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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甄萱, 867년~936년 9월 27일(음력 9월 9일) 재위:892년/900년~935년 음력 3월)은 후백제를 건국한 후백제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국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新羅)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제(百濟)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였고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를 도읍으로 하여
후백제의 군주가 되었으며
935년 음력 3월에 첫째 아들이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神劍)이
일으킨 정변으로 보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935년 음력 10월 17일에 비로소 후백제의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나
이듬해 936년 음력 9월 8일에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일으킨 거병으로
후백제는 끝내 멸망하였고
등창을 앓던 그는
그 다음날인 936년 음력 9월 9일 죽음.
목차
•1 「甄」의 읽는 법에 대하여
•2 생애 •2.1 출생 및 가계 •2.1.1 출생설화
•2.2 신라군 생활
•2.3 거병과 후백제 개창
•2.4 후고구려와의 전쟁 •2.4.1 금성 전투
•2.4.2 신라 방면에 대한 공략
•2.4.3 고려와의 전쟁 •2.4.3.1 공산 전투
•2.4.3.2 고창 전투에서 운주성 전투까지
•2.4.4 후사벌과의 전투
•2.5 생애 후반 •2.5.1 신검의 정변
•2.5.2 고려 망명
•2.6 죽음
•3 가족 관계
•4 평가
•5 대중문화
•6 견훤이 등장한 작품
•7 관련 문화재
•8 각주
•9 외부 링크
「甄」의 읽는 법에 대하여[편집]
조선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견훤의 거병을 기록하면서
「남해(南海)의 수졸(戍卒)인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 견의 한문 발음은 질그릇 견, 질그릇장인 진 두가지이고, 병음은 전(Zhen)이라는 ]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사람으로,
867년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농사로 먹고 살다가
광계(光啓) 연간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을 일컬었다고 하며,
견훤 자신의 성도 원래 이씨(李氏)였으나 뒤에 견씨
『이제가기
“진흥대왕(眞興大王)의 왕비인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구륜공(仇輪公)이고,
그 아들은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이고,
선품의 아들은 각간왕교파리(王咬巴里)가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으니,
이 사람이 아자개,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상보(尙父) 훤(萱)이고, 둘째 아들은 장군 능애(能哀),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龍蓋), 넷째 아들은 보개(寶蓋),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
이같이 《삼국유사》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아자개가 거병했다는 광계 연간은 서기로 885년에서 887년에 해당하며,
889년에 '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나는 등 신라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속출하던 시기와 겹치며,
아자개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난 지배계층의 성씨로 호족의
일원(6촌성, 경주 이씨[3] 견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삼국사기경상북도제왕운기[2] 출생설화[편집]
《삼국유사》의 <후백제지렁이900년 후백제신라 진성여왕
이러한 류의 설화는 야래자(夜來者)형 설화로 분류되며,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까지 흔적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의 함경북도 회령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를 비롯해, 일본 《고사기》의 오호타나네코(意富多多泥古), 《일본서기》의 오오모노누시 신(大物主神) 신화, 서구의 에로스 프시케삼국유사》의 설화[2]
후백제 견훤에 관련 전설이나 설화에 대해서는 견훤구인생설화
신라군 생활[편집]
견훤은 장성하여 군을 따라 왕경(王京)
견훤이 임명된 '비장'이라는 지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장군의 보좌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단순히 보좌관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장군 예하의 부장(副將)이나
장군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견훤이 복무한 서남해에 대해서도, 견훤이 처음 거병했을 때 무진주 동남쪽의 군현이 일제히 그에게 항복하여 따랐다는 기록이나,
견훤 자신의 측근 세력이자 혼인관계까지 맺은 인척이었던
무진주(武珍州) 성주 지훤(池萱)과 순천 출신 박영규(朴英規), 그리고 인가별감(引駕別監) 김총(金摠) 등이
모두 지금의 전라도 광주와 순천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대체로 순천과 여수[2]
거병과 후백제 개창[편집]
견훤의 거병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892년(진성여왕 6년)에 있었는데, 《삼국유사》에는 900년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신라삼국사기
무진주를 점령한 견훤은 섣불리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대신 스스로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를 칭하였다.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
후고구려와의 전쟁[편집]
금성 전투[편집]
견훤은 지금의 전라남북도 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돌려 대야성899년 7월에 궁예를 치기 위해 국원경 등 10여 성의 성주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거꾸로 비뇌성 아래에서 패하고,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
903년에는 후고구려의 해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906년907년
나주 지역을 후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고려에 노출되어서
