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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성(名護屋城) 폐허에서 3 – 무령왕과 차차(茶茶)
일행 중 삼국시대를 전공하는 공석구 교수(한밭대)가 항구 너무 먼 바다 쪽을 가리킵니다. 시야가 흐려 보이지는 않는데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이 태어난 가당도(加唐島, 가카라시마)라군요. ‘오늘을 비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이은상, 오륙도)입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을 설명하는 표지판에는 ‘가당도’라고 분명히 표기되어 있네요.
무령왕이라.... 한국사회를 두 번씩이나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입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몇 가지 기억을 떠오르네요. 우선 <한국일보>에서 무령왕릉 발굴을 특종하던 7월 8일 편집국 특히 문화부 주변이 떠들썩한 장면입니다. 외신부가 바로 옆에 있어 일을 못할 지경이었지요. 바깥 날씨는 찌푸렸는데 담당기자는 후일 성신여대로 옮겨 문화재 전문가로 활동한 허영환(許英桓) 교수였습니다. 상기되어 창백해진 그의 얼굴과 흥분하여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 않던 이원홍 국장의 모습이 선합니다.
왕릉 발굴을 지휘한 김원룡 교수에 관한 기억도 생생합니다. 저는 대학 3학년 때 서울대 문리대 동부 연구실 2층 고석구 교수님 연구실에 책상을 하나 놓고 조교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고인류학과 김원룡 교수님은 바로 옆방에 계셨지요. 두 분이 각별히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김원룡 교수님이 우리 방에 들려 점심 먹자고 재촉했습니다. 고석구 선생님이 먼저 저쪽 방으로 간 적은 거의 없었구요. 항상 성미 급한 분이 1, 2분이라도 먼저 나서기 마련이죠. 그리곤 두 분은 ‘곰탕 먹자’면서 아마 대한극장 뒤 유명한 곰탕집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당시 김원룡 교수님은 좋게 말해서 쾌활하시고, 실례된 말씀입니다만 조금 나쁘게 말하면, 가벼워 보였습니다. 후일 자신이 후회한다고 술회한 바와 같이, 국립중앙 박물관장으로 무령왕릉 발굴을 서둘러 많은 후유증을 남긴 것도 이런 성격 탓이 아닐까요?
무령왕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관심을 끌게 된 두 번째 사건은 일본 천황이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술회한 때입니다. 삼국시대 신라는 왜구의 약탈과 침략을 받아 왔지만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요. 백제가 패망한지 3년만인 663년 일본이 백제부흥을 위배 보낸 지원군이 금강하구인 백강구(白江口)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고 백제 부흥군의 공주 주류성이 항복합니다. 일본 <서기>에는 퇴각하던 일본군이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에 어찌 또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한 장면이 나옵니다. 다시는 백제 땅을 찾아 조상 제사를 지내지 못할 것이라는 이 구절을 저는 일본<서기>에서 가장 비장한 장면으로 꼽습니다. 무령왕과 일본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하기 어려울 겁니다.
무령왕(462-523, 재위, 501-523)은 백제의 제25대 국왕으로 고대사에서 한국과 일본을 엮어주는 약간 신비에 싸인 인물입니다. 그의 탄생에 대해서는 일본 <서기>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이 임신한 후궁, 실제로는 동생인 곤지의 애첩을 곤지에게 맡겨 일본으로 데려가게 했다고 합니다. 461년 규슈 쓰쿠시(筑紫)의 각라도(各羅島)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산기를 느껴 사내아이를 출산하였는데 그가 무령왕이라는 것이죠. 그가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곤지는 그의 이름을 사마라고 지었다고 하군요. 무령왕릉 지석에도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으로 나와 있습니다. 개로왕, 곤지 또 누구의 몇 번째 아들 등등은 골치 아픈 이야기이니 이 정도로 그치도록 합시다.
