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 엮음, <박인환 산문 전집>, 푸른사상, 2023년 9월 10일.
사랑을 전하는 연서들
1.
박인환이 쓴 산문 중에서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글은 총 15편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에 들어서기 전인 1940년 「고(故) 변(邊) 군(君)」이라는 수필을 썼고, 그가 타계하기 직전인 1956년 2월 「환경에서 유혹― 회상 우리의 약혼 시절」)을 썼으므로 시 못지않게 평생 동안 썼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사랑은 죽음의 날개와 함께」(1963)가 유고작으로 발표되었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과 『선시집』의 서문을 발췌해서 「불안과 희망 사이」(1967)로 발표되기도 했다. 박인환이 발표한 수필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고 변 군」(『경기공립중학교 학우회지』, 1940. 6. 20)
2) 「여성미의 본질- 코」(『부인』 제4권 3호, 1949. 4. 30)
3) 「실연기(失戀記)」(『청춘』 창간호, 1951. 8. 1)
4) 「제야유감(除夜有感)」(『신태양』 제16호, 1953. 12. 1)
5) 「현대 여성에 관한 각서」(『여성계』, 1954. 3. 1)
6) 「원시림에 새소리, 금강(金剛)은 국토의 자랑」(『신태양』 제3권 4호, 1954. 4. 1)
7) 「천필(泉筆)」(『민주경찰』제41호, 1954. 7. 15)
8) 「즐겁지 않은 계절」(『서울신문』, 1955. 5. 29)
9) 「낙엽 일기」(『중앙일보』, 1955. 7. 12)
10) 「크리스마스와 여자」(『신태양』 제4권 12호, 1955. 12. 1)
11) 「미담이 있는 사회」(『가정』 창간호, 1954. 12. 24)
12) 「꿈같이 지낸 신생활(新生活)」(『여성계』 제4권 10호, 1955. 10. 1)
13) 「환경에서 유혹― 회상 우리의 약혼 시절」(『여원』 제2권 2호, 1956. 2. 1)
14) 「사랑은 죽음의 날개와 함께」(최영 편, 『사랑의 편지』, 태문당, 1963. 11. 15)
15) 「불안과 희망 사이」(『52인 시집』, 신구문화사, 1967. 1. 30)
위의 글 목록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박인환은 사랑에 관한 수필을 많이 썼다. 「여성미의 본질- 코」에서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얼굴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코가 아름다웠다고 회상했고, 「천필(泉筆)」에서는 만년필을 가지고 싶어하는 남편을 위해 마련해준 아내에게 고마워했다. 「꿈같이 지낸 신생활(新生活)」은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환경에서 유혹」에서는 아내와의 약혼 시절을 그렸다. 「현대 여성에 관한 각서」에서는 사랑이 인간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실연기(失戀記)」와 「사랑은 죽음의 날개와 함께」에서는 지나간 사랑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다.
박인환의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크리스마스와 여자」는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할 때 만난 한 소녀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전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골목길에서 소녀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어 다가가 물어보니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고 했다. 박인환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돈을 모조리 꺼내 조위금으로 내었다. 박인환은 15년 전 그 소녀의 모습을 크리스마스 날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미담이 있는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미담이 없는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미담을 전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한 것을 밖에서 듣게 되면 집에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그 모습이다.
이밖에 「고(故) 변(邊) 군(君)」은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해 1학년 1반에 편성되어 수학할 때 쓴 글인데, 가장 가까이 지냈던 변윤식이라는 친구가 익사한 일에 슬퍼하고 있다. 「원시림에 새소리, 금강(金剛)은 국토의 자랑」은 박인환이 태어나서 자란 인제의 푸른 산과 맑은 물과 순박한 고향 사람들을 자랑한 글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간성으로 전근 가시는 담임 선생님을 배웅한 일, 애국가를 가르쳐준 동네의 목사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 등을 소개하고 있다.
2.
박인환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한 불안정한 연대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선시집』 후기)라고 토로했듯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참전 군인과 민간인이 100만 명 이상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고, 폭격으로 말미암아 주택과 건물들이 파괴된 참상을 바라보면서 깊은 슬픔과 상실감을 가졌다.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또 숨어 지내거나 피란하면서 겪은 충격은 5편의 수기에서 여실하게 나타난다.
