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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원도 원주 자감촌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귀여운여인
최초의 아파트 - 일산아파트 |
원주 최초의 아파트는 1977년 1월 17일 준공되었던 일산아파트였다. 일산아파트는 지금은 국제아파트로 2001년 7월 15일 재건축되었다. |
규모가 가장 큰 아파트 - 문막 부영아파트 | ||||||||||||
원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아파트는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1536-1번지에 위치한 문막부영아파트이다. 15층 아파트가 15동이 있으며 총 1,538세대이다. 2000년 10월 27일 준공되었으며 22평,26평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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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최초의 이발소 - 혁성이용원 |
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는 원주시 신림면 신림리 693번지 신림시장내에 있는 혁성이용원으로 1955년 4월 27일 문을 연 후 최근까지 운영을 해오고 있었으나, 최근의 운영자인 김길수씨의 자금난으로 인해 현재는 문을 닫고 휴업중인 상태이다. |
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 - 도미약국 |
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은 원주시 명륜동 25번지 남부시장에 있는 도미약국으로 1964년 5월 13일 강호섭(현66세)씨가 문을 연 이래 38년 5개월째 운영해 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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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 - 금강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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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은 금강다방이다. 금강다방은 1967년 10월 10일 등록이래 36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위치는 원주시 중앙동 260번지이며, 대표자는 이운숙(현43세)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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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의장과 초대 부의장 |
원주시 초대의장은 박태희(당44세)의장으로 공직과 언론계에서 일을 하였고 1955년 9월 1일부터 1956년 8월 23일까지 1년간 재임하였다. 원주시 초대부의장은 엄규상(당56세)부의장으로 고보를 졸업하고 회사중역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55년 9월 1일부터 1956년 8월 23일까지 1년간 재임하였다. |
통합 원주시 초대 의회의장과 부의장 |
1995년 1월 1일 통합 원주시의 초대 의장은 김성봉(당74세)의장으로 1995년 6월 30일까지 의장직을 역임하였다. 초대 부의장은 이명복(당68세), 어연선(당63세), 임상규(당60세) 3인 공동으로 임기는 1995년 6월 30일까지 였다. |
가장 오래된 부동산 중개업소 - 원주부동산중개사무소 |
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부 동산 중개업소는 지정면 간 현리 810-1번지에 소재한 원주부동산중개사무소로 최 돈영(66)씨는 1994년 7월 20일부터 현재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1994년 이전에도 부동산 거래 중개업을 하는 곳은 있었으나 중개사무소 허가를 받은 것은 원주부동산중개사무소가 처음이었다. |
가장 큰 필지의 사유림 |
원주에서 가장 큰 필지의 사유림은 김해김씨참교공파종중 소유의 땅으로 원주시 귀래면 용암리 산20번지 1호이다. 면적은 3,704,861(1,120,720평)㎡이다. |
가장 큰 필지의 국유림 |
판부면 서곡리 산166번지의 산림청 소유의 땅으로 12,114,282㎡(3,664,570평)이다. |
가장 큰 필지의 시유림 |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50번지1호로 금대리 소쩍새마을 입구 일대의 산이다. 면적은 13,130,746㎡(3,972,050평)이다. |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등산로 - 봉화산 등산로 |
원주시 단계동 산57번지 일대와 호저면 만종리에 걸쳐 있는 봉화산은 옛날에 "봉화"를 피웠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며, 정상은 해발 337m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야산이지만 산 정상에서는 원주시내는 물론 먼곳까지 한눈에 관망이 가능하다.
1996년도에 봉화산 등산로에 삼림욕장을 조성하여 각종 운동시설과 편익시설을 설치하고 매년 시설물을 확충·정비하고 있으며, 정상까지 1.1㎞로 약 1시간 정도면 왕복이 가능하고 하루 평균 800여명의 등산객이 찾고 있다.
봉화산은 접근이 용이하고 운동량이 적당하며 주변 경관이 좋은점 등 여러 가지 장점으로 이용객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용면에서 전국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등산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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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가축사육농가 - 한우 | ||||||||||||||||||||||||||
원주시 지정면 간현4리 271번지에서 한우를 사육하고 있는 최일영(당52세)씨는 원주시 관내에서 한우 사육농가로써는 최대규모(120두)이다.
