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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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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 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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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 | |
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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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 본위 | ||||
타자녀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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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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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도자 숭배 |
이 사은 사요 만큼 나를 크게 확장시키고 내가 가장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하고 이 사회를 평화의 세계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은이 들어가야 전쟁이 안 일어납니다. 사은에는 종교도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교든 힌두교든 사은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사은이란
말보다 사은의 내용이 어떤 종교인을 떠나서 거부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인도에 갔더니 힌두교 사람들이 불가촉천민에게 우민화 정책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똘똘하면 달라 드니까 머리 아프거든요. 그들의 자력을
길러주지 않아서 악순환이 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도 문제가 많습니다.
유럽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말 정도 되면 자기가 자력 생활 할 것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서른 다돼서 결혼 할 때 되면 아버지에게
돈 탈 준비합니다.
우리 용환이가 교당을 3년을 다녔는데 강연을 두 번 했다고 하길래
‘네가 참 의뢰 생활 많이 했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강연 할 때 말이
떠듬거리지요. 강연을 자주하면 그것이 고쳐집니다. 당장 학교나
연구소에서 프레젠테이션 할 때 더듬거리면 되겠어요? 이런 강연을
1년에 두 번씩 해야 해요. 중생의 의뢰하는 심리의 첫째는 편하게
어영부영 하자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시 받기 싫으면 자력 양성을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도 우리
사람은 희한하게도 무시 받기는 싫어하면서 자력 양성은 안 합니다.
자기가 책보고 공부하고 배우고 묻고 실천해보고 인내해야 자력이
양성돼서 무시를 안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데 때로는
왜 이리 단편적인지 모릅니다. 조삼모사가 딱 맞는 말입니다.
의뢰 생활 제일 많이 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여자입니다. 집에서는
설거지를 잘하는 것 같은데 강연하는 것 보면 남자를 시킵니다.
교무님들도 교도들도 무슨 발표를 시키면 전부 남자가 합니다.
남자에게 의뢰 하는 것입니다.
자력 양성이 원래는 남녀 권리 동일이었습니다. 그것을 확장 시켜서
대종사님께서 자력 양성으로 교리를 내 놓으신 것입니다. 무시 받기
싫어하면서 배우지는 안듯이 똑 같습니다. 권리는 누리고 싶은데 안
하려고 합니다. 미안하지만 권리와 의무는 비례합니다.
제가 완도에 근무를 할 때 서열이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로써는 서열 2위였습니다. 권리가 어느 순간에 2위가 되었습니다.
나의 선배들이 일을 안 하니까 내가 하게 되고 내가 일을 하니까 내
선배인데도 불구하고 내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선배의 대접을 받고
싶은데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권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일을 안 하려고 하는 것은 내 복을 밀쳐내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보물을 묻어버리고 빚은 더 많이 지고 나를 개발할 기회를 박탈해
주세요’ 란 말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일을 잘해요?
다 태어날 때는 자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차이가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지자를 통해서 얼마나 배웠느냐에 달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만 보면 잠이 온다고 하고, 공부방에 오라고 하면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 일을 자기 힘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자기 것 다 해 놓고 다른 사람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종법사님이 저를 대행자로서 안암 교당에
보냈는데 종법사님이 안암 교당 걱정 안 하게 해야지, 계속 안암 교당이
신경 쓰이게 하면 되겠어요? 오히려 내가 안암 교당 일을 다 처리하고
교구나 총부에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라고 해야죠.
