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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개국군주지만 사리분별에 어두워 왕자의 난을 자초했다.
조선에는 크게 네 차례의 정변(政變)이 있었다. 태종(太宗), 세조(世祖), 중종(中宗), 인조(仁祖)다. 정난(靖難)이라고도 하고 반정(反正)이라고도 하는데 일단은 중립적 의미에서 정변이라고 부르겠다. 정변을 일반적으로는 성공한 쪽의 입장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권력을 빼앗긴 쪽을 깊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들 네 정변이 성공하게 된 요인이나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거기서도 사리분별의 중요성을 살피게 된다. 다만 세조에게 권력을 넘긴 문종-단종 부자(父子)는 오히려 임금이 아니라 김종서(金宗瑞)라는 신하가 세조를 막아내지 못한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태조(太祖),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의 경우만 검토할 것이다.
이성계, 《대학연의》 읽었지만…
먼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경우다. 그는 말 위에서 세상을 얻었다. 그러나 통치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일찍이 군중(軍中)에 있을 때부터 송(宋)나라 정치가이자 유학자 진덕수(眞德秀)가 펴낸 제왕학의 텍스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개국이 되고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유경을 가까이에 두고서 이 책을 풀이하게 했다. 즉위 초에도 한동안 이성계는 《대학연의》를 강독했다. 하지만 여러 문맥을 보면 이성계 자신은 한문을 그다지 잘 읽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연의》 앞부분에는 한(漢)나라를 개국한 유방(劉邦)과 관련한 의미심장한 일화가 실려 있다. 원래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실린 내용이기도 하다.
〈한나라 고조(高祖・劉邦) 황제가 천하를 평정했을 초기에 태중대부(太中大夫・궁중고문관) 육가(陸賈·기원전 240~170년)가 수시로 그 앞에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높이 평가하며 강술하려 하자 고제(高帝・유방)는 “내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 어찌 《시경》과 《서경》이 도움을 주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육가는 말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해서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문무(文武)를 함께 쓰는 것이야말로 장구한 계책[術]입니다. 만일 진(秦)나라 시황제가 천하를 얻고 나서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닦으며 옛 성인(聖人)이나 성군(聖君)들을 본받았다면 (진나라는 망하지 않았을 터인데) 폐하께서는 어찌 천하를 얻어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고제는 부끄러운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육가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위해 진나라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 내가 그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 그리고 옛날 왕조들의 성공과 실패 등에 관해 책을 짓도록 하라.”
육가는 곧바로 나라 존망의 근본이치에 관한 저술에 착수해 모두 12편을 썼다. 매번 한 편씩 올릴 때마다 고제는 “처음 듣는 말[新語]”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책의 이름도 《신어(新語)》라고 지어주었다.〉
육가는 전한 초기의 변론가이자 외교가로 초(楚)나라 사람이었는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곧바로 이 구절에 대해 진덕수는 송나라 유학자 호굉(胡宏)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사리분별에 어두웠던 이성계
한 고조 유방.
“한 고조가 그 말을 채용했더라면 반드시 적서(嫡庶)에는 분명한 구분이 섰을 것이며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어 후(后)와 부인(夫人), 빈(嬪), 부(婦)가 각각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또 어찌 척부인(戚夫人·?~기원전 194년)이 인간돼지[人彘]로 불리고 그의 아들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 준양왕(准陽王) 유우(劉友), 양왕(梁王) 유회(劉恢)가 모두 다 비명횡사했겠는가?”
척부인은 고조의 총희(寵姬)로, 조왕 여의(如意)를 낳았다. 고조가 태자를 폐하고 조왕을 세워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의 계책을 써서 당대의 저명한 은사(隱士)들인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불러 태자의 빈객으로 삼으니 결국 태자를 바꾸지 않게 되었다. 고조가 죽자 여후는 조왕을 짐살(鴆殺)하고 척부인을 투옥한 뒤 수족(手足)을 모두 자르고 눈알을 뽑고 벙어리 약을 먹여 측소(厠所)에 던져두었다. 그런 뒤 ‘인체(人彘・인간돼지)’라 불렀다.
물론 유방의 경우에는 본부인 여씨(呂氏)가 비극을 일으켰고 이성계의 경우에는 본부인의 아들 이방원이 비극을 일으켰지만 그 결과는 실상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더욱이 한나라에서는 유방이 죽은 뒤에 그나마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조선에서는 이성계가 살아 있을 때 비극이 일어났다.
