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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대웅보전 처마에는 봉황문양이 여러곳에 있다.
육화당 다실에서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白蓮社이며 조선후기에 萬德寺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白蓮寺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무염국사)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백련사는 법화사상의 천년도량으로 고려 후기인 1211년(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가 주도하여 일어난 불교 개혁 운동인 백련결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유명하다.또한 한때는 중국 숭산에는 소림사,한국 만덕산에는 백련사라 할 정도로 무술로 유명하며,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스님들이 나라를 위해 의병으로 활동했던 사찰로 유명한 곳이다.특히 18세기에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완도 신지도에 귀양차 왔다가 이 절에 들러
만경루와 대웅보전의 두 현판의 글씨를 남겨 놓았으니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1. 가람배치와 연혁
백련사(白蓮寺)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11번지 월출산(月出山) 남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둔사의 말사이다. 절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이고 조선 후기에 만덕사(萬德寺)로 불리다가 근래 다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창건은 대웅보전에 있는 중수기 현판에 의하면 통일신라 시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6) 때 무염(無染, 801~888)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전하지만 현판이 18세기에 쓰여진 것이라서 확실한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절은 그 뒤 고려시대인 1211년(희종 7)에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에 의해 중창되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요세는 이보다 앞서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거주했는데, 이 지방의 독실한 불교 신자인 최표(崔彪), 최홍(崔弘) 형제와 이인천(李仁闡) 등의 요청으로 만덕산에 옮겨와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 지담(之湛), 법안(法安) 등으로 하여금 건물 80여 칸을 짓게 하고 1216년(고종 3)에 낙성법회를 열었다. 그 뒤 요세 스님은 1221년에 남원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청으로 관내에 제2의 백련사를 설치하고 몇 년을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1223년 최표의 간청으로 다시 백련사에 돌아와 도량을 크게 넓히고 법석을 마련했다.
요세의 입적 이후 절은 천인, 원환, 천책 등으로 이어지면서 법맥을 이어 나갔는데, 고려 중후기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서 절은 왜구의 노략질로 폐사가 되다시피 했다.
조선초기에 들어와서는 1407년(태종 7) 12월의 나라에서 실시한 2차 사찰 정리기에 조계종 자복사(資福寺) 24개 사찰 중에 소속되어 있어, 비록 고려말에 왜구의 침략으로 사찰이 많이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그 명맥은 계속 유지해 갔다고 여겨진다.
절은 그 뒤 1426년(세종 8)에 천태종 승려 행호(行乎) 스님이 크게 중창하였다. 천태종의 영수이며 도대선사(都大禪師)의 칭호를 갖고 있던 행호 스님은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복락을 비는 서원(誓願)을 하면서 제자 신담(信湛) 등으로 하여금 여러 단월에게 시주를 권유하도록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효녕대군(孝寧大君)에게 편지를 보내 대공덕주가 되어 줄 것을 청했고, 효녕대군은 기쁜 마음으로 시주하고 힘을 더해 주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는데, 특히 조수(曺隨)와 강습(姜濕)이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 중창 불사는 1430년에 시작하여 1436년에 준공되었는데, 이로써 불전과 승료가 옛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효녕대군은 왕위를 세종 임금에게 양보하고 사찰을 유람할 때 백련사에 8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밭 54두 2승락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그 뒤 1621년(광해군 13)~1627년(인조 5) 사이에 취여삼우(醉如三愚) 스님이 법회를 열며 옛날 모습을 되찾았다. 취여는 청허 휴정의 제자인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제자로서 백련사의 맹주가 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도 만덕사는 몇 차례 중수되었다. 1650년(효종 1)~1659년(효종 10) 사이에는 현오(玄悟) 스님이 서원(西院) 스님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절의 탄기(坦寄) 스님이 본사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조종저(趙宗著)에게 글을 청해 <백련사사적비>를 1681년(숙종 7)에 세웠다.
