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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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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보물 제1820호 보도각 백불로 유명한 관음기도도량 홍은동 옥천암
현림 추천 0 조회 709 19.02.20 21:09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보물 제1820호 보도각 백불로 유명한 관음기도도량 홍은동 옥천암


북한산을 가다 보면 홍지문을 지나 홍제천 개울가에 하얀 분칠을 한 여래가 전각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여래가 보물 제1820호로 지정된 보도각(普渡閣) 백불(白佛)이다.

공식 명칭은 홍은동보도각마애보살좌상(弘恩洞普渡閣磨崖菩薩坐像)이다.

이 마애불은 서대문구 홍은동 비구니 도량인 옥천암에서 관리하고 있다.


 

홍은동 옥천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로,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사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옛적부터 불암(佛巖)’으로 알려져 있던 고찰로 전해지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애보살상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기록이 전한다.

우선 15세기 후반에 활약한 대학자 성현(成俔)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처음으로 이 마애불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장의사 앞 시내물줄기를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불암(佛巖)이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겼다라는  매우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15세 후반에 이미 마애보살상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이후 불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불상이 새겨진 바위라는 의미의 불암(佛巖)’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실록(英祖實錄)등의 기록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19세기 이후의 기록인 동국여도(東國輿圖), 한경식략(漢京識略),

청우일록(靑又日錄)(1881419일 자), 조선명승실기(朝鮮名勝實記)(1914년 간행),

권상로의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등에 마애보살상과 함께

 보도각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 18세기 후반부터 옥천암이라는 명칭이 등장했고,

19세기 이후로는 해수관음(海水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또는 백불(白佛)’로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8(고종 5)에는 명성황후가 해수관음 곁에 관음전을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모친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옥천암에서 기도하며 호분을 발랐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후 기록은 찾을 수 없으며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李成祐)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건립하였으며, 1932년에는 대방 6칸과 요사채 3칸을,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보타전(寶陀殿)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홍은동 옥천암은 사찰보다 보도각에 모셔진 백불(白佛)이 더 유명하다.

보도각(普渡閣)은 최근에 마애불을 보호하기 정면 1, 측면 2칸으로 지은 전각 이름이다.




<보도각(普渡閣)> 普渡의 의미

홍제천 개울가에 마애불을 봉안한 전각은 <보도각(普渡閣)>이라 하며,

사찰로 들어가는 개울에 놓인 다리는 피안교(彼岸橋)가 아닌 보도교(普渡橋)라 부른다.

보도(普渡)란 말의 어원을 보면, 경전에 보도중생(普渡衆生)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니

의지할 곳 없이 떠다니는 것이 마치 바다 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본래 자비(慈悲)의 뜻으로 굉대(宏大)한 법력을 써서

다 구제하여 피안에 오르게 하리라.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또 중국 절강성 남해 관음보살 성지에 가보면 사찰마다

자항보도(慈航普渡)라는 편액이나 글귀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자항보도(慈航普渡)는 남해관음보살을 가리키는 이명(異名)이다.

자항보도(慈航普渡)자비로운 배로 많은 사람을 무사히 건너게 해 준다.라는 뜻이다.

 <보도각>의 여래를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 칭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백의관음(白衣觀音)>이라 부르는 것은 관음보살이 흰옷을 입고 때문인데,

보도각의 관음에 백색의 호분을 입혔기에 백의관음이라고도 칭하게 된 모양이다.



호분을 칠한 마애불상으로 서울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과

안성 굴암사 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는데

특히 보타사 마애보살좌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본방 서울보타사와 안성 굴암사 참조)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서울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옥천암에 있는 고려 시대의 보살상이다.

 19736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7<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로 지정되었으나,

 200964<옥천암 마애좌상>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4113일 보물 지정 예고를 거쳐,

201431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20<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보물 제1820호로 지정된 이 마애불은 높이 483, 무릎 폭 344

불상의 전면이 흰색 호분이 칠해져 있어 일반적으로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

또는 백의관음(白衣觀音)으로 불렸다.