최일영씨는 결혼전인 1975년(25세때)부터 한우사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한우 암송아지 1마리부터 시작하여 현재에는 120두의 최대 규모로 성장할 때까지 남 모르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때 그 때 남다른 감각과 경영 능력으로 한우 사업을 추진해 온 일꾼이다.
현재까지 지정면에서 한우를 사육하면서 2차례에 걸친 한우 파동을 겪어 오면서 남과는 다른 한우사육 기법과 경영 능력을 발휘해 슬기롭게 대처해 오면서 부농의 꿈을 일구어 가고 있는 일꾼이다.
최일영씨는 지정면 간현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앞으로 원주 지역 한우사업을 이끌어 나갈 유망한 축산 농업인으로 축산을 경영하고자 하는 후배 농업인들의 귀감이 되고자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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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최고의 환경개선부담금 납부대상업체 |
환경개선부담금은 경유자동차 및 160㎡이상 규모의 건물에 대하여 부과하는데 특히 시설물 환경개선부담금은 연료사용량과 용수사용량에 따라 차등 부과되는 부담금으로 원주기독병원은 2002년 상반기(6개월)동안 연료사용량이 854,135ℓ이고, 용수사용량이 116,389톤으로 원주시에서 가장많은 환경개선부담금을 납부하는 업체이다 |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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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주정차과태료 최다 체납자 |
불법주정차 과태료를 가장 많이 안낸 체납자는 원주시 학성2동의 000로 59회의 불법주정차에 체납금액은 236만원이다. 불법주정차 과태료는 4만원(승용) 5만원(기타)의 두 가지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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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되고 길이가 긴 횡단보도 - 원주역앞 |
횡단보도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횡단보도는 원주역 앞에 있는 횡단보도로 설치년도는 알 수가 없다. 이 횡단보도는 길이 44M폭8M로 또한 원주에서 가장 길이가 긴 횡단보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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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신호등 |
원주의 교통신호등 중 가장 오래된 교통신호등은 남부시장 맞은편에 있는 신호등이다 이 신호등의 설치년도는 근거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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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택시승강장 | |||||||||||||||||||||||||||||||||||||||
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택시승강장은 기업은행 맞은편에 있는 택시승강장으로 설치년도는 알 수가 없다. 설치년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원주에서 가장 오래된 승강장인 이 승강장에는 세 대의 택시가 정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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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청소년수련시설 - 간현청소년수련시설 |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1108-11번지에 있는 간현청소년수련시설로 1993년 9월에 설립되었다. 부지면적은 4,631㎡ 이며 건물면적은 1,383㎡이다. 수용인원은 197명이고 대표자는 김춘광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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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규모가 큰 분묘 - 운곡 원천석 묘역 |
원주시 행구동에 있는 운곡 원천석 묘지가 원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분묘이다. 봉분의 높이는 1m이고, 둘레는 18.7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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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수가 가장 많은 기업 - (주)만도 |
원주에서 직원수가 가장 많은 기업은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5-22번지에 있는 (주)만도로 총직원수는 1,136명이다. 부지는 173,385㎡이며 대표자는 오상수씨이고 주요 생산품은 자동차 조향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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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최다고용기업 - 이수세라믹 |
원주에서 장애인을 가장 많이 고용하고 있는 기업은 이수세라믹으로 전체직원은 103명이고 이중 24명이 장애인이다. 원주시 문막읍 농공단지내에 있으며 대표는 이상경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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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최장수의 고아원 - 성애원 |
원주 최초의 고아원은 원주시 관설동 1389번지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성애원으로 1945년 7월 개원하였고, 1946년 11월 1일 인가되었다. 성애원 최초 원생은 남자 15명,여자 7명으로 총 22명이었다. 지금은 남자 23명,여자 22명으로 총 45명이 입소해 있으며 원장은 최인숙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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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여성 성리학자 - 임윤지당(任允摯堂) |
1721 ~ 1793, 임윤지당의 본관은 풍천으로 부친은 임적이고 모친은 파평 윤씨였다. 윤지당은 당호이다. 19세인 1739년(영조 15)에 원주의 선비 평산신씨 신광유(1722~1747)와 혼인하였으나 8년뒤에 남편과 사별하여 자식을 두지 못하였고 1793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원주에서 살았던 여성 유학자였다.