1760년(영조 36) 2월에는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절의 여러 스님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시주를 이듬해 4월 8일 불사를 시작, 1762년 4월 13일 대법당의 중건을 마무리했다. 이 같은 사실은 대웅보전에 걸려 있는 중수기 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의 일은 잘 알 수 없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908년(융희 2) 서울에 거주하는 효녕대군의 자손 이정재가효녕대군이절에기부했던밭 54두 2승락과 함께 효녕대군이 거처하던 동전(東殿)을 철거해 그 목재를 되가져 갔다. 이리하여 절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되어 사찰의 유지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한다.
2. 백련사의 사격(寺格)과 법맥(法脈)
요세의 법을 계승한 천인(天因)은 상주 사불산에서 만덕산에 돌아와 백련사 제2세가 되었다. 그는 요세의 불교사상을 계승하였는데, 법화사상을 기본으로한 정토관을 통해서 그의 불교관을 표방했다. 즉 보현도량을 개설함으로써 법화사상과 정토신앙의 융합을 이루었던 것이다. 천인의 보현도량과 최씨무인정권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백련사는 보현도향을 개설하면서 최씨무인집정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최씨무인정권은 대몽항쟁의 차원에서 지식인과 서민 대중의 민심을 규합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명국사 천인의 뒤를 이은 백련사 제3세는 원환(圓晥)이다. 원환에 대해서는 천인의 문하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자료가 전혀 없어 그의 활동이나 사상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백련사 제4세는 진정국사 천책이다. 그는 요세에게 출가하여 스승의 곁에서 백련결사에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1232년(고종 19) 절에 보현도량이 개설 되었을 때 <보현도량기시소(普賢道양起始疏)>를 짓고 4년 뒤인 1236년(고종 23)에 스승의 명을 받들어 백련결사문을 짓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요세, 천인 등과 마찬가지로 법화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보현도량에세 주창한 정토관과 참법을 계승한 서민 불교를 표방했다. 또한 그가 불교의 입장에서 불교와 유교의 근본을 동일하게 이해했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백련사 제4세 진정국사 천책 이후 제5세부터는 법맥상이 혼돈이 보이고 있고, 또한 백련결사의 성격에 변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 후기 백련사는 청허 휴정의 제자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으로부터 시작해서 이후 해운 경열, 취여 삼우, 화악 문신, 설봉 회정, 송파 각훤, 정암 즉원, 연파 혜장 등 8대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백련사의 8대사가 소요 태능 계통의 전법제자로 이루어진 반면, 대둔사의 12대사는 편양 언기(鞭佯彦機, 1581~1644)의 전법제자가 대다수였다. 한편 백련사 8대사 가운데 취여 삼우·화악 문신·설봉 회정은 대둔사의 12대사에도 포함되고 있다.
3. 주요인물
(1) 원묘국사 요세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은 고려 중기 천태종의 고승으로서 백련사를 중창한 분이며, 현재의 경상남도 의령인 신번현(新繁縣)의 호장을 지낸 아버지 서필중(徐必中)과 어머니 서씨 사이에 합천에서 태어났다.
1174년(명종 4) 합천 천락사에서 출가해 균정스님을 은사로 천태교관을 닦았다. 1185년 승과에 합격하고, 그 뒤 천태종지에 뜻을 두고 널리 강의에 참석하여 수련을 쌓은 결과 몇 년이 못되어 일가를 이룰 만한 덕망을 얻게 되었다. 1198년 후진 양성과 수련을 위해 전국 유명 사찰을 찾아 순례하다가 영동산 장연사에서 법회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때 지눌이 팔공산 불갑사에서 그 소문을 듣고 선을 수행하자는 내용의 시를 보냈는데, 서로 뜻이 맞아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지눌을 1190년부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운동을 다지고 있었으므로, 이 동안 요세는 정혜사의 선 수행법을 익힐 수 있었다.