후고구려와 신라 방면으로 세력을 마음대로 확장할 수 없다는 것 이외에
자칫하면 후고구려에게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될 수 있고,
또 바다를 통해 중국과 외교 교섭과 무역을 주고 받고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는
후백제로서는 중국과의 외교 교섭과 무역 거래,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과의 중계 무역까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사태로서
후백제909년 영광군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견훤이 오월에 보내는 선박이
왕건에게 나포되어 후백제왕건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수군은 진도를 지나 고이도909년부터 910년까지 견훤은 나주를 놓고 마진(摩震)과 육지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910년에는 견훤 자신이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열흘 동안 나주왕건의 선단은 911년에 나주를 거쳐 무진주912년 덕진포(德津浦)[4]에서 왕건918년 6월에 태봉(泰封)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閔合)을 축하사절을 보내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이흔암이 지키고 있던 웅주(熊州)는 이흔암이 철원(鐵圓)으로 상경한 사이 운주(運州) 등 10여 개 주현과 함께 후백제아자개(阿慈蓋)가 왕건[5]
신라 방면에 대한 공략[편집]
920년 9월에 견훤은 다시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 화살을 바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서,
10월에 대야성에 이어 구사성(仇史城)까지 함락시켰고, 다시 곧 진례성(청도군)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가 고려
921년 여름에 도선의 제자인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달했고, 이때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
924년 7월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2]
고려와의 전쟁[편집]
926년 음력 4월 고려왕신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6]. 이는 궁예나 왕건
공산 전투[편집]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공산 동수 전투
927년 정월에 왕건은 후백제의 세력권인 용주(龍州)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고, 견훤은 후백제에서 죽은 왕신의 시신을 고려고려의 수군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康州)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여 전이산, 노포평, 서산, 돌산을 쳐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사흘 뒤 왕건이 웅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지만, 7월에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金樂)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대야성이 함락됨으로써 고려는 강주로 가는 길을 열었고, 8월에 왕건고려고려 귀부는 고려
이 수운교통로를 끊기 위해 9월에 견훤은 근품성을 쳐서 파괴하고 고울부(영천)을 함락시켰다. 당시 친고려 정책을 펼치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왕건의 군이 오기도 전에 단숨에 서라벌삼국사기》에는 이때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김부(金傅)를 새 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견훤 자신은 왕건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이때의 일을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태조)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고 메추라기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사(宗社)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었기에, 내가 먼저 조적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의 도끼를 휘둘러서, 백관들에게는 밝은 해에 맹세코 6부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득하리라 했는데, 뜻밖에도 간신은 도망가고 임금(경애왕)께서는 돌아가셨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경명왕왕건왕건
이 전투에서 신숭겸ㆍ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7] 이 전투를 공산 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구미시서라벌
《삼국사기》는 11월 7일에 오월에서 반(班)씨 성을 가진 상서가 도착해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화친할 것을 권하는 오월왕의 조서를 전했는데, 이 조서를 베껴 왕건에게 보내면서 견훤은 따로 왕건최승우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고려군을 상대로 거둔 전승들을 열거하면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한편으로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고까지 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내는 견훤에게 928년 정월 왕건은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내 마찬가지로 고려가 후백제
928년 1월에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고 7월에는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후백제김훤, 애식, 한장 등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청주를 공격했으나 탕정군에서 지원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유금필
왕건은 8월에 충주(忠州)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왕건은 명지성 원보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쫓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왕건은 왕충 등에게 조물성
