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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도 산행기 20130511
서울 건축사 등산동호회의; 5월 산행 집결지인 운서역으로 가기 위해 공덕역에서 8시 20분 인천공항 철도를 탔다. 해외로 나갈때나 타고 가던 공항 철도를 타고 산행에 나서는 것이 특별한 느낌이었다. 장봉도는 해발 150m 밖에 되지 않는 산이어서 지금까지 찾은 산행지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일 것 같다. 특별하게 크지 않은 섬은 산 자체가 섬을 이루는 곳이 많다.
섬 산행은 유람의 선입견이 더 큰 편이다. 섬의 인상은 고립된 장소, 일탈, 유배 은둔 별천지, 환상적이고 색다른 풍광, 낭만 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도 이번 산행을 나서는 것은 산세의 큰 체험보다 능선을 오가며 바라보이는 바다 풍경이 더 기대되었다.
9시 16분 운서역에 도착했다. 일행보다 혼자 먼저 도착한 줄 알았는데 정병협 회장 등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큰 길을 건너 맞은편 정류장에서 운서행 221-1번 버스를 기다리다가 윤원석 고문이 택시를 타고 가자고 하여 함께 삼목선착장으로 갔다.
3시 39분 삼목 선착장에 내려 주변을 돌아보니 바다가 툭 트여 보였다. 곧 이어 일행이 들어왔다. 표를 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배 삯은 나올 때 낸다고 했다. 비치된 승선표를 작성하고 선착장을 바라보니 앞서 출발할 배에 커다란 버스와 자가용 등이 마치 고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배 안으로 들아가고 있었다.
여객선은 만든지 얼마 되지 않는지 새로 출고된 승용차처럼 새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크기도 큰 편이어서 웬만한 파도는 끄떡없을 것 같았다. 승선 시간이 다가오자 많은 사람들이 승강장에 길게 늘어섰다. 대부분 등산복 차침이었다.
섬에서 온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지 안에서 손님과 차량 등이 내렸다. 한 아주머니가 장화를 신고 한 손에 고무 함지박을 들고 나왔다. 그 모습에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체취가 묻어났다. 그리고 이 배가 무엇보다도 그 곳 주민들의 긴요한 교통수단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 그 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관광객이 훨씬 더 많았다.
잠시 후 기다리던 관광객들이 배 안으로 우르르 들어섰다. 배의 앞쪽에는 2층의 선실이 있고 사람들이 타는 뒤편은 차량을 싣는 갑판으로 되어 있었다.
일행이 탄 배가 잠시 지체하다 10시 20분 장봉도를 향해 출발했다. 배가 출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심전심 2층과 옥상 갑판위로 올라갔다. 거기서 바다풍광을 보며 바람을 쏘이기도 하고 새우깡을 들고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관광지 부둣가에 사는 갈매기들은 그런 일에 길들여졌는지 사람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 내미는 새우깡을 곡예 하듯 받아먹었다. 그리고 많은 갈매기 떼가 모여들어 가까이 날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날씨가 점차 맑아지고 투명한 햇살이 잔잔한 바다와 섬들을 더 화사한 분위기를 감돌게 했다. 상쾌한 바닷바람이 얼굴에 스치고 주변의 섬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일상과 다른 여가롭고 별천지의 몽롱함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 선실과 갑판에 오른 승객들은 약간 들뜬 표정으로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는 바다 위에서 낭만스런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휴일을 맞은 사람들 마음의 한가로움과 바다라는 장소가 한데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였다. 배 안은 승선한 인원이 많아서 이곳저곳이 붐비고 있었다. 우리가 찾아가는 장봉도가 점차 많이 알려지고 있는 듯 했다. 섬 유람과 산행을 겸할 수 있는 것이 관심을 끌게 된 것 같았다.
