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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여호수아기의 말씀 24,1-13
그 무렵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3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사악을 주고,
4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를 주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는 세이르 산을 주어 차지하게 하였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5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든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6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 뒤에 너희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이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갈대 바다까지 너희 조상들의 뒤를 쫓아왔다.
7 그래서 너희 조상들이 주님에게 부르짖자, 주님이 너희와 이집트인 사이에 암흑을 갖다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들을 덮쳐 버렸다.
이렇게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보았다.
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8 나는 너희를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데려갔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으나,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어,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9 그 뒤에 모압 임금, 치포르의 아들 발락이 나서서 이스라엘에게 맞서 싸웠다.
그는 너희를 저주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왔다.
10 그러나 나는 발라암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희를 발락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11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서 예리코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리코의 지주들, 곧 아모리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다.
나는 그들도 너희 손에 넘겨주었다.
12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3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설교를 마치시고 갈릴래야를 떠나 유다지역으로 가시자 그곳에서도 많은 군중이 따랐고 그들을 고쳐주셨는데, 당신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의 질문, 곧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라는 질문을 받고, 결혼과 이혼과 독신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창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엄마와 아버지를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고유한 작품일 뿐,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당신으로부터 건네진, 당신의 형상이 새겨진 까닭입니다.
서로가 부족하기에 서로를 위하고, 껴안아 주어야 하고, 내어주어야 하고,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서로의 동반자로 만드셨습니다.
사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이미 이혼당한 여성들을 그대로 놔두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이혼장이라는 서류도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경우, 여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생활하다 붙잡히면 간통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마태 19,5)
교부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
(이사 62,5)
이는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남편으로 맞이하고 예수님의 아내가 되는 혼인성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이러한 깊은 관계가 우리를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며 “한 몸”이 되어 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태 19,5)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 만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 만이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떠나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제가 요즘 감사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젊은 형제들이 저희 공동체에 와 같이 살아주는 것에 대해서.
저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저와 살아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이주민 어머니와 아이들의 합동 연수회가 있었는데, 그 피정 집의 고양이를 보자마자 아이들이 일제히 고양이한테 달려드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 단순한 애정이 아닌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애정이 사람이 아니라 개에게 더 향하고, 혼족, 혼밥, 혼술이 대세이기에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는 요즘 수도원에 형제들이 들어온 것만도 고마운데 저와 같이 살아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더욱이 저는 저의 수도원에서 어느 시어머니보다 어렵고 살기 부담스러운 존재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런데도 저와 같은 사람과 살아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고마움이고 인간에 대한 고마움이라면, 신앙적인 고마움과 하느님께 대한 고마움도 제게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저희에게 보내주셨다고 믿는 프란치스칸이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형제들을 내게 보내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매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얘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형제들을 보내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의 유언은 이런 식입니다.
주님께서 다 해주셨다는 식입니다.
'주님께서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교회에 대한 신앙심을 주셨다.
주님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신앙의 눈으로, 성사적인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독서 여호수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 선조들을 통한 주님의 섭리입니다.
조상들이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룬 역사가 아니라 섭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란 우선 무엇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그 성취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취도 아니고 자연의 섭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도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에 맡길 때 계획은 인간이 세우고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섭리의 훌륭한 도구들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자>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 ‘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 ‘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 ‘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 8.3%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 ‘성격 차’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밀어붙이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하며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됩니다.
혼인할 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합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 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에페 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
(1고린 7,10-11)
서로 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은 이에겐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이혼에 관해 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주신 성경 말씀을 들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그들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라며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성경 말씀이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법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새롭고 완전한 법이 와 계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알았던 말씀이 완전하다고 하며 새로운 법을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말씀을 도외시하고 성경도 읽고 묵상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도로의 표지판과 같습니다.
지금의 나의 처지에 해당하는 말씀으로 나 자신을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을 멈춥니다.
두 살 이후로 자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라면 몸은 자랄 뿐 영혼은 두 살에 머뭅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완고해져서는 안 됩니다.
오노다 히로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군 정보장교였습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필리핀 전역) 막바지인 1944년 겨울, 필리핀 마닐라 근처의 작은 루방섬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250명의 훈련되지 않은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이었습니다.
오노나 소위는 미군의 루손섬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비행장 활주로를 파괴한 후 유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8사단장 요코야마 시즈오는 필리핀으로 떠나는 오노다 일행에게 “항복은 물론 옥쇄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버텨야 한다. 반드시 데리러 오마. 병사가 한 명이 남더라도 야자수 열매라도 따 먹으며 끝까지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항복은 물론 옥쇄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듬해 봄 미군이 상륙하면서 화력에서 밀린 일본 주력군은 패퇴하였습니다.
