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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병아리 틈에 사는 아기 독수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독수리의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병아리들 틈에서 자신이 병아리라고 굳게 믿고,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보며 ‘아, 참 멋지구나’ 하고 부러워하는 아기 독수리의 이야기 말이다. 가끔 자신의 날개를 다 펼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은 젊은이들에게 나는 자주 이 이야기를 해준다. 그런데 한번은 내게는 너무도 독수리 같은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은, “나는 그냥 병아리인데 독수리로 착각하는 것이면 어떻게 하나”라는 질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했는데, 나의 결론은 결국 우리 안에는 독수리 새끼도 병아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독수리의 나는 모습이 나의 영혼을 부축이거든 독수리처럼 비상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내가 비상하는 모습이 나는 병아리라 하더라도 여전히 멋지지 않은가? 병아리가 되었든 독수리가 되었든, 그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넘어 푸드득 날 때, 우리는 의혹과 어둠의 빗장을 넘기는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그저 닭의 사는 모습이 정답게 보이거든 닭처럼 마당을 걸으며 새벽을 알리는 것이다. 온 마음으로 닭의 삶을 살 때, 그 또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 참 열심히 살았구나” 이번에 한국에 돌아와 한 달가량 머물면서 가장 마음 따스한 순간은 20여 년을 못 만났던 여고 시절 단짝 친구들을 만난 것인데, 우리는 밤새 수다를 떨며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담들을 나누고,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물론 나이 들어 쓰는 가장 촌스러운 말, “하나도 안 변했다”를 연발하며 즐거워했는데, 그 엉뚱한 말을 주고받는 것은 한때의 젊은 모습을 아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인 것 같다. 비록 조금(?)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세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 모습 안에서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의 표정이나 꿈, 그 친구가 가진 고유한 매력을 기억해 내면서 “너, 진짜 안 변했다”고 하는 것이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한 친구가 아주 조용히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 참 열심히 살았다”라고. 그 말이 쿵 하고 마음에 닿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인간으로, 한 사람의 여성으로, 열심히 이 생을 살았구나 하는 그 말이 참 아름답게 들렸다. 오랜만에 만난 훌륭한 친구들에게서 내가 발견한 것은, 그들이 어렵게 살아가는 옛 친구들에 대해 “아주 열심히 살아”라고 말한다는 점이었다. 내 친구들이 참 멋지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아주 엉뚱한 상상을 했다. 우리 모두 독수리면 독수리, 병아리면 병아리, 우리의 모습대로 하늘을 향해 비상하며, 훨훨 나는 모습을 말이다. 용기를 내 담장을 넘고 싶다
앞에서 썼듯이 나는 자유를 평화로운 상태나 구속이 없는 상태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전 존재를 살아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통해 자유를 향해 가는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낸다. 먼저, 자유를 이해하는 데 아주 편리한 도식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free from)와 무엇을 향한(toward freedom) 자유인가를 정리해 보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하는 데는, 두려움, 죄의식, 수치심 등이 있을 것이다.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는 참된 나 됨을 향하고, 하느님 앞에 존재를 찾고,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런 태도나 방향성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나의 한계와 생채기들을 받아 안는 것이다.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 <성가(Anthem)>의 가사처럼 말이다. Ring the bells that still can ring. 아직 소리 낼 수 있는 종들을 울려라
<쇼생크 탈출>에 등장하는 두 사람, 앤디와 레드는 이 두 가지 자유의 축을 잘 보여준다. 앤디는 아내에 대한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힌다. 비록 자신이 부정한 아내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증오와 미움이 살해와 같다고 느끼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길이 없기에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불의한 감옥의 구조에 저항하며 탈출을 계획한다. 그런 의미에서 앤디에게 있어서 자유는 죄의식과 미움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또한 동시에 감옥의 불의한 구조로부터의 자유가 되겠다. 여기서 몇 부분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지는데, 자유를 꿈꾸는 인간의 전형 같은 것이 나온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동료들을 위해 벌을 감수하면서 음악을 틀어준다든지, 하늘이 펼쳐지고 누구도 누구를 가두지 않는 곳, 지와네타호를 희망하는 모습이라든지. 그리고 그는 치밀한 계획 하에, 완벽하게 자유를 향하여 나아간다. 내게 이 영화가 감동적인 것은 앤디가 자유로 향하는 과정 안에서 자신과 아내와의 관계를 온전히 성찰하고, 그 관계를 극복하는 부분이다. 다른 캐릭터 레드.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죄를 저지르고, 이제는 교도소에서 아주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자신이 갇혀있는 이 세계가 너무 익숙하고, 그곳에서 사는 방법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 그가 가석방된다. 교도소에서 아주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자유로운 삶이 그저 어색하기만 하다. 슈퍼마켓에 일자리를 얻은 그는 교도소에서처럼 화장실도 허락을 받고 가야만 마음이 편하다. 나는 레드의 자유를 향한 과정처럼 치열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독립적인 삶이 그저 불안하고 외롭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고 싶을 지경이다. 자신처럼 가석방된 동료 죄수는 그 자유가 버거워서 목숨을 끊었다. 레드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는 벗이 있었다. 총을 살까 컴퍼스를 살까 고민하다가, 그는 결국 컴퍼스를 산다. 생명을 택한 것이다. 이는 참 상징적이다. 컴퍼스는 삶의 새로운 방향을 의미하니까. 그리고 친구가 초대하는 그 새로운 방향을 따라 그는 또 한 번 규칙을 어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이 갇혀있는 울타리 아닌 울타리를 넘어, 친구가 메모를 숨겨둔 그곳을 찾아간다. 이 영화를 자세히 보면, 레드의 굳어진 얼굴이 점차 풀리고, 바람이 부는 모습이 계속 등장한다. 살아있음, 그리고 움직임에 관한 표현이라고 할까? 부활을 체험하는 제자들의 모습 같은 그런 감동이 온다. 그리고 그는 그가 살고 있는 곳, 지와네타호를 향해 떠난다. 독수리여도 좋고, 병아리여도 좋고, 날아가는 고양이라도 좋다. 그렇게 내 일상 속에서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건지, 무엇을 향한 자유로움일지 식별하고, 용기를 내어 담장을 넘고 싶다. 하늘은 무한히 넓고,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봉헌이 완벽한 것일 필요는 없기에, 나는 하느님이 주시는 바람을 가르며 그렇게 날아보고 싶다. * 자유로움에 관하여 전에 쓴 칼럼을 함께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필자
박정은 수녀 (소피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