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안군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중종의 서2남 해안군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해안군(海安君, 1511∼1573)은 중종대왕의 2남으로 1511년(중종 5)에 태어났다. 휘는 희(?), 자는 부붕(不崩),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어머니는 숙의 남양홍씨로 중종대왕으로부터 가장 많은 은총과 권애를 입었다. |
▲ 묘역 초입 도로 우측에 세워진 해안군 신도비 |
▲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해안군 생모인 숙의 남양홍씨 묘역이... |
숙의 남양홍씨(해안군 생모) 묘 |
▲ 중종의 후궁이며, 해안군의 생모인 숙의 남양홍씨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 남양홍씨 묘비에는 명호가 숙원(淑媛)으로 적혀져 있는 것을 보면 후에 숙의(淑儀)로 추증(追贈)된 것 같습니다. |
▲ 숙의 남양홍씨 묘역내 석물 모습 |
▲ 숙의 남양홍씨 묘역내 석물 모습 |
▲ 남양홍씨 묘역 우측으로 해안군 묘를 가는 중간에 있는 묘역인데, 봉분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임시로 조치한 듯... |
1519년(중종 13) 9세 때 해안군으로 봉군되었다. 배위는 영의정 성렬공(成烈公) 류순정(柳順汀)의 아들 진산군(晋山君) 홍(泓)의 딸을 군부인으로 맞이하였으나 1녀만 두고 1532년(중종 27) 27세 나이에 별세하였으며, 그 후 증 우찬성 홍유(弘猷)의 딸인 거창신씨를 맞아 6남 4녀를 두었다. |
▲ 숙의 남양홍씨 묘역 우측으로 80여 미터를 가면 아들인 해안군 묘역 뒷편으로 나오게 됩니다. |
▲ 해안군 묘역과 석물 전경 |
공은 평소 과묵하고 행동이 올바랐으며 음주하지 않고 용모가 단정하고 관옥같이 아름다워 부왕인 중종대왕은 일찍이 칭찬하기를 “나의 아들 중에 가장 침착하고 삼가 들떠 있지 아니함에 해안군 같은 아이가 없다.”하였다. 또한 중종의 잠저를 공에게 하사하여 지극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였다. 또한 공은 늘 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매 날리기와 말타기를 좋아했다. |
▲ 중종의 서2남 해안군(海安君)과 두 분의 배위 봉분으로 3기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
▲ 좌우측에서 바라 본 해안군 묘역 |
1563년(명종 18) 병이 나 언어구사가 어려워 조알(朝謁)을 폐하였으나 항시 의관을 정제하고 있더니 부종으로 병세가 위태로웠을 때 명종대왕은 어의를 보내며 약을 내리고 치료케 하였으나 별세하였다. 이에 임금은 부음을 듣고 3일간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내리었고, 내관을 보내어 유가족을 조상하였다. 향년 63세이다. |
▲ 묘비에는 두 분의 배위가 부좌로 되어 있어서 정면에서 바라 보는 방향에서 맨 좌측이 해안군 묘역입니다. |
▲ 해안군 묘역내 석물 모습 |
공의 신도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麟趾振振莫賢海安(기린 발굽 길도다 자손이 줄줄이 따르네 그러나 해안에서 더 어진이 없었네) |
▲ 해안군 묘역 아래는 아들인 오천군(烏川君) 굉의 묘역이 있습니다. |
▲ 해안군 우측 묘역(좌측 사진)과 오천군 하단의 묘역군(우측 사진) 모습입니다. |
해안군은 서릉군(西陵君) 섬(?) · 서흥군(西興君) 학정(鶴貞) · 오천군(烏川君) 굉(?) · 오산군(烏山君) 현(鉉) · 서천군(西川君) 금(錦) · 오강군(烏江君) 건(鍵)의 6남과 5녀를 두었다. -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제11대 중종대왕(中宗大王) [1488 ~ 1544]
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 ~ 1557]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 ~ 1515]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 ~ 1565]
서1남 복성군(福城君) [1509 ~ 1533] (경빈 박씨) |
해안군 묘역 위치도 |
|
시작 부분 바로 위가 숙의 남양홍씨 묘역이고, 우측 29m 지점이 해안군 묘역입니다.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46-1 |
|
빨간선 중앙의 시작 부분에 이직선생 묘가, 바로 윗 부분에 해안군 묘역이 위치. 벽제역/일영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길... |
|
첫댓글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