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다른 꿈을 꾸는 자들
대명부 호북성 강릉
옛이름 형주로 더 알려진 강릉시는 양자강 지류를 이용한 주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대한제국이 대륙을 통치하면서 옛 영화를 점점 잃어갔다. 대한제국은 강릉 바로 아래에 있는
사시에 물류기지를 새로이 건설하고 주변의 통상을 빠르게 흡수함으로써 강릉으로 몰리던 사람과
물산이 사시로 옮겨갔다.
“여기가 삼국지에 나온 형주란 말입니까 ?”
나승민 차기 대명부 총경은 강릉으로 들어서는 관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대명부 총리의 명령에 따라 모든 성은 성문주위를 제외하고는 성벽을 철거하도록 했기 때문에
강릉성 역시 도시 외곽을 둘러싼 성벽이 철거되어 있어서 더욱 초라하게 보였다.
“코흘리개로 폄하한 육손에게 관운장이 죽은 곳이지.
자만심은 자네가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적이 되겠군.”
“새겨듣겠습니다. 선배님. 그나 저나 지금 누굴 만나러 가시는 길이십니까 ?
부임지로 떠나시려면 시간이 촉박할 텐데요 ?”
“육손을 만나러 가네. 자네를 가장 괴롭힐 사람 중 하나일 테니”
허삼수 전임 대명부 총경은 특수 3부장에서 총경으로 승진하여 3년을 근무하고 북쥬신 대륙 북쪽에
마련된 내란 포로들의 정착지 행정관으로 부임하라는 인사 이동 명령을 받았다.
대명부를 떠나기 전에 허삼수는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이곳 형주에 들른 것이다.
“안에 계십니까 ?”
강릉 외곽에 위치한 단아한 기와집 대문에 이른 두 사람은 수행원들을 뒤로 물리고 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자 말쑥하게 차려 입은 귀여운 사내아이가 나타나 문을 빼꼼이 열었다.
“누구십니까 ?”
“난 허삼수라고 한다. 안에 어르신 계시느냐 ?”
“계십니다만, 사부님께서는 요즘 도통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죄송합니다만, 다음에 오셨으면 합니다.”
“아이야. 난 조금 있으면 이곳을 떠나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단다.
들어가서 어르신의 의중이나 여쭤보고 오도록 해라.
허삼수란 사람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뵙기를 청한다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꼬마가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자 나승민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대명부 총경이 이런 푸대접을 받는 것도 그렇지만, 그런 푸대접에 전혀 얼굴을 붉히지 않는
허삼수가 더 이상했다. 한참이 지나자 아까 그 꼬마가 다시 나와서는 대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시지요 어르신들”
근 일 년 만에 집안으로 들어온 손님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 아이가 앞서 나갔다.
나승민과 허삼수는 천천히 따라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집안 구석구석은 온화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저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사부님. 어르신들을 모셔왔습니다.”
“안으로 뫼 셔라. 너는 차를 내오도록 하여라.”
“네. 사부님”
아이가 어디론가 흥얼거리며 뛰어가자, 나승민과 허삼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대략 40세 정도 되는 사람이 읽던 책을 덮고는 일어나 둘을 맞이했다.
아이가 내온 찻잔에 담긴 뜨거운 차가 식을 동안 세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허삼수가 입을 열어 긴 침묵을 깨자 정지해 있던 방안의 공기가 움직였다.
“이쪽은 새로이 대명부 총경자리를 맡은 사람입니다.”
“나 승민입니다.”
“전 지협입니다.”
주인은 이름 석자를 말함으로써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미륵불이 따로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평온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그렇습니까 ? 미륵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미륵이 보입니까 ?”
허삼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마신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내 앞에 앉아계신 분이 미륵이 아니십니까 ? 미륵이 아니면 미륵의 탈을 쓴 그 무엇이겠군요 ?”
“눈에 뭐가 끼었나 봅니다. 헛것을 보고 계시는 군요.”
“미륵이 이미 하강하여 극락세계를 세우고 있는데 힘을 보태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극락세계를 지구 전체로 퍼트리기 위해 험난한 고행을 하고 있습니다.”
“한족이 3성에서 흘린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이란 건 또 무엇입니까 ? 당신들 한족이라 불리는 자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변방 민족에게
어떻게 했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대한제국에게는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대한제국민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이제 그만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해서입니다.
최소한 굶어죽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중구원을 외치는 교리와도 상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글쎄요 ?”
전지협은 여전히 말을 아꼈다.
그는 허삼수가 하는 말에 가장 효과적인 몇 마디만을 툭 던지고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나승민은 강릉을 나와 상해로 가는 길에 전지협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못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
“내가 한때 잡으려고 줄기차게 쫓아 다녔던 사람이야.
그 사람 때문에 대명부 전체를 돌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럼 야귀란 말입니까 ?”
“호남성 출생. 내란 전 백련교 외당주. 야귀라는 이름난 도둑으로 한때 만력제의 술잔을 보유하고,
후명 건국에 협조하였으나 백련교 교주 왕명과의 세력싸움에서 밀려남.
내란 후 백련교의 새로운 교주가 됨. 이게 전지협이란 자의 과거인가 !
아무튼 그들은 영혼의 일부를 상처 받았으니 언제인가는 복수하려 들 거야.
영혼을 다치면 쉽사리 치유가 안되거든.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내란에 대처한 천군부나 천인단 의 정책은
잘못된 정책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 같군”
“희생이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까 ?
살길을 열어 줬는데도 죽는 길을 택한 저들의 잘못이 더 크겠죠.
그러지 마시고 아예 잡아들이시지 그러십니까 ? 명분도 충분한데”
내란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이라면 대부분 대명부에서 추방당했다.
학자들은 예외 없이 추방당했고, 전직 관료나 상인들 중 태반이 대명부를 떠나야만 했고,
화북 3성 주민들도 살아남 기 위해 각지로 흩어졌다.
그런 와중에 전지협이란 사람이 강릉에 터를 잡고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지협은 밖으로 삐져나온 뿌리야. 그걸 없애면 다시 뿌리를 찾기 위해서 땅을 파야 하거든.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하겠지만…”
허삼수는 총경시절 대명부 총리가 천인단에 보내는 보고서를 어깨너머로 본적이 있었다.
“한족멸살”이라는 충격적인 단어를 사용한 보고서는 내란이 다시 한번 일어나면
한족 전체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멸살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었다.
허삼수는 그래서 대명부를 떠나기 전 전지협에게 경고를 해주고 싶었다.
수년동안 자신과의 숨바꼭질을 해온 적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어쨓든 자네가 잘 하리라 믿네. 질긴 사람들이니 자네는 더 질겨야 할거야?”
“알겠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참 순박하던데 이곳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가 봅니다.”
나승민은 일본부에서 거의 할 일이 없을 만큼 평화로운 근무를 했었다.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대한제국민임을 반기고 있었고 대한제국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그렇기에 정착단계에 있는 지금은 내란이라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전지협은 손님들을 내보내고 마시다만 찻잔을 들어올렸다.
차가움에 더해 전해오는 씁쓰름한 입맛이 입안 가득 차자 차를 내뱉었다.
“기다리면 때가 오려나 ?”
한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많은 지사들이 후명건국에 힘을 보탰지만 후명국은 본래의 취지인
순교를 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한족의 정기를 부러뜨렸다. 식량을 무기로 민중을 강력히 통제하고
있는 대한제국은 징병제와 관교육 제도를 확대시켜 젊은이와 어린 아이들을 세뇌시키고 있었고,
그렇게 세뇌당한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언제부터인가 신흥 한족 식자층들은 한족들의 사상인
사해동포주의로 포장된 대한제국민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주인과 지구인이라”
전지협은 생각을 정리하던 중 새롭게 등장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우주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대한일보에는 거의 매일 우주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고, 자신이 보기에 허무맹랑하기 까지 한
소식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우주인이 대한제국의 어느 도시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어제 신문기사가 아닐까 싶었다.
“소동아 소동아 ?”
“네. 사부님”
“차가 식었다. 다시 데워 오너라”
“네. 사부님”
전지협은 소동이 다시 내온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기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오는 열기가 심장까지 파고 들었다.
‘식은 차를 데우기는 쉬운 일이지만, 한번 꺾인 정기는 다시 일으키려면 고통과 피와
오랜 인내심이 필요했다. 피를 흘리라면 얼마든지 흘릴 수 있었지만 오랜 인내심은 쉽지 않아보였다.
단시간의 세월이라도 사람의 정신을 바뀌어버릴 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다.
하물며 15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 적들은 고통이 아니라 달콤한 꿀을 나눠주고 있는 지금,
온전히 과거를 돌이킬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
정신을 잃으면 그 민족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적들은 광활한 영토도 모자라 우주를 개척할 생각인가 본데,
우리는 언제 그 발끝이라도 따라간단 말인가 ?”