인간사 이치에 대한 이성계의 얕은 통찰이 결국은 이런 비극을 불러온 셈이다. 애당초 첫째 부인 아들들이 버젓이 살아 있고 심지어 그중 이방원은 개국에 결정적 공로를 세웠음에도 사랑에 눈이 멀어 두 번째 부인의 아들 중에서도 막내를 세자로 정한 것 자체가 이성계의 낮은 사리분별 수준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연산군은 알고 있었다
연산군(燕山君)에 대해 우리는 하나의 가설(假說)을 갖고 있다. 즉 연산군은 왕위에 올라서도 한참 동안 친어머니 윤씨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모르다가 외할머니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되고서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해 사화를 일으키고 대신들과 충돌하다가 폐위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설은 실록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소설가 박종화(朴鍾和)가 1930년대에 발표한 소설 《금삼(錦衫)의 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상과는 전혀 동떨어진 픽션일 뿐이다.
연산군은 이미 아버지 성종 시절 세자로 있을 때 어머니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 성종 13년(1482년) 8월 16일 어머니 윤씨가 사약(賜藥)을 받고 세상을 떠났을 때 연산군은 7세쯤 됐다. 그리고 6개월 후인 성종 14년 2월 세자에 책봉됐다. 그리고 5년 후인 성종 19년 2월에는 병조판서 신승선(愼承善)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 무렵 성종은 생각을 바꿔 폐비 윤씨를 추증하여 왕비의 자리를 되찾아주지는 않았지만 격식은 왕비에 준하게 해서 제사를 지냈다. 그것은 세자를 위한 배려였다. 제사를 조금 앞둔 성종 20년 5월 16일 성종은 당시의 재상 윤필상 등에게 밀봉한 작은 편지를 전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어미가 자식 때문에 영화롭게 되는 것은 임금의 은혜이며 후일의 간악함을 방비하는 것은 임금의 정사이다. 지금 세자의 정리(情理)를 생각하면 어찌 측은하지 않겠는가? 지금 특별히 일정한 제사를 드려 자식의 심정을 위로하여 영혼이 감응하게 하고자 한다. 그러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영원토록 바꾸지 말고 아비의 뜻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맨 마지막 문장이 결국은 연산군의 발목을 잡게 된다. 실은 이 무렵을 전후해 세자는 어머니 죽음의 실상을 거의 파악했다. 그랬기 때문에 연산군 1년 8월 15일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이런 전교를 내리고 있다.
“폐후(廢后)가 덕이 부족하여 부왕(父王)의 버림을 받았으니 나는 골육의 정을 잊지 못하여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하지만 여러 신하들이야 어찌 소식(素食)을 하려 하느냐.”
연산군이 실패한 이유
즉 훗날의 무오사화(戊午士禍)나 갑자사화(甲子士禍)는 갑작스러운 충격적 소식으로 인해 연산군이 폭군이 된 것이 아니라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오랜 충돌 과정이 누적되면서 일어난 사건들인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그의 광기(狂氣)에서 폐위의 원인을 찾는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폐비된 어머니 문제 못지않게 연산군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유약한 아버지 성종 시절 커질 대로 커진 신권이었다. 특히 홍문관의 권력화로 상징되는 성종 시기의 대간(臺諫) 권력은 실은 성리학 자체가 추구했던 신하 중심의 세계를 구현하는 별동대라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연산군은 누구인가? 성종 7년(1476년) 11월 6일 밤 원자가 태어났다. 도승지 현석규와 우승지 임사홍 등이 선정문에 나아가 이렇게 아뢴다.
“우리 조선이 개국한 이래 문종과 예종은 모두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시어 오늘 같은 경사는 처음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왜 하필이면 문종과 예종을 특정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정상적으로 왕위를 이은 문종과 예종도 잠저에서 태어났다면 다른 왕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단종의 경우도 문종이 세자 시절에 낳았다. 즉 연산군은 아버지가 임금으로 있을 때 궁궐에서 원자(元子)로 태어나 국왕의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다.
이런 출생 배경은 강력한 자존감으로 무장하기 마련이며 당연히 강한 왕권을 추구하게 된다. 이처럼 원자로 태어나 세자로 있다가 왕위에 올라 철권(鐵拳)정치를 보여준 임금이 바로 훗날의 숙종(肅宗)이다. 왜 숙종은 성공했는데 연산군은 폐위됐는가? 어머니 문제로 분노 조절에 실패했고 대신과 대간을 한꺼번에 적으로 돌린 데 큰 원인이 있었다. 사리분별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형세 판단을 그르쳤던 것이다. 변원림의 책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일지사)은 그런 점에서 어떤 전문 연구자보다 정확하게 연산군의 실패 이유를 짚어내고 있다.
“연산군이 폐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실정(失政)을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을 확고하게 구축하기 전에 너무 성급하게 권세가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서두른 것에 이어 자신의 측근에 있는 친위대의 인권과 내시들을 함부로 다루어 단 한 명의 심복도 얻지 못한 데 있었다. 연산군은 초기부터 궁인들을 다루기를 심히 박하게 하여 조금만 잘못을 해도 60, 70대의 매를 치고 귀양 보내곤 했었다.”
