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8,4-7.11-1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4 임금들을 세웠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대신들을 뽑았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신상들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망하려고 한 짓일 뿐이다.
5 사마리아야, 네 송아지를 내던져 버려라.
내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른다.
그들이 언제면 죄를 벗을 수 있을까?
6 송아지 신상은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 결코 하느님이 아니다.
정녕 사마리아의 송아지는 산산조각이 나리라.
7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줄기에 이삭이 패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알곡이 생긴다 하여도 낯선 자들이 그것을 집어삼켜 버리리라.
11 에프라임이 제단들을 많이도 만들었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그 제단들은 죄짓는 제단일 뿐이다.
12 내가 그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많이 써 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낯선 것으로만 여겼다.
13 그들은 희생 제물을 좋아하여 그것을 바치고 그 고기를 먹지만
주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주님은 그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그들의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야 하리라.”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고 싶으면 어린이와 같은 관찰자로 살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두 상반된 반응이 나옵니다. 마귀를 쫓아낸 것을 본 군중들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며 놀라워하고,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들은 관찰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린이의 행동을 심판합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어른의 모습보다는 어린이의 겸손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관찰하며 결국엔 부모를 찾아내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관찰을 통해 찾아내고 믿은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의심해봐서 이 과정을 잘 압니다. 자연과 사람, 법칙과 존재의 놀라움을 관찰하면 창조자를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조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C.S. 루이스(1898-1963)는 30대 초반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법이 존재하면 그 법을 만든 곳이 있어야 하고 화폐가 있다면 그 돈을 찍어낸 곳이 한 곳만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도 화폐도 상대화되기에 가치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법칙이 존재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자신의 추론을 명확히 설명했습니다.
유신론의 대가인 C.S. 루이스와 대척점에 서서 무신론을 주장하며 1950년 토론 대결 이후 30권 이상의 책을 쓴 교수가 앤서니 플루(1923-2010)입니다. 그는 무신론 대표주자입니다. 1976년 발행한 그의 유명한 논문 ‘신학과 위증성’은 그동안 무신론의 교과서처럼 인용되었습니다. 그가 신을 믿지 않거나 신이 있지 않다고 믿는 근거는 이것입니다.
a. 우주가 영원하며, 항상 있어 왔고 항상 존재할 것이다.
b. 생명은 무작위적 화학 작용의 결과물이다.
c. 하느님의 존재는 자기 모순적이다; 악과 하느님은 공존할 수 없다.
그는 이 세상을 어떤 지적인 인격체가 설계하였다는 데 대해 과학이 그 복잡성을 설명해 줄 것이라 믿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주와 함께 시작하고 끝납니다. 매일 느낄 수 있는 상식과 경험에 의해 이 세상의 숨겨진 매커니즘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밝혀질 것입니다.”
약 50년의 세월 동안 무신론에 관한 30권의 책을 낸 플루 교수는 2004년 뉴욕 대학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온 우주를 창조한 신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지적인 존재의 작업이라고 여겨지는 거대한 복잡성 때문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플루 교수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동물계 전체에 걸쳐 나타난 시각은 물론 기본적인 번식의 필요까지 완전한 형태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화석 증거가 있으며, 이 생명의 발생은 DNA에 기록되어 있고 DNA에서 RNA로의 전사, 그리고 RNA에서 단백질로의 전환, 이어지는 단백질의 접힘은 플루 교수가 창조주를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DNA가 하는 일들은 믿을 수 없는 복잡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배열과 존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요. 극도로 다양한 물질들의 조합에는 지적인 존재의 개입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연히’라는 말이 적용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번개가 쳐서 무생물에서 아미노산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단백질의 형태를 띠며 자기를 복제하는 능력을 갖추고 단세포 동물이 되는 데까지 우연적으로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래가 우연히 모여서 시계가 되거나 반도체가 되거나 아니면 원숭이가 무작위로 타자기를 두들겨 햄릿이라는 책이 만들어질 가능성보다 비교도 안 되도록 어렵습니다. 진화론자들은 다 우연히, 우연히라고 하며 넘기지만, 앤서니 플루는 50년간 무신론의 책을 내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그는 이제 진화론자들에게 이 세 가지를 묻습니다.
a.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b. 목적론적 구조를 가진 생명이 어떻게 무생물에서 비롯되었을까?
c. 생명의 복잡성과 법칙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연히’라는 말을 빼고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열역학 법칙들에 위반되는 것이고 모든 에너지는 저절로 생기거나 증가할 수 없기에 그 에너지를 준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앤서니 플루는 ‘전화기의 비유’를 합니다. 무인도에서 어찌어찌 전화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누르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현자는 이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하는 기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조금만 고장 나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것은 기계가 만들어내는 소리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리고 무인도에서 계속 외롭게 사는 것을 택합니다. 하지만 이 기계를 가만히 살펴보다가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신들의 말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는 기계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전화기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해주는 기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이제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란 음성이 들리고 믿게 된 사람들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마음의 평화에 머물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이 현상을 자기 판단으로 확정하고 본래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그 뒤에 있는 창조자의 존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처럼 관찰하는 이는 결국 전화기와 같은 이 현상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창조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창조자가 우리를 사랑하여 그 소통의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안 믿어서 좋은 게 뭐가 있을까요? 자기가 하느님으로 살며 온갖 걱정과 두려움에서 사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어린이는 부모 말을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가출해서 혼자 사는 것보다는 부모의 존재 안에서 머무는 게 더 행복임을 알고 관찰자로 머뭅니다. 심판자가 아닌 관찰자로 살아갑시다. 반드시 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를 만나게 됩니다. 아이작 뉴턴(1643-1727)은 우주의 질서와 복잡성을 신성한 창조자의 증거로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증거가 없다면 엄지손가락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대학을 다니는 신학생을 대상으로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실험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고 있는 이 학생들은 남들을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마음을 일반 학생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다면 그 사람을 돕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물론 100%는 아니라 63%였지만, 일반 사람보다는 훨씬 높은 수치였습니다.
이번에는 똑같이 누군가가 길에 쓰러져 있는 상황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늦으면 감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도움을 줄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까요? 63%에서 10%로 도움을 주는 수치가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근본적으로 착한 성향을 보여도 상황에 따라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실험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착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착함을 드러내기 힘든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방송에서 난처한 상황에서 무관심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듯한 뉴스를 보게 됩니다. 무관심하다고 악한 사람일까요? 어쩌면 그 상황에서 외면할 수밖에 없는 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상황을 이겨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무관심으로 대처한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역시 잘못이 아닐까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냈고 이 사람은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중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일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을 향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반대의 뜻을 취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마귀를 쫓아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 하는 이가 말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그런 일이 없었지만, 사랑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말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반대하는 모습, 어쩌면 앞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무관심의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하는 모습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명언: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한다면 '전한'과 같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음이요.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다면 '후한'과 같이 나라가 기울게 될 것이다(제갈공명).
사진설명: 착한 사마리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