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兆人高麗家貧,於御史臺替勳官遞送文牒。其時令史作偽帖,付高麗追人,擬嚇錢。事敗,令史逃走 追討不獲。御史張孝嵩捉高麗拷,膝骨落地,兩脚俱攣,抑遣代令史承偽。準法斷死訖,大理卿狀上 故事,準名例律,篤疾不合加刑。孝嵩勃然作色曰,脚攣何廢造偽,命兩人舁上市,斬之。<조야첨재 권2>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사는 한 고구려인의 집이 가난해서 어사대 훈관을 대신해 문서를 수발하는 일을 했다. 그때 한 하급관리(영사)가 가짜로 문서를 만들어 고구려인으로 하여금 사람을 쫏아 돈을 받아오게 시켰다. 일이 실패하자 그 하급관리는 도망을 가서 추적을 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당나라 어사 장효숭이 고구려인을 잡아 고문을 해서 무릎뼈가 땅에 떨어져 두 다리를 모두 못쓰게 될 지경이었다. 하급 관리의 위조한 죄를 대신해 고구려인을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대리경이 장계를 올려 말하길 옛 고사에 따르면 병이 심한 자에게 형을 가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어사 장효숭이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히며 말하길 "못쓰게 된 다리로 어찌 죄를 없앨 수 있겠는가"라며 명을 내려 끌고 가 고구려인의 머리를 자르게 했다.
中書舍人郭正一破平壤,得一高麗婢,名玉素,極姝豔,令專知財物庫。
正一夜須漿水粥,非玉素煮之不可。玉素乃毒之而進,正一急曰 此婢藥我, 索土漿、甘草服解之,良久乃止。覓婢不得,并失金銀器物十餘事。錄奏,勅令長安、萬年捉不良脊爛求賊,鼎沸三日不獲。不良主帥魏昶有策略,取舍人家奴,選年少端正者三人,布衫籠頭至衛。縛衛士四人,問十日內已來,何人覓舍人家。衛士云:有投化高麗留書,遣付舍人捉馬奴,書見在。檢云 金城坊中有一空宅,更無語。不良往金城坊空宅,並搜之。至一宅,封鎖正密,打鎖破開之,婢及高麗並在其中。拷問,乃是投化高麗共捉馬奴藏之,奉敕斬於東市。<조야첨재 권5>
당나라 중서사인 곽정일이 고구려 수도 평양을 함락시킬 때 한 고구려 여자 종을 얻었다. 이름이 옥소인데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 곽정일이 옥소로 하여금 집안의 재물고를 관리하게 맡겼다. 곽정일이 어느 날 밤에 죽을 찾으니 고구려인 계집종 옥소가 끓여야 한다고 대답했다. 옥소가 독을 타서 죽을 주니 곽정일이 이를 알고 급하게 말하길 "계집종이 내게 약을 먹였다"고 말하고는 토장과 감초를 찾아 먹고 치료를 했다. 고구려인 계집종 옥소를 찾을 수 없었는데 집안의 금은 기물 10여점도 아울러 없어졌다.
황제에게 보고하니 칙령을 내려 장안의 치안관리 불랑으로 하여금 매우 급히 수색하게했으나 3일이 지나도록 잡히지 않았다. 이때 불랑의 밑에 위창이란 인물이 책략이 있어 곽정일의 집안에서 어리고 단정한 용모를 가진 노비 3명을 잡아 왔다. 위사 4명을 묶어 묻기를 열흘 내에 누가 곽정일의 집을 기웃거린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위사가 말하길 항복한 고구려 사람이 촉마노에게 편지를 남겼다고 답했다.
편지를 살펴보니 "장안 금성방 가운데 빈집이 한 채 있다"고 적혀 있을뿐 다른 말은 없었다. 불랑이 금성의 빈집을 찾아 수색을 하다보니 한 집에 정밀하게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니 고구려 계집종 옥소와 항복한 고구려인이 그 안에 있었다. 고문을 하니 항복한 고구려인과 촉마노가 공모를 해서 숨긴 것이었다. 명을 내려 동시에서 목을 잘랐다.
