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색깔의 두 전쟁
단기 3957년(1624) 봄 베를린 부근
평지에서 길게 옆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대치하던 양 군대의 길이가 2킬로를 넘고 있었다.
구스타프로서는 이쯤해서 틸리군이 공격해 오길 바라고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배운 참호들을
언덕 아래에 파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틸리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공격징후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적 진영을 관찰하고 구스타프일행이 언덕을 내려와 지휘막사로 움직였다.
“그렇지. 후퇴하면 안되지. 그런데 왜 공격을 안 하는 거야 ?”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페르디단트가 더 이상 기다리게 놔 두지는 않을 테니까요.”
뤼베크는 페르디단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땅에 외국 군대가 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의 황권에 자신감이 없던 그로서는 당연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우린 작센인의 도움이 필요하단말야. 빨리 틸리군을 깨버리고 겁쟁이 신교도
영주놈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만 신교도들을 모을 수 있는데….”
구스타프가 라이프치히와 빈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했고, 그럴려면
현지보급과 지원이 필요했다. 스웨덴에서 물자를 공급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긴 보급로를 유지할 병력도 병력이지만 그럴 물자가 스웨덴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가 이번 출정을 계획한 것은 자국의 보급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현지보급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아직까지 작센공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꽝. 꽝. 꽝”
“뭐야 ?”
구스타프가 갑자기 들려오는 폭음에 놀라 소리쳤다. 토르스덴손이 달려왔다.
“적의 포격입니다. 조만간 공격이 있을 것 같다는 전초병의 보고입니다.”
구스타프는 기다리던 소식에 반가움을 얼굴 가득 나타내며 언덕위로 다시 말을 몰았다.
서둘러 적의 공격 진영을 보고 대응책을 하달해야 했다.
“기병을 중앙에 집결시키고, 토르스덴손은 야포에 산탄과 포도탄을 집어 넣고 대기”
언덕 위에서 바라본 적은 순수 보병만으로 움직였다. 기병은 보병 뒤에 숨었거나 아니면 우회기동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적 보병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적 선두가 사정 거리 안에 들어섰습니다.”
“더 기다린다.”
구스타프는 적이 돌격을 감행하면 야포를 발사할 생각이었다.
부사령관의 지휘하에 있는 보병부대가 구스타프의 진영인 낮은 언덕을 향해 한발 한발 움직이자,
요하네스 기병대는 숲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틸리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적의 허리를 뚫어 버릴 심산이었다.
“위험한 도박이긴 한데”
틸리는 장갑보병과 스웨덴군보다 강력한 포병대가 있으면서도, 이번 전투에 여전히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생기질 않았다. 그는 이런 전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격을 차일 피일 미루자,
파펜하임의 보고를 받은 황제의 재촉성 편지로 인해 더 이상 공격을 미룰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포탄이 날아와야 하는데 ?”
틸리는 구스타프에게 대포가 있다면 지금쯤 포탄이 날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스타프의 포 사정거리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좀더 시간이 지나거나 파펜하임 군대가 돌격을
시작하면 포격의 때를 놓칠 수 있었다. 아니다 다르까, 전방에서 연기가 올라오더니
포탄이 보병진출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격명령”
보병대의 돌격을 알리는 깃발이 오르자, 신호를 감지한 일선 보병 부대들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꽈 광”
포성이 멀리까지 들려왔다. 틸리는 망원경으로 포격을 뚫고 달려가는 보병들을 보면서
얼굴에 깊은 주름살을 만들었다.
“젠장. 저 놈들이 산탄을 만들었군”
서너 명이 한꺼번에 쓰러지는 모습이 망원경에 들어왔다. 산탄이 아니고서는 포탄이 떨어진
주변의 보병들이 쓰러질 리가 없었다. 가끔씩 돌격 보병 중앙에서는 산탄보다 더 위력적인 포탄이
터지고 있었다.
“요하네스에게 돌격명령”
보병선두가 적 방어선에 다다를 무렵 틸리는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부대를 다 쏟아 부었다.
여기서 승기를 잡으면, 예비로 남겨두고 있는 파펜하임의 기병대를 적 우익으로 밀고 가서
끝장내 버릴 수 있었다.
“화승총 사격 준비”
“발사”
“탕탕탕”
화승총의 몇 정인 불발탄이 열정 중 두 정에서 발생하고 있었지만, 100야드 앞으로 달려오는
적 보병을 향한 일제 사격이 긴 참호선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화승총에서 발사되는 총탄은
전방에 배치된 장갑보병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화승총 사격 후,
참호선 뒤쪽에 있던 아돌프 소총을 들고 있는 총병들이 총을 들어 지향사격 자세를 취했다.
“1렬 발사”
잠시 시간을 기다리던 총병 중대장들이 70야드 안으로 들어온 적을 향해 발사 명령을 내렸다.
“타타타타”
100야드 안에서는 장갑기병에게도 위협적인 아돌프 소총이 불을 뿜자, 화승총과는 판이한 결과가
나타났다. 진격 최전방에서 적 총탄으로부터 아군을 온몸으로 보호하던 장갑보병들이 우수수
쓰러지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틸리군에서도 화승총 병들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치열한 총격전이 보병들간에 벌어지고 있는 사이 요하네스 기병대가 숲속을 빠른 속도로 빠져나와
구스타프 진영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긴 창과 칼을 들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모습이
예리한 창이 종이장을 뚫어버릴 것 같은 기세와 같았다.
“야포를 돌려라. 2선 투입.”
구스타프는 기다리던 적 기병대가 나타나자 진영 T자 진영 맨 후미에서 보병간의 총격전을
지켜 만 보고 있던 기병 연대와 보병 연대를 투입했다. 이미 가속도가 붙은 상대에서 달려드는
요하네스 기병대는 구스타프의 기병대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돌격. 죽여라”
요하네스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적 진영을 유린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의 부하들은 죽음에 대한 겁을
상실했는지 날아오는 포탄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적 진영 중앙으로 내달리며 걸리적 거리는 보병들을
유린했다.
“좌측이 무너집니다.”
뤼베크는 좌측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자 조바심이 났다. 예비대가 투입되기 전에 진영을 파고든
요하네스의 활약으로 자칫 중앙이 유린당할 위기에 몰려 있었다.
“우측에서도 적 기병대가 몰려옵니다.”
구스타프는 전방을 응시하던 중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우측으로 망원경을 돌렸다.
대략 일천기가 못 되는 기병대가 우측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저 놈은 누군지 모르지만 무모한 놈이군. 기병대를 우측으로 보내 새로 나타난 적 기병을
전멸시키고, 적 보병 후미를 공격하라”
구스타프는 전방의 혼전을 바라보았다. 좌측이 위태위태 했다. 보병과 기병의 연합공격을 받고 있는
좌측은 조만간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적 보병은 아직 화승총 병들의 참호선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산탄과 포도탄은 적 보병의 접근을 조금씩 늦추고 있었다.
틸리는 점점 전황이 유리해져 가자, 처음으로 이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의외의 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이대로 간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스타프가 대포를 많이 끌고 왔나 ?”
요하네스 기병대에 쏟아지는 포탄 수를 세던 틸리는 최소 50문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틸리는 구스타프가 가지고 있는 야포가 신개념 야포로 소구경 경량포여서 손쉽게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말 한 필이나 사람 세 명이면 충분히 끌고 갈 수 있는 야포가
구스타프에게 있는 반면, 틸리가 가지고 있는 포는 말 세 마리가 끌어야만 했다.
어쨓든 틸리는 자신의 포를 전부 들어내지 않고 있었기에 점점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사령관이 명령도 없이 기병대를 움직였습니다.”
