
이렇게 해서 또 한 번 양화진(楊花津)이 유명해지게 된다.
또 하나 큰 사건이 있다.
1844년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실패한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이 일본으로 망명(亡命)을 갔다. 김옥균은 신변 보호를 위하여 이와다(岩田周作)라는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일본에서 10년을 지냈다.
숨어 살면서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내정 개혁을 계획했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이 김옥균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1893년 마침내
홍종우(洪鍾宇)가 김옥균을 만날 수 있었다.
홍종우(洪鍾宇)는 김옥균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같은 정계 지도자였으므로 의심하지 않았다.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제안하기를
“10년 동안 일본에서 조선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중국에 가서 외교 실세인 이홍장(李鴻章)에게 도움을 받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김옥균을 일본 내에서는 죽이기 어려워 중국으로 유인하려는 흉계였다.
그것도 모르고 김옥균은 홍종우와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홍종우는 1893년 3월 28일 중국에 있는 일본인 여관 동화양행(東和洋行)에서
김옥균을 암살했다.
그리고 김옥균 시체를 군함 위원호(威遠號)에 옮겨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양화진(楊花津)에 상륙했다. 그리고 양화진(楊花鎭)의 번화가 길목에서
1893년 4월 15일 김옥균의 머리와 사지를 자르고 머리를 나무에 매달은 효수형(梟首刑)에 처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의 양화진(楊花津)은 불과 한세대도 못되는 동안에 세 차례의
변란과 난세(亂世)를 겪으면서 그 평화롭고 아름답던 양화(楊花)나루터는 흉터(凶地)로 변하고 말았다.
더욱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강화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퇴 시켰지만
그 이전에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과 한양의 턱밑인 서강(西江) 나루터까지 온 것을
물리치지 못한 그 치욕을 씻기 위하여 이를 갈았다.
흥선대원군은
“오랑캐가 머물었던 자리를 깨끗이 씻어야 하는데 그것을 한강 물로 씻기엔 물이 너무나 아깝다. 그 자리는 프랑스 오랑캐를 끌어들인 천주교도의 피로 씻으라”고 하면서 양화진에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었다.
그전까지는 죄인을 사형 시킬 때는 새남터(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 모래사장)나
서소문 밖을 형장으로 썼지만 이때부터는 양화진을 목을 베는 형장으로 삼았다.
이제 그 아름답던 이름,
누에 머리 같은 잠두봉(蠶頭峰),
버들 꽃이 만발했던 양화진(楊花津)이
어떤 연유로 사람 머리를 칼로 자른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절두산(切頭山)이란 이름은 흥선대원군이 지은 이름도 아니고, 천주교인들이 지은 이름도 아니다.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리는 그 참상을 지켜보던 백성들의 입으로 전해온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변한 뒤 천주교회는 이곳을 천주교회의 순교(殉敎) 성지(聖地)로 지정했다.
“병인교난(丙寅敎難)”으로부터 90주년이 되던 1956년에 마포구 합정동 90번지 일대
약 1400평을 확보해서 절두산(切頭山) 위에 기념비를 세우고 노천(露天) 제대(祭臺)를 마련하여 순례자(巡禮者)들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1966년 순교(殉敎) 100주년을 맞이해서는 “병인순교(丙寅敎難)100주년기념사업회”
가 중심이 되어 전국 천주교인들의 후원으로 이곳에 순교자(殉敎者) 기년관을
세웠다. 병인순교기념관(丙寅殉敎紀念館)은 서울의 또하나 명소(名所)가 되었다.
결론은
흥선대원군이 조선국가의 문을 꼭 닫고 선진국과 문호(門戶)을 개방 안했기 때문에
세계는 발전하는데 조선은 안방에 병든 노인이 되어 국력이 약해졌다.
그로인해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광복이 되었지만 민족주의의 의지가 없어 권력 갈등과 소련 중국에 의해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삼팔선을 베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분단을 막겠노라”라는 비장한 결의로 김일성을
만나 통일국가 단판을 지으려던 김구(金九) 선생은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김일성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온다.
이때 이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에서는
북은 소련이 관리하고 남은 미군이 관리한다는 결정이 내려져 있었다.
이승만은 한반도 현실과 국제정세가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남한만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수립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이승만의 정치적 판단 덕이다.
지금 핵(核)을 보유한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은에 이르기 까지 북한의 “민 얼굴”을 보아온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만일에 김구선생의 주장대로 “통일한국”을 기대하였다면 아마 한반도는 중동의
어느 나라처럼 내전(內戰)상태로 국민은 처참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의 백성은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처럼 살기를 원하는가?
현재의 북한 주민처럼 살기를 원하는가?
이 선택이 우리국민의 답(答)이다.
5.16은 구테다다 혁명이다의 두 가지 주장과 “유신독재”의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조선역사 500년, 대한민국 현대사 100년
총600년 역사 속에서 국민이 가장 풍족하게 살고 세계 속에 코리아를 알리고
국력을 가장 강하게 한 초석(楚石)을 만든 정권이 박정희 정권이다.
그 후로
북한의 핵보유로 현재의 한반도의 정세는 1945년 8월 15일 전후와 같은 혼미한 상태로 국민은 불안하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보는 한국의 정치권은 이 두 인물을 뛰어 넘는 정치인이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 민비의 정치유산의 망령이 지금도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한국 근대사의 읽은 책과 TV 신문의 기사등을 근거한 자료다
최근에 읽은 전택부 선생의 양화진 열전을 참고한 내용도 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