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쇼 넬슨은 19세기 전 세계적으로 최강 영국 해군을 창건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영향력 큰 제독으로 우뚝 솟아 있다. 넬슨은 역사상 지금까지 해전의 으뜸가는 영웅으로 해전의 대명사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용맹스럽고 끈질긴 군인기질을 가진 해군제독으로 항상 부하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넬슨은 지금까지 영국해군이 모방하고 있는 해군의 행동기준과 전통을 최초로 확립해 놓았다. 승리의 순간 전사한 그의 영전에 영국 최고의 훈장인 가터 킹 오브 암스 훈장이 바쳐졌다. 왕은 넬슨 제독을 승리의 순간에 조국을 위해 순국한 영웅이라고 칭송하면서 그의 전사를 몹시 슬퍼했다.
넬슨은 1758년 9월29일 영국 노포크 번햄 토프에서 탄생, 불과 열두 살 해군에 입대할 때까지 성직자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스무 살 때 영국 프리깃함 함장에 기용됨으로써 영국 해군사상 최연소 함장 기록을 세웠다. 그는 10년간 대부분 서인도 제도에서 근무했다.
1793년 나폴레옹이 지배하는 프랑스와 전쟁이 발발하자 넬슨은 지중해 함대로 전근됐다. 그는 그곳에서 10여년 간 나폴레옹 군과 싸우면서 높아질대로 높아진 자신의 명성을 다시 국민적 영웅자리로 끌어올렸다.
처음 넬슨은 영국 아가멤논 함장을 맡아 코르시카 주변 해역에서 싸웠다. 그는 1794년 코르시카의 칼비 지역을 겨냥한 상륙작전을 지휘하다 처음 부상했다. 넬슨은 프랑스 혁명군이 대포를 쏘아 떨어뜨린 모래와 돌에 오른쪽 눈을 맞았다. 넬슨은 이때 부상으로 오른쪽 눈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상사인 후드 경은 칼비 상륙작전에서 넬슨이 세운 공로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로 인한 섭섭함이 오히려 실명의 고통보다 더 컸다.
지중해 함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그는 운명적으로 나폴리 주재 영국대사 부인인 엠마 하밀턴 부인을 만난다. 넬슨은 부인이 있었지만 하밀턴 부인과의 관계는 일생동안 계속된다. 하밀턴 부인은 런던에 있는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동원, 중요 고비마다 넬슨을 돌봐주었고 그의 승진에도 도움을 주었다.
하밀턴 부인의 도움이 그에게는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됐다. 그 덕택에 넬슨이 자기 부하들에게 불어넣은 용기와 전투 의욕은 엄청난 것이었다. 1797년 넬슨은 함포 74문을 적재한 캡틴 호를 지휘해 함포 130문의 산티스마 트리니다드 호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트리니다드 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다. 넬슨이 이때 거둔 승리가 세인트 빈센트 봉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해군소장 진급과 함께 기사작위를 받았다.
넬슨은 같은 해 7월 캐너리 섬 산타쿠르즈 시를 점령하려는 작전에서 또 다른 부상으로 오른쪽 팔을 잃었다.
1년 후인 1798년 그는 부상에서 회복해 다시 지중해로 복귀,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전을 지원하는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육군은 넬슨이 도착하기 전 이미 아부키 만 상륙을 완료했다. 그러나 8월1일 다음 전투에서 영국 전투함들이 13개 중 11개의 프랑스 전투함을 나포하거나 파괴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 피해는 하나도 없었다. 이때 넬슨의 승리가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이집트 침공작전을 영구히 포기케 했다.
넬슨은 나일강 전투 때 머리를 부상했지만 뒤따른 전투가 승리함으로써 나폴리에서 프랑스군을 축출하고 이탈리아 왕정을 회복시켰다. 그후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와 부인과 별거하면서 이때부터 공개적으로 하밀턴 부인과의 관계를 계속했다.