오노다의 고집으로 부대는 불리한 상황에도 전투에 나서야 했고, 첫 전투에서 207명이 전사했고, 나머지 43명은 산속으로 흩어졌습니다.
미군이 살포한 삐라 전단을 읽고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알게 된 나머지 20명은 투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미군의 전단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던 시마다 오장과 고즈카 상등병을 데리고 유격전을 계속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종전 다음 해인 1946년 봄, 오노다 일행을 구하기 위해 일찍이 투항했던 오노다의 옛 부하들이 필리핀으로 가서 섬 전체를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오노다, 오노다! 전쟁은 끝났으니 숲에서 나오거라. 어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오노다는 그들의 외침을 분명하게 거듭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간사한 미국군이 자신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계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아버지까지 와서 전쟁이 끝났다고 외쳤으나 가족까지 미군에게 속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얼마 후 오노다 일행은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여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유격전을 전개한 것이었지만, 실상은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한 공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사람 30명을 죽이고 100여 명에게 다치게 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이라 괜찮다고 여기며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필리핀 정부는 토벌대를 섬으로 보냈고, 1954년에 시마다 오장이 토벌대에게 사살되고 1972년에는 고즈카 상등병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개의치 않고 단신으로 유격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필리핀의 정글에서 행방불명된 오노다 소위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를 직접 찾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974년 루방섬을 방문한 스즈키는 결국 오노다를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즈키는 일본이 패망하면서 2차대전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오노다를 설득했으나, 오노다는 직속상관의 명령이 없으면 투항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일본 언론에 오노다 소위의 아지트를 공개했고 일본 열도는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오노다 소위의 귀환을 위한 작전이 펼쳐졌으며, 제대 후 도서 판매상이 된 직속상관 타니구치 소령을 겨우 찾아내어 타니구치가 항복 명령서를 가지고 필리핀 루방섬에 있는 오노다를 만나 투항을 명령했습니다.
투항 당시 오노다는 일본군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99식 소총을 정비해 놓고 500여 발의 탄환과 대여섯 개의 수류탄도 가지고 있었으며 칼은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등 장비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2세가 되어서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 국민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습니다.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국민은 오노다에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라며 열광했고, 극우파들은 오노다야말로 옛 일본의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했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려 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노다의 모든 범죄를 사면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노다는 현대화된 일본이 미국의 속국처럼 보여 일본에 적응하지 못하고 1975년 브라질로 떠나서 목장을 경영했으며, 이듬해에 결혼하였습니다.
1984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 오노다 자연학교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루방섬을 다시 찾아가 현지 학교에 1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2014년 1월 16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의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참조: ‘오노다 히로’, 위키 백과]
오노다가 종전되었다는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전쟁이 종식되면 들통나고 벌을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일탈을 즐기기 위해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말씀으로 매일의 등불을 삼지 않을까요?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거룩함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 목적지입니다.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니 표지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와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고 심판도 기다림을 알 때 우리는 방향을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표지판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 표지판은 말씀입니다.
매일 하루 하나의 말씀을 찾아 나의 새로운 발걸음을 인도하게 합시다.
저는 본당이나 지인들 사이에서 성경이나 하.사.시, 혹은 다른 좋은 영성 서적이라도 하루에 한 문장씩 예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말씀을 찾아 카톡으로 공유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의 작은 경험으로 큰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추천하는 방법입니다.
매일 말씀을 찾아 오늘의 나에게 적용하는 삶이 내가 목적 있게 사는 사람임을 증명해 줍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또는 고발할 명분을 찾으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이미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31-32).
바리사이들은 그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대답하시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때와는 다른 대답을 하셨다고, 즉 앞뒤가 다르다고 비방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대답하시면, 그들은 신명기의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했다고, 즉 율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고발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의 배경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있습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요한이 헤로데의 이혼과 재혼을 비판했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4,3-12).
그래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는, 헤로데의 이혼과 재혼은 정당한가, 아닌가? 라는 뜻도 들어 있고, 동시에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은 정당한가? 아닌가?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대답하시면, 바리사이들은 헤로데에게 가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을 옹호하면서 헤로데를 비난했다고 고발했을 것이고, 반대로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대답하시면, 예수님이 헤로데가 한 일은 정당하다고 말했다고 떠들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민중이 예수님에게 거세게 반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불순한 의도를 알고 계셨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혼인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을 재확인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즉 ‘하느님의 성사’ 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이혼하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인용한 율법은 신명기 24장 1절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것은 하느님의 법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만든 규정일 뿐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하느님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라는 말씀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임시 조치였을 뿐이다, 또는 그것은 과도기의 규정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혼인의 신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던 때의 임시 조치였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수긍했는지, 아니면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해서 반감을 품은 채로 그냥 물러났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혼인과 이혼에 관한 ‘우리 교회의 대원칙’이고, 우리 교회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예수님의 법’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혼인이 언제나 항상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나?