단장님들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겨울 훈련을 가는데 일반은
교무가 챙겨야 하는지 단장이 챙겨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무님 걱정
마세요 내가 단원들 불공해서 훈련 가도록 하겠습니다. 훈련은 누구누구
갑니다. 식당에 몇 명 예약 하세요’ 라고 해야 하는데, 교무는 걱정이
태산인데 단장에게 전화를 하면 단원이 훈련에 몇 명이 가는지도 바빠서
모르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력을 양성하면 아주 떳떳해지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자력
양성을 하려고만 해도 사리 연구가 제대로 됩니다. 사람들이 이야기
하길 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좋고 일을 잘 하나보다 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과 원력이 강하면 자력
양성을 하게 되고 지자에게 배워서 연구를 하고 실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 수양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뇌를 1%도 못 쓰고 간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죽을 때 손도 곱게 썩게 하려고 그러냐? 일꾼의 손이든 아니든
썩으면 다 또 같습니다. 어떤 종교 기자가 대종사님의 손을 보았는데,
종교의 수장들을 보면 대개 손이 깨끗한데 대종사님의 손은 일꾼의
손처럼 못이 박혀 있었답니다. 그것을 본 기자는 ‘야 무서운 집단’
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송대는 대종사님이 직접 구들장을 놓았습니다. 대종사님이 처음부터
어떻게 구들장을 놓겠어요? 대종사님은 ‘어떻게 제생의세를 할까?’ 를
생각하면서 구들장 놓는 사람에게 묻고 당신의 실력을 기르고 연구를
해서 구들장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놓은 구들장은 골고루
땃땃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대종사님은 깨달았으니까? 저렇게 구들장도 잘 놓는다’ 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깨달은 것은 ‘공부길’을 깨달은 것입니다. 정말로
믿음과 서원이 필요하고 자력을 기르기 위해서 배우고 내 스스로 연구를
하고 실천을 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인과의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누가 해 놓은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났고, 저 사람은 환경이 좋고, 저 사람은 머리가
특별히 좋고, 저 사람은 선천적으로 건강하다’ 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력에도 삼학이 들어 있습니다. 계속 준비하고 계속
연마하고 계속 실천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건강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앞집 앞집에 곧 죽게 생긴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안 죽고 성성한 사람이 초상이 나서 오라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생각에는 ‘희한하네 건강한 사람은 죽는데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은 계속 살고 있네..?’
제가 허리를 다쳤는데 왜 허리를 다쳤는지 아세요?
이것이 다 멍청해서 그렇습니다. 운동을 하다가 다리를 삐어서 운동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기운이 떨어지고 운동도 못하고 일은 많아서
피곤하고 자세도 불량한 상태로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일어나는데 허리가 탁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제가 속으로
‘너 받을 것 받았다. 멍청한 놈아..’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가 틀어지거나 다친 것 외에 허리가 아픈 사람 대부분은 근육의
힘이 약한 것 입니다. 즉, 운동을 안 한 것입니다. 여러분 피곤하니까
쉬어야 해요 운동해야 해요?
- 운동을 해야 해요.
피곤한데 쉬어야지 무슨 운동을 해? 아주 웃기네? 여기에 묘미가
있습니다. 너무 피곤하면 쉬어야겠지만, 피곤하니까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즉, 자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운동을 하면 기본 체력이
증장됩니다. 그러면 점점 덜 피곤해집니다. 피곤해서 쉬면 계속 체력이
약해져서 더 피곤한 것입니다. 피곤하니까 운동을 해야 합니다.
자력이 있다는 것은 어디 가서나 주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 거저 되는 것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영어를
잘 한다면 그 만큼 시간 투자를 한 것이고 수학을 잘 한다면 그 만큼
시간 투자를 한 것입니다. 아까 피아노 보세요 여러분보다는 잘 치는데
훈련이 조금 부족했죠. 틀린 이유는 마음에 수양력이 없고 자력이
없어서 연습도 부족하니까 서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틀린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보다는 잘 친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무님 교리 공부해서 뭐 합니까? 실천을 잘
해야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화기를 쓰려고 해도
매뉴얼을 읽어 봐야 합니다. 원불교을 다니려면 정전을 배우셔야 합니다.
누가 피부과의 직원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거기에 가서 배우겠지만
피부에 대한 책을 사서 보라고 했습니다. ‘책은 싫어요’ 라고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는 약자로 살고 의뢰 생활하고 빚지는 생활하고
앞으로 점점 가난하게 살면서 여러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습니다란 말과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사실입니다.
자력 양성은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자력, 단체의 자력, 자신의
업무의 자력을 말합니다. 종교, 사회, 가정도 마찬가집니다.
영국에 총리 대신이 옥스포드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자력 생활 하는
것이다.> 자녀를 키울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제가 간사로 있을 때인데 저하고 같이 살던 여자 간사가 있었는데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그 전의 여자 간사는 노래를 하면서 빨래를 하고
바느질을 하는데 이 간사는 울면서 빨래를 하고 바느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 보았습니다. 집에 식모가 있어서 일을 해보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죽겠다고 하면서 엄마 아버지가 나에게 이런 것을
안 가르쳐 주어서 원망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웃으면서
하는데 그 간사는 울면서 힘들다고 합니다.