임윤지당은 조선후기 영?정조시대에 원주에 살았던 한국 역사상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로서 일평생 유교경전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우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원리를 체득하였고, 부단한 수양과 도덕적 실천으로 높은 인격을 완성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었다.
저서로는 자신이 연구하고 체득한 것을 훌륭한 문장으로 저술한 ‘윤지당 유고’가 있는데, 대부분이 경전연구와 성리설에 관한 논설 및 선유에 대한 인물논평들로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대학자와 견주어 손색이 없다. 그 중에서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예악설(禮樂說),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人說) 등의 논문은 율곡 이이에서 시작된 기호학파의 정통 성리학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후기 관념철학에 대한 높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봉건적 사회분위기에서 매우 진보적인 여성론 - 여성도 교육과 수양을 통해 성현이 될 수 있다 -을 주장한 매우 독보적인 인물로서 학문을 닦고 자아를 실현한 최고의 여성예술가이며 여성학자라 한다. 족보에 나타난 묘소는 정지안면 무지곡 뒷산의 경좌에 있으며 시동생인 신광조와 서조카인 신재승의 묘소도 함께 있다고 하며, 현재 호저면 무장리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조엄(趙儼) |
1719년(숙종 45년) 지정면 간현리에서 태어나 1777년(정조 1년)까지 살았던 인물로 본관은 풍양,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이다.
이조판서 상경의 아들로 그의 시호는 문익이라 했다. 1738년(영조 1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내시교관?세자익위사시직을 지내고, 175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벽파인 홍인한.정후겸 등과 결탁하였다는 홍국영의 무고를 받아 파직되면서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들 진관의 호소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이듬해 병사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해차록 등 저서를 남긴 경제가로 명성을 떨치신 분으로, 영조 39년(1763)에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최초로 가져와 경남 동래 및 제주도 등지에서 재배하여 구황 작물인 고구마를 전국에 보급시킴으로써 굶주림에 허덕이던 많은 백성들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794년 좌의정 김이소, 평안도안핵어사 이상황의 노력으로 신원되고 1814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지정면 간현리 산 69-3번지(작동 앞산)에 있다.
후손들이 7대를 내려오면서 판서를 지냈다고 하여 마을명이 작동인 것은 벼슬 작(爵)자를 쓴 것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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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장 - 임경업(林慶業) 장군 |
1594 ~ 1646, 그의 출생지에 대해 충주 달천과 평안도 개천이 언급되고 있으나 충북도지와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평촌마을의 전설과 현지주민의 보고, 그리고 임씨 문중에서는 부론면 태생임을 시인하고 있다. 판서 정의 7대손으로 황의 아들이다.
임경업 장군은 27세가 되던 1618년 무과에 급제한 후 이괄의 난 당시 관군으로 길마재싸움에서 크게 이겨 공을 세우고 일등진무 원종공신이 되었고 1643년 명군의 총병으로 청나라를 공격할 때까지의 조선조 명장이다.
1640년 청이 명의 금주를 치게 되어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출전하게 하였으나 친명파인 임경업은 명군과 협력하여 청군을 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탄로나 천보산으로 도망쳤다. 임경업은 중의 행세를 하며 해풍현에 도착하여 등주도독 황용의 안내를 받으며 숭정황제로부터 부총병의 관직을 받았다.
명이 망하자 마등홍은 배반하여 임경업을 잡아 청에 항복하였다. 임경업이 북경의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조선에서는 인조반정의 공신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났다. 서인은 노서와 소서로 갈라지고 다시 원각(원두표)과 낙당(김자점)으로 당파싸움을 하던 때로 김자점이 득세하던 시대였다.