무령왕은 마흔에 왕이 되었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편입니다. <삼국사기>에는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림같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8척은 오늘날 180 센티미터 정도입니다. 여포, 관우, 장비가 9척 혹은 8척이라 한 것은 과장이 아니라 당시의 치수로 말한 겁니다. 성격도 인자하고 관대해서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연히 그를 따랐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그의 치세 23년을 읽어보면 상당히 유능한 군주였던 것 같습니다. 즉위 초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앞장서서 수습합니다. 전쟁은 단순히 방어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 주도적으로 공세를 취하여 대부분 승리를 이끕니다.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 개로왕을 참살한 이후 기세가 꺾인 백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백제에게는 상당히 의미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나고야 성 아래 항구와 저 멀리 가당도를 보면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는데 한명기 교수가 길을 재촉하군요. 그의 안내로 성지에서 내려와 차도를 따라 걸어가자 산리환 태합거관적(山里丸 太閤居館跡)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납니다. 길을 꺾어 올라가니 나고야 성에서 히데요시가 묵은 숙소가 보입니다. 정확히 말해 그의 측실 요도 도노(淀殿)가 거주한 광택선사(廣澤禪寺)라는 절입니다. 요도 도노의 아명은 차차(茶茶)로 알려져 있죠.
몇 년 전 cable J-TV에서 <고우~공주들의 전국(戦国)>이란 드라마를 방영한 바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2011년 NHK가 고우(江)-히메타치노 센고쿠(姫たちの戦国)로 제작한 대하 역사 드라마입니다. ‘고우’라는 영주의 딸을 중심에 두고 ‘아자이 삼 자매’의 이야기인데, 그 배경으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그리고 이에야스의 아들이자 고우의 남편인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집권기를 그린 것입니다. 우에노 주리(上野樹里)라는 배우가 연기한 ‘고우’는 쇼군 히데타다의 정실이자 3대 쇼군의 어머니이며 딸이 천황과 혼인하여 천황의 장모가 되는 희대의 인물입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2011년 일본에서 최악의 드라마 상을 받았고 우에노 주리도 최악의 주연여우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쁘던데.... 차차 역의 미야자와 리에(宮沢りえ)는 극 중에서의 비중에 비해 별로였던 것 같았고....
히데요시와 고우의 어머니 간의 관계가 이 드라마를 이끄는 주요 모티브가 아닌가 합니다. 드라마상의 설정인가 했는데 역사적 사실이군요. 고우의 어머니 오이치노 가타(お市の方)는 오다 노부나가의 동복 여동생으로 오미국(近江国)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부인인데 그가 죽은 후 오다 사천왕 중의 한 명인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와 재혼합니다. 실제로도 예뻤고 무인 가문의 기질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스즈키 호나미(鈴木保奈美)도 기품 있는 연기를 보였습니다.
오이치는 첫 번째 남편 아자이와 사이에서 3자매를 낳았는데 이들이 극의 주인공 ‘아자이 삼 자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남편 시바타가 히데요시에게 패하자 남편과 히데요시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라 죽음을 선택합니다. 히데요시가 오이치를 열렬히 사모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이 여인을 살리려고 하지만 실패하죠. 아마도 미천한 가문 출신인 히데요시는 오다의 기품 있는 누이를 처음에는 멀리서 애타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오다가 죽은 후로는 대놓고 대시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후 오이치를 닮았다는 장녀 차차를 측실로 맞아들여 임진왜란이 시작된 다음해인 1593년 아들 히데요리(豊臣秀頼)를 얻었습니다.
히데요시는 환호작약하죠. 그런데 한 가지가 걸렸지요. 1591년 8월에 히데요시의 적장자인 쓰루마쓰(鶴松)가 죽고 뒤 곧 바로 누이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관백(関白)이란 지위까지 줍니다. 그가 히데쓰구(豊臣秀次)입니다. 원래 관백은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했지만 평민출신이라 ‘쇼군(將軍)’이 되지 못하여 받은 것은 최고의 지위입니다.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지 못한 이유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네요.) 히데요시는 양자에게 ‘관백’의 지위를 물러주고 대신 태합(太閤)이란 새 타이틀을 갖습니다. 관백이나 타합 모두 조선의 ‘왕’과 같은 경칭인 ‘전하’로 불렸으니 일반 각료급 중 최고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동양에서는 ‘폐하’ 다음이 ‘전하’이고 굳이 서양과 비교한다면 majesty 다음인 highness에 해당할 겁니다.
