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문】 정승동(政丞洞) 지명 유래의 대발굴과 밀양시 역사관광자원화 건의
— 고려조 두 정승(행촌 이암·김용)의 역사적 실증 기록에 기반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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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4(화) 오전 9:33 최종 수정
■ 제언자: 향토사학자 손흥수 · 도재국
■ 취지문 :
밀양시의회와 지자체에 간곡히 제언합니다
저희 두 사람은 수십 년간 향토사 연구에 매진하며, 밀양 단장면 **‘정승동(政丞洞·政丞谷)’**의 지명 유래에 얽힌 결정적인 역사적 사료를 발굴해냈습니다.
이것은 밀양시가 수억 원의 예산을 들여 용역 과제를 수행하더라도 쉽게 발굴해낼 수 없는, 개인의 사재와 열정으로 이뤄낸 매우 귀중한 향토사적 대발굴입니다.
지자체나 학계가 없는 역사조차 만들어내는 요즘,
이처럼 명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대발굴을 그대로 사장시키는 것은 밀양의 발전을 위해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침체되어 가는 밀양의 지역 경제와 문화 관광을 위하여, 밀양시가 이 귀중한 역사적 자산에 침묵하지 말고 **‘획기적인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해 주실 것을 간곡히 제언합니다.
■ 핵심 건의 :
정승동 『두 정승의 대비(對比) 유적비』 건립
밀양시 차원에서 정승동 현지에 고려 시대 두 정승의 역사 유적비를 건립해 주시기를 강력히 건의합니다.
●충신 행촌(杏村) 이암(李嵒) 정승 유적비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에 충성한 뒤, 정승동의 뛰어난 영남 알프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은거했던 구국 충신의 모습.
●역적 김용(金鏞) 정승 유적비
권력욕에 눈이 멀어 반역을 꾀했다가 밀양으로 유배되어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던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모습.
💡 후세 교육과 관광자원화의 가치
한 장소(정승동)에 머물렀던 **‘나라의 충신(행촌 이암)’**과 **‘나라의 역적(김용)’**이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역사적 인물의 삶을 유적비로 조명한다면,
이는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한 국민 역사 교육의 장이자 독보적인 스토리텔링 역사관광자원이 될 것입니다.
■ 《밀양지명고》의 전설·오류 수정과 역사적 진실 규명
기존 《밀양지명고》 등에 기재된 정승동의 유래는 고증되지 않은 막연한 전설에 의존하고 있어 반드시 수정·보완되어야 합니다.
[기존 기록의 오류]
"신라 때 왕자가 載藥山 약물을 마실 때 수행한 정승이 머물던 곳이라거나, 조선조 어떤 정승이 귀양살이한 곳으로 전해온다."
1. 조선 시대 정승 유배설의 허구성
조선 시대는 국가 통치 기틀이 엄격히 정비된 사회였습니다.
국왕과 신료들의 모든 언행과 조정 회의가 기록된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급 최고 관료를 유배 보낸 일화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막연히 '조선조 어떤 정승'이라 뭉뚱그려 기술한 것은 엄밀한 사료 고증을 거치지 않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2. 고려조 사료로 입증된 명백한 진실
기존의 막연한 전설은 고려 시대 **‘우정승 김용이 밀양으로 유배되어 온 역사적 사실’**로 정정·수정되어야 합니다.
더불어, 고려 시대 최고 재상이자 충신이었던 **‘좌정승 행촌 이암 선생이 은거하고 거닐었던 곳’**이라는 사실을 공식 지명 유래에 반드시 더해야(추가해) 합니다.
■ 사료 검증 :
고려 말 두 정승의 재임 및 정승동 연유(緣由) 기록
[ 행촌 이암 (李嵒) 정승 ]
● 관직 및 성격 : 고려 문신, 충신 및 영웅 (좌정승·수문하시중)
● 정승 재임 기간 :
○1차 : 1349년~1351년 (충정왕, 좌정승)
○2차 : 1358년~1362년 (공민왕, 수문하시중·좌정승)
● 주요 업적 및 행적 :
○홍건적 2차 침입 시 공민왕을 복주(안동)로 호종한 으뜸 공신
○1362년 관직 사퇴 후 정승동 등 영남 알프스에 은거 및 유유자적
● 정승동 유래 관계 : 정승의 신분으로 정승동에 은거 및 체류
[ 김용 (金鏞) 정승 ]
● 관직 및 성격 : 고려 문신, 권신 및 역적 (우정승)
● 정승 재임 기간 :
단선 : 1362년~1363년 (공민왕, 우정승)
● 주요 업적 및 행적 :
○정세운, 이방실 등 국난 극복의 명장들을 음모로 모함 및 제거
○1363년 '흥왕사의 변'(왕 시해 미수 반란) 주동
● 정승동 유래 관계 : 반란 실패 후 '밀양(密城) 유배'로 정승동 도착 (이후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