1) 「서울 재탈환」, 『사정보(司正報)』 제14호, 1951. 4. 9.
2) 「서울역에서 남대문까지」, 『신태양』 제1권 4호, 1952. 11. 1.
3) 「암흑과 더불어 3개월」, 『여성계』 제3권 6호, 1954. 6. 1.
4) 「밤이나 낮이나」, 『사정보』 제26호, 1951. 9. 10.
5) 「밴 플리트 장군과 시」, 『세월이 가면』, 근역서재, 1982.
「서울 재탈환」에서는 국군 6185부대가 서울을 재탈환한 장면과 아울러 폐허가 된 서울과 그 속에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박인환은 종군기자로서 서부전선에 해당하는 안양과 과천 부근에서 죽어간 민간인들과 군인들을 목도했다. 「서울역에서 남대문까지」에서는 한국전쟁에 동원된 비행기의 폭격으로 서울역에서 남문까지의 건물들이 처참하게 파괴된 상황을 그렸다. 「밤이나 낮이나」에서는 중부와 동부 전선에 해당하는 고향 마을을 찾았으나 전쟁의 폭격으로 말미암아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그렸다.
「암흑과 더불어 3개월」에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3개월 동안 겪은 체험들을 담았다. 서울 도처에서 일어난 체포, 납치, 살육, 인권 유린, 재산 몰수, 전향한 예술가들, 그리고 공포심 등이 그 상황이었다. 박인환은 한국전쟁 초기에 피란 가지 못하고 소설가 김광주와 이봉구, 시인 김경린과 김광균 등과 만나면서 숨어 지냈다. 또한 친구 세 사람과 서울을 탈출해 부산으로 가다가 보안대원에게 잡혀 이천 보위부에서 취조받고 겨우 풀려난 뒤 서울로 돌아와 9․28수복을 맞았다. 아울러 그러한 상황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을 “세상이 평화롭게 되었다”라는 의미인 세화(世華)라고 지은 사실도 소개했다. 박인환은 수많은 사람이 죽고 도시가 불타고 마음이 황폐해지는 참상을 경험하면서 한국전쟁의 명분이 허위였음을 폭로했다.
「밴 플리트 장군과 시」에서는 박인환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제8군 사령관 밴 폴리트 장군을 위해 헌시를 쓰게 된 사연을 밝혔다. 밴 폴리트의 아들인 제임스 중위는 아버지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 찾아와 공군 작전에 참여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이 사고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박인환은 한국 사람의 도리로서 그를 위해 헌시를 쓴 것이었다.
3.
박인환은 그의 나이 서른 살 무렵 대한해운공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해운과 관련된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로부터 일거리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월급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사장은 어느 날 박인환에게 월급 대신 미국 여행을 제안했다. “박 형처럼 문학을 전공하는 분으로서 한 번은 태평양을 넘고 미국의 풍물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서북 미주의 항구를 돌아」)이라고 주선한 것이었다. 박인환은 뜻밖의 제안에 당황했지만, 그 필요성에 공감해 실행해 옮겼다. 여행에 쓸 경비가 없어 여기저기 빌리기도 했는데, 작은이모부가 많이 도와주었다. 작은이모부는 박인환이 해방 직후 상경해 서점 마리서사를 차릴 때도 도움을 주신 분이었다.
박인환의 미국 여행 일정은 1955년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를 타고 부산항을 출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 8시경 시모노세키를, 다음날 새벽 5시경 세토나이카이(賴戶內海)를 거쳐 오전 11시경 일본 고베항에 도착해 입항했다. 박인환은 일본에서 4일간의 시간이 있어 고베, 오사카, 교토 등을 주로 전차를 타고 여행했다.