“뭐라고. 그 머저리 같은 놈이 내 명령도 없이 뛰어 나갔단 말야 ? 당장 불러들여”
“이미 적 기병대가 대응하고 있어서 빠져 나오기 힘듭니다.”
틸리는 파펜하임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기병 천오백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비어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면 될 것을 파펜하임은 이미 전세가 기울다고 오판하고 자신의 부대를 투입해 버렸다.
전공을 틸리에게 빼앗기는 것을 시기했는지 아니면 자신도 뭔가를 보여주려 했는지 몰랐지만,
그의 독단적인 행동은 틸리군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그가 돌파에 성공하지 못하면 틸리군 우익은 텅 비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이런 망할 놈의 새끼. 포대를 전진 배치시켜 당장”
이미 파펜하임은 월등한 숫자에 앞도 당해 전멸 직전에 놓여 있었다. 보병과 기병의 연합공격을 당하고
있는 파펜하임은 틸리 사령관이 절대로 움직이지 마라는 명령이 생각났지만 이미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파펜하임은 보병이 찔러오는 장창을 칼로 막고 왼손에 들려있던 단창을 날렸다.
단창이 적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깜짝 놀란 보병이 뒷걸음 쳤다.
어느새 주위에는 자신의 부하들이 한기도 남지 않았는지 적군으로 가득차 있었다.
“탕”
드라군이라 불리는 아돌프 소충을 가지고 있던 기병대원 하나가 마지막까지 혈투를 벌이고 있는
파펜하임의 머리를 향해 정조준 한방을 날렸다. 총알은 정확회 파펜하임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더니 말에서 떨어졌다.
“돌격. 우회해서 적 진영 후방을 친다.”
스웨덴 기병대장 빌헬름 2세는 전장을 보병들에게 맡겨놓고 서둘러 말을 몰아 앞으로 내달렸다.
아군 좌측과 정면에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부대가 적 후방을 쓸어버리면 적 진영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준비되는 대로 무조건 발사해서 막아”
틸리가 노령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숲속에서 끌어낸 포들이 포구를 움직여
각도를 조정하고 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틸리가 자랑하는 포대. 당시에는 획기적인 포이(包耳)를 갖추고 있던 포대는 초탄에 자탄 8개가
들어있는 일명 포도탄을 발사했다. 1마일을 날아간 포탄이 터지면서 기병대를 휩쓸었지만,
다음 포탄을 장전하는 5분동안 보병 측면을 돌아 후위를 달리던 기병대가 본영 사령부 진지로
쇄도해 들어갔다.
“예비대를 전부 투입해”
구스타프는 기병대가 우회에 성공하자, 예비대를 전부 투입해서 우선 기병대를 상대하게 했다.
요하네스 기병대를 힘겹게 막아내던 기.보 연합부대는 연대 규모의 보병이 추가로 투입되자 점점 승세
를 잡아갔다. 거기에 전 야포가 보병공격에서 요하네스 기병대 측면공격으로 포격 방향을 바꾸었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전세가 불리해지자 요하네스는 부대를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보병들의 온갖 구식 무기들을 상대하다
보면 어느새 총탄이 날아와 자신의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기.보 연합공격으로 요하네스는 부하 중 반절이상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적의 증원 병이 몰려오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가 사령부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마침내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이 불을 보듯 뻔했다.
“돌격”
마침내 구스타프는 후퇴하는 적들을 향해 총 돌격명령을 내렸다. 그가 몸소 롱소드를 쳐들고 언덕 위를
내려오자, 주위의 호위병들이 뒤질세라 뒤따라 달려왔다. 뤼베크는 일어나고 있는 대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거의 질 것 같았는데, 구스타프의 적절한 용병술로 인해 승리가 확실시
되고 있었다.
“돌격”
참호선에서 움직이지 않던 총병들과 기타 도검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방어선을 넘어 돌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월급을 받으며 훈련을 받은 보병들은 틸리군의 보병들을 차근차근 무찔러
나갔다. 요하네스가 쫒겨오자, 후퇴를 엄호해야 할 포병들이 포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틸리군의 포병은 우수한 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 전투에서 거의 역할을 해 내지 못했다.
“보병을 후퇴시켜서 전열을 재정비한다.”
틸리는 적 기병대를 피해 보병안으로 들어갔다. 오밀조밀하게 만들어진 보병진영은 기병대가 뚫고
지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는지, 틸리를 쫓아 보병진영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베를린으로 가는
통로를 장악하고 적군을 전장 중앙으로 몰아갔다.
“젠장. 베를린으로 후퇴한다. 요하네스는 길을 뚫어라”
앞뒤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틸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 가장 취약한 적 기병대를 향해
부대를 몰아갔다. 거꾸로 기.보 합동 공격을 받게 된 빌헬름 2세는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며
적의 기동을 방해하는 전술기동을 계속했다.
“타타타타타타”
전방에서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총탄소리는 틸리군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대규모
집결지에 떨어지는 스웨덴 야포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언덕 반대편에
배치되어 있던 야포가 전장이 이동하자 언덕을 넘어와 방렬 되고 있었다.
거의 보병과 같은 속도에 이동성이 용이한 야포가 산탄을 쏘아대고 아돌프 소총이 불을 뿜자,
틸리는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 멍청한 놈 때문에… 으으으윽”
주위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살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가 내려야할 마땅한 명령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 번 무너진 지휘체계는 겉잡을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제대로 응사하는 아군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요하네스만이 돌파구를 뚫기 위해 길을 막고 있는 적 기병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보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했다.
“탕”
“펑”
전장을 이탈하려던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하나 둘씩 쓰러져갔다. 적 기병대는 빠르게 다가와서는
석궁과 장창을 날리고는 빠르게 멀어져 갔다. 이쪽에서 조준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병들의 공격에 보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쉬이익, 윽”
틸리의 허벅지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이제 적들은 화살까지 날리고 있었다. 틸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부하들을 위한 마지막 명령.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명령을 내릴 때가 온 것이다.
“부관. 백기를 준비하게”
틸리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거의 이십년 만에 흘리는 눈물인가 하는 전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잡생각이 났다.
“눈물이 마른 줄 알았는데…”
“꽈광”
백기를 부관에게서 받아 든 틸리가 머리위로 백기를 들어올렸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서
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끝내 틸리는 그의 마지막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두 눈에 흐르다 만 눈물을
간직한 체 하얀 백기를 붉은 피로 촉촉이 적시며 생을 마감했다.
“백기가 흔들렸습니다.”
“상관없다. 계속 공격해”
구스타프도 언뜻 적 진영 중간에서 백기가 날리는 것을 본 듯 했으나,
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자칫 명령을 내렸다가 적이 역공이라도 하는 날에는 다잡은 승기를 놓칠 수 있었다.
단기 3957년(1624) 봄 스몰렌스크 카틴 숲 부근
이덕동 대위는 기병 정찰 중대병력을 서둘러 카틴숲 근처로 이동시켰다. 봉황에서 보내온 구조 신호로
스몰렌스크 진공군 사령부가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지 전투에서 단 한 척의 피해도 입지 않은 봉황이
최초로 적의 공격을 받고 추락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찰에 투입된 두 척이 모두 피격되어
그 중 한 척이 추락하고, 다른 한 척 역시 기지로 급히 귀환하고 있었다.
“부대정지”
이덕동 대위는 부대를 정지시키고 서서히 추락하는 봉황을 바라 보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봉황은
숲에서 불과 10미터로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자작나무로 빼곡히 채워진 숲은
자신이 적이라면 매복하기에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였다.
“난감하군. 일개 분대를 먼저 숲속으로 들여보내 주변 정찰을 시행하도록”
아군 구출도 중요했지만 주변 상황이 너무 나빴다. 자동소총을 꺼내든 정찰 분대가 천천히 추락한
봉황으로 다가갔다. 그사이 200여명의 중대원들이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며
언제라도 지원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승무원들은 왜 밖으로 나오지 않지 ?”