이 곳 장봉도가 주복을 끌 게 된 것은 영종도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부터일 것이다. 그 이전에는 영종도와 장봉도 모두 그리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영종도의 인천 국제공항의 건설은 매우 획기적인 역사(役事)라 할 수 있다. 그 것은 섬 전체를 단일 공항으로 만든다는 거대한 발상과 바다를 매립하면서 섬 자체의 토사와 자원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도 특별한 아이디어가 담긴 일이었다. 그리고 그 후 완공된 국제공항은 동북아 교통과 물류의 크게 판도를 바꾸어 놓았고 그 주변의 섬들의 가치도 새롭게 인식될 수 있게 되었다. 영종도와의 지정학적 의미와 더불어 나지막하고 평온하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갖고 있던 본래의 가치가 인천 공항 철도 같은 교통 시설이 갖춰짐으로서 당일에 오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섬 여행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장봉도의 유래는 고려말엽에 몽고 병을 피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본도로 피난을 와서 거주하면서 섬이 길고 봉우리가 많다하여 긴 장자(長)와 봉우리봉자(峰)를 사용하여 장봉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응암 해수욕장, 진촌 해수욕장, 한들해수욕장 등 고운 백사장과 노송이 어우러져 운치 있는 해수욕장아 자랑이다. 그 중 2km 길이로 펼쳐진 응암해수욕장은 인어의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다시 선실로 들어오니 창 쪽으로 배열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마치 영화 스크린을 감상하듯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와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앞을 지나는 신도는 옆으로 길게 펼쳐 있어 마치 긴 언덕처럼 끊임없이 펼쳐 보이고 있었다. 장봉도로 가는 여객선은 신도와 시도, 모도 앞을 차례로 지나가게 되었다.
10시 56분 장봉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장봉도를 오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배에서 내린 많은 인원이 다 탈 수 없는 상황에서 한시간 꼴로 다니기 때문에, 버스를 타지 못하면 할 수 없이 한 시간을 기다려야 되기 때문이다.
선착장 주변을 돌아보니 보니 사진으로 보았던 인어상이 보였다. 인어상은 이 섬의 전설과 관련이 있다. 옛날 장봉도 날가지 어장에서 어느 어부가 그물을 걷으니 인어가 그물에 걸려 나왔다. 뱃사람들은 그 인어를 측은히 여기고 그대로 바다에 넣어 주었는데 그 후 그 곳에 그물을 치니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우리 일행도 처음에는 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바로 산행을 시작하기로 하여 우측 해변도로로 이동해 들머리에 도착했다. 들머리까지 약 200m 정도 해안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사이 우측 바다 건너에 모도와 시도가 겹쳐 보였다.
11시 5분 들머리에 그려 놓은 산행 안내판을 보고 산행을 시작했다. 산이 나지막하고 흙산이어서 걷기 편했다. 조금 올라가니 주변이 트여 보였다. 하늘에는 간간히 비행기가 지나갔다.
11시 18분 장봉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상산에 도착했다. 장봉도의 전경 전체가 포착되는 지점으로 거기서 바라보이는 풍경이 이 섬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 곳 정상부에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거기서 잠시 머무르며 스케치를 하다 보니 뒤에 온 다른 일행들이 거기서 자리를 잡고 앉아 간식을 먹었다. 한 사람이 잘 삭힌 홍어회라며 일행에게 권했다. 맞은편에서 오던 아주머니들이 정자에 오르자 맛을 보라며 권하였다.
잠시 후 스케치를 마치고 내림길을 걸어가니 장봉1리 마을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그 곳은 토착 주민의 마을이라기보다 외지인들의 별장인 전원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 안쪽을 지나는 콘크리트 포장로를 걸어 빠져나가면서 길가에 서 있는 사람에게 국사봉 가는 길을 물으니 우측 산길로 되도 되고 도로를 따라 가도 된다고 했다. 다시 많은 일행을 보았느냐고 물으니 도로로 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도로로 가다 다시 되돌아와 산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조금 오르니 일행이 보였다. 오르막길 옆에 세 팀으로 나누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침에 출발해 서울로부터 70여 km 떨어진 자연의 품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특별하게 여겨졌다. 맑은 공기에 오월의 푸르름이 무르 익어가고 진달래가 수 놓인 숲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도시 식당에서의 식사를 할 때와 비할 바 아니었다.
일행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도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밥과 반찬 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과 막걸리 등을 곁들이며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중 한 그룹에 끼어 함께 식사를 했다. 오늘은 산행이 가벼울 것 같아 삶은 감자 3개를 가져 왔다.
12시 18분 먼저 출발하여 국사봉을 향해 갔다. 평지 같은 능선길을 가다보니 길에 놓인 벤치에서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누워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앞 봉우리를 오르니 다른 일행들이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봉우리에 오르자 완만한 산세 로 이어진 뒤편 멀리 국사봉 정상이 보였다.
