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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여호수아기의 말씀 24,14-29
그 무렵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4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섬겨라.
15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6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17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또한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과 이 땅에 사는 아모리족을 우리 앞에서 몰아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19 그러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주님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너희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20 너희가 주님을 저버리고 낯선 신들을 섬기면,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선을 베푸신 뒤에라도, 돌아서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망시켜 버리실 것이다.”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너희가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한 그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가 증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3 “그러면 이제 너희 가운데에 있는 낯선 신들을 치워 버리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 하자,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25 그날 여호수아는 스켐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웠다.
26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모두 하느님의 율법서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그곳 주님의 성소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세웠다.
27 그러고 나서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은 너희가 너희 하느님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28 여호수아는 백성을 저마다 상속 재산으로 받은 땅으로 돌려보냈다.
29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죽었다.
그의 나이는 백열 살이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심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자 청년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다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련하여 이끌어갑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18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 18,3)
“너희들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 18,10)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로 여기건만 제자들은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 19,14)
이처럼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하며, 동시에 사회에서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복음의 뒷 장면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부자 청년(19,16-22)과 자신들의 성과에 목소리를 높이는 제자들(19,27)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어린이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고, ‘작은 자’ 되게 하고,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가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면, 우리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복음화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단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나 혹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단지 ‘어린이에게 다가가라’ 혹은 ‘어린이를 돌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 곧 ‘어린이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 19,14)
주님!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어린이처럼,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타성과 사랑의 갱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오늘 독서는 여호수아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어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얼마나 좋은 것을 많이 베풀어 주셨는지 장황하게 얘기한 여호수아는 이제 자기 삶 역할을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다른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그것도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저는 오늘 여호수아의 촉구를 들으면서 ‘오늘 선택’하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선택하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진정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까?
말로만 선택이지 실제로는 어찌해야 할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런 면이 있고 또 그래야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마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로 당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종처럼 비굴하게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자유가 있는 존재로서 사랑으로 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귀인이 되게 하시고 당신은 귀인의 사랑을 받고자 하심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받는다면 종의 사랑보다 귀인의 사랑을 받길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택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래서 이것의 의미는 다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너희가 다시 선택하라는 말이고, 부모와 조상의 선택에 떠밀려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선택으로 새롭게 다시 섬기기 시작하라는 것일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선택으로 신자가 되거나 부모의 권유로 수도원에 들어온 경우,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성당을 멀리하거나 수도원 성소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예’라고 하고는 포도밭에 가지 않은 아들보다 ‘싫다’라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는 아들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부모의 선택, 조상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의 선택이어야 하고, 그것은 자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늘’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과거 조상들이 어떠했어도 오늘 네가 새로이 결정하고 선택하라는 것이고, 또 나의 결정으로 하느님을 섬겨왔더라도 오늘 다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오늘 선택하라는 것의 의미는 사랑의 타성을 깨는 의미이고 사랑을 갱신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한번 결혼했으니 사랑 없이도 남편과 아내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을 매일 다시 선택하고 새롭게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음으로써 타성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오늘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뭐든지 갱신하지 않으면 타성에 젖기 쉽기에 세례를 갱신하고, 서약을 갱신하고, 혼인을 갱신하라는 일깨움을 여호수아로부터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지금은 구역 반모임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방문을 하고 가정축복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집을 개방한다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속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이 있던 예전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반모임 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 ‘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을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않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 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할머니가 데려온 어린아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머리 굴리지 않으며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어미 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가 부모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의탁하는 단순함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시편 131,2) 같이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초 긍정적 시선이요, 초 낙관주의적 시선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개념 있는 행동이나 예의바른 처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 사고나 판단 능력보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요란스레 예수님 앞에 등장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입니다.
안그래도 계속되는 복음선포 활동으로 격무와 상습피로에 시달리고 계시는 스승님이신데,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셔야 할 스승님이신데, 개념도 예의도 없는 아이들이 몰려오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가까이에서 군중들의 질서 유지 담당 역할도 수행했었던 제자들이기에, 자연스레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스승님께 몹시 바쁘시니, 빨리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크게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 19, 14)
우리 가톨릭교회는 예로부터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어린이의 예를 들어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의심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그런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을 하느님 나라 입국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십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입국은 불가능하다거나 요원한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자연을 향한 강한 믿음과 신뢰심, 깨끗한 마음과 단순성, 솔직함과 겸손함을 지닌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 존재에 대한 극진한 존중과 배려가 눈에 띱니다.