이덕동대위는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겨우 창 2개를 맞았다고 봉황이 추락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땅에 떨어진 지 꽤 지났는데 봉황 승무원들이 밖으로 나오질 않고 있었다. 추락하면서 통신기가
고장났는지 이쪽의 무선에 전혀 응답이 없었다.
“모두 부상을 당한 게 아닐까요 ? 아님 전사했거나 ?”
“그럴 리가 있나 ?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추락충격을 견딜만한 선체 골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이덕동대위는 1소대장의 말에
동의를 하며 형편없이 찌그러져 쪼글쪼글해진 비행선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누군가가 탔다면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다.
“이제 봉황시대는 간 것 같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 저나 우리가 천붕 지원을 받기는 힘들다고 하던데,
이러면 앞으로 더 힘들어 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나 저나 적들도 분명히 봉황을 따라왔을 텐데, 우리가 먼저 온 건가 ?”
이 지역은 스몰렌스크와 너무 가까웠다. 겨우 1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기에 적이 나타날
개연성이 상당히 높았다. 이대위의 예측대로 바르가 이끄는 기병대가 이미 숲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간발의 차로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는 성호를 긋고 있었다.
추락한 비행선을 발견하고 숲 밖으로 나갈 찰나에 적 정찰중대를 발견하고는
다시 숲속으로 숨어 들었다. 하지만 바르는 이대위와는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대한제국군은 영악하게도 일곱 기만 숲속으로 들여보낼 생각인지, 본대는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다.
“일단 뒤로 물러난다.”
바르는 일단 저들을 고이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공격하면 충분히 적을 섬멸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매복이 노출되면 더 큰 고기를 놓칠 수 있었다.
작은 미끼를 주고 대어를 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은 나무위로 올라가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행동해”
바르는 나무를 잘 타는 대원 둘을 나무위로 올려보내고 대한제국 기병대가 천천히 다가오자
드러나지 않게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이덕동 대위가 먼저 칼을 들어 봉황 외피를 찢어나가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출구를 확보하고
내부로 들어간 이덕동은 코를 자극하는 지독한 냄새에 코를 틀어막았다.
중대원들이 사방에서 외피를 찢고는 서둘러 승무원들을 밖으로 꺼냈다.
열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동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봉황 한 척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중대장님. 사령관님의 통신입니다.”
악취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 코를 잡고 있던 이덕동이 무전기를 받았다.
“충성 이덕동 대위입니다.”
“상황은 어떤가 ?”
“승무원 전원 사망입니다. 기체는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그곳은 위험 지역이니, 중요서류만 챙기고 봉황을 파기하라. 서둘러라”
“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통신을 마친 중대장은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사자를 운반할 도구를 봉황 잔해로
서둘러 만들고, 봉황 안에 있는 주요 기기에 폭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항해일지와 기타 서류를 챙겨 든 이덕동이 부대에게 이동명령을 내렸다.
바르 기병대가 만 하루를 숲속에서 웅크리고 다음날 아침을 맞이할 무렵
윤방식 소장이 이끄는 부대가 카틴 숲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바르는 전 대원에게 전투 명령을 하달하고 선발대가 지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여기가 봉황 추락지점인가 ?”
윤방식 소장은 부대의 이동을 잠시 멈추고 이덕동 대위가 폭파시킨 봉황 잔해들로 너부러져 있는
지역을 바라 보았다. 잔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주변을 바라보던 윤방식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작전참모를 불렀다.
“이곳 정찰은 했나 ?”
“네. 기병 정찰 중대가 하루 전에 정찰한 곳 입니다.”
“그래 ? 그런데 이상하군. 그때 정찰 중대장 좀 오라고해”
이덕동대위는 갑자기 사령관이 자신을 호출하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충성. 대위 이덕동. 사령관님 부름 받고 왔습니다.”
“자네가 어제 이곳에 왔었다지. 저기 보이는 작품이 자네 솜씬가 ?”
“그렇습니다.”
이덕동은 뭐가 잘 못 되었냐는 표정으로 윤방식이 지휘봉으로 가르킨 곳을 한 번 바라본 후 대답했다.
“어제와 특별히 달라진 점이 있나 ?”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질문에 이대위는 어제 폭파시킨 봉황의 잔해들을 하나 하나 바라보았다.
어제 멀리서 바라본 모양 그대로 인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전적으로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자네가 스몰렌스크 부대장이라면 이곳을 이렇게 놓아 두겠나 ?”
이대위도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적의 신식무기가 완전히 못쓰게 폭파되었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연구할 가치는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왔다 가야만 했다.
그러면 이렇듯 현장이 깨끗하게 보존될 리가 없었다.
“저 같으면 모조리 회수해서 연구해 보겠습니다.”
“동감이야. 하지만 적은 완전히 바보거나, 영리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군. 뭔가 노리고 있다는 거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작참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부대가 이곳을 지나려면
자작나무 숲을 좌현에 두고 길게 늘어섰다가 숲을 통과해야 했다. 우현으로 대부대가 기동하기에는
듬성 등성 있는 바위들과 잡목들로 진출이 용이하지 않았다.
“매복이 있겠군요 ?”
“그래. 분명히 있을 거야. 얼마나 있느냐가 문제군. 숲 규모로 보아서는 족히 수만은 숨길 수 있을
정도로 거대사군. 여기만 지나면 스몰렌스크가 바로 눈앞인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방해를 받지 않았으니까 !”
“숲을 통째로 구어 버릴까요 ?”
“나중을 위해서 후환을 없애야겠지. 우측으로 기병대대를 보내고, 좌측에 천포를 배치한 후
1연대부터 서서히 이동시킨다. 일단 맛 배기로 포탄 몇 발을 날려보지.
모두에게 숲속의 짐승들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해.”
스몰렌스크는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 진격하면 되었다.
딱히 본부에서 진격을 종용하는 것도 아니어서 시간에 구애 받을 필요는 없었다.
예상되는 위협은 무조건 없애버리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상책이라 생각한 윤방식 소장은
후미에 있는 천포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사이 기병대대는 우측으로 정찰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천천히 움직였다.
대한제국군의 움직임은 숲속에 있는 바르 기병대에게 모두 파악되고 있었다.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 들켰나 ?”
바르는 대한제국군이 이동을 멈추자 의아심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적절한 공격시점을 찾고 있던 바르는 망원경을 접고는 병력을 말에 올라타도록 하고
좀더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모두들 조용히 말을 타고 바르의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땅이 미약하게 떨려오더니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드드”
“뭐야. 저건”
바르는 말도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시커먼 철 덩어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철 덩어리 위에는 포가 한 문이 실려있었다. 대한제국군은 천포를 방어벽 삼아
천천히 숲을 지나쳐 갔다.
숲과 일직선이 되게 달려오는 50대의 천포 괘도와 엔진에서 만들어낸 소음이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소리가 뚝 멈췄다. 100미리 포를 탑재한 천포병들이 서둘러 네 모퉁이에 완충 지지대를
들이대고는 단단히 고정시켰다. 진행방향을 향하던 포신이 빙그르 돌더니 거의 동시에 숲을 향하자,
바르가 놀라 소리쳤다.