전지협은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단기 3957년(1624) 여름 신시
북쥬신대륙 중앙 평원을 경계로 동쪽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부족들의 수장들이 신시에 모여
자신들만의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모임을 가지게 된다. 근 2년간 대륙을 떠돌며 부족간의
규합을 노력한 은하이족을 주축으로 4개의 대부족, 아파치, 스콰미쉬, 아라파호등과 그 밖의
수십개의 소 부족 이 참여한 이로쿼이 연맹은 신임 사령관 김경환 대장과 을지문 초자연 연구소
소장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대한제국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정치제도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행정수도를 결정하기 위해 신시에 모였다.
“아무래도 대한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극동 주변에 행정도시를 새로이 건설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
은하이는 대한제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로쿼이는 대한제국에게 배울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자면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좋았지만 아파치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만, 저는 이곳 신시 주변에 건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극동 주변은 대한제국민들이 너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진정한 우리의 도시를 건설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곳에 행정 도시를 만들면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길 것이 분명합니다.”
“이곳은 극동과 1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중간에 있는 큰 산과 사막을 돌아간다면
실질적으로는 족히 2천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 입니다. 말을 타고 달린다 해도 대략 십일이나 걸린단
말입니다.너무 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그리고 이곳 신시는 대한제국의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그런 곳에 우리들의 도시가 들어선다는 것을 반길지 의문입니다.”
회의실 탁자에는 쥬신대륙 전도가 펼쳐져 있었다. 대한제국이 개설한 도로는 신시를 끝으로 더 이상
동쪽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지금은 남쪽의 파나마와 북쪽의 앵커리지를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듯 지도에는 도로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대한제국의 힘이 미약한 이곳을 기반으로 제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을 기점으로 동쪽은 거의 평지나 다름없습니다.
서쪽에 비해 강줄기도 풍부하고 말입니다. 극동에는 연락관을 개설하면 됩니다.”
말을 이용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아파차 족은 서쪽의 산간, 고원지대보다는 동쪽의 평원지대를
선호했다. 여러모로 생활하기에는 동쪽이 편리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문제는 있었다.
“족장님께서는 수 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난 수년동안 그들과 교류를 해왔습니다. 작은 마찰이 생기긴 했지만 서로 협조아래
잘 지내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족이나 샤이엔족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말입니다.”
“정 그렇다면 저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
한동안 주변을 둘러본 은하이는 결론을 내리려 했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은 것은 섭섭한 일이었지만 다른 부족들의 의견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의 행정도시는 이곳에 적당한 곳을 지정하여 건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따라 이제부터 우리는 이로쿼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같은 부족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묶여 있으며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
은하이가 이로쿼이 연맹의 초대 맹주로 선출되고 10년의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대한제국과의 조약을
재조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 해 가을 은하이와 대한제국에서 파견된 특사와 맺어진 조약은 기존의
조약을 좀더 세분화 시켰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양국의 발전을 도모하며 서로를 존중한다.
-. 쥬신대륙은 대한제국과 이로쿼이가 평화로이 공존한다.
-. 대한제국은 향후 100년 동안 광물 취득 권을 가지며, 이로쿼이는 대한제국의 기간시설을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
-. 이로쿼이는 경찰 이상의 군대를 조직하지 않으며, 대한제국은 이로쿼이의 요구 시
군대를 파견하여 이로쿼이의 안녕을 도모한다.
이로쿼이가 만들어지고 초대 맹주가 된 은하이는 연맹 결성 후 세상이 급속도로 변할 줄 알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끊임없는 발전 추구보다는 자족하는 삶을 지향하는 그들의 속성으로 인해
은하이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면직물 공장 건설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적잖게 실망하고 있었다.
“선생님 계십니까 ?”
오랜만에 을지문 선생님을 방문한 은하이가 을지문의 연구실 문을 여러 번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 소장님을 뵈러 오셨나 보군요 ?”
은하이는 말소리가 자신의 뒤에서 나자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수수하게 차려 입은 여자가 종이다발을 가슴에 가득 안은 채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 안에 계시지 않는 가 본데요 ?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이 걸로 문 좀 열어주세요”
여자는 은하이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입에 물고 있는 열쇠를 은하 이에게 내밀었다.
은하이는 두 손가락으로 열쇠를 집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여자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서는 종이다발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휴. 종이가 엄청 무겁네. 들어오세요”
“아 네”
“전 소장님 비서입니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시죠.
소장님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연구하는 문박사님의 연락을 받고 급히 떠나셨습니다.
아마 서너 달은 넘게 돌아오지 못 하실 겁니다.”
“그래요 ?”
은하이는 답답한 심정을 풀 길이 없어 선생님에게 조언을 얻으려 했는데
그것마저 어렵게 된 것 같아 더 마음이 가라앉았다. 비서라고 밝힌 여자가 차를 끓여 내오자
은하이는 말없이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비서는 뭐가 바쁜지 은하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가져온 서류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었다.
“바쁘신가 봅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선생님도 안계시니….”
“어머. 죄송합니다. 손님이 오셨는데 생각 없이 제 일만 했네요 ?”
그러면서 비서는 부지런히 놀리던 손을 멈추고 은하이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까 ?”
“네. 최근에 이곳 이로쿼이민들의 면역체계에 대한 연구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중입니다.
원래는 극동의료원에서 해는 일인데 소장님께서 알고 싶으시다고 해서 몇부 가져 온 겁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
아직까지 방문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난 듯 비서가 물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일단 신분상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알긴 알아야 했다.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전 은하이라고 합니다.”
“근데 이름이 굉장히 낯익군요. 어디서 들었더라 ? 저희 소장님과는 친하신가 보죠 ?”
비서는 은하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이곳에 온지 한 달이 안된 그녀로서는 연구소 직원들이 명찰을 달지 않으면
얼굴과 이름을 합치시키는 것도 힘들었다.
“서울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죠. 이곳에서도 그렇지만. 그런데 여기 온지 얼마 안 된 모양이죠 ?”
“네 20일이 조금 넘었어요. 전 장미영이라고 해요. 가끔 들러 주세요. 저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
“그럼요. 더군다나 소장님과 친한 분이신데”
“그건 그렇고 아까 말씀하신 것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뭐요 ? 아 이거요 ? 그럼요.”
장미영은 들고 온 서류들을 들춰보다가 문득 은하이라는 사람이 이로쿼이 연맹의 맹주라는 것이
떠오르자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은하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몰라본 자신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로쿼이민들의 면역체계가 대한제국민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질병원에 노출되면 쉽게 병이 걸리고 회복기간도 두배 이상 길다는 연구 자료가
많습니다. 일례로 우리에게는 흔한 감기조차도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황립의료원에서는 이점에 매우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황립 의료원
의사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니까요 !”
은하이는 계속되는 장미영의 설명을 들으며 극동에서 일어난 전염병 때문에 주변지역 은하이족이
피해를 본 것이 생각이 났다. 자신은 대자연의 순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한제국에서는
그 원인과 그 대책을 마련하느라 고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최고 지도자로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대한제국민과 접촉해서 생긴 병들이라는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이로쿼이만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개선 방안이 마련되고 있습니까 ?”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습니다. 수백 수천년 동안 내려온 유전적인 작용이라
단시일안에 개선하기는 힘들 것 입니다. 하지만 예방책을 서둘러 시행해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무슨 용무가 있어서 들르신 건가요 ? 맹주님. 아까는 알아보지 못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저 선생님하구 말씀이나 나눌까 해서 왔는데요 뭐.”
“아 네. 요즘 바쁘시겠네요 ?”
“전혀요. 할 일은 많은 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은하이의 지금 심정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었다.
은하이는 10년 안에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주제 넘은 참견 같지만, 하나만이라도 확실히 해 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쉬울 겁니다.”
“그 하나라는 것을 하기가 힘들다는 거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장미영를 붙들고 이런 애기를 해야 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한 은하이는 그만 자리를 일어나고 싶었다.
“학교를 세워보세요. 가장 하기 쉽고도 가장 보람 있는 일이지요.
교육은 백년을 위한 준비라고들 하더군요.”
장미영은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서류철을 정리하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은하이는 장미영의 말을 듣고는 쇠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지금껏 가장 쉬운 길을 옆에 두고 가장 먼 길을 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기 3957년(1624) 가을 이스탄불 황궁
무라도 4세를 모스크바에 유학차 보내버린 모후 타르한은 모든 정사를 직접 챙기며 터키제국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었다. 동방무역의 독점권을 이용한 향료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는
아랍상인들과 중계무역에 종사하고 있는 그리스와 이태리인들의 터키제국 왕래로 터키제국은
개국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임 황제의 추종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데
성공한 타르한은 점점 자신감이 생기자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미련이 스멀스멀 일어나기 시작했다.
“태후마마 무할라비 재상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어오시게 하라”
황궁근위대 예니체리 대장이었던 무할라비 장군은 무스타파를 몰아내고 그 추종세력을 진압한 공을
인정 받아 터키제국의 재상이 되었다. 타르한의 연인이기도 한 무할라비가 안으로 들자 타르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찼다.