스님은 1208년(희종 4) 영암 월생산[월출산] 약사사에 거주하고 있을 때, 천태종 중흥의 사명을 자각하고 “만약에 천태의 묘해(妙解)를 발하지 못하면 영명 연수(永明延壽)의 120가지 병(病)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자각은 요세가 지눌의 조계선에서 천태선으로 복귀하는 사상적 전환점이 되는 동시에, 뒤에 전개되는 백련결사운동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1211년에는 강진의 불교 신자 최표·최홍·이인천등의간청으로 수행장소를 만덕사 옛터로 옮기고 절을 새롭게지어 천태종중흥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221년 봄 남원태수 복장한의 요청으로 관내 백련산으로 옮겨 몇 년을 주석하다, 1223년 최표 등의 간청으로 다시 만덕사에 돌아왔다.
스님은 1232년(고종 19) 4월 8일 처음으로 만덕사에서 보현도량을 결성하고 전통적인 법화삼매참회를 닦았다. 도량의 명칭을 보현도량이라고 한 것은 <법화참의>에 나타난 참회의 주존이 보현보살이기 때문이다. 백련결사운동은 보현도량의 개설을 계기로 그 체제가 정비되었고, 백련사라는 결사 명칭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백련결사 운동의 구체적 내용은 천태지관, 법화삼매참, 정토왕생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요세의 백련결사에 참여한 훌륭한 제자만도 38명이었으며, 국왕 이하 지방관, 서민에 이르기까지 직접 결사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300여명이나 되었다. 그 밖에 멀리서 결사에 인연을 맺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1237년 고종은 요세에게 선사의 법계와 세찬을 내렸으며, 강종의 서녀이며 최충헌의부인인정화택주는백련사의외호에힘써무량수불상을조성하여봉안하였을뿐만아니라「금자법화경」을사경하도록했다. 1240년「계환해법화경」을 개판하여 보급하였는데, 당시의 권력자 최이(崔이)가 책의 발문을 썼다. 백련사 보현도량은 이와 같이 최씨무인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그 비호로 급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요세는 50년 동안 수도인 개경에 발을 붙인 적은 없었다.
1245년 4월에 제자 천인에게 백련사를 맡기고 별원으로 물러나 같은 해 7월 입적하였다. 시호는 원묘국사, 탑명은 중진이며 자는 안빈(安貧)이다.
요세 스님은 천성이 순후하며 꾸밈이 없으며 눈으로 삿된 것을 보지 않았고 말을 함부로 하지도 않았다. 또한 밤에는 등불을 켜지 않았으며, 잠잘 때는 요를 깔지도 않았고, 시주물은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오직 옷 세벌과 발우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일상생홀에서도 매일 참천을 했으며 경전을 가르치는 여가에 「법화경」 한 부를 외우고, 준제신주를 1000번, 나무아미타불을 1만 번 염송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준제신주를 염송한 것은 그 당시 천태 밀교가 융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백련사의 보현도량에서는「계환해법화경」이 채택되어 널리 신앙되었다. 그것은「화엄경」과「법화경」이 다같이 문수보살에게 시작하여 보현보살에게 끝난다는 독특한 법화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스님은 일생 동안 참회를 행하고 강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참회(徐懺悔)’로 불렀다고도 한다.
저서로는「삼대부절요」가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2) 천인
천인(天因, 1205~1248) 스님은 고려 후기 천태종 백련사의 고승이다. 성은 박씨이고, 청주출신으로서 만덕산 백련사의 제2세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글을 잘하여 유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었으나 과거에 실패하자 실의에 빠져 출가를 결심하고 허적(許迪)·신극정(申克貞) 등과 함께 백련사의 원묘국사 요세를 찾아가 스님이 되었다. 그 뒤 송광사의 수선사 제2세 혜심으로부터 조계선의 요령을 얻어 다시 백련사로 돌아와 수행하다가 요세의 천태교관을 전수 받았다. 그 뒤 지혜가 크게 열려 변화가 자재하였다 한다. 요세가 천인에게 백련사의 법석을 맡기려 하자 몰래 도망했는데 요세스님으로부터 “어찌 그렇게 배은은 하느냐”는 글을 받고는 다시 돌아와 백련사의 제2세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제자 원환에게 법을 전한 뒤 물러났다.