“공격”
그의 공격명령을 기다리던 궁수들이 먼저 화살을 날렸다. 대략 500미터를 날아간 활들이
대한제국군 행렬에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천포들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꽈광”
천포가 쏠 수 있는 최소 거리인 500미터를 날아간 포탄이 지면에 자탄을 뿌리며 폭발하며
숲속을 막 빠져 나오던 기병들을 휩쓸었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당황하던 보병들이
숲속을 향해 무조건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탕타타타타탕”
“펑”
더불어 천포에 달려있던 12.5미리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겨우 30초가 흘렀을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탄창하나를 다 비워버리고 새 탄창을 갈아 끼우던 병사들이
사격 중지 명령을 받고 전방을 응시했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윤방식 소장은 1연대와 천포대대가 날리는 포성에 귀가 멍멍해져서 쓰고 있던 철모를 탁탁 쳤다.
포격을 한 후, 매복병이 뛰어 나오면 그때 잡으려 했는데 먼저 공격을 받았다.
숲속에서 달려 나오다 총탄에 맞아 쓰여진 적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포탄으로 잔가지에 불이 붙어서 검은 연기가 여기저기서 올라왔다.
“1연대 투입 시켜 깨끗이 청소해”
바르는 자기가 왜 말에서 떨어져 꼼짝 못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짧은 시간동안 주위가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보였다.
자신과 같이 온 이천 명의 기병들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대장님. 여기 지휘관 같은 자가 쓰러져 있습니다.”
소대장은 모병장이 소리치자, 모병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숲으로 들어온 1연대 병력은
화살이나 총탄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몰라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주변을 수색했다.
소대장은 살 가망성이 없을 부상자를 바라보았다. 귀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고이 보내줘라. 생지옥이 따로 없다.”
주변은 피비릿 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말과 인간의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린 카틴 숲을
아무일 없었다는 듯 평원을 가로지른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댔다.
“철수”
확인 사살을 마친 1연대 병력이 숲속을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나무 위에 올라가 있어 용케 포격과
수색을 피한 패잔병들이 덜덜덜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차마 밑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 눈에는 대한제국군은 악마 군이나 다름없게 보였다.
“앞으로 5킬로만 더 진군하고 야영을 준비한다.”
1연대의 사격연습을 지켜보던 2연대와 기병 연대 병력들이 1연대가 숲속을 뒤지는 사이
진군을 계속했다. 천포들은 혹시 있을 지 모를 포격요청에 대비해서 아직 지지대를 풀지 않고 있었다.
포탄을 장전할 준비를 마친 천포원들이 지나가는 기병연대 병력들에게 엄지 손가락을 보이며
자신들의 전과를 자랑했다. 숲속의 상황을 알리 없는 그들로서는 당연하겠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1연대장은 착찹한 마음에 한 숨을 길게 쉬었다.
“휴 우 ! 피비릿내도 이제 지긋지긋 하다. 이번 작전만 끝나면 전역 신청서를 내야겠어”
연대장은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졌다.
스몰렌스크를 천포 최대 사거리인 5킬로 정도 남겨놓은 지점에 임시 주둔지를 만든
윤방식 소장은 자신들의 목표를 어떻게 공략하는 것이 좋은지 마지막 작전회의를 주재했다.
“기계화 부대가 있으면 거의 환상이겠군”
윤방식소장은 기계화 사단이 가지고 있는 천마들이 생각났다. 이런 곳에서는 천마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총안구까지 마련된 천마 열대만 있으면, 적 일천명은 충분히 와해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봉황은 언제 지원 가능하다던가 ?”
문뜩 윤소장이 아직까지 봉황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항상 머리 위에서 정찰을 해주어야 했는데, 사고 이후로는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아침에 도착 예정입니다. 이번 사고로 공군성에서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과거처럼 근접 정찰은 이제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광대역 통신 수단으로는 꼭 필요하니까 한시라도 빨리 와야 할 텐데.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이용해야 하니. 4600여단에서 지원나온 대대를 정찰 임무와 야간 매복에
투입시켜도록. 그건 그렇고, 스몰렌스크에 사자를 보내는 게 좋겠나 ?”
“항복을 권유하죠. 항복할 리는 없겠지만…”
“카틴 숲의 대학살을 전해 들었다면 항복할지도 모릅니다.”
“결사항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참모들간의 의견들이 분분했지만 윤소장은 상황이 어떻든 사자를 보내는 것이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좋을 듯 싶었다. 문제는 목숨을 걸고 완전 무방비 상태로
적진으로 들어가야 하는 임무를 누구에게 맡기느냐는 것이다.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은가 ?”
“민간인 자격으로 동행하고 있는 야로뽈끄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윤소장은 고두노프 비서였던 야로뽈끄가 자신의 부대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라면 이런 일에 적임자임이 분명하긴 했다.
야로뽈끄는 고드노프 퇴임과 함께 물러난 전진 행정직 관료 중 다시 채용된 몇 안 되는
고위관료 중 한명으로 아마도 스몰렌스크 행정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그 사람이 있었지. 일단 야로뽈끄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그가 간다고 하면 우리의 뜻을
스몰렌스크 주둔군에게 전해주십사 부탁드리게.”
바르 기병대가 거의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했다는 소식은 카틴 숲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베르나르딘에게 전해졌다. 가장 믿음직한 바르가 전사했다는 비통함에 젖어있던
그는 해자 앞에 대한제국에서 보낸 사자가 왔다는 소식에 발끈 화가 치밀었다.
“접근하면 사살해도 좋다. 무슨 얼어죽을. 그냥 돌아가라고 해”
야로뽈끄와 10여기의 기병대는 스몰렌스크에서 날리는 화살과 화승총을 피해 성에 접근도 못해보고
야전사령부로 귀환해야만 했다.
단기 3957년(1624) 봄 스몰렌스크
윤소장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야뽈로끄가 쫓겨 왔다는 소식에 적잖이 실망을 했다.
최소한 도시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는데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것이다.
스몰렌스크는 평지에 만들어진 도시였다. 유럽에서 많이 보이는 영주들의 성과는 다르게
도시 전체가 낮은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안에는 거주지가 밀집되어 있었다.
외벽은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할 만큼의 높이였고, 앞으로 해자가 만들어져 있었다.
“철저한 포격으로 외벽을 완전히 없애버려. 보병의 희생을 강요할 수도 있으니까.
“포격 개시 후 2연대를 접근 시킨다. 접근전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군.”
“민간인 피해가 상당하겠습니다.”
“민간인 ? 전쟁 중에 민간인이 어디 있나 ? 저 도시에 있는 사람은 다 우리의 적이야.
포격개시 하도록 해”
스몰렌스크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지휘부에서 일킬로미터 전방에 방렬된 천포대대에게 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사령부 상공에는 봉황이 떠 다니며 포격 유도와 주변으로 접근하는 적을 탐지하고
있었다. 최전방에 나가있는 2보병연대장 경안성 대령은 자신의 머리위를 지나가는 포탄의 궤적을
쫓았다. 순식간에 날아간 포탄이 외벽 주변으로 떨어져 내리며 폭발음이 들려왔다.
“뒤로 공일공. 효력사”
봉황에게서 수정치를 전해들은 공구중령이 효력사 포격을 명령하자,
40문이 일제히 포문을 열고 목표지점을 집중으로 타격하기 시작했다.
“저 정도 위력일 줄이야 !”
베르나르딘은 무너져가는 외벽을 망루에서 지켜보면서 망연자실했다. 거의 3마일 거리에서 날리는
포탄에 외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외벽에 기대어 적이 다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화승총병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철수시켜. 도시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 한판 붙는다.”
베르나르딘은 외벽과 해자가 대한제국군의 진입을 막는데 긴요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부질없음을 깨닫고는 병력을 도시 안으로 끌어드렸다. 도시 지리에 밝지 않는 대한제국군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면 승산이 있을 수도 있었다.