그분께서는 시대를 앞질러 인권의 가치와 소중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시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어린이들, 그들에게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 영적 차원에서 그들이 지닌 우월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의 천진난만함, 영적인 순수함, 맑은 영혼의 가치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들 못지않게 결핍 투성이요,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무리 비참하고 죄투성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초 긍정적 시선이요, 초낙관주의적 시선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을 오늘 병든 우리의 영혼을 재조명하고 일어서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숱한 죄와 불충실로 인해 부끄러운 우리지만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그대의 인생은 아주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더 존귀합니다.
그대는 내게 정말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지닌 가치와 아름다움에 걸맞은 성(聖)스런 삶을 살아가십시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 예찬 - 하늘 나라의 삶>
어제는 결혼과 이혼, 독신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나눴고, 어제에 이어 오늘은 어린이에 대해 나눕니다.
강론쓰는 이 시간, 어린이같은 마음으로 책상앞에 앉아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참으로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했을 때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자 예수님의 즉각적 반응입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이어 생각나는 매3주간 저녁 성무일도시 두 번째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입니다.
이런 시편을 찬미노래로 바칠 때의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후렴에 이어지는 사랑스런 시편 131장입니다.
“주여, 잘난체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좆지도 아니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끊임없이 바치는 이런 찬미의 은총이 주님을 닮아 날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자만심이나 자부심은 추호도 찾아볼수 없는, 순수하고 단순하고 열려있는, 신뢰심 가득한 겸손한 어린이 같은 영혼입니다.
요즘은 노인들은 많은데 어린이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참 힘듭니다.
예전 어린이들 가르칠 때가 생각나 보관중인 옛 일기장을 들춰 봤습니다.
누렇게 바랜 공책은 글씨도 희미했습니다.
정확히 47년전 저는 28세 청년 교사로 12세 5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일기장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치열했던, 가열찼던 초등학교 교사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75세, 당시 12세 아이들은 지금 59세가 되었고, 이때 맡았던 학급 인원은 80명 이상이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온통 어린이들과 함께 지냈던 8년간의 교사시절은 저에게 가장 행복한 때였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제 사랑 전부이지만 그 당시는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했듯이 저도 그러했습니다.
일기장은 물론 글씨도 희미하게 바래 있었습니다.
두 편의 동시를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떠나간 빈 교실은
썰물이 씻어간 바닷가
먼 파도에 귀를 모으며 나는
귀여운 조개를 줍는다
커텐 주름에서, 꽃병밑에서, 고운 향기로 살아오는
맑은 웃음들,
“저요, 저요, 저요”
고사리 손의 물결속에 방실방실 떠오르는
작은 얼굴들
눈을 감으면 끝없는 물결소리
내 작은 인어들은 어느 수평선을 가고 있을까?
아이들의 옷깃을 고치듯
비뚜러진 책상을 바로 놓는다’
-1976.9.15.
또 하나의 동시입니다.
아마 교재준비 후 7시 넘어 퇴근할 때의 심정일 것입니다.
‘텅비어 있는 교실
창을 통해 어둠이 들어오면
마음의 창도 빛을 잃는다
유리창 안에 들어왔던 하늘도
초롱초롱 빛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말소리도 흡수해버린
교실은 말이 없다
밤이 무척 쓸쓸하고 무섭지만
아이들의 꿈을 꾸면 즐거워진다
내일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1976.9.18.
이때의 추억이 지금도 산책중 동요를 부르도록 부추깁니다.
지금도 즐겨부르는, 해방 후 가장 먼저 많이 불렸다는 ‘새나라의 어린이’입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하늘 나라의 우리로 생각해도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쟁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몸이 튼튼합니다.
무럭무럭 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해방 후 새나라 건설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지금도 즐겨 부르는 동요입니다.