1247년에 몽고족이 쳐들어오자 상왕산의 법화사에 머무른 뒤 이듬해인 1248년에 강진 용혈암에서 문인들을 모아 임종게를 남기고 입멸했다. 시호는 정명국사이며, 저서는「정명국사시집」 3권과「정명국사후집」1권이 있다.
(3) 천책
천책 스님은 고려 고종 때의 천태종 고승인데 생몰년을 알 수 없다. 성은 신씨(申氏)이고 자는 몽차(蒙且)이다. 어렸을 때에 급제하여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무상을 느끼고 백련사로 출가하여 백련결사를 제창한 원묘국사의 제자가 되었고, 그 법을 이어받아 백련사의 제4세가 되어 천태종풍을 떨쳤다. 그는 만년에 용혈암(龍穴庵)에 거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용혈존숙’이라 불렀다. 시호는 진정국사(眞靜國師)이며, 저서로는「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1권과「법화해동전홍록(法華海東傳弘錄)」1권,「호산록(湖山錄)」2권 등이 있다. 선문보장록은 선을 높이 내세우고 교를 낮추어 보고 있어 천책의 저서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법화해동전홍록」은「법화경」의 영험설화를 수록한 것으로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 요원(了圓)이지은「법화영험전」에많이인용되어있다.
(4) 정오
정오(丁午) 스님은 고려 충선왕 때의 국통으로 천태종의 고승인데 생몰년을 알 수 없다. 젊은 시절에 승과에 합격한 뒤 여러 곳을 유력하였다. 1278년(충렬왕 4) 봄 용혈암에 거주하다가 1280년 여름에 상주로 옮겨 주석했다. 그 뒤 1290년 봄에 괘탑암(掛搭庵)으로 옮겼으며 1294년 가을에 괘탑암을 중수했다. 1295년 4월 이 암자의 남쪽 봉우리에 능허대(凌虛臺)를 세웠으며 1297년 봄에는 초은정(招隱亭)을 세웠다. 1302년 월출산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가 충렬왕의 요청으로 왕의 원찰(願刹) 묘련사의 제3세 법주가 되었다. 1306년 ‘백월낭공적조무애대선사’라는 호를 제수 받았고, 이듬해 여름에는 왕사로 책봉되어 다시 ‘불일보조정혜묘원진감대선사’라는 호를 받았다. 용두산 금장사를 하산소로 하여서 백은 16근을 희사, 금장사의 금당을 수리하고 주불인 미륵삼존을 개금했다. 1308년 가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선교각종산문도반총섭조제’의 호를 내렸다.
(5) 운묵
고려 후기 백련사의 고승인 운묵(雲默) 스님은 호가 부암(浮庵), 자가 무기(無寄)로서 정확한 생몰년대는 모른다. 일찍이 백련사에 출가해 천책의 제자 불인 정조(佛印靜照)국사 이안(而安)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밑에서 천태교학을 공부한 뒤 천태선에응시하여합격하였다. 그 때 굴암사의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명리를 버리고 다시 수행의 길에 올랐다. 금강산·오대산 등 명산대찰을 유력하다가 시흥산에 이르러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그곳에서「묘법연화경」을 독송하고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틈틈이 불화를 그리며 20여 년을 지내다 입적했다. 저서로는「석가여래행적송」2권 1책과「천태말학운묵화상경책」1권이 있다.
4. 성보문화재
백련사는 경사가 급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계단식 석축이 많다. 중심 구역의 가장 뒤에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36호인 대웅보전이 있고, 대웅보전 양옆으로 칠성각과 명부전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만경루(萬景樓)가 있고, 명부전 서쪽에 응진당 및 그 앞 넓은 공간에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37호인 사적비가 서 있다. 또 만경루 좌우로 요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육화당(六和堂)’으로 불린다. 육화당은 본래 있던 요사를 1995년 확장 중수한 것으로서,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객실로 사용된다. 만경루 옆에는 시멘트로 새로 지은 종각이 있다. 본래 종각은 칠성각과 대웅보전 사이에 있었으나 1991년 현 위치로 옮겼다. 가람 배치상 현재는 만경루가 가장 앞에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다.