“왕궁과 대포를 끌어와”
베르나르딘은 굉음을 울리며 다가오는 10개의 괴상한 물체가 눈에 띄자, 서둘러 왕궁을 끌어오도록
했다. 말 두필이 장전할 수 있도록 개조된 왕궁은 하늘에 떠 있던 비행체를 사냥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장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2연대 투입”
2연대 3대대 병력이 천포에 달려있는 기관총의 엄호 사격을 아래에서 천천히 스몰렌스크로 접근했다.
교두보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3대대 병력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적들의 반격이
없었지만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면 최소한 화살이라도 날아올 것이 분명했다.
“드드드드”
천포장의 기관총 사격과 동시에 3대대 병력이 각개 약진으로 교두보를 확보하고 대기중인
다른 대대가 공격할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사이 포탄은 이제 외벽을 지나 훨씬 앞쪽을 때리고 있었다.
“돌격 500미터 까지 전속력 돌격”
“탕. 탕. 탕”
모진 포격속에서도 살아남은 폴란드 병사들 몇명이 화승총을 쏘아 댔다.
전력 질주 하던 3대대 병력이 전방에서 포염이 들리자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미끄러지며 바닥에 바짝 엎드려 사격을 가했다.
“뭐하나 ? 3소대 돌격. 돌격 하란 말야”
중대장이 무전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니기미. 소대 돌격 준비. 적이 쏜 직후 달려나간다.”
중대장의 돌격명령을 받은 3소대장은 차분히 시간을 기다렸다. 재장전하는 시간을 대략 2분정도로
계산한다면 조만간 저놈들은 장전을 마칠 것 같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적이 사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소대장은 하는 수 없이 소대원들에게 진격명령을 내렸다.
“하중사. 3분대는 현위치에서 엄호하고 나머지 분대는 높은 포복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실시”
소대장이 엉덩이를 들고 앞으로 전진하자 나머지 소대원들도 포복으로 100여미터를 전진할 요량으로
움직였다. 화살이 날아오지 않은 게 용했지만, 외벽은 안전하게 활을 쏠 만한 은신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타당 타당”
“적들은 재장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단숨에 달려간다. 전원 돌격”
소대장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으리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헉”
폴란드 병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대장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뜻밖의 사태에 헛기침 소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타탕”
헛기침을 하며 엎드리던 소대장은 폴란드병의 얼굴이 터져나가면서 뒤로 넘어가자 뒤를 보았다.
언뜻 하중사 총구에서 연기가 나는 듯 했다. 그 짧은 사이 소대원들이 외벽을 타고 넘어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베르나르딘은 대한제국군 보병보다는 무지막지하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무직하게 생긴 천포에
더 신경이 쓰였다. 불과 10대 밖에 되지 않는데도 종행무진 움직이며 부하들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천포가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저기 멈춰있는 놈을 향해 발사”
베르나르딘이 가르킨 곳에는 천포 하나가 이동을 멈추고 사격을 해대고 있었다.
“왜 멈춰선거야 ?”
“엔진이 꺼졌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천포장인 마중사가 운전병과 대화를 하고 있던 중에 운전석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중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창화살 하나가 운전석 전방을 뚫고 들어와 운전석 의자에
꽂혀 있자 마중사 입이 짝 벌어졌다. 마중사와 이야기를 하느라 운전석에서 일어나 있던 운전병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 앉았다.
“어디서 날아오는 거야 ?”
얇은 막 처리가 되어 있는 전방 유리는 충격을 못 이기고 사방으로 갈라져 시야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사이에 서너개의 창화살과 포탄이 주변으로 떨어져 내렸다.
“집 나와라 집 나와라. 우린 공격 받고 있다.”
마중사는 급히 무전기를 들어 포대 대대와 통신을 연결하고자 했지만 무전기와 연결된 선이
끊어졌는지 계속해서 잡음이 들려왔다.
“천포를 버리고 후퇴한다. 서둘러라”
마중사가 천포에서 뛰어내려 후방을 향해 달려가자 다른 3명의 승무원들도 미련없이 천포에서
뛰어 내렸다. 한참을 달려가던 마중사는 뒤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소리에 천포가 폭발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적 포대 위치 확인. 좌표 030-120”
봉황은 전방에 나가있던 천포가 폭발하자 그 쪽으로 망원경을 돌려댔다.
집중 포격을 받은 천포는 포탄이 유폭을 일으켰는지 연속적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적 포대 위치로 일제 포격”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공구 중령은 천포 하나가 폭발하자 어이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천포가 소모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와와와와”
반면 대한제국의 천포를 파괴시킨 폴란드 포병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넓은 지역에서 공격해오는
대한제국군을 막기위한 전투지휘에 여념이 없던 베르나르딘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천포 한대를 파괴하고 다른 목표를 공격하기위해 재 장전하던 그들의 머리위로 40문에서
쏘아올린 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자 방금 전까지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사람들이 한 조각 고깃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천포 1대 손실. 2연대 선발대가 도시 안으로 진입.”
작전참모는 전선에서 들어오는 보고를 토대로 연신 상황판을 고쳐나갔다.
“1연대를 투입시킬 까요 ?”
1연대는 2연대 공격방향에서 남쪽으로 한참 더 내려온 곳에서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기병연대가 도시 외곽을 돌아다니고 있는 동안,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적 후방에서 오는
지원병을 차단하기 위해 배치된 1 연대는 1개 대대만 참호선에 투입하고 나머지는 공격 대기 중이었다.
“조금 더 지켜보지. 일단 천포를 전방으로 이동시킨다.”
보병이 점점 진격해 들어감에 따라 천포도 방렬 위치를 재 조정하기 시작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간
2연대 병력들은 건물 하나 하나를 수색하며 조심스럽게 진격로를 개척해 나갔다.
그들은 적의가 없음을 확실히 표현하지 않는 이상,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북쪽이 심각합니다. 서쪽 병력을 이동시켜야 합니다.”
베르나르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용병력의 대부분이 북쪽과 서쪽에 몰려 있었고,
서쪽을 비우면, 대한제국 군이 서쪽으로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기병대는 도시 주변을 돌면서
계속해서 허점을 찾고 있었다.
“그럼 서쪽은 누가 지키나 ?”
모두들 말이 없었다. 대한제국군은 일시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대략 500-600명이 공격을
감행해 한 지점을 확보하면 뒤에서 순차적으로 비슷한 규모의 병력이 엄호를 받으며 진격했다.
3000천여명대 오백명의 싸움이었지만 무기 성능에서 차이가 너무 났기 때문에 죽어 나가는 것은
폴란드 군이 대부분이었다.
“악랄한 놈들. 저 놈들은 포로를 살려두지 않는다는데…”
베르나르딘은 카틴숲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말을 생각해 냈다.
치료만 하면 살 수 있던 부상당한 사람들은 대한제국군은 확인 사살까지 하는 모습을 나무 위에서
목격한 그들은 대한제국 군대를 악마라고 말하곤 했다.
“대장님. 굴러다니는 철덩어리들이 엄청나게 몰려 옵니다.”
“어느쪽에서 오는 거냐 ?”
“북쪽입니다. 대충 봐도 30개는 넘어 보입니다.”
10대의 천포를 상대하기도 벅찬 베르나르딘은 30여개가 더 나타났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그에게는 온전한 대포도 남아있지 않았다.
“꽈고고고광”
“또 시작인가 ?”
잠시 멈췄던 대한제국의 포격이 재개되었는지 포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처음보다 도시안쪽으로 떨어지는 포탄은 목조건물을 불태워버리고 석조건물을 무너뜨렸다.
“빨리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 있다가는 서쪽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게 됩니다.
다행히 북쪽을 제외한 외벽은 무너지지 않았으니, 소수 병력으로도 잘 하면 버틸 수 있습니다.”