아버지의 업보를 넘어서기에는 그 또한 아버지를 닮아 미숙했다는 말이다.
신경진과 구굉
우선 오해를 막기 위해 한 가지 지적해 둘 것이 있다. 사필귀정이라 해서 반정(反正)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광해군은 광해군 15년(1623년) 3월에 무력(武力)에 의해 쫓겨나기는 했지만 이미 광해군을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1620년경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그렇다면 당시 무력을 장악하고 있던 광해군이 1500여 명의 오합지졸에 의해 폐위됐다는 것은 곧 그의 무능과 연결짓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인조반정을 주도한 2인을 꼽을 때 신경진(申景禛)과 구굉(具宏)을 꼽는다. 두 사람 모두 당대의 무장(武將)이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宣祖) 주변의 혼맥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구조적 요인들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의 인물은 신화국(申華國)이다. 그의 두 아들이 신립(申砬), 신잡(申磼)이고 그의 장녀는 구사맹(具思孟)과 혼인을 했다. 신경진은 신립의 아들이고 구굉은 구사맹의 아들이다.
평산 신씨 집안과 능성 구씨 집안은 각각 선조와도 사돈관계였다. 신립의 장녀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 신성군과 결혼했다. 인조(능양군)는 신성군의 친동생 정원군의 장남이었으니 신립의 장녀는 인조의 큰어머니였다.
그리고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구사맹의 다섯째 딸과 결혼을 했다. 따라서 신경진은 인조의 큰어머니의 남자형제였고 구굉은 인조의 외삼촌이었다.
두 사람의 모의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광해군 7년(1615년) 신경희(申景禧)가 능창군을 추대하여 정변을 모의했다는 사건이 터져 결국 신경희는 국문을 받던 도중 옥사(獄死)하고 능창군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능창군은 능양군(인조)의 동생이었다. 신경희는 신립의 형 신잡의 아들이었다.
능양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친동생을 잃었고 신경진의 입장에서는 사촌동생(신경희)을, 구굉의 입장에서는 조카(능창군)를 잃은 셈이었다. 학계의 연구를 살펴보면 이미 이 무렵부터 신경진과 구굉은 동조세력 규합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항복 인맥
인조반정의 주역들을 길러낸 이항복.
다행스럽게도 광해군은 중앙정치는 대북(大北)세력(정인홍·이이첨)에 맡기면서 북방은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西人)에게 맡겼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했을 만큼 군무에 정통했다. 광해군 초에는 좌의정을 거쳐 북방 수비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를 지냈고 광해군 9년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를 가 이듬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훗날 인조반정 4대장이라고 할 때 신경진 외에 이서(李曙),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이 꼽히는데 이들 4명은 모두 이항복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신경진은 이항복이 도체찰사로 있을 때 막료로 데리고 있었다. 이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류는 당대의 실력자 정인홍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이항복의 천거로 관리로서 성공했다. 이귀는 이항복과 가까웠던 이덕형의 지원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들 네 사람은 하나같이 서인 계통의 인물들이었다.
한편 중앙정계는 대북세력과 소북(小北)세력의 당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각종 역모사건 등으로 희생자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광해군 정권에 반감을 갖고 초야에 숨는 인사들도 많아졌다. 이런 가운데 광해군 9년 인목대비 폐비가 이뤄졌다. 여론은 급속도로 반(反)광해군으로 돌아섰다.
신경진과 구굉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다. 다만 능양군은 능창군 사건 이후 집도 빼앗기고 감시가 워낙 심해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일차적으로 무신 이서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 두 사람은 이어 문무를 겸비했다는 김류를 포섭했다. 나아가 능양군 추대 계획을 완성하고서 원로 정객 이귀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이귀는 이미 대북세력으로부터 위험인물로 간주돼 감시를 받던 인물이었다. 최명길은 이귀와의 인연을 고리로 해서 그의 아들 이시백과 함께 거사에 참여했다. 그런데 광해군 정권은 위험인물인 이귀를 광해군 13년(1621년) 4월 연금(軟禁)에서 해제한다. 그만큼 무능했던 정권이었다.
광해군의 무능
광해군 14년 8월 신경진과 이귀의 정변 모의가 누설돼 대간의 탄핵이 시작됐다. 그런데도 처벌은 ‘외직 좌천’에 그쳤다. 심지어 조정에서는 “이귀와 김자점이 반역을 꾀하니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됐지만 광해군의 귀는 밝지 못했다[不聰]. 결국 3월 12일 광해군은 쫓겨났다.
태조, 연산군, 광해군 3명의 임금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점이 있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 전(傳) 8장의 한 구절이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그 사람의 나쁜 점을 알고 있고, 또 미워하면서도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天下鮮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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