“어서 오시오 재상.”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 태후폐하 “
“요즘은 좀 뜸합니다. 재상 ? ”
태후가 되기 전에는 나흘이 멀다 하고 타르한을 찾던 그가 요즘은 뜸했다.
태후라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태후폐하. 불러주지 않으시면 소인이 찾아 뵙기 민망하옵니다.
보는 눈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음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겠지요. 오늘 재상을 부른 이유는 저 번에 논의한 일은 어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입니다.
언제쯤이면 터키제국의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기술자들이 대한제국에서 들여온 증기선을 응용하여 증기기관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의외로 간단한 원리라고 합니다. 머지않아 저희 제국도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잘 된 일입니다. 지금도 그라나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교도들의 학살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저 흉악무도한 이교도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괴롭히고 있다지요 ?”
“그렇습니다. 스페인의 새로운 황제인 필립4세는 그 아버지보다 더 가혹하게 알라를 믿는 형제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합니다.”
“언제쯤 우리 형제들을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구출할 수 있을 지….”
타르한은 터키제국을 하나로 묶는 방법으로 기독교도들에게 당한 치욕을 지방영주들에게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그라나다를 비롯한 이베리아반도와 유럽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교도들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을 빌미로 그라나다 해방을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타르한이 오늘 재상을 부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무거운 이야기를 끝낸 타르한은 대한제국에서 수입한 물건에 생각이 이르자 작은 흥분이 일었다.
“재상.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
타르한이 자리 밑에서 꺼내 보인 것은 동그란 작은 원반 같은 것이었는데
그녀가 바람을 불어넣자 희한한 모양을 한 작은 비닐 방망이로 변했다.
“모르겠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
“보면 볼수록 대한제국은 재미난 것을 만들어낸단 말입니다. 이건 남녀간의 사랑을 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상인들을 통해서 유럽 상류층으로 많이 퍼진 모양입니다. 한번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
타르한의 노골적인 유혹에 재상이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타르한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받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손끝에 묻어나는 기름 같은 것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것만 있으면
임신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옵니까 ?”
“일단 이렇게 부풀어 오는 것은 사용하지 못 한답니다. 사용법은 오늘 밤에 직접 알려드리지요.
보면 볼수록 유용한 물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황제께서는 요즘 통 소식이 없으십니다.
잘 지내고 있겠지요 ?”
“그렇습니다. 대한제국 대사관에서 매일 폐하의 근황에 대한 보고서를 우리에게 제출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자전거라는 물건을 타려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약간 다쳤다고 합니다.”
“무릎을 다쳐요. 고귀하신 황제께서 그런 물건을 뭐하러 탄단 말입니까 ? 크게 상하신것은 아닙니까 ?
무스타파 일족을 척살할 때는 냉혈한 같은 마음을 가졌던 타르한은 황제가 다쳤다는 소식에
자상한 어머니로 돌아와 있었다.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폐하께서 세상만물에 호기심이 동하는 나이가 아니시옵니까 ?
알라께서 보살펴주시는데 큰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알라께서 하시는 일이신데.
아무튼 이번 터키제국 함대가 개편되면 그라나다를 수복하도록 합시다.
지중해를 장악하면 더 이상 이교도 놈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
대한제국에서 폴란드와 전쟁을 선언하고 북쪽지방을 탈환하고 있는 지금
우리도 우리의 옛 땅을 되찾고 우리의 형제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시칠리에 있는 아라곤 왕에게 사자를 보내심이 어떻겠습니까 ?”
“페르난도가 비록 필립에게 쫓겨 왔다지만 그 역시 엄연한 이교도입니다.
그런 자가 우리와 손을 잡을 지 의문이지만 일단은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페르난도가 가지고 있는 함대를 이용할 수만 있다면 저희들도 큰 힘이 되겠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대한제국의 지중해 함대가 우리의 후방을 책임지고 방어해주기로 했으니
페르난도가 우리의 제의를 거절하고 뒤통수를 치지는 못 할 것입니다.”
무할라비 재상은 타르한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육로를 통한 지원이 가능하긴 했지만 그 길은 너무 멀었다.
페르난도가 필립4세와 협약을 맺고 시칠리를 중심으로 지중해를 봉쇄하면
터키제국의 함대는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단기 3957년(1624) 가을 로마 교황청
작년에 교황으로 추대된 마패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우르바누스8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교황청을
이끌면서 추기경회의로부터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가 개혁안을 들고
나서기까지는 말이다. 우르바누스8세는 교황 취임 1년을 넘기면서 기독교사회의 내부 모순과
이교도들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위해 공인된 문건들에 대한 재해석을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마의 힘과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지 깨트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서 오시오 갈릴레이. 마조니 교수는 잘 지내시오 ?”
베르니니 잔 로렌초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교황이 성베드로 성당으로 들어서는 갈릴레이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상화를 그리던 베르니니는 교황이 움직이자 화구를 들고 자리를 떴다.
“교황님. 이렇게 면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파도바대학을 그만 둔 후로는 만나지 못 했습니다만 가끔 편지로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마조니 교수도 신의 보살핌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베르니니가 살짝 고개를 흔들자 갈릴레오는 가볍게 답례를 하고 교황에게 다가가 손에 입을 맞췄다.
자신의 오랜 親舊가 교황이 된 것은 그에게 커다란 행운이 될 것 같았다.
“자네가 올린 탄원서를 읽어 보았네, 나폴리에 있는 캄파넬리를 석방시켜달라고 ?”
“그렇습니다. 그는 제 오랜 은인이며 스승이십니다. 참 지혜로운 사람이었는데 고문을 못 이기기고
완전히 미쳐버렸다고 하더군요. 재정신이 아닌 사람을 차가운 감옥에서 꺼내주신다면 교황님의
인자하심을 널리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가 ? 하지만 요즘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의견 충돌이 있어서 말야 ?”
교황은 교리를 책임지고 있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온 힘을 오로지 신교와 싸우기 위한 구교 진영의
단결에 쏟아 붇고 있었고 교황에게 교황청의 힘을 분산시키지 않도록 종용했다. 그는 교황의 이름으로
구교들이 힘을 합쳐 신성로마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관여하길 원하기까지 했다.
“캄파넬리는 미치광이일 뿐입니다. 부디 교황청의 관대함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는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자로서 교황청이 내린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와 그외 많은 과학자들의
성과물들이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 과거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났고
앞으로도 게속 일어날 과학적 사실에 대한 탐구는 성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역행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부디 교회의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캄파넬리는 미치광이든 아니든 그가 떠들어대는 말은 지극히 불순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 않소 ?
언젠가는 성경자체를 믿지 못하겠다고 할지도 모르지. 일단은 그가 미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폴리에 특사를 보내도록 하죠. 페르난도가 아라곤에서 밀려나 그곳에 와 있으니
정말 그가 미쳤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거라 생각되는데… 하지만 자네가 약속을 해줘야겠어 ?”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
“자네도 알다시피, 공회에서는 이미 8년전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완벽한 오류라고 세상에
공표했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공인된 곳에서 내린 결정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 하나님의 신성한 권능을 부여 받은 교황청에서 내린 결론을 명백히 반박할
증거가 없는 한 그 어떤 것도 교황청의 권위를 넘볼 수 없단 말이야.
그런데 터키제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대한제국의 수많은 책들이 다 이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 해.
증명 불가능한 것들로 일반 대학생들을 현혹시키고 있단 말야. 금서들로 지정해서 모두 출판과 소장을
금지하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퍼져나가고 있어. 우리 기독교세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나는 심히
우려된다네. 이교도들과 사악한 악마로부터 하나님의 종들을 지킬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는
나로서는 말야.”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만….”
갈릴레이는 케플러에게 들은 연주시차나 광행차에 대해 말을 하려 했지만
교황이 그의 말을 막고 나섰다.
“그래서 말야. 자네는 온 유럽이 인정한 가장 뛰어난 과학자가 아닌가 ? 자네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책을 기술하고 출판하는 것을 허락하겠네.
검열관에게 내 일러두지. 하지만 두 우주체계를 공정하게 취급해야만 하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우주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 우주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를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 어때 내 조건에 다짐할 수 있겠나 ?”
갈릴레오는 케플러가 편지에서 밝혔듯이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짐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교황님.”
“내가 자네를 얼마나 신뢰하는 지를 잊지 말기 바라네”
캄파넬리의 출옥과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에 내려진 금지법령을 철회시키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던
갈릴레이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저서에 대한 출판허락을 받게 되자 교황에게 감사의
말을 수도 없이 했다. 교황 검열관이 내민 출판 조건서에 서명을 한 갈릴레이는 캄파넬리에게
희망적인 서신을 보내고 나서 서둘러 로마를 떠났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케플러가 보내온 열역학을 응용한 증기기관을 만드는 것을 제자에게 넘겨주고
‘2개의 주된 우주체계’에 대한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열역학이라는 것에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오랜 숙원인 천체를 다루는 이 일이야말로 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나폴리
“캄파넬리 그대의 편지를 받고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답답했었는데 오늘은 기쁜 마음으로
글을 쓰네. 우리의 영원한 親舊이자 하나님의 충복이신 우르바누스8세 교황께서 그대의 출옥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네. 비록 사면은 아니더라도 감옥에서는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네.
