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산이 함께하는 제주 애월읍 ‘물메마을’
애월읍 가운데쯤 자리한 중산간 마을 수산리. '수산(水山)'은 이 마을의 옛 이름 '물메'의 한자 차용 표기입니다. 마을을 감싸듯 지키고 있는 수산봉, 곧 '물메오름'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지요. 물메오름은 '정상에 물이 있는 오름'이라는 데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옛날에는 정상에 마르지 않는 샘물을 품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수산봉에서 바라본 물메마을 전경.
이 마을의 면적은 애월읍 관내 26개의 행정리 가운데 13번째로 그리 넓지 않습니다.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경작지이기에 주거지만 벗어나면 농촌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분위기가 펼쳐집니다. 주민의 약 80%가 농사를 짓고 있다는군요. 눈길 닿는 곳마다 그림 같고 엽서 같은 경치를 자랑하는 수산리에는 상동, 당동, 예원동, 하동 등 네 개의 자연마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을까? 괜스레 궁금해집니다. 제일 먼저 고려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얘기되고 있습니다. 1271년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오면서 수산마을과 가까운 귀일촌에 기대었고 인근에 항파두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부터 수산마을 지경에도 이미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속칭 주진가름에 '진터(秦趾)', '진밭(秦田)'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6백여 년 전에 진씨 성을 가진 이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진씨(秦氏)가 설촌했다 해서 '주진촌(住秦村)'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수산봉 포토존 그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요. 조선시대인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수산악'에 봉수가 설치돼 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는 적어도 1481년 이전 무렵부터 '물메오름'이 '수산악'이라는 명칭으로 한자 차용 표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제주의 봉수는 고려 1302년(충렬왕 28)에 이미 설치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수산봉수가 언제 설치됐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조선시대인 1439년(세종 21)부터 제주에 설치되어 있는 봉수들을 본격적으로 정비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설치됐음을 짐작게 합니다. 봉수가 설치되면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6백여 년 전에 수산봉과 가까운 지경에 봉수 운영과 관련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들어서 있었을 테지요.
제주밭담길 캐릭터 '머들이네 가족'이 방향을 안내해준다.
700여 년의 역사가 담겨있는 수산마을을 걷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밭담길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물메밭담길'인데요. 밭담은 '선(線)'입니다. 수많은 선들이 겹친 듯 이어진 듯 모여 이룬 구불구불한 곡선입니다. 그런데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밭담은 '점(點)'입니다. 크고 작은 수많은 돌들이 모여 이룬 점선입니다. 밭담은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참 신기합니다. 분명히 사람이 쌓아 이룬 인공구조물인데 자연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원래 처음부터 있었던 자연물처럼 보입니다. 멀리 떨어져서 볼수록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고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들이 점점이 쌓였는데 일정한 규칙마저 느껴집니다. 아마도 돌과 돌이 엇갈리며 만나 이룬 돌 틈 때문인 듯합니다. 그 구멍들이 잘 짜인 그물처럼 바람을 착착 걸러내고 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메밭담길
밭담들을 눈에 담노라니, 제주섬 전체의 밭담 길이는 얼마나 될까 궁금해집니다. 전수조사가 이루어져야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있겠지만, 몇 지역을 샘플링해서 전체 길이를 추정해 본 연구사례가 있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제주 밭담의 길이를 2만 2108㎞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리장성이 6400km. 지구의 둘레가 대략 4만㎞이니 2만 2000여㎞면 지구를 반 바퀴 돌고도 남는 길이입니다. 그래서 제주섬의 밭담을 두고 '흑룡만리(黑龍萬里)'라 부르기도 합니다. 검은색을 띠고 있는 현무암의 밭담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구불구불 흘러가는 모습이 마치 흑룡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기서 '만리'는 숫자 1만이 아니라 끝없는 듯 이어진 길이를 나타내는 상징어지요. 그래서일까요? 밭담 풍경은 멀리 바라볼수록 점점 더 거대하게 다가들며 금방이라도 한 마리 흑룡이 되어 승천할 듯 신비롭게 펼쳐집니다.
밭담길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수산봉이 보입니다. 높이 122m의 수산봉은 오름이 아름답고 어질며,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라 해서 영봉(靈峯)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오름 정상에는 예부터 봉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봉수는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봉화를 올려 알리던 옛 군사 통신 시설이었습니다. 수산봉수는 동쪽으로는 직선거리 8.7㎞에 있는 도두봉의 도원봉수와, 서쪽으로는 직선거리 4.5㎞에 있는 고내봉의 고내봉수와 연결했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 제441호 수산 곰솔.
수산봉 아래 수산저수지 너머로 근엄한 위엄을 뽐내는 곰솔나무 한그루가 눈에 띕니다. 천연기념물 제441호로 제정된 수산리 곰솔입니다. 높이 10m, 가슴 높이의 둘레 4m의 거목인 곰솔나무는 진주 강씨 제주 입도 3세 손이 살던 집 뒤뜰에 심은 나무라고 전해집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될 때까지 강씨 집안에서 관리해왔다고 합니다.
곰솔은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수입니다. 잎이 적송인 소나무의 잎보다 억세어 곰솔이라고 부르고,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이라고 하며, 줄기 껍질의 색깔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이라고도 합니다. 국내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곰솔은 이 수산 곰솔을 비롯해 여섯 개 밖에 없을 정도로 소중한 나무입니다. 물가에 닿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수산곰솔은 겨울철 수관(樹冠)의 상부에 눈이 덮이면 마치 백곰(白熊)이 저수지의 물을 마시는 모습 같다고 해서 곰솔(熊松)이라고 불러왔다는 이야기도 있어, 재치 있는 상상력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당동 팽나무 쉼팡.
수산저수지 주변은 환경 정화 사업을 하느라 분주한 모습입니다. 올 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인데요. 공사가 다 마무리되면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됩니다. 밭담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당동 마을 삼거리 팽나무 앞 정자에 도착했습니다. 커다란 팽나무 세 그루가 정자를 이룬 마을 쉼팡이 여행자를 반겨주는데요. '당동정자(當洞亭子) 녹음민회(綠陰民會)'라 해서 바로 이 팽나무 아래에서 동네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는 모습이 '물메 호반8경' 중 제7경으로 꼽힙니다. 여름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은 이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고 민주적으로 결의하곤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1945년 8월 15일에는 광복된 감격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던 곳이고, 1955년에는 저수지로 없어질 마을 걱정에 반기를 들었던 곳이기도 했고요.
물메마을 시비.
밭담길을 걷는 내내 돌담과 어우러진 시비(詩碑)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물메마을에 꼭 와봐야 할 이유 중 하나입니다. 수산마을이 2013년부터 진행해온 시를 주제로 한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시인협회와 손을 잡고 시비를 세웠습니다. 길을 걷다 마주하는 시비 앞에 잠시 서서 시를 읊어 보는 여유도 누려보길 바랍니다.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부디 걸어야만 만날 수 있는 제주의 특별한 매력을 물메밭담길과 물메마을에서 꼭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칼럼니스트 김재원은 작가이자 자유기고가다. 대학시절 세계 100여 국을 배낭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에 사는 '이주민'이 되었다. 지금은 제주의 아름다움을 제주인의 시선으로 알리기 위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에세이 집필과 제주여행에 대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