어떻게 찾은 나라인데... 어제 원장수사에게 부탁의 메시지와 더불어 태극기 선물도 받았습니다.
“내 솜씨로는 안되니 가능하면 태극기 A4용지 크기로 출력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집무실 십자고상밑에 붙여놓고 애국심愛國心을 진작振作시키며 독립운동獨立運動하는 마음으로 살려구요!”
광복 78주년을 지났지만 진정한 독립은 아주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마음 역시 어리이같은 순수한 마음의 발로라 믿습니다.
오늘 강론은 어린이 예찬입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 늙어도 마음은 순수한 어린이들입니다.
다시 이런 어린이 마음을, 동심童心을 살아야 하겠고, 참으로 예수님처럼 어린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해서 잠언 역시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대의 아이들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당신을 거쳐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또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에게 소유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자기만의 사고가 있으므로.
그대의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까지 가두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마라.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의 어린이들 사랑 깊이에는 이런 어린이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동심을 살고 싶은 우리들 하나하나 영혼에 대한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제1독서 여호수아 이름은 그대로 예수입니다.
두 분 다 어린이같은 영혼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하늘 나라를 사셨던 분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여호수아의 마지막 열정과 순수를 다한 연설입니다.
여호수아의 연설에 주님을 섬길 것을 약속하는 백성들이 순수한 어린이들 같습니다.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누굴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이구동성, 이에 대한 한 목소리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거듭 응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대로 순수한 영혼의 어린이들 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섬기듯, 예수님을, 이웃 형제들을 겸손한 사랑으로 섬길 때 동심도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마지막 여호수아의 죽음이 장엄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는 뒤에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죽었다.
그의 나이는 백 열 살이었다.’
가장 확실한 사실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때 어린이같은 순수한 영혼에 하늘 나라의 삶일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린이같은 마음으로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 그런 중재를 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수송아지로 우상을 만들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려고 하였을 때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다가 광야에서 모두 벌하신다면 다른 신들이 하느님을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럴 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와 메추라기는 질린다고 불평했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높이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서 ‘밀당’을 잘하였습니다.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만남’에도 적당한 밀당은 필요하다고 합니다.
전화 빨리 받기, 문자 바로 보내기는 필요하지만 가끔 여유를 가지고 전화하거나 문자 보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만날 때 마다 비용을 혼자서 지불하는 것도 좋겠지만 가끔은 상대방이 비용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혼자서 비용을 모두 계산하면 처음에는 고마워 하지만 나중에는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상대가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만남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쌍방통행일 때 더욱 깊어진다고 합니다.
100%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만남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적당한 ‘밀당’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합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그런 ‘밀당’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밀당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그 가족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느님만을 섬길 것인지 다른 이방의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 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수아와 같이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증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은 너희가 너희 하느님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일에는 밀당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도 선을 넘지 않는다면 적당한 밀당은 사목에 도움이 됩니다.
매일 똑같은 날씨보다는 4계절이 있는 것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매일 맑은 날 보다는 때로 흐린 날, 비오는 날도 있으면 인생이 따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밀당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도, 배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밀당이 아니고 선택입니다.
그 선택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 결단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배우 윤여정 씨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나이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처음 살아 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윤여정 씨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지금 자기 나이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나이만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말로 과거에만 머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거의 나이를 통해 다른 이를 판단하고 때로는 잘못되었다면서 단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자기 나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처음 살아 보는 자기 나이, 이 나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힘이 없다고, 나이가 들어 정신도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다면 지금 나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이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많은 어른이 이렇게 과거의 나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과거의 나이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더 나이 먹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지요.
과거에 하지 못한 것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는 과거의 나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의 나이만을 바라보며 미래를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어린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면, 우리는 열심히 어린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외모를 어린이처럼 꾸미면 될까요?
아니면 말투를 어린이처럼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간직하지 않으며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어린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어린이처럼, 이것저것 재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지 않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잘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찾는 사람만이 미래에 할 수 있는 것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주님께서 주신 처음 살아 보는 지금의 나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이 주님의 훌륭한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를 떠나 지금의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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