인간들이 마음대로 한 일인데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바로 그것을 식별하기 위해서 각 교구마다 혼인 법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인지 아닌지를 개인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 판단은 교회의 교도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사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혼인 법원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들과 증언들을 신중하게 심사해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인지, 즉 유효한 혼인 성사였는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이 아닌 일, 즉 성사로서는 무효한 일이었는지를 판단합니다.
혼인 무효 소송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소송이 제기된 혼인에 대해서, “그 혼인은 혼인 성사로 인정할 수 없으니 무효다.” 라고 혼인 법원에서 선고를 내리게 되면,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그 혼인에서 풀리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혼인 법원의 선고는 ‘이혼해도 된다.’ 라는 선고가 아니라, ‘그 혼인 성사는 무효다.’ 라는 선고라는 점입니다.
혼인 무효 소송은 이혼을 허락받기 위한 소송이 아닙니다.
성사로서 적법하고 유효했는지, 아니면 불법적이고 무효인지를 판단받기 위한 소송입니다.
혼인과 이혼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했던 다음 말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
(1코린 7,15)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 전례; 우정의 여정>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1)
화답송 시편 136장이 잔잔한 위로를 줍니다.
국민 모두가 공부하고 각성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공부하는 마음, 배우는 마음으로 날마다 강론을 씁니다.
참으로 공부해야할 것이 많습니다.
물론 공부와 더불어 기도는 필수입니다.
얼마전 보는 눈, 관(觀)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나눴습니다.
공부의 목적도 이런 보는 눈, 올바른 관점(觀點)을 지니는 데 있음을 봅니다.
특히 올바른 공동체관, 교육관, 결혼관의 교육과 공부는 너무 절실합니다.
이런 교육과 공부가 전무하기에 겪는 혼란과 낭비가 너무 큽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 혼인과 독신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결혼관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를 근거로 혼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리사이들의 당신을 시험하기 위한 이혼에 대한 불순한 질문에 개의치 않고 올바로 답변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간음으로 인해 부득이 이혼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결혼관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 독신의 경우는 타고난 고자, 사람들이 만든 고자, 하늘 나라 때문에 자발적으로 결혼하지 않는 고자의 경우를 들면서 예외적인 독신도 인정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이나 바오로,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사제와 수도자, 동정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과연 나는 어느 상태에 있습니까?
결혼했다면 결혼관에,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이라면 그 생활관에, 또 독신이라면 역시 그 인생관에 투철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어떻게 참으로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 것인지 고민하고 공부와 자기훈련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은, 부모는 아무나 하나? 결혼도, 부모도 자격시험을 봤으면 좋겠다!”
오늘날의 무책임한, 무자격자 부부들의 빈번한 이혼을 보며, 자녀 교육의 부실함을 보며 저절로 탄식처럼 나온 말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십계명 아홉 번째는 남성이라면 깊이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불륜으로 인한 부부공동체를 깨는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지속적인 불륜은 절대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부부간 무너진 신뢰와 사랑의 상처의 회복이 너무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뢰와 사랑에 바탕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에 철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서로 마주보며 사는 부부공동체가, 수도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평생 우정의 여정에 항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맞지 않아 이혼할 경우도 있겠습니다.
아주 오래전 부제반 때 교회법 교수신부님이 로마에서의 혼인법 마지막 수업시간 스승 신부님이 결론처럼 들려 주셨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교회법을 총동원해서 살 사람은 살게 해주고, 못 살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말그대로 복음적인 해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상한 경우이고, 서로간 관계를 위한 노력은 평생동안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부공동체의 일치도, 수도공동체의 일치도 평생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 또 함께 사는 이들과의 “우정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우정의 여정을 풍자하는 재미난 예화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납니다.
“십대 부부는 꿈속에 살고, 이십대 부부는 신나게 살고, 삼십대 부부는 사랑하며 살고, 사십대 부부는 싸우며 살고, 오십대 부부는 미워하며 살고, 육십대 부부는 불쌍해서 살고, 칠십대 부부는 고마워서 산다.”
연인의 연정(戀情)에서 친구의 우정(友情)에 이르는 기나긴 사랑의 성장 여정을 보여줍니다.