히데요시는 과감히 결단을 내립니다. 양자 히데쓰구를 모반죄로 몰아 자살하게 하고 그의 처와 첩은 물론 아들, 딸 그리고 가신들까지 모조리 죽입니다. 친자식인 히데요리의 후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양자이자 누이의 아들 가문을 멸족시킨 겁니다. 여기에는 이제 두 살배기 어린애의 장래를 우려한 차차의 음모설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이게 1595년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전세가 역전되어 이제 일본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어지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운명은 돌고 도는 것이죠. 히데요시가 죽은 지 2년 뒤인 1600년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승리한 도쿠가와가 실권을 잡으면서 히데요리의 영지를 축소하고 드디어 1614년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에 고립된 채 다음 해 어머니 차차와 함께 자살합니다. 그의 나이 22세(1593-1615). 2001년 오사카 성을 구경하던 중 차차와 히데요리가 자살한 곳을 발견하고 한 때 숙연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히데요시의 측실인 도노(淀殿) 차차가 묵었다는 광택선사(廣澤禪寺)는 아주 작군요. 흔히 보는 한국 절의 대웅전 보다 작고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암자 같은 기분이 듭니다. 히데요시가 차차와 거주한 절이라면 대사찰이었을 것인데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지금 보는 이 조그만 건물만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바깥에 승용차가 보이고 마당에 있는 큰 나무들이 잘 다듬어 진 것을 보니 누가 거주하는 것 같은데 아무른 기척이 없습니다. 들어가 보려 했으나 문이 잠겨있어 밖에서 사진만 찍고 나왔습니다. 앞에는 연혁을 적은 현판이 있는데 읽지 못하겠고 글의 마지막 부분에 송운(頌云)이라는 제목으로 한시가 한 수 있네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제2 외국어인 한자로 지은 시는 중국인들이 지은 시 보다는 읽고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간단히 뜻을 새겨보면,
誰知豊公寵姬名(수지풍공총희명) 누가 풍신수길 공이 사랑한 여인의 이름을 아는가
削髮染衣守節誠(삭발영의수절성) 삭발하고 물들인 승려복으로 수절하는 정성을 다했네
萬綠叢中紅一點(만록총중홍일점) 푸른 숲 가운데 붉은 석류꽃 같이
生涯不絶梵音聲(생애부절범음성) 살아생전 범종 소리 끊이질 않는구나.
만산총중홍일점은 당송8대가에 속하는 왕안석(王安石)의 석류시(石瑠詩)에서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초여름에 푸른 숲 한가운데 붉은 석류꽃이 눈에 띈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남자들 중 이쁜 여성 한 명을 말하겠지만.
밖으로 나오니 동백꽃이 지고 있네요. 연분홍색입니다. 차차와 아들 히데요리가 자결하면서 흘린 피 인가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새빨간 동백이 아니군요. 남해안 지역에서 피는 한국의 동백은 임란 때 흘린 조선인들의 피 일겁니다. 남해안 여러 섬, 특히 여수 오동도를 덮은 동백꽃이 유명하지만 저에게는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통영 충렬사의 동백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묘하게 대비가 되군요.
나는 진주 촉석루 입구에 있는 변영로의 시 ‘논개(論介)’에서 양귀비꽃을 동백꽃으로 바꾸어 읽습니다. 변영로는 양귀비를 당 현종의 양귀비와 비유하면서 ‘아마도’ 논개가 이쁜 여인이라는 걸 연상시키려 했을지 모릅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뒤마 피스(Alexandre Dumas fils)의 소설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élias)’를 기초로 한 것입니다. 일본식 번역 ‘춘희(椿姬)’의 ‘춘(椿)’은 참죽나무라는데 아마도 동백과 가까운 종이 아닐까요? 그러니 ‘논개’에서 양귀비꽃을 동백으로 바꾸어 ‘동백꽃보다도 더 붉은...’의 동백꽃은 춘희의 아름답다, 사랑에 정열적이며 헌신적이다 등과 함께 우리 식의 붉은 마음인 충렬, 지조 등의 의미가 담겨져 있어 더 좋지 않을까요? 읊어보면 더 맛깔스럽습니다. 변영로가 동백꽃을 몰랐을까요? 이 시에 넣어 본 동백은 일본의 분홍색이 아니라 조선의 새빨간 동백입니다.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情)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 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동백꽃) 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꽃 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동백꽃) 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 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동백꽃) 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2016.1.10.)
사진 1. 차차가 머물었다는 절
사진 2. 차차의 집 밖 동백은 지고...
첫댓글 떨이진 동백 꽃잎으로 땅이 핏빛으로 물들었네요.............
감사합니다. 한번씩 글을 올려 안부를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