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의 「봄」감상 / 문태준
봄
이정훈
하루 식전엔 누가 대문 밖을 서성거리기에 문 빼꼼 열고 봤더니 그 눈치 없는 것, 봉두난발에 흙발로 샐쭉 깡통 내밀데요 언제 동네를 한바퀴 돌았는지 흰쌀에 노랑 조, 분홍 수수, 자주 팥 없는 것이 없는데 그냥 보내기 뭣해서 보리 싹 한줌 얹어주었지요 고것이 인사도 없이 뒤꿈치를 튀기며 가는데 멀어질수록 들판은 무거워지고 하늘은 둥둥 가벼워지고 먼 개울가에선 버들강아지 눈 틔우는 소리 들려왔어요 참 염치도 없지, 몽당숟갈 하나 들고 따라가고 싶더라니까요
이정훈 / 1967년 강원 평창 출생. 2013년〈한국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쏘가리, 호랑이』
.........................................................................................................................................................................................................
이 시에서는 구걸을 하러 온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의 추레한 행색보다는 그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얻어온 것들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는 뭘까. 흰쌀과 조와 수수와 팥 그리고 보리 싹 한 줌에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아마도 파종을 하는 봄이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노는 땅 없이 땅을 갈고, 종자를 파종하고, 또 여기저기서 새순이 푸른빛으로 움트는 때이기 때문일 것이다. 몽글몽글한 버들강아지에 봄볕이 곱고, 뒷산에 진달래가 피고, 들에 쑥이 돋는 봄이다.
봄이 왔지만 새싹과 꽃을 볼 여유가 도통 없는 요즘이다. 하지만 봄은 우리 앞에 쌓인, 불안과 고통의 언덕을 넘어 우리의 마음으로도 머잖아 들어올 것이다. 우리의 마음 바구니에도 파릇파릇하고 향긋한 봄이 얼른 담겼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
첫댓글 그냥보내기 뭣해서 보리 싹 한 줌 주었는데 염치도 좋게 인사도없이 가는 것이 미워서 그랬을까요? 싱숭생숭 봄은 돌아왔는데 일철은 돌아오고, 에라~ 나도
몽당숫갈 하나 들고 따라가고 싶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