저는 그래서 부부는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救援)이요 성인(聖人)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정말 남남의 부부가 평생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있는 순교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지극한 인내의 기다림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살다보면 깨달음의 은총과 더불어 연민과 감사의 성숙한 우정에 도달할 것입니다.
수도공동체 생활 42년째 70대 중반인 저를 포함해 두 수도형제도 이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참으로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어느 사이좋은 부부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ME부부 단체 피정시 지도 신부님이 ‘죽은 다음 다시 태어나 지금 배우자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 보라’ 했을 때 가만히 눈떠보니 자기 부부뿐이었다는 일화입니다.
정말 이런 부부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할 것입니다.
결혼하면 칼릴 지브란의 잠언이 생각납니다.
비단 결혼한 부부만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귀기울여 경청하고 묵상할 지혜입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날개가 그대들의 삶을 흩어놓을 때에도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아니 신의 고요한 기억 속에서 까지도 함께 하리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마라
그보다 그대들 영혼과 영혼의 두 기슭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하나의 잔으로
함께 마시지는 마라
서로에게 제 빵을 주되 같은 조각으로 먹지는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따로 있게 하라
비록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 속에 묶어 두지는 마라
오직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담아 낼 수 있으니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처럼
참나무와 편백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참으로 공동생활에 깊은 통찰과 깨달음의 지혜를 주는 잠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여호수아서는 내일이면 끝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호수아가 대업을 이룬후 열두 지파 연맹의 성읍이며 성소인 스켐 전례 집회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회고하는 연설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믿는 이들의 공동체 형성에 전례은총이 얼마나 큰지 깨닫습니다.
새삼 주님의 이 거룩한 공동 미사전례 은총이 결혼 부부 공동체든 수도공동체든 공히 반듯한 공동체 일치의 형성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거행되는 공동미사전례의 은총이 주님은 물론 서로간의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희 세대는 ‘이문세’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대표적인 노래는 “광화문 연가, 소녀, 그녀의 웃음소리뿐, 휘파람, 사랑이 지나가면, 옛사랑, 가로수 그늘아래 서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오늘하루’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밥 한 그릇 시켜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 창가에 비추는 건 나를 보는 내 모습, 울컥하며 터질 듯한 어떤 그리움,
그리운 건 다 내 잘못이야, 잊혀질 줄 알았었는데 이렇게 생각이 다시 날 걸 그땐 알 수 없었어.”
저는 가사 내용 중에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저녁 식사 전에 성당에 모여서 늘 하던 것이 ‘양심성찰’이었습니다.
양심성찰을 하면서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받는 데 익숙하다 보니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내 몸 아픈 것은 신경 쓰면서 이웃이 아파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나의 십자가를 남에게 맡기는 이기적인 때가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사목정보’라는 잡지에서 ‘오늘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사제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신부님의 모습을 거울 속에 비추듯이 바라보았던 교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당 신축을 하면서 사제관이 없어서 편안한 아파트를 얻어드리려고 했는데 신부님은 굳이 상가 2층에 방을 얻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매일 아침 상가 마당을 청소하였다고 합니다.
상가 주인이 무척 미안해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젊은이들에게는 유쾌하였고, 어른들에게는 공손하였고, 성가를 부를 때면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고 합니다.
어느 비 오는 날, 신부님의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구두가 낡아서 비가 오면 신발에 물이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우들이 주는 옷, 구두, 음식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외투는 20년은 족히 넘어보였다고 합니다.
얼굴이 검게 그을려서 오셨기에 좋은 곳으로 휴가를 떠난 줄 알았는데 시골 본가에 가셔서 종일 밭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따뜻한 마음의 사제가 임기가 되어서 다른 본당으로 떠날 때, 본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사제로서 자랑스러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 사람은 우울증으로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형제 모두에게 있는 증상으로, 실제로 8남매 중에서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지만 모두 포기하고 조용한 산골에 들어가 홀로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다가 암을 판정받게 되지요.
그리고 이 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
과연 이 사람의 삶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만 들으면 아마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평생 죽음을 떠올렸다고 하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싶지요.
하지만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철학가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이 마지막 말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행복했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멋진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지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무엇을 후회하는지 물으면, 좀 더 즐기지 못했다는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한 후회만 남아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 결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단순히 자기 만족을 위한 즐거움만을 찾으면 마지막 순간에 후회할 일만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만족이 아닌, 주님께서 만족하실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혼인의 원칙을 이야기하십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입니다.
혼인은 남녀의 인격적인 결합일 뿐 아니라 혼인을 통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혼인의 의미를 담고 사는 사람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하는데, 그 반대인 미움의 의미만을 찾습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몸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의미 있는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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