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수의 인생은 자신의 히트곡을 따라간다는 속설이 있다.
묘하게도 히트곡의 가사내용과 비슷한 삶의 궤도를 벗어나질 못하는 전례 때문이다.
불멸의 국민가요 '산장의 여인''호반의 벤취'로 이 땅에 팝 스타일의 고급가요를 도입했던 권혜경선생도 그 속설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이 슬픈 노래가락 그대로 외롭게 '산장의 여인'으로, 선생은 평생을 외롭게 살아왔다.
'가사의 굴레'가 시련이 되었던 유명가수는 많았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中)던
차중락은 낙엽이 지는 11월에 32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돌아가는 삼각지' 中)의
배호는 안타깝게 신장염으로 29살에 요절했다.
애절한 선율의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사랑하기 때문에' 中)를
노래하던 천재 음악가 유재하는 불과 25살에 교통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 밖에도 돌연사한 가수 김성재는 '마지막 노래를 들어줘'를 남겼고 '하늘에 편지를 써'('내 눈물 모아' 中)를
부른 서지원은 20살 나이에 스스로 세상과 이별했다.
반면 밝은 노래로 삶의 긍정적 전환을 맞은 가수들도 있었다.
'쨍하고 해뜰 날'의 송대관은 문자 그대로 '쨍하고 해 뜬' 삶을 맞았다.
이한철도 2006년 '괜찮아 잘 될꺼야'란 노랫말의 '수퍼스타'를 불러 이름을 알렸다.
참으로 아쉽게도 본명이 권오명인 권혜경선생이 지난 25일 오후 1시께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다.
10여년 전 서울에서 충북 청원으로 주거를 옮긴 권혜경은 최근 청주 효성병원 중환자실에서 투병해왔다.
권씨의 측근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에서 거주해온 고인은 건강이 무척 안 좋은 상태였다.
몇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된데다 최근에는 교통사고까지 겹쳐 2~3일 전부터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밝혔다.
가요계 원로들은 “고인은 거리에서 자기 노래가 나오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무대에만 서면
혼을 담은 노래를 열창했다”고 회고했다.
가수 故 권혜경이 불러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산장의 여인'의 배경은 경남 마산시.
무명의 권혜경을 일약 스타로 만든 이 노래는 가요계의 큰 별인 마산출신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KBS 마산방송국 문예부장에 재직할 당시 결핵환자들이 모인 국립마산 결핵요양소에 위문공연을 갔을 때
한 모퉁이에서 흐느끼고 있는 한 여인에게 눈이 끌리면서 시작됐다.
당시 반 선생은 공연을 마친 뒤 이 여인에게 사연을 알아본 결과 폐결핵환자로 외롭게 혼자서 산장에서
쓸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을 알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그 여인을 생각하며 지은 노래 제목이
바로 '산장의 여인'이다.
가사는 마산결핵병원에 입원해 있던 작곡가 이재호씨에게 넘겨졌고 당시 함께 결핵을 앓고 있던 권혜경이
애절한 목소리로 불러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권혜경은 마치 이 노랫말처럼 지병인 후두암과 심장판막증 등을 앓으며 충북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외딴집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채 홀로 지내다 지난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음악인생을 살펴보자.
1931년 강원도 삼척에서 5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고인은 일찍부터 노래에 재능과 열정을 보이며 서울대 음대에 입학, 성악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예술가로 성공하기보다 현모양처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조흥은행에 입사했다.
하지만 노래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출생인 권씨는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전속 가수 3기로 발탁됐고,
57년 음반 데뷔곡인 '산장의 여인'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노래의 인기를 업고 동명 영화로 제작됐을 만큼 대히트가 터졌다.
지난 25일 가수 조용필(58)이 데뷔 40주년 기념콘서트에서 자신의 노래방 애창곡이라며 열창한 노래이기도 하다.
이런 것을 우연이라 해야하나 운명적이라 해야하나.
권혜경선생이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을 24일 밤, 국민가수 조용필은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을 치르고 있었다.
이날 5만 관객과 '노래방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던 조용필은 "내 애창곡"이라며 '산장의 여인'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중략)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 나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중, 장년 관객들도 나지막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다음날, 권혜경이 숨을 거뒀다.
조용필로서는 아무런 교감 없이 대선배의 가는 길에 조가(弔歌)를 부른 셈이 됐다.
조용필의 측근은 "안 그래도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평소 친분은 전혀 없었지만 듣자마자 조화를 보내 예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평소 조용필이 사석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십중팔구는 이 노래를 불렀지만 무대에서 쉽게 부를 노래는 아니었다.
본인도 부음을 듣고 '참 묘한 일'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산장의 여인'의 배경된 경남 마산시는 26일 고 권혜경의 빈소가 마련된 충북 청주시 목련공원에 위치한
청주시 장례식장에 백유승 마산시 보건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문사절단을 보냈다.
황철곤 마산시장은 "전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산장의 여인'은 바로 마산결핵병원과 그곳에서 투병 중인 환자들을 위해
지은 노래로 마산시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 조문사절단을 파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시 그녀의 음악궤적을 따라가보자.
성공적인 데뷔이후 권혜경은 주목받았다.
당시로서는 당대의 대중가요와는 차별되는 고급스런 팝 스타일의 창법으로 노래하는 가수였기 때문.
그녀는 라디오 드라마 '호반에서 그들은'의 주제가인 '호반의 벤치', 59년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를 취입하며
가수로서 승승장구했다. 적어도 그때까진 이 신인가수의 앞 날이 '산장의 여인'과는 무관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인기 가수 대열에 들어선 뒤 59년 심장판막증 판정을 받았고 이어 후두암, 늑막염, 관절염, 백혈병, 자궁암 등
갖은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투병 중 작곡가 박춘석 씨와 손잡고 발표한 '물새 우는 해변'‘호반의 벤치’, ‘동심초’등은
온갖 질환과 싸우면서 만들어낸 올드팬들이 기억하는 그녀의 명곡들이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지만 그녀와 인연이 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련을 이기기 위해 불교에 귀의한 그는 생의 절반 이상을 봉사활동에 바쳤다.
'대명화'라는 법명을 받고 70년대 이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재소자들을 격려해 수많은 수인들로부터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했다.
잠시 병세가 회복될 때마다 전국의 교도소를 찾아가 재소자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 결과 1982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 표창으로 노고를 인정받았다.
선생의 측근은 "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가수 활동보다 투병 생활에 더 많이 매달리면서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재소자를 격려하는 봉사 활동을 해오셨다"고 회고하고, "생전에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은 없다"고 덧붙였다.
권혜경은 서서히 대중에게서 잊혀갔다.
그러다 한 일간지에 "충북 청원군 산속에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고 그 곳엔 마당에 직접 판 구덩이가 보였고
자신이 죽어 묻힐 구멍이며, 그 앞에 '산장의 여인'의 노래비를 세우는게 소망이라고 했다"는 기사가 공개되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사랑마저 물리쳐'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산장에서 살아간 권혜경.
하지만 박씨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이웃을 도우며 끝까지 '재생의 길'을 걸었다.
외롭기는 했지만 결코 '세상에서 버림받은' 삶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영구는 27일 오전 9시 빈소 청주시장례식장(043-221-3396)을 떠난다. 화장 후 유해의 일부는 고인이 살던 곳의 수목장으로, 일
부는 부모의 묘소에 함께 안치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