자력을 길러 놓으면 어떤 일을 웃으면서 할 수 있습니다. 직장 생활도
웃으면서 할 수 있고 교당 생활도 웃으면서 할 수 있고 경제 생활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력이 있다는 것은 어디 가서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력이 없을 때는 타력을 입어야 합니다. 타력을
입을 때는 뭐하기 위한 것이에요? 자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고 그
자력으로 다시 보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은의 은혜를 제대로 알면 보은의 기준이 보통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은 사은의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보은하는 기준이 너무 낮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시키면 안 하려고 하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난 할 만큼 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 할 만큼
했습니다. 딸과 아들 전무 출신 시키고 당신의 월급에서 십일조
꼬박꼬박 내고 백 주년 탑에 이름도 있고 우리 엄마 모르게 돈도 많이
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한테 ‘저는 사은의 은혜를 제대로 느끼고
원력이 크다면 나는 할 만큼 했다는 그런 말 안 할 것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자식 잘 키워야 하는데 어중간하게 키우면 자식한테 혼납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네 말이 맞다’ 고 하셨습니다.
항상 자력만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력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법문에 보면 하루를 살 때 내가 자력 생활을 했는가 아니면
빚지는 생활을 했는가? 를 살펴서 빚을 점점 줄이고 혹시 빚을 진다면
자력을 기르기 위한 빚을 얻으라고 했습니다.
어중간한 사람은 자존심이 있어서 절대 타력을 안 입으려고 합니다.
자력으로 다 하려고 하는 것도 병입니다. 쉽게 말해서 대출을 얻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가게를 잘 차려야 손님이 오지 돈이 없으니까 별 볼일
없게 가게를 차리면 손님이 오겠어요? 망해버립니다. 자력 생활을
강조해서 타력을 입지 않고 피한다면 그 자력도 문제입니다.
자력 있는 사람은 타력을 잘 입을 줄도 알지만 그 타력이 자력으로 잘
활용되도록 합니다. 또 자력이 너무 없으면 타력을 입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은행에 가니까 ‘종교인이 뭐 가진 것이 있느냐?’ 며 대출을 안
해주었습니다. 제가 부동산 담보가 없는 것입니다.
자력과 타력은 회전의 관계입니다. 나중에는 참 자력으로 타력을
안아버리는 자력입니다. 자타불이의 일원상 자리까지 가는 자력입니다.
그 안에는 타와 자가 하나입니다.
아이티가 옛날에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한 때 미국에게
점령 당했었는데 이들 나라들은 아이티를 부려만 먹고 자력을 길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악순환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이 사회를 하나로 보는 일원적 시각을 가지고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주의로 확장이 되는 시각을 가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처럼 자력에는 정신적 가치관의 자력도 있습니다.
천도도 자력 천도가 기본으로 되어야 타력 천도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서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마음 공부도 안 하고
정신의 수양력도 없는 사람이 죽으니까 천도재에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타력을 입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천도재를 잘 지낸다고 해도
자신이 자력이 없으면 천도재를 지내도 오지 않습니다. 천도재 때
경종을 댕댕댕 치고 영가를 불러도 안 옵니다. 살아 있을 때도 안
오는데 죽어서 오겠습니까? 똑 같습니다.