심기원의 모반사건에 임경업이 관련되었다 하여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잡혀오게 된 것이다. 53세 되던 해 6월 20일에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충주의 충렬사, 선천의 선민사, 백마산성의 현충사에 제향되었다. 그의 추모비는 부론면 손곡리 248번지, 임경업 장군의 생가터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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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가장 긴 사람 - 강정희 |
가장 머리카락이 긴 사람은 원동에 거주하는 강정희씨(만43세). 그녀는 18 세부터 유난히 댕기머리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덕에 지금의 머리카락을 기르게 되었다. 당시 학창시절 모발 단속이 심해 학교 졸업후부터 모발을 기르게 되었는데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그녀는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두 딸 예쁜이, 예림이도 머리카락 기르는걸 무척 좋아해 가 족 모두의 머리카락 길이는 무려 5미터가 넘는다. 역시 20년 넘게 정 성을 들여온 강정희씨는 2.4m, 첫딸 예쁜이(중3)는 1.5m, 둘째 예림 이(초등6)도 벌써 1.3m가 되었다. 두딸이 머리카락을 잘 기를 수 있도록 학교에 사정을 했더니 들어주어 정말 고마웠다는 강정희씨. 요즘 청소년들이 자기자신을 아끼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며 "자기 신체를 소 중히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孝의 시작임을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주장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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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축구예술가 - 허남진 |
허남진은 1968년 4월 17일 원주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 부상으로 축구선수의 꿈이 깨 그는 축구에 관한 한 대적할 사람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1995년 3월 11일 멈추지 않고 전신으로 볼컨트롤하기에 도전해서 18시간 11분 4초, 10만번 이상의 바운딩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또한 2000년 6월 19일에는 멈추지 않고 헤딩오래하기 부문에서 4만 3백 51번, 7시간 24분 54초로 기네스북에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지금 서울 강북구 번1동에 거주하며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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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가업을 계승하는 한지장인 - 장응렬 |
2000년 산림청 지정 임업 신지식인으로 원주시 우산공단내에서 "원주한지"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3대째 전통한지를 만드는 가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260여종에 이르는 색한지를 제작하여 전국의 한지공예가들로부터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1999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원주한지문화제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방식인 외발뜨기를 선보여 일본의 화지 장인들의 경탄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2001년에는 제26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전통한지 천연염색을 출품해 입상하였으며 일본 히가시찌찌부 화지축제에서 원주한지를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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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리 은행나무 |
문막 반계초등학교 부근 42번 구국도상에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33m, 둘레 14.4m, 면적 100평의 크기이며 수령은 800년이상 된 나무이다. 옛날 한 도사가 이곳에 이르러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는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간 것이 성장한 것이라고 전하며, 또 이 나무 속에는 큰 백사가 살고 있어서 아무도 자르지 못하는 신목(神木)으로 가꾸어 왔다고 한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현지 조사후 거목대장에 기재하고 천연기념물 제167호로 지정했다. 용문사 은행나무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이 나무는 예전부터 나무가 일시에 단풍이 들면 그 해는 풍년이 든다고 전해지는데, 현재까지도 이를 믿는 사람이 많다. 또 서리가 내리면 나뭇잎이 언제 어떻게 지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시에 떨어져 신기함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200년 전 화재를 당했으나 아직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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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지역 최대의 사찰 - 법천사지(法泉寺址) |
통일신라시대부터 임진왜란시대에 존재했던 사찰로 경주 황룡사와 익산 미륵사 다음 가는 중부지역 최대 사찰로 추정된다. 법천사지는 부론면 법천리 산70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법천사는 725년(성덕왕24)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문종때 지광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柳方善)이 머물면서 강학하였는데 이때 수학한 한명회,강효문,서거정,권람 등이 탑에다 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했다고 한다. 문화재로는 금당(金堂)터 북쪽에 있는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를 비롯하여 불상광배,불두,연화문대석,용두,석탑재 등이 있다.