“좋아. 일단 이동시킨다. 노출되지 않도록 이동해서 적의 이동을 차단하도록”
그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전령이 서쪽으로 뛰어가는 사이에도 시 중앙을 향해서 계속해서
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포탄은 무차별적으로 지상에 있는 건물과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타당”
분대단위로 흩어진 2연대 병력들이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도시 중앙으로 이동하는 중 석궁을
든 자를 발견하고 사격이 가해졌다. 엄폐물로 이용된 목조건물 모퉁이가 너덜너덜해지면서
사람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전진”
분대장의 명령의 분대원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격자세를 취하며 전진했다. 매복병들은 지리를
최대한 이용하여 골목모퉁이에서 화살이나 화승총을 발사하고는 골목길로 스며들었다.
매복병을 쫓아 모퉁이를 돌면 매복병은 어느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어지럽게 만들어진 골목길 자체가 시가전을 펼치는 폴란드 군에게는 휼륭한 엄폐물이 되고 있었다.
각상병과 조일병이 무하사가 가르키는 집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어두컴커컴한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조용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각상병의 말에 분대 전체가 집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분대장이 다시 골목으로 나와 다음 집으로 들어갔다.
“3분대장님”
집안으로 들어가려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린 무하사는 자신을 찾아온 소대전령을 바라보았다.
“왜 ?”
“소대장님께서 이곳 수색을 중단하고 작전지역 340으로 이동하랍니다.”
“알았다. 우리만 가나 ?”
‘아닙니다. 중대 전체가 움직입니다.”
소대전령이 본부소대로 돌아가자, 전술지도를 펴든 분대장은 340지역이 어딘지를 살펴보았다.
그곳은 동쪽으로 한참을 이동해야만 했다.
“이동 명령이다. 차병장이 선두를 맡는다.”
분대원들이 골목에서 모두 사라지자, 무하사가 들어가려고 했던 집안에서
두어 명의 폴란드 병사들이 나와서 중앙으로 열심히 뛰어갔다.
“타타타타타탕”
무하사는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사격소리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왠만해서는 자동으로 사격을 하지 않는 게 대한제국군의 교전 수칙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헉”
“사격”
“탕탕탕’
갑자기 폴란드 병 십여명이 샛길에서 뛰어나오자, 놀란 무 하사가 방아쇠를 당겼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300-340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10여명을 일시에 쓸어버리고
그들이 나온 샛길 모퉁이로 고개를 내밀자, 폴란드 병 수십명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분대 산개. 적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적이 나오지 않자, 불안해진 무하사가 다시 모퉁이에 고개를 내밀었다.
“타타타탕타탕”
무하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아군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반대편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다른 분대는 이곳에 아군이 있다고는 생각을 못했기에
모퉁이에 사람머리가 보이자 바로 총을 난사했다.
대한제국군 군복을 입은 사람이 바닥에 널부러지자,
그제사 오인 사격을 알아채 상대편이 서둘러 뛰어왔다.
양쪽 분대원들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무하사를 부등커 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마하사님. 분대장님.”
“야이 개새끼야. 잘 보고 쏴야 될거 아냐 ? ”
차병장이 상대방 분대장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일순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서로 총구를 겨누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멱살을 잡힌 분대장은 멍하니 몸을 차병장에게 맡긴 채 망연자실해 있었다.
“적이다.”
서로 죽일 것 처럼 으르렁 거리던 사람들이 누군가 외친 한마디에 우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분대장은 아직도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있었다.
그의 몸에 화살이 서너개가 날아와 밖히자,
그제사 정신이 든 분대장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화살을 쏜 자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꼬꾸라 졌다.
“1연대 투입하고 기병 연대에 시청 접수 명령을 하달하도록”
북쪽이 늘어난 적 지원병으로 인해 고전한다는 소식에 마침내 윤소장은 1연대를 시가전에 투입시켰다.
세시간 동안 지속된 전투가 점점 끝이 나고 있었다. 도시 깊숙이 들어간 병력 때문에 천포들은
포격을 멈추고 확보된 통로를 통해 보병들을 근접지원하기 위해 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단기 3957년(1624) 봄 스몰렌스크
이종선 대령이 이끄는 기병연대가 스몰렌스크 외곽을 맴돌다가 시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접수하고는
북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도시 외곽을 감싸고 있는 외벽은 기병대가 뛰어 넘기에는
무리가 따라서 이미 천포 포격으로 무너진 북쪽으로 진입하려는 듯 보였다.
“대대 돌격 준비”
연대장이 8연발 권총을 꺼내 들고 하늘을 향해 한발을 발사했다.
“탕”
연대장의 돌격 명령에 1대대부터 대략 오분의 간격을 두고 연대 병력이 확보된 통로를 통해
시내 중심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모든 기병 대원들은 돌격소총대신에 허리춤에 찬 권총을 꺼내 들고
속도를 높였다.
“천포를 옆으로 산개 시키고, 기병대는 종심을 파고 든다.”
좁은 교통로에 천포대대와 기병연대가 몰려들어 병목현상이 생길 것을 우려한 사령부에서는
천포대대를 좌우로 움직이며 보병연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그사이 4파로 나뉘어진 기병연대가
경주라도 하듯 빠르게 시내 중심을 향해 달려나갔다.
“탕.탕”
기병대원들은 눈에 띄는 사람들에게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손에 들린 총을 난사하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윤방식 소장은 자신이 보유한 병력 중 특수여단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이
스몰렌스크에 투입 시켰다. 강력한 저항에는 더 강력한 힘으로 뚫어버린다는 전술을 즐겨 사용하는
윤방식소장은 기병연대를 투입하고도 적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면 천포대대를 이용해서
스몰렌스크를 완전히 불태워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연대 정면에 적이 소수이기만을 바래야지. 연대에 돌격명령을 하달하게”
경양근 보병 1 연대장은 외벽 반대쪽에 있었던 폴란드군이 북쪽으로 대부분 이동했기 만을 바랬다.
중간 중간에 있는 해자 때문에 실제로 연대병력이 이용할 수 있는 통로는 한정되어 있었고,
이동 중 일제사격에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많았다.
“3소대가 먼저 움직인다. 후방엄호를 확실히 하도록”
3소대가 움직이는 사이 나머지 소대원들은 폴란드병을 저격하기 위해 외벽을 응시했다.
“이동”
3소대장의 명령에 소대원 40여명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앞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100미터를 넘게 달리자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들이 헉헉대기 시작하더니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외벽에서 대략 400미터 지점까지 진출한 3소대 병력이 기관총을 거치하고 사격 준비를 마치자,
뒤에서 돌격준비를 마친 중대병력이 돌격자세로 3소대를 지나쳐 앞으로 달려나갔다.
각 소대에 배치된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만이 3소대에 합류해서 기관총을 거치하기 시작했다.
“돌격”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중대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전방의 외벽을 향해 달려나감과 동시에
후방 기관총 진지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적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하는 제압사격이 계속되는 동안
외벽에 가장 먼저 도착한 1소대원들이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수류탄 투척”
수류탄 수십개가 외벽을 넘어가 터졌지만 들려오리라 예상한 비명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소대장이 의아해 했다.
“외벽을 폭파시킨다.”
폭발물 일명 도시락이라 불리는 폭탄을 외벽 군데 군데에 박아넣은 소대원들이 뒤로 50미터 이상
후퇴한 후 도시락을 폭파시키자, 대략 10여미터의 구멍이 뚫렸다.
그 사이로 중대원 전원이 빨려 들어갔다.
“좌우로 신속전개”
멀리서 폴란드 병이 달려오는 것을 확인한 소대장이 급히 소총을 들어 사격을 시작했다.
“좌측방 적이다.”
“타타타탕”
방사형으로 이루어진 스몰렌스크는 기병연대가 도심에 있는 시청을 장악하자 내선의 이점을 살리며
방어전을 펼쳐오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어난 길을 따라
움직이는 기병연대가 곳곳에서 보병연대 병력과 선을 연결하면서 폴란드군은 도시의 좁은 구역에서
포위당해 각계격파를 당하기 시작했다.