3월 9일 밤 남해호는 고베항을 출발해 미국으로 향했다. 박인환은 항해하는 도중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전차』를 비롯해 10여 권의 책을 읽었고, 선원들과 친교도 맺었다. 남해호는 3월 22일 오전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항에 입항했는데, 박인환은 상륙에 필요한 수속 절차를 거치느라 23일 하선했다. 이후 박인환은 올림피아, 터코마, 시애틀, 에버렛, 아나코테스, 포트엔젤레스, 포틀랜드 등을 여행했다. 그리고 4월 10일경 미국을 떠나 4월 말경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아내에게 건넬 선물과 결혼 10주년 행사에 사용할 물품, 그리고 아이들의 장난감이 들려 있었다. 박인환의 미국 여행기는 총 4편이다.
1) 「19일간의 아메리카」, 『조선일보』, 1955. 5. 13․17.
2) 「서북 미주의 항구를 돌아」, 『희망』 제5권 7호, 1955. 7. 1.
3)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 『아리랑』 제11호, 1955. 12. 1.
4) 「몇 가지의 노트」, 『세계의 인상』, 진문사, 1956. 5. 20.
박인환은 「19일간의 아메리카」에서 미국 여행 동안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소개했다. 산의 수목들이 무성한 삼림, 신호등을 잘 지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인들의 높은 질서 의식, 약속 시간의 엄수,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높은 관심,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 한국인을 좋아하는 미국 사람들의 태도 등이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이 정신적인 면에서나 지식적인 면에서 민국인들에 비해 결코 낮지 않다는 자부심을 내보였다.
「서북 미주의 항구를 돌아」에서는 미국 여행을 떠나게 된 경위와 감정을 밝혔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재건에 힘쓰는 일본의 모습과 파친코 산업에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미국 사람들의 술 문화, 여성들, 그리고 한국 유학생과 이민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돈이 모자라 공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유학생들, 어렵게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실정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에서는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소개했다. 박인환이 찾아간 곳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쫓겨 망명한 박용현 씨 집이었다. 딸기 농사를 열심히 지어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있었고, 조국의 발전도 응원하고 있었다.
「몇 가지의 노트」에서는 미국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개했다. 박인환은 상류층의 사람이 아니라 “노동자, 식당 주인, 서점 주인, 자동차 회사의 세일즈맨, 도서관장, 오일 회사의 사무원”(「몇 가지의 노트」) 등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민중들을 만났다.
4.
『박인환 산문 전집』에는 박인환 시인이 아내에게 보낸 11통의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이정숙에게」,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나의 정숙이에게」라고 부른 데서 볼 수 있듯이 박인환 시인은 아내를 많이 사랑했다. 또한 “세형, 세화, 세곤이나 잘 놀고 있습니까? 밤마다 당신과 애들을 꿈에 보고 헛소리를 합니다. 참으로 보고 싶습니다.”(「정숙이」)라고 쓴 데서 볼 수 있듯이 자식들도 많이 챙기는 아버지였다. 이외에 이봉구 소설가에게 보낸 2통의 편지도 수록했다. 안부 편지였지만, 인연에 대한 박인환의 다정다감한 면을 잘 볼 수 있다.
「칭기즈 칸」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왕으로 평가받는 칭기즈 칸의 일대기를 그린 글이다. 그렇지만 유목민 부족들로 분산되어 있는 몽골을 통일하고 남러시아와 북중국까지 영토를 확장해 대제국을 구축한 전쟁이나 통치의 모습보다는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한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렸다.
『박인환 산문 전집』에는 박인환이 세 번의 설문에 대답한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남북 요인 회담 요청이 일부에서는 농숙(濃熟)한 모양인데 이에 대한 기대는 어떠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박인환은 북조선이 참가하지 않을 것 같고, 설령 참가하더라도 국제 문제인 만큼 우리 민족만의 합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고 보았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식을 내보였다. “6·25 수난 속에 숨은 선생의 미공개의 비화는?”이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부산으로 탈출하다가 도중에 체포되어 돌아온 일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애인이 있다면 무슨 프레젠트를 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현재 애인이 있어도 프레젠트를 못 하는 저의 심정으로서는 어찌 이런 질문에 답할 길이 있겠습니까”라고 에둘러 답변했다. 그만큼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고 정성을 다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