우리는 자력 천도와 타력 천도를 병진 해야 합니다. 어릴 때, 늙었을 때,
병이 들었을 때는 타력이 필요합니다. 타력도 입을 때는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빚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력을 기르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빨리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정말 대단한 문화입니다. 음식문화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같이 세계적인
것은 드뭅니다. 우리 전통의 음악, 건축, 그림, 도자기 등등 대단한 문화
입니다. 그런데 우리 것을 모릅니다. 클림트가 좋다고 클림트전 보러
가는데 단원
신사임당의 그림을 보면 쥐가 수박을 파 먹는 것이 있는데 얼마나
좋던지요. 이렇게 좋은 그림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나라가 약소국이고
즉, 자력이 없으니까 충분한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대주의는 약자의 심리입니다. 연예인 사진을 방에 붙여 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리 만족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자의
모습입니다. 나도 공항에서 연예인들 많이 보았거든요. 프랑스에서 배우
받으려고 난리였습니다. 그 사람도 소중한 사람이고 나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자력이 없을수록 연예인한테 환장합니다. 자력이 없어서
그 사람이 크게 보이고 멋있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탤런트,
나는 교우죠, 그래요 안 그래요? ^^
- 그래요 ^^
여러분도 다 마찬가집니다. 어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소중한
여러분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자력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별 볼일
없는 놈이고 저 연예인이 대단한 사람이라면 자력 양성이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가 여래요, 상주요, 부처님입니다. 사실입니다. 자력을
양성해서 그 자리를 깨쳐서 그 자리를 가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거지
근성과 노예 근성과 어린이 근성으로 달라붙거나 항상 떠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래 같은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존재임을
알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 삼아서 한 번 해보면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오늘도 유아실 넓히려는 공사를 하려고 사람들이 왔는데 전문 용어를 막
씁니다. 제가 다 알아 듣습니다. 만약에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버리
하면, 즉, 내 자력이 없으면 벌써 견적이 두 배가 되어서 올라옵니다.
내가 자력이 없으면 무시 당하고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공부 삼아서 기본적으로 자력을 길러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의 모든 것의 기본적인 개론을 공부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대상을 만나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자동차를 모는데 운전 실력이 별로 없으면 맨날 반클러치를 써서
디스크를 다 닿게 만듭니다. 우리 교당 차가 11년 되었는데 벌써 다
되었답니다. 원리를 알고 써야 하는데 모르고 쓰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모르면 물어보던가 아니면 책을 보던가 해야 하는데, 원리도
모르면서 책도 안보고 물어 보지도 않고 차를 몰고 다니니까 디스크 다
닿아지게 만든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손해이지 모릅니다. 사은의 은혜는 산더미처럼
입고는 입은 줄도 모르고 갚을 줄도 모릅니다. 그런 은혜를 갚으려면
자력 양성을 안 할 수 가 없습니다. 서원을 이루려고 해도 자력 양성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자에게 불공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지자에게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지자를 함부로 알수록 약자라는
것입니다.
선도 해보면 대종사님이 참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제불제성의
심인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됩니다. 설명 듣고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자의 마음 자리라는 것은 어떤 마음 자리인가?
자기가 수행을 해봐야 그 마음 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자력이 양성이
되어야 그 자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과 상시 응용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을 타력이고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은 자력입니다. 그래서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 1조가 <상시 응용 주의 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 >
이렇게 되고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 6조에는
< - 실생활에 활용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로 자력과 타력이 맞물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당 내왕시를 잘하면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을 잘 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타력을 잘 입으면 자력을 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당에서
대충 설교 듣고 가니까 집에서는 원불교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즉, 대종사님 일과가 아닙니다.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은 대종사님 일과입니다. 아침에는 무엇을 하라.
노는 시간이 있으면 무엇을 하라. 저녁에는 무엇을 하라. 미리 어떻게
하라. 응용하는데 어떻게 하라고 다 나왔습니다.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은
원불교인의 자력적인 일과입니다. 원불교 신앙에 있어서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을 활용 하는 것은 자력 양성의 핵심입니다.
교당에 안 빠지고 다녔다는 것에만 만족하면 그 사람은 세월이 지나서도
자력이 타력을 받쳐주지 못하니까 그 타력마저도 약화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원불교는 어려워요. 해도 안돼요.’ 라고 하는데 집에서 자력
양성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좌선을 하려고 하면 얼마나 자력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서원을 반조해야
정신이 번쩍 들어요. 그리고 허리를 세우고 호흡을 단전에 내리면서
일심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때 자력이 없으면 어느 순간에 허리 숙이고
딴 생각을 하고 앉아 있습니다. 얼마나 자력이 중요합니까?
조물주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이가 35세 넘었다. 그럼 그
사람한테 평가가 나옵니다. 저 사람은 무엇을 잘하고 저 사람은 어떤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전부 자기가 지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혜관님이 무엇을 뚝딱뚝딱 잘 만듭니다. 관심이 있어서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결국은 자력 양성해서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는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교당에서는 그것을 도와줄 뿐입니다.