하지만 출옥하더라도 당분간은 연금상태를 감수해야 할거네”
캄파넬리는 나폴리 종교감옥에서 갈릴레이의 편지를 다 읽고는 잘게 잘라서 입 속에 집어 넣고
흐믓한 표정으로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 무렵 페르난도와 가르디는 두 명의 특사들의 방문을 받고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나폴리와 시칠리를 오가며 필립에서 빼앗긴 옛 영토를 찾을 방법을
강구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던 그들로서는 서로 방법을 달랐지만 양쪽 다 구미가 당겼다.
“캄파넬리를 로마로 보낸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더군다나 교황께서 직접 나선 문제라면
말야. 하지만 로마가 정말로 그럴 만한 힘이 있는 지 모르겠군.”
페르난도는 주교들의 눈치나 보고있는 교황청이 필립4세에게 압력을 넣는다고 필립4세가 순순히
물러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교도인 터키제국과 연합하자니 자칫 범유럽권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터키와 연합해서 스페인과 전쟁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가르디 재상은 로마의 힘을 업고 프랑스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장미빛 환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능성은 터키가 훨씬 많은데 위험부담이 있고, 로마는 안전하기는 한데 가능성이 희박하단 말야.
용병들 모집상황은 어떤가 ?”
“그것이. 지금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쪽에서 용병들을 사들이고 있어서 쉽지가 않습니다.
나폴리인들은 배를 타지 않으면 맥을 못 추는 족속들이라…”
말끝을 흐리는 가르디를 못 마땅한 듯 바라보던 페르난도는 군대를 키워놓지 않은 자신이
더 한심스러워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캄파넬리를 로마로 보내고, 터키에게는 병력을 보태줄 수는 없지만 적대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선에서 밀약을 성립 시키도록 하게. 재상은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한번 프랑스를 다녀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가르디가 총총히 물러가자, 페르난도는 아센시오를 불렀다. 비밀리에 대한제국으로부터 신무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아센시오는 아라곤의 유일한 힘인 재력을 바탕으로 수에즈에 있는 대한제국과
물밑작업을 일년째 해오고 있었다. 아센시오가 성공만 한다면, 지금 있는 병력만으로도 바르셀로나를
탈환하고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기 3957년(1624) 가을 자카르타
근대적 도시로 완벽하게 건설된 자카르타는 상주인원 십만에 유동인구 십만을 자랑하는 동남아 최대
항구도시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말레이반도와 자바섬, 슈마트라섬, 필리핀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상선과 여객선들이 자카르타를 드나들었다. 호주와 이집트로 향하는 거의 모든 선박들은
자카르타를 들러 보급을 받았기 때문에 항구주변은 언제나 장사치들로 북적댔다.
대한제국을 배신한 아체국과 조호르국은 그 배신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서 왕국자체가 공중 분해 되고
대한제국은 일방적으로 주변 도서를 대한제국 영토로 선언해 버린다.
그 힘의 정점에 자카르타 해군 기지가 있었다.
자카르타항 왼쪽에 자리잡은 자카르타 해군 기지 사령부 4층 건물은 석조건물로 지어지고 벽면에
부채살 모양의 흰색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강렬한 햇빛을 사방으로 반사 시키는 사령부 건물은
그 웅장함 이 주변 여타의 건물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지중해로 향하는 함대가 예정대로 오늘 정오에 외항에 들어옵니다.”
가무라 소령이 곡명기 사령관에게 결제판을 내밀며 오늘 정오 행사를 다시 한번 상기 시켰다.
언제나 그렇듯 군 행사는 조용하게 치러 지는게 관례였다. 그래서 아무리 항모가 입항한다 하더라도
곡명기 사령관이 직접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가무라 소령이 사령관에게 이 일을 상기시킨
이유는 후임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 탑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들어온다는 놈은 엄청난 놈이라지 ? 마음이 설레는 구만.”
함대 사령관 곡명기 대령은 내일이면 보게 될 2101함과 그 호위함들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자카르타 해군 기지는 보유함정만으로 본다면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했지만 질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른 함대 분함대 화력에도 못 미칠 지경이었다.
수만개의 섬으로 구성된 주변해역 특성상 곡명기 대령 휘하의 함정은, 다섯척의 초계함과
기함인 4418번 전투함을 제외하면 500톤 안팎의 해안 순시선이 대부분이었다.
곡명기 대령의 끊임없는 순양함 배치 요구는 지중해 함대와 파나마함대의 증강 사업 때문에
항상 후순위로 밀려났다. 이번 2101 전투단은 노후화된 고구려전대를 대치하기 위해
크레타기지 완성에 맞추어 지중해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해적들은 아직도 극성인가 ?”
“요즘은 좀 뜸합니다만, 원천적으로 해적행위를 근절할 만한 정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백여척의 해안 순시선들이 주변 해역을 순찰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지역의 항로가 위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야간에는 위험이 배가되고 있습니다.
주로 그 피해선박이 아랍상선이란 것도 문제입니다.”
곡명기는 10일 전에 아랍상인 대표와 가진 면담이 떠오르자 얼굴이 저절로 찌뿌려 졌다.
아랍 상인들은 계속해서 상선이 해적들에게 공격을 받자 자신들도 무장을 하겠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아니면 상선대를 호위해줄 함대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어느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자는 대한제국정책에 반하는 것이고 후자는 사령부의 능력을 상회하는 요구였다.
“함대에 야간 작전이 가능한 함정은 몇적이나 되나 ?”
“기함까지 포함한다면 총 10척입니다.”
“기함을 그런 일에 투입해야 한단 말인가 ?”
그렇다고 잠수함을 투입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아체국의 잔당들로 의심되는 해적들은 빈약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지만, 무방비 상태의 아랍상선들은 해적선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는 게 상책이었다.
대한제국은 영해를 운항하는 모든 선박의 무장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이를 어기면 상선의 주인은 막대한 벌금과 몇 달간의 지리한 조사를 감수해야 했다.
“제주 사령부에서는 지원해준다는 소식 없나 ?”
이럴 때 야간전이 가능한 함정이라도 보내주면 그로서는 한결 짐을 덜 수 있었지만 제주 사령부는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해적들은 대한제국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달이 없는 밤에는 마치 자기 세상인 양 바다를 헤집고 다녔다.
“아직 없습니다. 자체 해결하라는 전문만 앵무새처럼 보내오고 있습니다.”
“할 수 없지. 4척의 초계함에 각각 순시선을 배치해서 야간 순찰을 시행하는 수 밖에. 무엇보다도
해적들의 근거지 파악이 중요해. 전 해안을 다 뒤져. 구역을 나눠서 하나씩 하나씩 뒤지라구.”
곡명기 대령은 자신이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길 바라고 있었다.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그로서는 내후년으로 다가온 장성 진급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속의 제국이라고 불리는 해적을 완전 소탕한다면 그에게 가산점이 붙게 되고
그나마 다른 경쟁자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만 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 자네는 그 말투를 아직도 못 고쳤나 ?
자신감을 가지야 큰 일을 하지. 같습니다. 같아요. 이런 애매모호한 말투 좀 쓰지 말고”
곡명기는 가무라소령을 말하는 모양새를 보며 우유부단하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지적하곤 했다.
일본부에서 태어난 가무라로서는 출신에 대한 막연한 자격지심이 작용하고 있었는지,
곡명기가 느끼기에 그는 매사에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듯 보였다.
“고치려고 하는데도 잘 안됩니다.”
“이번에 초계함에 승선해서 진정한 뱃사람을 한 번 느껴보라구 알겠나 ?”
“네. 사령관님”
“그만 가지”
곡대령이 작은 지휘봉을 들고 모자를 집어 들어 머리에 살며시 올려 놓았다.
모자 챙을 약간 앞으로 수그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무라 소령이 전화기를 들고
자동차를 대기시키도록 어디론가 이야기를 했다.
수송선을 포함하여 총 15척으로 구성된 대선단이 자카르타 외항에 차례로 들어와 정박지를 잡고
닻을 내리기 시작했다. 자카르타항은 평균 수심이 10미터였기에 오만톤급 항공모함인 2101함은
부두에 정박할 수가 없었다. 기함을 중심에 두고 주변에 흩어진 순양함들이 사방을 방어했고,
수송선들은 부두에 접안을 시작했다.
“충성. 자카르타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제독님”
“고생이 많네.”
곡대령과 지중해 함대 후임 사령관 김성일 소장은 간단히 상견례를 하고 2102함 옆에 접안한
통선으로 옮겨 탔다. 김성일 소장이 통선에 오르자 별 두개가 그려진 깃발이 꽂히고 바람에 나부켰다.