단기 3957년(1624) 여름 신성로마제국 황궁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 2세가 자신을 급히 찾는 다는 전갈을 받고 황궁으로 들어섰다.
틸리의 전사와 틸리군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는 황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구스타프 군대는 작센공의 후원을 받으며 군대가 삼만이 넘어 있었고
차츰 차츰 라이프치히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렌슈타인경.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소 ?
나는 그대가 황제군 총 사령관직을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요하네스는 아직 경륜이 짧아 대군을 이끌기에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
“그렇긴 합니다만. 전 이제 그만 물러날까 합니다. 더 이상 폐하를 도와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경이 안 도와 주면 누가 도와 준 단 말입니까 ?”
“폐하. 지금 구스타프 군대중 일부가 보헤미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제 영지도 지키기 힘든 상황입니다. 로마나 스페인에 구원을 요청하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발렌슈타인은 자신의 경쟁자 한명이 운 좋게도 사라지자 이번에 확실히 자신의 입지를
다질 생각이었다. 각지의 구교도 영주들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시점에서 틸리 장군의 죽음은
더 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발렌슈타인경. 정녕 힘들겠소 ?”
거의 체념에 가까운 황제의 음성에 그는 이쯤해서 미끼를 던졌다.
“제가 보헤미안쪽에서는 원성을 듣고 있지만 남부에서는 좋은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대략 오만정도의 병사를 모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각 영주의 입김이
작용하는 군대를 통솔한다는 것은 총사령관으로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지금 같은 위기에 총사령관의 명령이 일사분란하게 먹혀 들지 않으면 어떻게 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겠소 ?”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 상황으로는 누가 총사령관직에 오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군대를 강력하게 통솔할 조치가 필요한 것 입니다.”
“만일 경이 총사령관직을 수락한다면 무엇이 필요한 것 같소 ?”
황제는 발렌슈타인이 총사령관직을 수락만 한다면 뭐든지 해 줄 용의가 있었다.
지금 그의 곁에는 그만한 군 지휘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없었다.
“제가 오만의 병력을 제가 먹이고 입히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총사령관에게 황제에 버금가는
지휘권을 내려 주십시오. 이는 각 지역의 영주들에게 총사령관의 명령에 황제에 버금가는 복종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과 버금가는 지휘권을 요구하는 발렌슈타인의 말에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요구를 수락하면 제국에는 두 명의 황제가 존재하는 거와 같은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황제는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것이 확보되지 않으면 저는 제 영지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폐하 ?”
“알았소. 네 경의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았으니, 제발 총사령관이 되어 주시오 ?”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각지의 영주들에게 폐하의 뜻을 알려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남부로 내려가서 병사들을 모집할 까 합니다.
그 사이 황제폐하께서는 잠시 몸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소. 경은 서둘러서 구스타프를 몰아내도록 하시오. 총사령관 ?”
“소신은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발렌슈탄인은 서둘러 황궁을 나와 남부에 있는 영지로 돌아갔다. 그는 지금까지 축적한 재산을
평소부터 알아오던 연대장급 장교들에게 풀어서 병사들을 모으게 했다. 군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기에 많은 영주나 황제군 장교들은 언제나 재정적 지원에 목말라 했다.
연대장 정도만 되어도 그는 자신의 병사를 스스로 먹이고 입혀야 했다. 그런데 발렌슈타인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자, 너도나도 그의 휘하에 들기를 원했다. 그렇게 모인 오만의 병력과 황제의 명으로
구교영주들이 보낸 병력 오만 총 십만의 병력이 구스타프의 사만 병력을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서
몰아내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 부대들은 절대로 구스타프군과 전면전을 벌이지 말고
적 보급로와 통신로를 차단하는데 주력하라.”
발렌슈타인이 총사령관직에 오르고 내린 첫번째 명령이었다.
그는 틸리가 여러 차례 후퇴하려고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구스타프군은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어서 몇 배의 전력차를 보이지 않으면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발렌슈타인이
채택한 전략은 적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그를 위해 보급로 공격에 소수 정예 병을 투입했다.
브르타뉴 로리앙 에드몽영지
몽블랑에서 영지를 담보로 잡힌 에드몽은 그의 아버지인 로리앙 백작이 사냥도중 사고를 당해
죽어버리자 로리앙 영지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하지만 고리대금 업자에게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던 그는 영지를 고스란히 몽블랑 주인에게 넘겨줘야 했다.
“자. 이로서 이곳 영지는 몽블랑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자 이백 파운드는 무엇으로 갚으신 생각이신지요 ?”
몽블랑 주인이 보증서준 오백 파운드에 세귀르에게 빌린 돈 백 파운드 거기에 다시 빌린 돈
이백 파운드에 이자 백 파운드가 겹쳐 총 구백 파운드가 에드몽이 진 빚이었다.
영지 판매대금 칠백 파운드로 빚잔치를 했지만 그래도 이백 파운드가 모자랐다.
에드몽은 지난 겨울동안 구백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탕진해 버렸다.
“이곳 영지를 넘겼으면 되었지. 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이요 ?”
세귀르가 악마보다도 더 한 놈으로 비춰진 에드몽은 열불이 났다.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다.
“몇 달 동안 황제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생활을 하셨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정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오. 난 이제 가진 게 하나도 없단 말이요 ?”
“그러시면 곤란하지요. 마님 집안도 꽤 부유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사위를 나 몰라라 하시겠습니까 ?
아니면 마님이라도….”
세귀르는 뒷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여차하면 에드몽의 부인을 사창가에 팔아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었다. 브르타뉴에서는 미인이라고 소문난 에드몽의 부인을 파리의 사창가에 내다 놓으면
인기를 끌만 했다.
“그건…”
에드몽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에드몽님의 생각 여하에 따라서는 이곳 영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만…”
두 사람의 말을 다 들었다는 듯 마리가 휘장을 열고 나타났다. 이유정이 나타나자 세귀르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몽블랑에서 가야금을 치던 여인으로만 알고 있던 에드몽은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말은 그에게 물에 빠진 사람이 붙잡고 싶은
지푸라기와 같았다.
“무슨 말이요 ? 세귀르”
“마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에드몽. 당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지금까지의 악몽이
달콤한 꿈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수 없겠소 세귀르 ?”
“그건 마님에게 여쭈어 보십시오. 실질적인 몽블랑의 주인이시며, 제 돈의 주인이시기도 하지요”
에드몽은 몽블랑의 실질적인 주인이란 말에 이유정을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놀라실 것까지요. 제가 에드몽님에게 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쉬운 것이지요. 어때요. 제 제안에 응하시겠습니까 ?”
지금 상황보다 더 나빠질 게 없는 에드몽은 이유정의 제안이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그가 처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물론이지요. 설사 저보고 죽으라고 해도 할 것입니다.”
“호호호. 에드몽님처럼 잘 생기신 분이 돌아가시면 파리의 뭍 처녀들의 원성을 어찌 들으라구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니 너무 겁먹지 마십시오. 앞으로 다른 분이 에드몽님에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알려줄 것입니다.”
이유정의 소개를 받은 고진영 소령이 휘장를 열고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 전 방금 소개 받은 고진영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천천히 우리의 일에
대해 논의 해보기로 하고 만찬을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 새로 태어난 에드몽을 위해서요 ?”
“좋습니다.”
방안의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에드몽만이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어리둥절해 있었지만
세귀르가 그를 대리고 나가자 방안에는 이유정과 고진영만이 남았다.
“이로서 그림자 104호도 만들어졌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진영이 이유정의 손을 잡자, 그녀의 양 볼에 홍조가 띄었다.
