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전투 [公山戰鬪]
고려 태조 10년(927)에 경북 팔공산에서 벌어진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 후백제의 침공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왕건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다가, 경주를 약탈하고 되돌아가던 견훤의 군대와 팔공산에서 만나 전투를 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장수 김락(金樂)과신숭겸 등이 죽는 등 고려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후 팔공산으로 불리게 됐다.
8명의 명장 (* 3명은 동상, 기념비, 사원도 있다.)
*신숭겸 / *전의갑 / *전이갑 / 김락 / 김철 / 호원보 / 전락 / 손행
공산전투 신숭겸 장군(우측에 선 이)과 태조 왕건(오른쪽에서 두번째 앉은 이)
신숭겸 장군 유적지
신숭겸 장군 동상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八公山) 으로 바뀌었다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구지하철 1호선 해안(解顔)역의 유래는 '얼굴을 폈다' 라는 의미인데, 공산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뒤쫓아오는 후백제군을 피해 도주하다가 이 곳에 이르러서야 분한 얼굴을 풀었다는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반야월(半夜月)은 후백제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왕건이 자신의 탈출로를 비춰주던 새벽 반달을 보고 이 곳을 반야월(半夜月)이라 칭한대서 유래한다.
안심(安心)은 왕건이 추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이 곳에 이르러서야 안심했다는데서 안심(安心)이란 지명이 유래된 것이다.
왕건이 대구 앞산에 도달, 앞산 은적사(隱跡寺) 근처에서 사흘동안 몸을 숨기게 되는데 이후 이 곳에 은적사가 세워지게 되며, 인근 안일사(安逸寺)라는 절에서도 쉬게 되는데 이 곳도 왕건이 편히 쉬었다 갔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파군재 남쪽 산기슭인 봉무동 노인정 개천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태조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고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잠시 걸터앉아서 쉬었던 곳이어서 독좌암(獨坐岩), 도망치다 들른 마을에 어른은 한명도 없고 아이들만 있었다고 해서 불로동(不老洞)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전의갑, 전이갑 형제 장군 유허비
전의갑, 전이갑 형제 장군 유적지 한천서원
왕건은 고려를 창건하고 삼장군을 건국공신으로 태사에 봉하였다. 승전 후 삼태사는 군민과 등짐장수를 모아 전공을 치하하고 승전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등짐장수들은 흥에 넘쳐 쪽지게(등짐장수들의 지게) 위에 우두머리를 올려 태우고 “월사 덜사”하고 승전가를 부르며 서로가 밀면서 뛰어 놀았다. “월사 덜사”에서 월사(越沙)는 견훤이 모래골을 넘어 도망가는 뜻이라고 한다.
그 후 이것을 본 군민들은 쪽지게를 본 따 놀이기구를 만들어 덕망 있는 사람을 태우고 양편으로 나누어 놀이를 하여 전승을 기념하니 이것이 차전의 효시이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이런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