출처는 http://lyuen.egloos.com/ 번동아제 님의 이글루스 블로그입니다. 이글루스 아이디가 없어서 작성자이신 번동아제님께 허락받지 못하고(가 아니라, 가입해서 덧글 남기기가 귀찮은 거겠지...-_-;) 긁어왔습니다. 문제가 될 경우 삭제합니다.
이런 걸 보고 있자면 당에게 종종 따라 붙는 '화이일가(華夷一家)의 세계제국'과 같은 수식어가 참 무색하게 느껴지는군요.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나 급진적 탈민족주의자들이 말하는 "아시아의 '민족(그게 nation이든 ethnic group이든)' 개념은 유럽에서 완전히 이식되어 모방한 것으로 근대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식의 설명에 다시금 회의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번동아제님의 본문 글에도 적혀 있지만, 고선지나 이회옥(이정기)의 자랑스러운(?) 군사 활동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이런 대다수 고구려 유민들의 비참한 삶 역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 동북공정처럼 통일적 다민족국가에 기반한 중국학계의 곡학아세적 (유사)역사학을 논파하는데 이런 '민족' 차별의 기록들이 매우 소중하게 다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첫댓글 대부분의 고구려 유민들은 저런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ㅠ
그러했겠지요. 사실 중국 중세의 호한 융합이라는 것도 좀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 영가의 상란 이래 호와 한이 융합하여 세계 제국을 일궈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인식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한족 중심의 질서에 호족이 순응하고 들어간 측면도 보이니까 말이지요. 호한 융합적 관점 자체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듯 합니다.
저도 광개토태왕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호한 문화의 대등한 융합이라기엔 너무나 중화라는 정체성이 강하게 유지되었고, 그렇기에 오늘날의 중국도 있는 것이죠. // [아틀라스 중국사]에 보면 전진과 동진의 비수전투에서 만약 전진이 이겼더라면 중국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되어 있는데, 전진이라는 나라의 성격이 후대의 북위나 수, 당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혹여 이에 대해 아신다면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이런 건 저보다 야스페르츠 님이 더 잘 답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부족하나마 간략히 적어보자면, 5호 16국 시기 호족과 한족이 공존할 수 있는 틀을 제대로 마련한 것은 탁발씨의 북위 왕조였습니다(그마저도 이런저런 곡절이 있기는 했지요). 이들은 다른 왕조들보다 정권 내 한족의 지분을 적극적으로 인정했고, 이를 통해서 정권의 토대를 안정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위 시기 이전까지 이러한 모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진도 비수 이후의 혼란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내부에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요. '전진이 이겼다면 한족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그 말이 실제로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호한의 융합이나 어떤 타협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통일이 이뤄진다면 혼란이 강남 일대로까지 확산되지 않았을까...하는 정도의 부연 설명이 아닐까 합니다. 덧붙여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이 패배했다면 한족 집단을 결속시키는 심리적인 그 무언가(중화주의?)는 크게 꺾이었겠지요.
그렇겠군요. 동진이 실제 힘을 화북 지역에 미칠 수는 없었어도, 그 상징성은 유목민들에게도 인정받았던듯 합니다. 비수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전쟁이었는지 다시금 실감하게 됩니다. ^^
출처가 되는 조야첨재란 책을 검색해보니....조선조(숙종까지) 야사 금석문 문집등을 모아 저자미상의 편년체사서라 나오는데.....이 출저가 맞는지요....아니면 동명의 다른책이 있는지요???
동명의 다른 책입니다. 당나라 시대 장작(658-730)이 지은 '야사'라는군요. '위서'는 아니므로 사료로 간주해도 될 법 합니다만...^^;
아 그렇군요.....어디서 찾아 볼수 있는지도 염치없이 부탁드립니다....좋은 자료제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번동아제님 블로그에서 이 글이 인상적이어서 사료 부분만 긁어왔고, 지나가다 님의 질문에 답할 의무감으로 검색을 좀 했을 뿐입니다^^; 해당 사료의 출전과 기타 사항에 대해서는 혹 이글루스 블로그가 있으시다면(있으신 듯 했습니다만) 번동아제님께 코멘트를 남기시는 편이 훨씬 빠르실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