만경루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은그야말로 빼어난 절경이다. 그리고 강진만을건너바라다보이는곳이고려청자의생산지로유명한강진사당리이다. 백련결사 운동이 절정에 이르는 13세기 후반에 사당리의 사기장(砂器匠)들도 결사에 참여하여 그릇을 시주했는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백련사에 시주할 그릇을 사당리의 사기장에게 주문했는지 그릇 바닥 안에 ‘만덕(万德)’이란 글씨가 상감된 13세기 후반의 청자 조각이 사당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1)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1702년에 중건되었다. 현판의 ‘대웅보전’글씨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써, 1755년 진도로 유배된 이후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러 쓴 듯하다.
건축양식을 보면, 기단을 높이 쌓아 경사면을 고르고 건물을 안치했는데 건물의 뒷부분에도 3단으로 높은 축대를 쌓았다. 공포는 다포식이고, 천정은 우물천정인데 중앙 부분을 한 단 높게 처리하여 내부 공간을 크게 활용하고 있다. 앞면 중앙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해 놓아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안에는 나무로 모신 석가·약사·아미타불의 삼세불좌상이 있다. 높이가 150cm인 본존불은 머리가 나발이며 머리 위에는 조그만 보주형 육계가 솟아 있고 그 아래에 계주를 표시하였다. 두꺼운 느낌을 주는 옷자락이 양어깨를 감싸고 가슴에는 내의 자락이 표현되었고,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을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았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손 모양이 다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삼세불 뒤에는 1765년(영조 41)에 그린 영산회상도·약사회도·미타회도를 한 폭에 그린 가로 400cm, 세로 450cm의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최근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웅보전 동쪽 벽에도 1773년에 그린 삼장탱화가 있었지만 후불탱화와 같이 도난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서쪽 벽에 신중탱화만 모셔져 있다.
한편 안에는 전각의 중수 사실을 알려주는 중수기 현판 2매가 걸려 있어 참고가 된다. 하나는 <백련사대법당중수기>로서, 대웅보전의 중건 배경과 연도 및 불사에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1760년(영조 36) 2월에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왈찰(曰刹)·지정(智正)·혜철(惠哲)·태화(太和)·신징(愼澄)·규연(圭演)·찰연(察演)·윤철(閏哲)·연징(蓮澄)·붕관(鵬寬) 스님 등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여러 곳에서 시주를 모아 이듬해 4월 8일 불사를 시작, 1762년 4월 13일 대법당 등의 중건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 중수기는 동강(桐岡) 이의경(李毅敬, 1704~1778)이 지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설 지일(晶雪智逸) 스님이 지은 <해탈문중수기>인데, 1836년(헌종 2) 해탈문을 중수한 사실이 적혀 있다. 해탈문은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는 만경루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안에는 사자(獅子)를 조각해 법고를 받치도록 고안한 법고대(法鼓臺)와 반자(飯子)가 하나 있다. 법고대는 법고보다 오래된 것인데, 연잎 형태를 한 받침 부분의 지름으로 보아 본래의 법고는 현재 것보다 더 컸던 듯하다.
(2) 명부전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안에는 지장상을 비롯해서 무독귀왕·도명존자 및 시왕 10체와 판관·녹사·인왕상 각 2체 그리고 사자상 1체 등 지장보살의 권속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안에는 1775년(영조 51)에 정암 즉원(晶巖卽圓, 1738~1794) 스님이 지은 <시왕전중수기> 현판이 있어 연혁을 아는 데 참고가 된다.