 이 마애보살좌상에 관해서 성현(成俔, 1439~1504)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마애보살좌상의 상호(相好)는 사실적이고, 설법인(說法印)의 수인 형태도 유려하며,

어깨에 드리워진 천의(天衣)와 가슴에 대각선으로 걸쳐있는

 넓은 띠 주름도 유연하게 흘러내려 훌륭한 조각 표현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주면서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고려 시대 불교 조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현재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사면을 모두 개방한 보도각(普渡閣) 안에 보존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 앞에서 기원하였으며,

조선 후기 고종의 어머니도 아들을 위하여 이곳에서 복을 빌었는데 이때부터 하얗게 칠을 하였다고 한다.

  


  

머리에 쓴 원통형의 보관(寶冠)이나 목걸이 장식,

그리고 대의(大衣) 안쪽으로 보이는 대각선으로 입혀진 내의(內衣)의 표현에는

금색을 칠하여 장식성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또한, 관의 좌우에 뻗어 있는 관대(冠帶)에도

타원형의 금판(金板)이 달려 화려함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조각기법에서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하며, 관 밑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다. 이 불상은 머리에 쓴 보관으로 보아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짐작되지만, 관음보살 대부분이 보관에

 화불(化佛)을 새기는 것과 달리 이 보살상의 보관은

세 칸으로 나뉘어 각각 그 중심과 모서리에 연꽃을 장식하였다  


  

비교적 둥근 얼굴은 눈이 가늘고 입이 작게 표현되어 고려 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옷은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옷 주름은 선이 깊지는 않지만, 신체 전반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마애불로서 보물 제215호인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보인다.

(본방 북한산 승가사 참조)


#<현지 안내문>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이다.

불암 또는' 보도각 백불'로 일컫지만, 조선 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존상 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난 불교 존상이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다.

그리고 이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존상은 머리에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존상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입이 단아하다.

신체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편이며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어서

고려 12~13세기 마애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불암 뒤 모습


불암 옆 모습



이 마애보살좌상에 보이는 삼면 절첩식 보관과 뿔 모양의 관대,

타원형의 보관 장식, 천의식 착의법 등은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보타사 마애좌상과 형식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거의 흡사한 특징을 보여준다.(보타사는 본방 <서울 보타사 참조)

특히 이 보살상의 천의식 착의 형식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조성된 보살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이 마애보살상의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에

조선 전기 이전에 조성된 마애보살상임이 분명하다.

처음부터 어떤 신앙적 배경 아래 조성되었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는 해수관음 또는 백의관음, 즉 관음보살로 인식하였고

열렬히 신앙되어 왔음을 여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거친 바위 면에 새겼음에도 그 형태가 단정, 우아하고

선의 흐름이나 신체의 비례 등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고려 시대의 수준 높은 마애보살좌상으로 평가된다.


이 마애불에는 1편의 영적기(靈蹟記)가 전해지고 있다.

1807(순조 7)에 고양군 신도면에 살았던 윤덕삼(尹德三)이라는 노총각은

 나무 장사를 하여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그는 홍제동에서 자하문을 넘어

 나무를 팔고 돌아올 때마다 이 석불 앞에서 수십 번씩 절하면서

아내를 얻어 아이를 낳고 부자가 되어 나무 장사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100일이 넘은 어느 날, 꿈에 한 노부인이 나타나서

 내일 새벽 자하문에 나가 문이 열리거든 첫 번째 성 밖으로 나오는

여인을 집으로 데리고 오면 소원을 이루리라.”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자하문이 열릴 때 윤 도령을 찾아간다는 처녀를 만났는데,

그녀 역시 전날 밤에 윤 도령과 백년해로하라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석불에 예()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와서 낭자가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전답과 산을 사고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어

자손을 낳고 단란하게 살았다고 한다. 현재 이 절은 비구니의 수도 도량이다.

 

범종각


극락전


아미타불




신중탱


칠성탱




법고








삼성각


옥천암 삼성각은 여늬 삼성각과 많이 다르다. 독성, 칠성 산신을 모신 것은 같지만

옥천암의 산신은 바위에 부조되어 있으며

적멸보궁에서 유리벽을 통해 불탑이나 능을 보듯 유리벽으로 조성해 놓았다.











주소: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지문길 1-38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8

찾아가는길: 홍제역1번 출구. 마을버스8, 7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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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9.02.21 05:31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19.02.21 07:03

    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

  • 19.02.21 10:30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19.02.21 14:35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 19.02.23 16:59

    나무대자대비 관세음보살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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