“에드몽은 의외로 쉬었습니다. 그만 가시지요 소령님”
“단 둘이 있을 때는 소령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고진영이 돌아서는 이유정을 살짝 끌자, 그대로 딸려 들어가 그의 품안에 안겼다.
품안에 살포시 안긴 이유정이 고진영을 올려다보자 고진영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몸을 비틀던 이유정의 얼굴과 고진영의 얼굴이 하나로 겹쳐졌다.
에드몽이 새로운 영주로 오른 후 로리앙 지방에는 몇 가지 획기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소작농들에게 부과되었던 무거운 세금이 없어지고, 농민들에게 한글과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아울러 구교 주교들의 영향을 받는 교회를 배척하는 일을 우회적이고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에드몽이 직접 건립한 교회는 기부금이나 십일조 기타 헌금을 일체 받지 않고, 오히려 교회에 오는
자들에게 음식과 일거리를 제공하였다. 이 교회는 모두 위그노라 불리는 신교도에 의해서
운영되면서 프랑스 남서부에 살던 많은 신교도들에게 주목 받는 지역이 되어 갔다.
주로 상공인이나 군인들로 구성된 신교도들은 에드몽 영주가 영지 내에서 신앙의 자유를 공포하자,
모두들 환영하며 영지에 있는 브레스트 항구에 상선대를 입항시키기 시작했다.
앙리4세가 공포한 낭트 칭령에 의해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듯 했지만,
이 칙령은 구교도들이 장악한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에서 등록을 거부함으로써 효력이 발효되지 않고
있었다. 신교도에서 구교도로 개종하면서 까지 신.구간의 분쟁을 조정하려 했던 앙리4세의 노력은
그가 죽자 종이쪽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로 인해 구.신교간의 불화는 꺼지지 않은 채
브레스트 항구 내에서 조금씩 그 불길을 키워 갔다.
단기 3957년(1624) 여름 폴란드 바르샤바.
스몰렌스크가 대한제국의 공격에 무너질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자,
영주회의에서는 스웨덴 원정군을 민스크로 돌리는 한편, 국왕인 지그문트에게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전권을 위임했다.
“대한제국군이 스몰렌스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부근도 조용합니다.”
스체르비츠키 재상이 최근 입수된 국경부근의 정보를 지그문트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럼, 저들의 목적이 단지 스몰렌스크를 빼앗기 위해서 군대를 움직였다고 생각하는가 ?”
“그렇지는 않을 것 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에게 우크라이나를 돌려달라고 하지도 않았겠죠.
조만간 우크라이나도 대한제국의 공격을 받게 되겠지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곳은 이곳 민스크입니다.
이곳으로 병력을 집중시켜서, 저들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 우리는 바로 스몰렌스크를 함락 시키고
모스크바로 진격해 가야 합니다. 대한제국이나 저희나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저들은 움직입니다.”
“젠장. 이렇게 되면 구스타프가 대륙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나 ?”
지그문트는 구스타프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군과 전쟁을 선포하자 스웨덴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며
좋아했지만 이제는 구스타프가 전쟁에 휘말려 있어서 폴란드가 대한제국을 공격하는 동안 뒤통수를
맞을 염려가 없음을 고마워해야 했다.
“10여년동안 가만 있다가 스웨덴이 전쟁을 선포하자 움직인 것을 보면,
대한제국과 스웨덴간의 협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
“구스타프 같은 놈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마와도 손을 잡을 놈이지….”
지그문트는 구스타프가문이 자신과 사촌지간 이지만 가까운 만큼 증오심도 컸다.
원래는 스웨덴과 폴란드의 왕은 지그문트가문이 이어야 했다. 하지만 권력싸움에서 쫓겨난
지그문트 가문은 스웨덴을 탈출해서 폴란드에 둥지를 틀고 스웨덴과는 계속 전쟁을 해왔다.
“전국의 기술자들을 총동원해서 화승총이라도 많이 만들어서 군대에 지급하고,
스웨덴놈이 만들었다는 아돌프 소총도 사들이고 야포도 사들여.
영국놈들이 새로운 총을 개발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쪽에도 사람을 보내”
“그러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있잖아. 세금을 더 거두고, 영주들에게 갹출하라고. 지금 왕국이 위태로운데
모두들 그 정도는 감수 해야지 않겠나 ?”
대한제국의 물품을 유럽으로 가져 다 파는 무역에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폴란드 상인들과
영주들은 대한제국과 전쟁이 나자 무역로가 폐쇄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그문트가 내린 특별령으로 인해 영주들은 자신들의 재산이 점점 줄어들자,
죄없는 우크라이나 영지를 더 쥐어짜기 시작했다.
“지금도 살인적인 세금을 징수하고 있습니다.
자칫 대규모의 반란이라도 발생한다면 저희는 두개의 적을 상대해야 합니다.
외적보다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적을 더 경계하심이. 그리고 크라코프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소금광산의 인부들이 술렁이고 있어서 소금 채굴에 지장이 상당하다는 소식입니다.”
“우크라이나 얼뜨기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다 죽여버려 그리고 영주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군대를 보내서 쓸어버리라고 해. 대한제국 놈들이 호시탐탐 왕국을 노리고 있는데,
감히 광부 무지렁이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게 놔두면 쓰겠나 ?
그 소치니라는 놈과 무리들을 모조리 화형 시켜. 그런 일은 주교들이 나서서 해야 되는 거 아냐 ?”
재상은 지그문트의 고함에 가까운 말소리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딱히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그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 소재는 파악되었나 ?”
“모스크바에서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상인들이 있어서,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조만간에 소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지금 같은 때에 왕자가 적국의 도시에 있다는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부아디수아프는 ?”
“예수회에서 파견 나오신 신부님과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오신 분은 아주 훌륭한 신부님이라고 정평이 자자합니다.
“못 난 놈”
재상은 부아디수아프와 바쟈 중 누가 못난 놈이라는 것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부아디수아프와
바쟈중 둘 중에 한명이 다음 폴란드 왕이 되던가 아니면 아무도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모스크바.
케플러는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 싸는 것을 거들고 있는 바쟈도 심경이 복잡했다.
케플러는 스웨덴과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으로 실질적인 후원자인 발렌슈타인의 귀국 종용을
거부할 수 없어 여름방학이 되자 모스크바를 떠날 생각을 굳혔다.
“아저씨.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
“그럼. 아직 죽기에는 젊잖아. 그런데 자네는 여기에 남아 있을 생각인가 ?
대한제국이 스몰렌스크를 함락 시키고 조만간 우크라이나로 진격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
“그래서 요즘 고민이에요. 좀더 대한제국의 문물을 배우고 싶기도 하고, 돌아가자니 형이 무섭고.
돌아갔다가 포르트갈로 보내버리면 어떻게 해요 ?”
바쟈는 폴란드와 대한제국간의 전쟁보다는 예수회 수도원 같은 곳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아직까지 대한제국이나 학교 당국에서는 자신의 신분에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가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직접적인 개입을 한 적이 없었다.
“알아서 하게. 이번에 가면 다시 대한제국 땅을 밟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내 욕심 같으면 자네라도 남아서 나에게 편지로 배운 것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케플러와 바쟈는 거의 40에 이르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동기생으로서 많은 것을 상부상조했다.
케플러는 바쟈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바쟈는 케플러를 위해 번역을 해주곤 했다.
“아무튼 조심하세요. 시간 나면 한번 뵈러 갈께요 ?”
바쟈는 제법 어른스럽게 케플러에게 악수를 청했다.
케플러는 그런 바쟈의 손을 잡는 대신에 바쟈를 끌어 가슴깊이 안아주었다.
첫댓글 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