고속으로 달린 통선은 10분만에 내항으로 진입해 통선 전용 부두로 다가갔다.
“오시는데 불미스런 일은 없었습니까 ?”
행여 간덩이가 부은 해적들이 전단을 스쳐가지나 않았나 싶어 곡대령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김성일 소장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태풍을 피한 것 말고는 별일 없었네”
김소장 대신 같이 따라온 참모장이 대답을 했다. 곡대령은 부두에 올라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로
다가갔다. 해군전용 부두라서 그런지 주변에는 일반들의 접근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오늘 점심은 뭔가 ?”
“네. 개고기 훈제입니다. 바티비아에 거주했던 유럽인들이 개발한 요리라고들 합니다.
입맛에 맞을 지 모르겠습니다.”
“난 가마솥에 한나절 푹 끓인 탕이 좋던데. 훈제는 처음이군. 이런 더운 지방에서 생활하려면
고단백 식품이 제격이지. 이집트도 만만치 않다는데. 그나저나 오늘 날씨는 화창해서 좋구만”
김성일 장군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늘이 갑자기 씨껌해지더니 먹구름이 주변을 확
뒤덮었다. 이네 굵은 빗방울이 차 지붕을 두들기더니 운전병이 자동차 속도를 급속히 줄였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소나기가 퍼붇기 시작했다. 오른팔을 차창에서 얼른 내려놓은
김성일 장군은 서둘러 유리창을 올리고는 무안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허참 !”
“우기가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한시간 정도 쏟아지다가 그칩니다.
종종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져서 주변이 삽시간에 물바다로 변합니다만,
비만 그치면 언제 거짓말처럼 화창하고 물도 금방 빠집니다.”
김성일은 곡대령의 설명을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차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후덕지근한 공기 때문에 겨드랑이에 맺히고 있는 땀방울들이 물줄기를 이뤄 밑으로 흘러내렸다.
창밖으로 내밀었다 축축해진 오른손 소매가 영 찝찝한지
김성일은 자꾸 소매 아래를 잡고 연신 흔들어댔다.
단기 3958년(1625) 봄 서울
경복궁 복원으로 서울의 중심부에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어났다. 소실전과 똑 같은 규모로
복원하자는 측과 축소복원 하자는 측간의 팽팽한 신경전 끝에 두 안을 절충하여,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건물과 그렇지 않은 건물을 분리하여 이미 그 존재 가치가 없는 건물들 이를 테면
교태전이나 후궁들이 사용했던 집희당, 벽하당 같은 수많은 당우(堂宇)들은 복원에서 제외하고
복원이 끝나고 나서 다시 논의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광화문을 지나 조정에 들어선 황궁부 직원들이 근정전 복원이 한창인 공사현장을 둘러보며
건설부에서 나온 공사 책임자를 찾고 있었다. 금강천황의 뜻을 받들어 시작한 경복궁 복원은
벌써 이년을 넘기고 있었는데도 기초공사만 이루어진 상태였다. 시간 날 때마다 진척 상황을
살펴 보곤 했던 이자명은 공사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어서 여기 올 때마다 짜증이 났다.
“이 보게 ! 여기 박과장은 어디 갔나 ?”
이자명은 끝내 책임자를 찾지 못하자,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인부인 듯한 사람을 붙잡고
약간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황궁부 직원들은 고위직을 빼고는 전주 이씨들이 많았다.
효령대군파의 몇 대손이라는 이자명도 그런 사람중의 한 사람이라 그의 몸짓과 목소리에는
은연중 황족이라는 자부심이 베어 있기 마련이었다.
“저기 근정문에 계실 텐데 못 보셨습니까 ?”
“아. 그래 ?”
이자명은 그 어슬렁거렸던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근정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근정문에 이르니 박과장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여기 이거 설계도하고 10센티미터정도 차이나잖아. 싹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해.
도대체 몇 번을 해야 제대로 하는 거야 ? 이래 가지고 자네들 이름을 여기 석판에 올릴 수 있겠어 ?”
뭐가 잘못되었는지 박과장이란 사람은 인부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어이. 수고가 많네 박과장 ! 오늘은 좀 진척이 되어가는지 원 ?”
“진척은 무슨 진척입니까 ? 근정문을 죄다 헐고 다시 지어야 할 판입니다.”
“또 허물어 ?”
이자명은 대충 모양을 잡아가는 근정문을 헐어버린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
벌써 두 번째 근정문을 다시 만들고 있었다.
“인부들이 꼼꼼히 일을 하지 않아요. 대충대충 만들어 놓고는 광화문 광장에다
자기 이름하나 올리려고 하니 제 목구멍이 남아 나질 않습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십니까 ?”
대한제국은 모든 건축물 앞에 그 건축물을 지을 때 관여한 모든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을 관행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광화문 한 켵에는 공사인부와 책임자들의 이름을 적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그 이름들은 조정 석판에 빼곡히 각인 될 예정이었다.
박과장은 멀쩡한 옷들을 먼지라고 묻은 것처럼 탈탈 털어대며 황궁부에서 나온 이자명이라는 자를
바라보았다. 이자명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원칙대로 하겠다는데
뭐라 할 말은 없었다. ‘이러다 10년이 걸려도 못하겠구나 ? 이것들이 일부러 천천히 하는 거 아냐 ?’
“조선 최고의 기술쟁이들이 그럴 리가 있나 ? 다 감독쟁이들이 못나서 그런 것이겠지 ?”
계속해서 하대도 아니고 존대도 아닌 이상한 말투를 섞어 가며 말하는 꼬락서니가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황궁부 관리들과는 되도록 이면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박과장은 대꾸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박과장이 입을 다물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이자명은 말이 너무 심했나 싶어 슬며시 말을 돌렸다.
“황제폐하께서 자꾸만 진척 상황을 하문하시니 오늘도 내가 이렇게 왔네. 어떤가 ?”
“잘 되고 있습니다. 그리 아시고 걸리 적 거리니 구경하실 요량이며 좀 멀리 떨어져서 하십시오.
진척상황은 정기적으로 보고서가 올라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박과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근정전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아니. 이건 뭔가 ? 이게 왜 언문으로 쓰여진 건가 ?”
이자명은 근정문 현판이 큰 한글에 괄호 안에 작은 한자로 쓰여진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에게 이런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요 ?”
“한자만 써야지. 이게. 언문이라니 ! 가당치 않아.”
“한자도 좋고 언문도 좋은데. 도대체 왜 한자로만 써야 하지는 그 이유를 말해 보시오.
내가 납득이 되면 한문으로 쓰는 것을 고려해 보죠.
그리고 이건 한글이라는 엄연한 좋은 이름이 있습니다. ”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박과장은 이자명을 째려보았다. 이자명은 왜 한자만 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했지만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그건 당연한 것이지
사고해야 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위성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건. 그건.”
우물쭈물하던 이자명을 뒤로 하고 박과장은 근정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멍하니 서있던 이자명은
어느 봄날 우연히 던져진 화두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미 한자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어서,
조선에서는 한자로 만들어진 책은 더 이상 구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천자문을 공부하지 않았고 한자로 된 사서삼경 같은 책은 창경궁터에 지어진
황립 도서관 지하실이나 박물관에 가야 만나볼 수 있었다.
2대 천인단장인 정현우의 임기가 올해말로 끝남에 따라 서울의 주요 공직자들은 삼삼오오 모이면
으레 제 3대 천인단장 선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것은 천군부에서 일하는 장성들도 예외가
아니 여서 신기철 2대 천군부 장관도 이번 선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천군부를 맡은 지 삼년째인 신기철은 새로운 천인단장이 업무를 인수하는 내년까지 폴란드 진공을
미루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신기철이 천군부 장관으로 취임했을 때 정현우는
천군부를 천인단의 조직으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두어 번 했지만 천군부 장성들의 강력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고 신기철 또한 내심으로는 그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을 이끄는 쌍두마차의 사이가 과거처럼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이럴 때, 천인단의 강력한 후원이 필요한 대규모 점령 전을 시작한다는 것은 신기철을 비롯해
천군부 전체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오랜만에 저녁이라도 하자고 해볼까 ?”
정현우가 차기 천인단장보다는 대하기에 더 편할 거라는 생각에 전화통을 붙잡고 천인단장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번호를 돌렸다. 정현우는 벌써 퇴근을 했는지 응답이 없었다. 한참을 드륵 드륵 하는 소리를
듣다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현우 입니다.”
“신기철 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 ?”
“아. 네. 방금 막 나가려다가 전화소리가 들려서요 ! 어쩐 일이십니까 ?”
정현우의 목소리에는 의외라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천군부와 천인단의 실무들은 각 위원회에서
조율해나가고 있었고, 군대를 대규모로 움직이는 일도 최근에는 없어서 둘이 업무적으로
통화할 일이 거의 없었다.
“오늘 저녁 약속 없으시면 오랜만에 약주라도 대접할까 해서요 ! 괜찮으시겠습니까 ?”