국보 제59호로 지정된 지광국사현묘탑비는 높이 455cm로 비면 주위에는 아름다운 국화문양을 조각하였고 좌우 양쪽에는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양각하였는데 이는 11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원래는 이 탑비 옆에 국보 제101호로 지정된 지광국사의 부도(浮屠)인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는데 경술국치 뒤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8.15광복 이후에 국내 여론으로 다시 반환되어 경복궁에 보존되고 있다. 또한, 절터 남쪽 약 800m 지점에는 완전한 형태의 당간지주가 있다. 높이 280cm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당간지주는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당시 법천사의 규모를 대변하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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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수가 가장 많은 구룡사(龜龍寺) |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번지에 소재한 구룡사는 조계종으로 오대산 상원사의 말사이다. 구룡사는 치악산 국립 공원 내에서 가장 큰 사찰이며 조선말기까지도 그 사격(寺格)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룡사에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6년(666)의상대사가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九龍寺)라 하였으나, 조선 중엽에 거북바위와 얽힌 연유로 구룡사(龜龍寺)로 불렀다고 하며 숙종 32년(1706)에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대웅전은 전면으로 보아 기둥 위에 주심포를 두고 주심포 사이에도 공간포를 2조씩 배치한 다포계양식이며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앞 좌우에는 90여평의 심검당, 설선당의 승사가 있고 정면에는 보광루가 푸른숲에 반사되어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기타 부속 건물로는 원통문, 직묵당, 국사당과 종각 등이 있으며, 1989년부터 구룡사는 가람규모를 갖추기 위하여 불국사 석가탑의 형태를 모방한 석가탑을 세우고 사천왕문 1동을 신축하여 사천왕상 4개를 점안하여 전통사찰로써의 규모를 갖추어 오고 있다.
현재 신도수 6,000명으로 원주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은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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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강원감영(江原監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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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서 가장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 상원사(上院寺) |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치악산 줄기인 남대봉(1181m) 기슭에 위치한 상원사는 원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삼복더위에도 세 번 창문을 열어놓고 자면 그해는 더운 해라고 할 만큼 시원한 곳이어서 얼마나 높은곳에 위치해 있는가를 가늠케 한다. (참고 : 우리나라에서 제일높은 사찰은 법계사 암자는 봉정암)
신라 문무왕때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말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여 관법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린 것을 1968년에 중건하였다. 1988년 대웅전을 다시 짓고, 범종각과 일주문을 신축하였다.
이 사찰과 관련하여 은혜 갚은 꿩의 전설이 전해온다. 경상도 의성에 사는 한 선비가 한양 과거길에 이곳 적악산 기슭을 지나고 있을 때 꿩이 큰 구렁이에게 잡혀 막 죽음을 당하려는 찰나, 선비가 쏜 화살에 구렁이는 죽고 꿩은 살아서 날아갔다.
그런데, 그날밤 깊은 산중 소복한 한 여인네가 맞아준 절간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바로 죽은 구렁이의 암컷으로, 구렁이로 변하여 선비를 물어 죽이려 할 때 절의 종루에서 세 번의 종이 울리자 암컷구렁이는 선비를 놓아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날이 새어 선비가 그 종루 밑을 살펴보니 세 마리의 꿩이 머리가 터진채 죽어 있었다. 전날 살려준 꿩이 선비의 은혜를 갚고자 종을 치고 죽었다는 보은의 전설이 지금도 전해오며 이 전설로 인해 적악산이란 산이름이 꿩 치(雉)자를 써서 치악산이라 변경되었으며 상원사 절담에 이 전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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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 국보 제59호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59호로 지정된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는 지광국사가 법천사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 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山)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고려 선종2년(1085)에 세워진 작품으로, 거북등의 조각수법과 머릿돌의 모양이 새로운 것이 특징이다. 비앞면 가장자리에 덩굴무늬를 새기고, 양 옆면에 정교한 조각을 한 치밀함이 돋보여 형태와 조각이 잘 어울리는 고려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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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국사현묘탑 - 국보 제101호 |
국보 제101호로 지정된 이 부도는 고려시대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 ~ 1067)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 시대에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어 현재는 경복궁 안에 세워두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의 부도가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 준다. 법천사지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의 내용으로 보아 지광국사가 입적한 시기인 고려 선종2년(1085)경에 이 탑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은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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