12시 26분 육교가 지나는 도로에 도착했다. 육교의 통행을 통재하고 있어서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 도로를 건너 다시 산길에 접어들었다. 지나는 길은 산세가 완만하여 매우 편안하게 느껴졌다.
다시 봉우리를 지나 12시 40분 마성터 표지판과 마상이 있는 다리 앞에 도착했다. 표지판에 “마성 터로 불리는 북도면 장봉리 독바위 일대는 1454년경부터 1895년경까지 있던 ‘장봉목장’터이다. 장몽복장에서는 처음에는 소를 방목하였다가 인진왜란 이후에는 말을 키웠다. 이 곳은 국사봉 동쪽, 목장의 출입구였던 말문 고개를 경계로 섬의 동쪽지역에 속한다. 마성은 말을 관리하기 위해 지었는데, 산돌을 이용해 막쌓기로 해안까지 축조하였다. 현재 대부분 없어지고 석재 일부가 말문고개를 경게로 동쪽과 서쪽에 흩어져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 곳을 자니, 12시 47분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올랐다. 그 곳에 국사봉을 줄 알았는데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부 바닥에 삼각점에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서 진행방향 저 앞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국사봉 같았다. 그 곳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12시 50분 국사봉에 도착했다. 그 곳 정상에도 아까 지난 상산 봉우리처럼 정자가 놓여 있었다. 그 정자 안에 두 팀이 모여 각자 식사를 하며 두런두런 예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좌측의 팀은 동창 모임 같았다.
거기서 잠시 머무르며 앞에 펼쳐 보이는 풍경을 스케치 했다. 장봉도에는 장봉 1리부터 4리까지 있는데 상산에서 앞에 내려다보인 곳이 장봉1리이고 앞에 보이는 마을이 장봉2리 같았다. 장봉도에는 여러 봉우리 사이의 낮고 평평한 곳에 경작지를 뿌리 삼아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국사봉을 지나 가막머리로 향했다. 국사봉을 700m 지나온 내리막길 안부에 물탱크가 놓여 있었다. 장봉 3리가 1km 남아 있었다. 그 옆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온 한 분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공덕역에서 공항 철도를 탈 때 옆에 앉았던 분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하고 있어서 인사는 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봉우리를 넘어 1시 34분 국사봉을 1.4km 지나온 곳에 갈림길이 나왔다. 우측으로 가야 될 것을 길을 잘 못 들어 한동안 직진해 가다 돌아 나와 다시 가막머리 쪽으로 향했다. 복사꽃이 수를 놓은 고개를 넘어가는 굽은 길을 지나니 100톤 용량의 큰 물탱크가 보였다. 그것은 마을 상수도로 쓰이고 있었다. 사각 철망 울타리 안에 주름진 알미늄 외장판낼로 마감한 원형 시설물이 조형미가 느껴졌다.
내리막길을 가다보니 아래쪽에 집이 한 채 보였다. 그 옆으로 길이 있고 직진 방향으로도 산길이 있어서 어느 길로 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망설여다 산길로 이어진 길이 맞을 것 같아서 산길로 내려가다 보니 맞은편에서 몇 분의 등산객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 그 길로 길로 내려가 해수욕장이 나오면 좌측 산길을 오르라고 했다.
알려준 대로 해수욕장을 바라보며 가다 산길을 올랐다. 그런데 길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계속 가다보니 참호가 연이어 나타났다. 그렇게 계속 가다보니 아예 길의 흔적이 끊기고 말았다. 다시 뒤돌아 나왔다. 아까 앞 봉우리서 만났던 일행을 만났다. 길이 없다고 하자 그 중 한 분이 자기가 지났던 곳이라며 앞서 갔다.
다시 되돌아 나와 집 옆쪽으로 난 길을 행해 가다보니 일행이 포장도로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산길을 올라 봉우리를 넘으니 도로가 나오고 다시 산길로 봉우리를 오르니 앞서 온 일행이 모여 쉬고 있다가 막걸리를 주어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이 곳을 오기 전에 지인이 알려준 곳을 들러 가려고 앞서 출발했다. 일행은 가막머리까지 가지 않고 장봉 4리에서 버스를 탄다고 했다. 장봉4리 로 가는 포장도로를 지나 가막머리로 이어지는 산길을 가다 우측으로 봉우리를 오르니 봉수대가 보였다. 그 봉수대는 고려가 이웃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형성된 연락망일 것 같았다. 그 옆 정자에 오르니 지나오며 길을 잘못 들었던 봉우리와 해안이 보였다
봉수대에서 내려와 우측 산길로 가다보니 아래쪽에 그 앞쪽을 지나는 도로가 보였다. 하지만 연결된 길이 없어서 산비탈 수풀을 헤치고 내려갔다. 거기서 우측 굽은 오르막길을 넘어가니 지인이 예기했던 장소가 눈에 띠었다.