“글쎄요 ?”
정현우는 약간 뜸을 들였다. 딱히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피하고 싶었다.
“바쁘시면 다음에 할까요 ?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그럽니다.
시간 좀 내주시지요. 안되겠습니까 ?”
대충 핑계를 대고 신기철과의 만남을 피하려 했던 정현우는 저쪽에서 간곡히 나오자 어쩔 수 없었다.
“뭐 특별히 바쁜 일은 없습니다만, 시내에서 만나는 것은 좀 그러니, 제 집으로 오시겠습니까 ?
네. 그럼 7시까지 오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혼자 오시는 것이지 ? 네. 그럼 그렇게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정현우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대충 두시간은 남았으니 집사람이 서둘러 준비하면 그런대로 될 것 같았다.
집으로 전화를 건 정현우는 손님이 갈 테니 저녁 준비하라고 이르고 의자에 도로 앉았다.
신기철은 생선에 나물, 김치, 고기산적등 골고루 차려진 주안상 겸 밥상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이 자리를 잡자 다시 앉았다.
음식이 입맛에 맞는다는 둥 집사람을 보내서 요리솜씨 좀 배워오라고 해야겠다는 둥
입에 발린 칭찬을 하던 신기철은 안주인이 방 한쪽에 앉아 있다 방문을 닫고 나가자 입을 다물었다.
“반주로 한잔 해야죠 ?”
숟가락과 젓가락을 열심히 놀리던 정현우가 밥공기를 반쯤 비우더니 일어나 벽장을 열었다.
정현우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벽장에는 과실주며 인삼주 등이 가득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집에 술이 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마셔버리는 버릇이 있다.
신기철은 정현우의 벽장이 보물창고처럼 보였다. 그의 집에는 기껏해야 작년가을에 남은
포도주 몇 병이 전부였는데 부인이 술을 담근다 싶으면 어느새 바닥이 보이곤 했다.
“좋죠. 저기 저쪽 걸로 한잔 합시다.”
그 중에서 병이 투박하지만 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좋은 술이라 생각한 정현우가 지목하자
신기철이 웃으면서 그 병과 다른 병을 꺼내왔다.
“술꾼은 병만 봐도 아시나 보죠 ? 이건 15년 된 뱀 술입니다.
맛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전 매실주나 한잔 하겠습니다.”
“병안에 뱀이 있습니까 ?”
“물론이죠. 칠보사라는 독사 라던데 이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뚜껑 딸 때 조심해야겠는데요. 죽지 않고 있다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
"그럴 리가요 ? 15년이나 되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겠습니까 ?”
“모르시는 말씀. 한번은 10년 된 뱀도 멀쩡히 살아서 사람목숨 뺏어간 적도 있는데요.
만사 불여튼튼이죠”
그러면서 신기철은 병뚜껑을 조심스럽게 열고는 망사로 얼른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는 대여섯 잔 분량의 술을 주전자에 따르고 병을 다시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런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정현우는 자신의 술잔에 매실주를 따라 놓고
신기철의 술잔이 차기를 기다렸다.
“지난 구년 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올해로 마지막이라는 섭섭하기만 합니다.”
신기철이 술잔을 부딪치며 공치사를 해왔다.
“저야 초대 단장님에 비하면 반딧불에 불과하죠. 일년만 잘 정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홀가분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벌려놓은 일은 많고 수습도 해야 하는데 임기 안에
다 처리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대충 윤곽이 잡힌 것 아닙니까 ? 이제부터 진행만 시키면 되겠는데 엄살이 심하십니다.”
정현우는 천군부에서 지금 유럽진공과 쥬신대륙 동안으로의 진출계획수립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쥬신대륙 동안은 거의 전적으로 천군부에서 진행하고 있었지만
유럽진공은 천인단에서 상당부분 협조를 하고 있었기에 대부분은 정보가 공유되고 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는 이번 작전 개시 전에 천인단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정립하고 나갔으면 합니다.”
“아무리 제가 국무총리를 겸직하고 있다지만 실상 모든 일이야 위원회에서 처리하고 있는데
제가 무슨 힘이 될 수 있겠습니까 ?”
정현우는 자칫 구설수에 오늘수도 있는 문제에 끼여들고 싶지 않았다.
내년에 선출되는 후임자가 전면에 나서서 처리해도 될 것이기에 자신은 한발 뒤로 물러나고 싶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지만, 천군부 조직이 천인단 만큼 방대하고
관할하고 있는 지역도 무시할 수 없는 시점에서 무리하게 천인단으로 흡수하려 한다면 문제점이
발생할 것은 자명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초대 천인단장과 천군부장관의 후광이 작용하고 있어서
두 부서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다음대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두 조직을 하나로 묶는 상위개념의 최고 명령권을 가지는 조직을
만들어 놓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
“천군부가 완전히 국무회의에서 빠져나가겠다는 소리로 들리는 군요.
대한제국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두 조직이 삐걱거리면 제국자체가 사상누각이 될 수 있지요.”
“조직표상에는 국무총리 아래에 천인단과 천군부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리고
지금껏 별개의 명령개통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 저는 다만 현실을 반영하자는 것입니다.”
“장관님. 100년 후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다면 천군부의 효용성이 급격히
줄어들 것입니다. 지금 이런 체제가 굳어진다면 100년 후에는 바꾸기 더 힘들어질 지도 모릅니다.”
신기철도 그걸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천군부가 국민에 의해서 집권하는 행정수반에게 명령권을 이양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가칭 “단군”을 만들어서
국무총리의 임무를 대신하고 천인단과 천군부 모두를 관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단군’을 맡길 생각이십니까 ?”
“그건 ?”
신기철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양 조직에서 합의 하에 공동대표형식을
취하는 것이었지만 그것 역시 불안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단군’을
만들 필요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양 조직 중 한 조직에서 맡는다면 다른 조직에게 명령이
이행되지 않을 우려도 있었다.
“일단 고려해 보도록 하지요. 천군부 장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으니 그만 술이다 듭시다.
조만간에 우리의 입장을 정리해서 만나도록 합시다.”
지금 당장 무슨 결론을 내기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기에 신기철도 이쯤해서 논의를 마친다는 것에
동의해서인지 그 이후로는 잡다한 이야기를 대화의 소재로 삼았다.
“내년에 뭐 할지 생각해 두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
신기철은 남의 일이 아니었기에 조심스럽게 정현우를 떠보았다.
“신시로 가서 이로쿼이 연맹의 발전을 위해 미약한 힘이나마 보탤 생각입니다.
이곳에 남아 있으면 괜히 부담만 주지 뭐 도움이 되겠습니까 ?
요즘 들어서는 왜 초대 단장님이 말년에 겉돌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세월이 사람을 가르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습니다.”
몇잔 마신 술에 취기가 오르자 신기철은 슬그머니 속내를 내비쳤다.
“그렇죠. 좋으신 계획이십니다. 저는 아직 생각을 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조준옥 장관님처럼
어디 촌구석에 쳐 박혀야 겠네요.
올해부터는 이곳 저곳을 방문하면서 좋은 곳을 물색해 볼 생각입니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 안 드십니까 ? 그건 그렇고 4군을 올해 안에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
“보급로 확보계획만 세워지면 그럴 생각입니다. 크레타기지가 운용되고 있고, 발틱에 있는
조선소에서 함정을 건조 중입니다. 터키군이 움직이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4군병력 중 일부를
이동시킬 생각입니다. 전략군 사령부에는 이미 병력이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전략군이라는 말에 정현우는 눈이 동그래졌다. 전략군이라면 단기 3946년이래 십년 동안 해군과 육군의
발전을 중단하고 키워온 천군부 제일의 부대로 20만의 해상상륙군과, 수송선 100척, 수송 호위함 20척,
잠수함 5척으로 구성한 해병함대 그리고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주도 전체가 이 전략군의 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부분의 병력이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들은 명령접수 후 12시간 안에 제주도를 떠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으며
그에 걸맞는 장비가 지급되었다.
“얼마나 움직입니까 ?”
“더 자세한 것은 내일아침이면 보고서가 올라갈 겁니다만, 파나마에 3만, 크레타기지에 5만입니다.
한동안 제주도가 텅비겠습니다.”
천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 제주도는 곳곳이 천인단과 천군부를 위한 시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난 10년 동안 전략기동군이 제주도에 자리를 잡으면서 제주도는 이제 섬 전체가 군사기지화 되어
가고 있었다.
“제주함대가 모처럼 기를 피겠군요 ?”
제주함대 사령관과 약간의 친분이 있던 정현우는 가끔씩 전화로 투덜대던 사령관이 떠올랐다.