10월에는 후백제군이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고(《삼국사기》) 11월에는 견훤 자신이 정병으로 오어곡성(《고려사》, 《삼국사기》에는 부곡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여명을 죽였으며, 이 무렵에 고려의 장군 양지고려사》는 이때 왕건[2]
고창 전투에서 운주성 전투까지[편집]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한 견훤은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나주왕건후백제군은 10월에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고려사
930년 1월에 왕건김악유금필이 고창 전투 직전에 공훤과 홍유와는 달리 후백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왕건에게 강력하게 요청해 승락을 얻은 후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저수봉으로 진격하여 저수봉을 빼앗은 이후로 계속 분투하여 고려[8]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
932년 6월에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였는데, 공직은 왕건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고 《삼국사기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전함 100척을 파괴하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였으며,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해 고려의 당시 수군 총사령관이었던 대광 왕만세까지 패퇴시키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국 당시 고려 조정 내부의 참소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933년 5월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
934년 9월, 왕건왕건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고려군이 자신의 영토를 빼앗을려고 진군해왔는데도 화의를 청해, 평소의 패기 있고 자신만만해하던 견훤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근본적으로 930년 고창 전투때부터 지금까지 고려군에게 전체적으로 패배를 거듭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후백제군과 견훤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고려군에게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고, 견훤의 이런 약해진 모습을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에게 견훤군을 공격할 것을 요청해 왕건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유금필은 강력한 기병 수천명을 이끌고 돌격해 후백제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사이에 후백제군을 쳐서 대패시키고 후백제측의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고려[2]
후사벌과의 전투[편집]
929년에는 박언창
생애 후반[편집]
신검의 정변[편집]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 · 용검삼국사기》는 이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935년
《삼국유사》에는 신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견훤은 금산사[9]
고려 망명[편집]
4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해 6월에 고려로 망명하였다(이 해 4월에 유금필이 나주를 다시 점령한 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 같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10]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1월에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귀순한데 이어, 936년태자 무(武)와 박술희삼국사기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투항한 후백제 장군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후백제군의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의 목을 베었으며 후백제군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후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너머 마성에 주둔하였다.
신검은 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본심이 아닌 능환과 양검,용검 등의 협박(?)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하지만, 2000년~2002년까지 KBS 1TV에서 최고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태조 왕건.'의 마지막회의 나래이션에서도 나왔듯이 학계에서는 신검이 비록 벼슬을 제수받았다고는 하지만 동생들인 양검과 용검이 항복한 이후, 왕건에 의해 진주로 귀양갔다가 얼마뒤에 모두 처형된 점, 신검 자신도 왕건에게 투항해서 벼슬을 받은 이후의 행적이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같은 고려시대를 다룬 권위있는 역사서들에서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고려하면 신검 역시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투항한지 얼마후 동생들과 같이 처형되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죽음[편집]
후백제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9일개태사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은진현조에는 현의 남쪽 12리 되는 풍계촌에 왕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충청남도 논산시
가족 관계[편집]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에게는 장남 견훤(甄萱) 외에도
능애(能哀), 용개(龍盖), 보개(寶盖), 소개(小盖)의 아들과 대주도금백제(百濟)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 고려[11]
《삼국유사》에는 10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삼국사기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금강(金剛)[12], 그리고 고려(高麗)로 함께 망명한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쇠복(哀福)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신검, 양검, 용검과 금강[13]
《삼국유사[14].