그 곳을 나와 일행과 함께 버스를 타기로 한 장봉 4리를 찾아갔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앞서 온 일행이 보였다. 뒤에 오던 일행들도 한사람씩 도착했다. 그 곳 마을도 나지막한 산세에 들러 쌓여 평온한 분위기였다. 장봉도는 육지보다 철이 늦은지 철쭉과 배꽃, 복사꽃 등이 아직 선명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다 논가로 내려가 사진을 찍었다. 야트막한 산자락이 아늑하게 감싸안은 들녘에 작년에 추수한 벼포기 사이로 발갛게 하늘을 비추는 논물이 고여 있고, 봄볕에 돋아난 풀이 연둣빛으로 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논가에 조성되어 있는 늪지에 산벗꽃닢이 떠 있고 미나리가 파릇하게 돋아나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 일행뿐 아니라 먼저 와서 줄을 선 다른 일행까지 인원이 많아 다 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뒤에서 타는 사람들이 밀고 들어가 버스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겨우 다 타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라 선착장까지 가는 도중 기다리던 다른 등산객들은 태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장봉 1리에서 그 섬에 사는 할머니를 발견하자 태우고 가야 된다고 해서 미리 조금씩 물러서며 작은 공간을 만들어 탈 수 있게 했다.
3시 48분, 오전에 들어섰던 선착장에 도착했다. 재무가 매표창구에 줄을 서서 단체 표를 샀다. 표가 없으면 나가는 배를 탈 수 없으니 들어올 때 그냥 태워도 무단 승선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선착장으로 가 기다리니 앞배가 막 떠나가고 있었다. 그 것을 보고 실망한 일행이 뾰도롱 해서 술을 마시고 가자고 하는데 옆 사람들이 금새 온다고 해서 그 자리서 기다려 배를 탔다.
귀가길에 오르며 다시 바다 위를 떠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바다를 접할 때마다 특별한 감흥을 느끼게 되는 듯하다. 산수라는 말이 있듯이 물과 산은 가장 대표적인 자연 구성 요소로서 대비의 감각과 조화로운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동양 사상의 근본인 음양의 원리와도 통한다.
인류 초기에는 인류의 삶이 물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대에 강가나 바닷가는 사람들의 살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현대의 조선 기술보다 생산성이 높지는 않았지만 바다를 건너고 고기를 잡거나 피차간의 전쟁을 이기기 위해 많은 배가 건조되었다. 그리고 한때 바다는 세계의 쟁패를 판가름하던 곳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해양의 시대가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 및 서역 등지까지 해상을 통한 교역이 활발했고 해상을 제패했던 장보고나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등도 해상 무역을 하던 세력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해상을 장악함으로서 일본이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대에도 바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 사업, 무역이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몇 분이 새우깡을 손에 들자 갈매기가 날아들었다. 해가 서쪽으로 지나가면서 역광이 비춰 오전에 접하던 주변 풍광이 달라 보였다. 완만한 능선 길을 산보하듯 걸으며 즐겁게 한나절을 보내고 귀가길 에 오른 사람들이 표정이 다 행복해 보였다.
4시 48분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일행은 운서역 근처로 나와 막횟집에 들러 지난번 주작산 산행 때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한 횟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귀가했다.
(20130511)
첫댓글 다시 다녀온 듯한 느낌의 장봉도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봄 소풍같은 섬 산행 같이해서 즐거웠습니다.
김석환건축사님 감사합니다.
끝까지 함께하지못해 아쉽지만 혼자 돌아오는길도 좋았네요..집행부 감솨1````~~
좋은 계절의 청명한 날씨에 봄기운의 운치가 베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산행을 무사히 마치기까지 정회장님을 비롯한 임원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처럼 참석한 서울건축사등산대회 참 즐거웠고요 ~ ^L^ ~
김석환 건축사님의 글과 사진, 그림이 잘 어우러진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예, 저도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 좋은 곳에 박건축사님과 함께 나들이 하듯 동행하여 즐거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