해군성에 수 차례 전략군 기지 이전을 요청했다가 다 퇴짜를 받았다고 하소연을 하곤 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 하니 그럴 만도 했지만 해군성은 천군부의 하부기관이라
요청서만 올릴 뿐 적극적인 요청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단기 3958년(1625) 봄 로마 바티칸
우르바누스8세 로마 교황청 교황 앞에서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이가 출판한 책을 왼손에 잡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고 교황의 성호를 긋는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두 우주 체계 -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 의 대화’란 갈릴레이의 저서가 봄에 출판되자 그의 명성은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유럽 최초로 목성의 위성을 관측하여 메디치가의 네 명의 아들의 이름을 따 명명하면서 천문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이제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천문학자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다. 목성 위성을
메디치가에 헌납하면서 갈릴레이는 메디치공에게 철학자의 칭호를 받음과 동시에 메디차가의 든든한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메디치가는 유럽의 합스부르그왕가와 더불어 많은 왕비와 왕을 배출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로 교황과 추기경도 대 여섯명 배출하여 바티칸과도 막역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갈릴레이가 나를 배신하고, 자신의 약속을 배신하고 그런 책을 냈단 말인가 ?”
교황은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기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추기경이 책을 펼치고 문제되는 부분들을 낭독하자 교황은 안색은 점점 굳어져갔다.
갈릴레이는 명백히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정당화 시키고, 공의회에서 공인한 지구 중심 우주관을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 근거는 뭔가 ?”
교황은 분명이 갈릴레이에게 증명할 수 없는 추측이나 가설로 기존의 권위와 정당성에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 적이 있었기에 확인하고 싶었다.
“금성과 목성입니다. 갈릴레이가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관찰한 목성 위성의 위치 변화와
금성의 모양변화 그리고 금성의 크기 변화 등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추기경은 태양을 중심에 두고 그려진 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태양계를 교황에게
보여주었다. 내행성의 시운동에게 관한 복잡한 수식과 도형으로 가득찬 기하학적 그림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교황의 눈에는 단지 원 중심에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놓여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교황에게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의 피조물이 생활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당연했다. 지구가 우주 중심에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불경죄에 해당했다.
“우주라는 책은 책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 즉 삼각형, 원, 기하학 등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깜깜한 미로 속에서 헤매는 봉사에 불과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우주는 얻으려는 자에게는
언제나 열려있지만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당시 유럽은 천체연구는 신학과 밀접한 학문으로 신의 영역을 탐구하는 자들의 전유물,
즉 교회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천국에 대한 끝없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에서는 천채연구를 계속해 왔다.
일천이백년 동안 공인된 지구 중심주의 천체관은 우주관의 발전보다는
교회의 정당성을 지키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이것은 메디치 대공 어머니께 갈릴레이가 보낸 편지입니다.
대공 어머니께서는 갈릴레이에게 성서에 기록된 것이 거짓일리가 없다는 의문을 제기하셨는데,
갈릴레이는 답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성서는 신성불가침 한 것으로 절대적인 진리이지만, 그 해석을 하는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만약 과학과 성서가 불일치 한다면 그것은 과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서의 해석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교황의 권위와 공의회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갈릴레이는 한때 성직자의 길을 걷기를 희망한 독실한 신자로서 신성 모독이나 성서의 절대적인
신성 불가침을 모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추기경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낭독하고 있었다.
갈릴레이에 대한 배신감이 난로에 올려진 냄비에서 잘잘 끓어오는 물처럼 가슴 밑바닥부터 올라오고
있을 때 추기경은 거기에 기름을 붓는 회심의 일 타를 가했다.
“캄파넬리가 연금가택을 벗어나 프랑스로 도망갔습니다.”
“그게 사실이요. 이이이….”
“당장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시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교황은 추기경에게 마침내 갈릴레이를 붙잡아 종교재판에 회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오만하게도 교황청과
자신의 경고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추기경회의에서 그 논의를 금지시킨 지동설을 유포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갈릴레이를 처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예전에 부르노 신부를 화형 시킨 것 처럼 갈릴레이를 화형 시키고 싶어했다.
라이프치히
발렌슈타인의 요청으로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케플러는 천문학보다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무기들의
성능향상에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발렌슈타인의 점성술사로 알려져 있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시간을 모토르 연구와 화승총 개량에 쏟아 붇고 있었다.
“큰일났군 !”
갈릴레이가 쓴 책을 구해 읽은 케플러는 갈릴레이가 걱정이 되었다. 갈릴레이는 천체연구의 최고자리에
있다는 우월감과 오만함으로 케플러가 발견한 법칙이나 그가 편지로 알려준 공전의 증거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불완전한 증거들로 코페르니쿠스를 옹호에 나갔다.
“금성의 모양변화는 탁월한 관측 기록이지만 궤도를 완전한 원으로 상정하게 되면 실제 타원형 궤도와
차이가 생기게 되고 갈릴레이가 제시한 증거는 거짓이 된다. 왜 연주시차나 광행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지. 심지어 중력에 대한 이야기도 없군”
완변한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아집을 고수할 바티칸이 이런 불완전한 증거로 갈릴레이를 가만둘리
만무했다.
“격발장치는 다 만들어졌나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케플러는 발렌슈타인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 한방을 준비하고 있던 발렌슈타인은 케플러가 개발하고 있는 바퀴식 격발장치에 관심이 많았다.
“네. 다 되었습니다. 가시지요. 10정을 만들어서 지금 실험할 생각이었습니다.”
“야포는 ?”
“그것도 거의 끝나 갑니다. 구스타프가 가지고 있다는 야포보다는 성능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운용에는 문제가 없을 것 입니다. 그보다는 야포 운용방법에 대한 전술 개발이 중요합니다.”
“그런가 ? 그건 그렇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그렇게 강한가 ? 아님 과장된 소문인가 ?”
“직접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단하긴 할거라 짐작은 갑니다. 믿을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소문들이 현실로 나타날 때면 대한제국은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그렇다는 건가 ?”
“한번은 제가 다녔던 학교 선생님께서 물과 공기만을 가지고도 대포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요.
물대포라는 것이었는데 특별반 누구도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능하더라구요. 거기에 약간의 도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거의 50야드를 날아갑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나 ? 이건 실험을 하진 않았지만 물을 끓여서 생기는 수증기의 힘으로도
엄청난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발렌슈타인은 케플러가 말하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두 눈으로 보고 왔다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구스타프 그 박쥐 같은 놈을 몰아내고 그 쪽에 대한 연구를 한 번 해보게.
내가 뒤를 확실히 봐줄 테니. 하지만 나로서는 영 믿어지지 않는단 말야.
그런 것 보다는 군대에 대한 자료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군 !”
“발렌슈타인 공작님 ?”
케플러는 구스타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뭔가 할말이 있다는 듯 발렌슈타인을 불렀다.
“왜 그러나 ?”
“이번에 구스타프와 싸우시더라도 구스타프를 죽이지는 마십시오.
그가 죽으면 신성로마제국에 득보다는 화가 더 많을 것입니다.”
“왜 ?”
케플러의 의외의 말에 발렌슈타인의 눈이 커졌다.
온몸은 탐욕에 물들어 있었지만 큰 눈망울을 가지고 있던 그의 눈은 맑기만 했다.
“대한제국이 그들의 뒤에 있습니다. 구스타프 죽음은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핑계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혹시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특별한 것이라도 있나 해서 약간 긴장했던 발렌슈타인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별 걱정을 다하는군. 대한제국이 아무리 강해도 폴란드왕국을 넘어서 신성로마제국까지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더군다나 그들은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는 이교도들 아닌가 ?
이교도들이 성스러운 기독교도들을 침략하면 전 기독교인들이 떨쳐 일어나 맞설 거야.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리시는 이 땅에 이교도놈들이 감히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모르긴 몰라도 제 2의 십자군 원정이 일어날 수도 있지.
괜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구스타프 엉덩이에 불침을 놔줄 총이나 보러 가세 ”
앞서가는 발렌슈타인을 총총 따라가던 케플러는 길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괜한 말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튼 경고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완연한 봄이 온 대지는 어느새 하나님께서 녹색 물감을 뿌려놓으셨는지 온통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모스크바
제5군단과 6군단을 완편하는데 온 역량을 집중하던 4군 사령부는 천군부에서 내려온 예하부대
훈련강화 명령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례적인 천군부 명령은 더군다나 훈련 개시 날짜만
명시되어 있었다. 적은 피해를 입고 스몰렌스크를 장악한 4군은 새로 획득된 지역에
5군단과 6군단을 전진 배치하고 그들의 보급로를 만드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4군은 그 과정에서 스몰렌스크를 거대한 창고 도시로 만들어 놓았다.
“멀지 않았군.”
김상태 대장은 아무리 늦어도 올해 안에 4군 전체가 움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란드는 서막에 불과했다. 폴란드를 위해서 4군 전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낭비였다.
“스몰렌스크에 엄청난 물자를 비축할 때부터 알아보았지.”
각 부대의 훈련 계획이 기록된 보고서를 꼼꼼이 살펴보던 사령관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교육참모장을 올려 보았다. 직감적으로 보고서가 틀렸다는 것을 감지한 교육 참모장이
질문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참모장은 정확히 네 번을 직접 검토했지만 아무런 문제점이 없었던
것으로 확신했다. 사령관이 한동안 말이 없자 그의 눈빛이 의구심에서 점점 자신감으로 변해갔다.