•아버지 : 아자개(阿慈介)
•어머니 : 상원부인
•국왕 : 견훤(甄萱, 867~936) 재위:892?/900?~935)
•왕비 : 왕비 박씨(王后 朴氏) •장남 : 견신검(神劍,885~936 재위:935~936)
•차남 : 견양검(良劍, ? ~936)
•3남 : 견용검(龍劍, ? ~936)
•장녀 : 국대부인 견씨 (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
•차녀 : 견애복(衰福),정령공주(貞逞公主)
•사위 : 지훤(池萱)
•후궁 : 고비(古比女) •4남 : 견금강(金剛, ? ~935)
•막내 : 견능예(能乂)
한편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서는 애첩 고비고비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내아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의 견훤을 위로하기 위해 신검측이 견훤과 함께 있도록 허용한, 견훤이 귀여워하던 인물들이 금산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비
평가[편집]
현전하는 견훤 관련 기록 대부분은 그와 적대했던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다. 삼국사기
대중문화[편집]
•이환경이 극본을 썼던 KBS1 태조 왕건에서 서인석이 연기한 견훤은 초반에는 참모 최승우
견훤이 등장한 작품[편집]
•《태조 왕건》(KBS, 2000년~2002년, 배우:서인석)
관련 문화재[편집]
•전 견훤묘
•상주 견훤사당
각주[편집]
1.이동 ↑ 동사강목 제5상, 임자년, 진성 여주 6년, 당 소종 경복(景福) 원년(892년)
2.↑ 이동: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後百濟 甄萱), 한국인문고전연구소(2012년)
3.이동 ↑ 견훤이 태어났다고 전하는 가은읍 아차마을은 아자개의 이름을 따서 아개동(阿介洞)으로도 불리는데, 한편 견훤의 집안은 실제로 문경 농암면 서쪽 끝에 있는 궁기리(宮基里)의 '궁터'라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아차리는 견훤의 어머니가 살던 곳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4.이동 ↑ 《동사강목》에는 영암군 북쪽 5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병도에 따르면, 웅주 비풍군 적오현 또는 덕진현이라 하였다.(《삼국사기》잡지제5, 지리3 신라) 912년의 전투는 나주 지역을 두고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충남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라 보긴 힘들고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영암군 덕진면 일대로 추정되며, 이 지역은 대대로 덕진진이 위치하고 있었다.
5.이동 ↑ 이때 항복한 아자개가 견훤의 친아버지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6.이동 ↑ 《고려사》제1권 세가 제1 태조세가 태조 9년.
7.이동 ↑ 팔공산 인근의 지명 및 대구지하철 1호선역의 역명을 참조하라.
8.이동 ↑ 이는 삼국사기의 설이다. 고려사에서는 영주 순흥으로 이야기하며, 또한 929년 음력 7월에 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음력 9월에 왕건이 영주로 오기 위해서는 바로 옆 고을인 순흥을 견훤이 점령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의 지명 및 사건 배열 순서를 따랐다.
9.이동 ↑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왕위 계승 문제 뿐만 아니라, 이후 견훤의 행보를 볼 때 고려와 강화를 하거나 항복을 하자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근왕파와 계속 전쟁을 하자는 강경파 사이의 대립이 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이는 견훤의 발언에도 근거를 두고 있는데,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군사가 북쪽의 고려보다 배나 많은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이는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건지지 않겠는가?"라고 아들들에게 발언하였으나, 신검, 양검, 용검은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미 935년 음력 6월에 백제를 떠났던 견훤이 시기상 할 수 없는 발언이고, 신검의 정변 이전에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나, 934년 이후 견훤이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0.이동 ↑ 경순왕에게는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식읍으로 양주를 택한 것은 초기 백제가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인것 같다.
11.이동 ↑ 《한국 고대 인명사전》, 견훤(甄萱), 도서출판 역락(2007년)
12.이동 ↑ 924년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할 때 군을 이끌었던 수미강(須彌強)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13.이동 ↑ 《한국고중세사사전》, 견훤(甄萱), 한국사사전편찬회(2007년)
14.이동 ↑ 이병도의 《삼국사기》주석에 이러한 주장이 등장한다.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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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신라 51대 진성여왕) 제1대 후백제 국왕
892년 ~ 935년 3월 후 대
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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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왕
후백제 (892년 ~ 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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