넬슨은 1801년 해군중장으로 발틱함대의 부사령관으로서 하이드 파커 경(卿) 지휘 아래 덴마크 해군과 치열한 코펜하겐 해전을 벌여 승리했다. 덴마크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영국 함대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넬슨의 치밀한 작전계획과 과감성, 그리고 유리한 기회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상관의 명령을 임기응변으로 무시한 덕분이었다.
1801년 2월 넬슨은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코펜하겐 항구로 들어갔다. 덴마크는 함선 16척과 중(重)해안포로 코펜하겐을 방위하고 있었다. 이때 덴마크 해전은 영국 해전역사상 전에 없이 치열했다.
코펜하겐 하늘을 온통 대포알로 뒤덮자 파커 경은 넬슨에게 후퇴하라고 멀리서 신호를 보냈다. 넬슨은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에 망원경을 대고 있다가 부하들에게 “나는 눈이 하나뿐이야. 그래서 때로는 보지 않을 권리가 있단 말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는 모른 체 전투를 계속했다. 그날 전투가 끝나자 넬슨은 후퇴하지 않고 버틴 덕택에 승리를 거뒀다. 그는 이 전투에서 상부의 명령을 어긴 죄로 견책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작 칭호까지 받았다.
넬슨의 코펜하겐 해전 승리 덕택으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1803년 두 나라는 다시 전쟁으로 끌려들어갔다. 넬슨은 함대를 다시 지중해로 이동시켰고 그곳에서 해상봉쇄로 프랑스 함대를 투롱에 꼼짝못하게 가두었다.
프랑스 군대는 1805년 악천후 속에서 영국의 해상봉쇄를 벗어났다. 넬슨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프랑스군을 추격해 다시 봉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스페인 함대와 합류한 데 이어 자신들의 육군과도 합세, 영국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넬슨 함대는 프랑스군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33대27척으로 함정 수에서 영국 함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슨은 세밀한 작전계획을 다시 짜 이를 각 함장에게 시달했다. 그리고 자신은 기함 승리호 상에서 “조국은 모든 병사에게 각자 맡은 바 작전임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넬슨은 그런 다음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쌍방 함대는 1805년 10월21일 스페인 트라팔가르 곶(串)에서 만나 치열한 해전에 돌입했다. 이 해전은 정확히 넬슨의 작전계획대로 진행됐다. 영국 함대는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함선 사이를 뚫고 들어가 19척의 적함을 격침 또는 나포했다. 이 작전으로 영국군은 단 한 척의 함정을 잃었을 뿐이다. 트라팔가르 해전 후 영국은 100년간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고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꿈은 트라팔가르 바다 밑에 수장되고 말았다.
그러나 넬슨은 이 위대한 승리를 끝까지 살아서 지켜보지 못했다. 그는 서전에서 프랑스의 1급 저격수가 근처 선박 돛대 위에서 쏜 머스킷 구식 총알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이 위대한 영국의 해군제독은 “나는 이제 만족해. 조국을 위해 내 임무를 완수하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한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숨을 거뒀다. 넬슨의 시신은 브랜디 통에 보존돼 런던으로 옮긴 뒤 세인트 폴 성당 묘지에 안장됐다.
넬슨은 평생 동안 터득한 해군 전략·전술의 달인으로 이것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실제로 최대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 전선을 뚫고 들어가 화력을 효율적으로 집중하고 기동성을 극대화했다. 넬슨은 최악의 조건에서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천부적 지도력을 가진 위대한 군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넬슨은 비록 생애 최성기인 47세를 일기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조국 영국에 남긴 세계 최강 해군의 유산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의 해군 전략·전술 유산은 미국의 해군제독 앨프리드 타야 마한에게 전해져 해군전투에서 많은 새로운 이론개발의 기초를 제공했다.
넬슨은 오늘날 영국 해군의 영웅으로서, 전세계 해군 장병들에게는 수병의 상징인물로서 19~21세기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해군제독으로 추앙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