“이번 훈련의 목적이 무엇인가 ?”
너무나도 기초적인 질문에 교육참모장이 순간 당황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주어진 명령을 완수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 습득과 그에 요구되는
체력 및 정신력을 비롯한 전투력 향상에 있습니다.”
“그렇지. 군단과 사단 그리고 연대별 전술 훈련은 아주 훌륭하군. 그런대 말야 내 직감인데
이번 훈련은 단순한 훈련이 아냐. 훈련으로 끝나지 않고 실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 그리고 보급작전이 너무 미흡하단 생각이 드는군”
교육참모장은 훈련이 바로 실전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훈련을 강화하라는 명령에 말 그대로 훈련 강도만을 높일 생각을 해서
강도에만 초점을 맞춰 훈련 계획서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령관님 말씀대로 훈련계획을 수정하면 실상 훈련 강화라는 목적에 부합된다고
볼 수 없지 않을까 합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 교육 참모장은 자신의 말에 어폐가 있음을 인식했다.
4군지역은 다른 지역에 주둔하는 군대와는 상황이 달랐다. 사령관은 그 점을 바로 지적하고 나왔다.
“수치상으로 본다면 자네 말이 맞지만 이곳은 상황이 틀리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훈련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으면 정작 전투명령이 하달되면 예하부대들은 피로도가 극도로 올라가서
훈련을 하지 않은 만 못하게 될 수도 있어. 그리고 장교들에 대한 교육계획은 따로 만들지 않았나 ?”
“네 ?”
“지휘관들 말야 ?”
통상적인 훈련에서 지휘관만을 위한 훈련은 만들어 본 전례가 없었던 교육 참모장은
도대체 사령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보통 부대장들은 훈련이 끝난 후 훈련 결과를
가지고 훈련 평가를 했지 훈련 전에 특별한 교육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지휘관들은 훈련 종료 후….”
교육 참모장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번 훈련은 종료 시점이 없는 훈련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다시 한번, 만들어서 올리게. 실전을 염두에 두라고. 그리고 천군부 참모부에서
누가 올지는 모르지만 참관인이 온다는 후문이 있어. ”
“네. 알겠습니다.”
교육 참모장은 군대생활 20년 동안 자신이 그렇게 경계하던 고정관념에 빠졌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사령관실을 나오면서 비서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했지만 참모장은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했다.
발틱해 연안 신항
러시아부가 편입되면서 천인성에서 멈췄던 대륙 횡단 철도를 모스크바를 거처 신항까지 연결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고, 신항에서는 발틱 함대가 운용할 전함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모든 자재가 육로를 통해 움직이고 있어서 선박 건조는 더디게 진행되었지만 철도가 연결되면
숨통이 틸 것 같았다. 신항 해군기지 안에 있는 선박 수리와 건조를 위한 독은 세개가 만들어져
있었지만 하나만 운용이 되고 있었다.
신항은 군사 항으로 개발되어 있었기에 민간 선박은 근처 항로를 항해하는 것 자체도 제한되고 있었다.
신항 경비를 담당하는 강삼호는 정경일에게 연락을 받고 그 동안의 회포를 풀기위해 선창가로
뚜벅 뚜벅 걸어갔다.
“잘 지냈나 ? 親舊 ”
정경일이 반가운 마음에 두팔을 들어 강삼호를 껴안았다.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있던 정경일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삼호 역시 호탕하게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제수씨는 안녕하신가 ? 아이는 ?”
“안녕하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요즘은 생산적인 일 하기가 힘들다니까.
나보다 자네 형수님이 더 바쁘다네. 참네. 요즘은 집구석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다니까 ? ”
“뭐 하시는데 ?”
정경일의 행복한 투정을 들으며 보드카를 입안에 털어넣은 술잔은 내려놓았다.
도수가 45도에 육박하는 앱수르트 보드카는 스웨덴에서 들여온 고급 술이었지만
소주보다 더 심한 술 냄새가 났다.
“내가 애기 안 했나 ? 식물에 완전히 푹 빠졌어. 김대성 전 몽고부 총리와 죽이 맞아 가지고는
고비사막 녹화사업에도 관여하고 있고. 애기 낳을 생각은 않고 내가 미친다니까 ?
이번 기회에 바람이나 피울까 생각중이야. 한번은 내가 바람 피운다니까 뭐라는 줄 알아 ?
기가 막혀 가지구. 애 하나 만들어서 오는 건 뭐라고 안 하겠다나. 그리고…”
정경일은 자신이 편하게 사는 것 같아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는 둥 결혼을 괜히 했다는 둥
끝날 줄 모르고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간단한 말로 그의 말에 호응해주던 강삼호는
술잔이 몇잔 돌자 슬슬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부탁한 것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일은 뭐 알아봤나 ?”
“뭐 ? 어 그거 ! 내놓고 알아볼 수 있나 ! 걸리면 집안이 아작 나는데.
그런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더라고. 개인적으로 친한 상인들이 넌지시 물어보더만.
대부분 네덜란드나 스웨덴 사람들인데 그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하여간 가격은 상관말고 알아봐 달라는데 난 영 깨름직해.
그런데 자넨 이런 걸 왜 알아봐 달라고 했나 ? 군에서도 벌써 조사를 하고 있는 건가 ?”
강삼호는 정경일이 물어볼 것에 대비해 그럴듯한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지만,
스스로 답을 말해주자 더욱더 그의 답은 완벽해졌다.
“오래되었지. 아무래도 왕래가 빈번하다 보니 유출은 불가피한 거고, 이번에 이 지역 주변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 밀거래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네.
천군부나 천인단이나 정보 유출을 최대한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야.
상당 부분은 이미 유출되었다고 봐야겠지.”
“설마 그러기야 하겠나. 그렇다고 해도 전혀 쓸모가 없을 걸.
기초지식이 부족한 그들로서는 그림의 떡이 아닐가 싶은데.”
“경일이 자네는 유럽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구만. 지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유럽이야. 이미 상업자본이 충분히 축적되고 있어서 과거의 농토중심의 봉건제는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네. 거기에 유럽 전역이 오랫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 전쟁 수행자들이
어느 시기보다 더욱더 관심을 보이고 있지. 연금술사들이 전부 무기제조에 투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 와중에서 새로운 발명품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는데. 유출된 무기나 지식들이
그런 곳에 쓰여지고 있겠지. 영국에서는 대한제국의 소총과 비슷한 총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어. 네덜란드나 스웨덴에서도 그런 총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
“그렇군. 하긴 아랍인들이 증기기관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그건 그렇고 요즘 러시아부 전체가 술렁이던데. 제국 확장이 또 시도되는 건가 ?”
정경일은 누구보다도 군부의 움직임에 민감했다. 장사치라면 다 그렇듯 전쟁은 장사꾼들에게는
좋은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더구나 자국의 승리가 확실할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정경일이 느끼기에 천군부에서 또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럴 것 같네. 이놈의 제국은 도대체 지구 전체를 다 먹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모양이야.
이러다가는 조만간에 망하는 거 아닌지 몰라. 위대한 제국은 언제나 초라한 몰락으로
끝을 맺곤 했는데 걱정이야”
“자네는 유럽을 너무 과대 평가하고 있는 것 같군. 지금 유럽은 거의 몰락하기 일보 직전이야.
동방과의 무역로를 완전히 빼앗기고 스페인이 쥬신대륙에서 들여오는 은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
거기다 전쟁은 허구헛날 일어나고 있고 말야. 겉은 번지르 하고 안으로는 완전히 곪아 있는
호박같다고나 할까. 누가 손만 대도 푹하고 꺼져버릴걸.
그들의 하나님은 욕심과 질투의 화신이 아닌가 ? 아주 훌륭한 신과 성경을 가지고도
그렇게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지. 그리 생각하면 성경이나 하나님은 유럽인들에게는
너무 과분한 존재야. 봉사에게 전기불 과 같은 거지. 안 그런가 ?”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천년을 넘게 지배해온 종교인데 그렇게 쉽게 무너질까 ?
아무리 타락했다고 해도 군계일학이라는 말도 있는데.”
정경일이 자신의 생각에 동의를 구했지만, 강삼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라는 것은 때론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하곤 했다.
“하하하. 그놈들이 군계일학이라면 대한제국은 이놈 아! 군학일계다. 하하하”
무엇이 그리 좋은지 정경일은 마냥 웃어 제꼈다. 학들의 무리에 끼어든 한 마리 닭 같은 존재가
혹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강삼호는 통쾌하게 웃고 있는 親舊의 웃음소리가
자신을 비웃는 소리로 들려왔다.
‘나는 파닥거리는 병아리. 닭 새끼인가 ? 아무리 발버둥쳐도 날아오르지 못하는 그런 닭 새끼인가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