일주일에 교당에 몇 시간 정도 있어요? 솔직히 몇 시간 안되잖아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과 가정에서 자력으로 생활 하시잖아요.
그런데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 타력도 못하면서 자력으로써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이 안되면 안됩니다. 약자일 때는 타력이 주이지만 어느 정도
되면 모든 것이 자력이 주입니다.
내가 들어서 타력도 응용하는 것이고 내가 들어서 타력으로 도와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의 경전과 스승님의 가르침과 교당에서 법회에서
그 판단의 기초를 원리적으로 가르쳐 줄뿐이고 겨의 대부분의 결정은
자기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당에 와서 그것을 확인 받는 것입니다.
행도 불행도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원 교무는 청소년 교화를 잘한다고 합니다. 나는 양이 안
차는데..? 누가 만들었어요? 내가 만들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육신을
낳아주시고 사은의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의 키는 결국
내가 만든 것입니다. 직업 선택도 결국은 여러분들이 한 것입니다.
잘하고 못하는 것도 결국은 여러분들이 한 것입니다.
아까 원진 교무님은 복사를 바쁘게 하고 있는데 우리 선허는 자기 일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허 교우 같으면 교무님 도와 드릴께요 라고
말합니다. 왜 일에 어두울까요? 인과의 이치입니다. 평상시에 관심이
없어서 어둡고 어두워서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일이 보이면 도와주고
그러다가 실력이 늘고 때로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 봐야 합니다. 공부
삼아 자력 양성하는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고 준비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장을 만나러 온 손님이 와도 신경도 안 쓰고 시키면
시키는 것만 하는 비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력 양성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가실 때 사장님이 찾을지 모르니까 명함 한 장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자기가 명함을 가지고 있어야죠.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은 자력이
아닙니다. 자기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단 직원이어도
자력을 공부 삼아 양성하면 마음은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방 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에 주인 정신이 없는 사람은
계속 주인이 안 되고 종업원입니다. 주인 정신이 없으면 계속 노예
근성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력 양성을 하면 재미가 있고 실력도 늘어나고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도 각자의 자력에
따라서 전부 다르게 느껴집니다. 제가 한문을 쓰니까 어떤 사람은
저렇게 쓰니까 명료해진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자력이 없는 사람은
교무님은 맨날 한문만 쓴다고 합니다. 생각 자체가 다릅니다.
그리고 자력양성은 자기가 하자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자력 양성을
요구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불공하라고 설교를 했는데
‘이것은 우리 시아버지가 와서 들어야겠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자신이 불공을 잘하자는 것입니다.
질문해 주세요.
n 질문과 답변 =========================================
Q_
A_교무님: 자력이 있으면 알아집니다. 정신의 자주력이 있으면
알아집니다. 삼학 공부를 잘 하면 알아집니다.
Q_
하려면 어느 선까지 해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못하는
것은 분업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기준을
모르겠습니다.
A_교무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력을 양성 하자는 것은 내가 다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할 수 있는 마음도 자력입니다. 여러분
도반이 얼마나 자력의 재료가 되는지 아십니까? 훈련 할 때 함께
쪄진다고 하는데 그것도 자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자력이 없으면
타력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의 일을 다 할 수 있어요? 여기서는 각자
각자가 자력을 양성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맡은 바를 하고
상황에 따라서 할 것은 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꼭 이것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영어 선생이 없으면 자기가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
내가 집에서 자력 생활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의뢰 생활하는 것이고 어른은 자력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도 어른이 되고 수행에서도 어른이 되고
공부에서도 어른이 되고 일을 할 때도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의뢰 생활도 자꾸 맛을 붙이면 습관이 되고 업력이 되어서 내생에서도
세세생생 가난합니다. 자력 양성은 부지런함과 같이 맞물립니다. 게으른
놈일수록 의뢰 생활 잘합니다. 다 부지런하시죠?
게으른 놈은 게으른 놈도 싫어합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950202_화공_41_제1장 일상 수행의 요법-6.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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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놓쳤던 부분 다시 챙기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공부심 제일인 현도교우님 고맙습니다. ^^v
성은중앙님 정원교우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공부하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v
감사합니다!
항상 찾아주시니 고맙습니다.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