(3) 칠성각 · 응진당
칠성각은 맞배지붕에 앞면 2칸, 옆면 1칸이며 안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가 있다. 산신탱화는 가로 83cm, 세로 104cm로써 1931년에 봉안되었는데 본래는 대웅보전에 있었다.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석가모니불상을 비롯, 아난·가섭 등의 16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있다.
(4) 만경루
맞배지붕에 앞면 5칸, 옆면 2칸이다. ‘만경루’현판은 대웅보전 현판과 마찬가지로 이광사가 썼고, 그 밖에 1871년(순조 17) 응언(應彦) 스님이 지은 <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이 있다. 또한 1969년에 주조한 중종도 있고, 만경루 옆에는 맷돌이 있다.
(5) 백련사사적비
1681년(숙종 7)에 탄기 스님이 절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세웠다.
귀부는 목을 짧게 조각하고 긴 수염은 늘어뜨려 움츠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등위의 귀갑(龜甲) 안에는 5~6잎의 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중앙에는 굵게 양각한 넝쿨무늬를 배치하여 사각형의 비좌를 에워싸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감수하고편집한「만덕사지」에이귀부와관련된흥미있는기록이있다. 「만덕사지」4권에 보면, 이 비문을 요약하여 적으면서 그 끝부분에 ‘옛 비는 유실되어 그 소재를 알 수 없고 귀부만 남았는데 탄기 스님이 다른 돌로 비를 세우면서 옛날 비석의 귀부를 사용하였다.’ 라고 주를 달아 놓은 것이 그것이다. 또한 비문에도 ‘학사 최자(崔滋)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원묘국사의 비가 있었지만 유실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가지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이 사적기에서 옛 비라 지칭한 비는 곧 비문에서 말하는 원묘국사의 비석이고 귀부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비문의 앞면에는 조종저(趙宗著, 1631~1690)가 짓고 낭선군 이우(李俁, 1637~1693)가 글씨를 쓰고 낭원군 이간(李偘, 1640~1699)이 두전(頭篆)을 쓴 비문을 음각했다. 비석 옆면에는 넝쿨과 꽃무늬를 조각하고 뒷면에는 비의 건립과 관계된 스님과 시주자, 장인들의 이름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절의 위치와 연혁, 원묘국사의 백련결사, 원묘국사비와 사리탑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서까래와 부연을 조각하고 윗면을 우진각지붕 형태로 하고 용마루에는 용을 조각했다.
비문의 글씨를 쓴 낭선군 이우는 선조(宣祖)의 증손으로 이외에도 많은 불교 금석문에서 글씨를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 순천 송광사사적비, 평강 보월사중수비, 영변 보현사풍담대사비는 백련사사적비와 같이 조종저가 글을 짓고 낭선군 이우가 글씨를 쓰고 낭원군 이간이 두전을 쓴 것들이다.
(6) 부도
절에는 응진전 앞에 1기, 만경루 뒤 선방 앞에 1기, 절입구 축대 위에 1기 그리고 절 서쪽의 동백 숲에 4기 등 전부 7기의 부도가 전해진다. 이 가운데 부도의 주인공 이름이 알려진 것은 선방 앞의 춘파당 부도와 동백 숲의 월인당 부도뿐이다. 월인당은 대웅보전 중수기를 쓴 총신 스님이며, 춘파당은 누구인지 모른다.
월인 총신(月印聰信) 스님은 건륭(1736~1795) 연간에 활동한 분으로서 본래 미황사 스님이었는데, 만덕사에 머무를 때 글씨를 잘 쓴다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백련사사적비>에는 17세기 후반의 부도 8기가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원모국사중진탑이라 하였다. 월인당의 부도는 1804년에 세워졌으므로 따라서 사적비에서 말하는 부도 가운데 몇 개는 당시에 이미 유실된 것을 알 수 있다.
절에서는 동백 숲의 가장 위쪽에 있는, 대좌가 사각형이고 둥근 모양의 탑신에 구슬 무늬를 새긴 것을 <원묘국사중진탑>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대에 세워진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사리탑이나 고려말에 세워진 영광 불갑사의 각진국사자운지탑과 비교하여 볼 때 가장 아래쪽에 서 있는, 사각형 평면의 부도가 바로 <원묘국사중진탑>이라 생각된다.
(7) 동백림
절은 고려시대부터 동백림으로 유명했다. 현재도 아름드리 동백이 우거져 있어 천년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동백 숲을 지나면 만경루에 닿게 된다.
절의 <백련사사적비> 내용 가운데는 만경루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치가 빼어나다는 것과 절 주변의 동백 숲에서 겨울과 봄 사이에 빨갛게 피어나는 동백꽃이 볼만하다고 한 글이 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 성임(成任)과 임억령(林億齡)이 이 아름다운 모습을 읊은 시가 있는데, 시 내용에는 지은이가 이러한 승경을 직접 보지 못해 한스럽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지금도 수많은 탐방객을 부르고 있는 백련사의 동백은 예전에도 전국적으로 유명했던가 보다.
또한 동백림 부근에는 작설차(雀舌茶)가 야생하고 있는데, 예전에도 이곳 작설차가 유명했던 듯 전차(煎茶)로 만들어 나라에 진상했다 한다.
(1974년에 조성된 산신탱화),백련사 대웅보전 우측 삼성각에 모셔져 있다.
금어는 김일섭스님, 석정스님 스승님으로 알려져있다.
산신탱화는 1931년에 봉안되었는데 본래는 대웅보전에 있었다.차를 달여 산신에게 올리는 모습을 통하여
1930년대 차를 달이는 학술적 귀한 자료이다.백련사 주지 여연스님이 설명해 주셔서 저도 관심을 갖고 전국 사찰의 산신각에 등장하는 다화를 몇곳 확인했습니다..이와 비슷한 탱화가 전남 무안군 무안읍소재 약사사에 봉안된 산신각 탱화와 백련사 산신각 탱화를 비교 연구하는 것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주말에 백련사에 머물때 다인들이 백련사를 방문하면 가능하면 삼성각에 모셔진 1931년에 조성된 다화를 설명해 드리고 있습니다.강진 백련사는 신라말 무염국사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로 고려때 8분의 국사를 배출했고 백련결사가 120년간 이어져 곳이다.조선시대에는 서산휴정대사님이 지리산에 머물때 백련사 중창 모연문을 써주셔서 중창하는데 큰 힘을 보태어 주셨고 서산휴정대사의 법손들이 백련사 8대사를 배출한 다선도량이다. 사명당대사도 문집에 백련사에 머물때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긴 시가 전한다.백련사는 중국 소림사와 비견되는 곳이다.임진왜란때 승병을 양성하던 곳이요 소림사처럼 무술을 잘하는 스님들이 백련사에 모여서 수행하던 곳이다.지금은 백련사에 무승들이 수행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이부분도 조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는 18년간 대흥사 일지암에서 18년간 다선을 수행하시던 다승 여연스님이 백련사로 옮기셔서 서산휴정대사의 다선을
통하여 이제는 초의를 알리는 것 뿐만 아니라,서산휴정대사,사명대사,소요대사를 포함한 후손 8대사를 배출한 곳이다.아암혜장선사가 백련사 주지로 주석하때 초의스님을 백련사에 3년간 머물며 다산초당 다산선생에게 유학과 시문을 공부하도록 추천해주시며 초의스님을 후원하여 주셨다.아마 1974년에 주석하신 주지스님이 대웅보전에 산신탱화를 통하여 1000년넘게 이어져온 백련사의 다선을 상징하지 않았느냐 하는 해석을 하게됩니다.
이 다화때문에 전국 사찰 200곳에서 다화를 이미 발견해서 10차례정도 논문으로 발표할 생각으로 지역별로 다시 분석하고 있습니다.전남지역 대표 사찰을 11곳을 선정해서 논문으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1760년대부터 다화가 등장합니다.아직까지는 이전것은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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