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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 ||
여덟 개의 바늘을 알코올램프에 달구어 각각의 바늘귀에 명주실을 꿴다.바늘 끝에서부터 0.5㎝가 남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명주실을 감는다.명주실을 감을 때에는 실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그래야만 잉크가 뭉치거나 한꺼번에 나오는 일이 없다.바늘귀 부분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1㎝정도 맨몸으로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명주실에 먼저 베니티안 레드를 묻힌다. 살에 꽂는 첫 땀.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 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우리는 그것을 첫이슬이라고 부른다.첫이슬이 맺힘과 동시에 명주실이 품고 있던 잉크가 바늘을 따라 내려온다.붉은색 잉크는 바늘 끝에 이르러 살갗에 난 작은 틈 속으로 빠르게 스며든다.마치 머리 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 밖으로 시원하게 나와 주는 듯한 기분.바늘땀을 뜰 때에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 거즈로 피를 찍어내고 잉크의 농도를 확인한다.일단 첫 땀이 성공적으로 떠지는 것을 확인하면 그때부터 내 손은 빨라지기 시작한다.속도를 잃지 않는 것.그것이 고른 색을 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명주실에 묻은 잉크 양을 조절하며 거미에게 살을 심어 준다.거미는 어느새 붉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이제 살을 뼈로 감쌀 차례이다.거미는 인간과 달리 뼈가 밖으로 나와 있는 셈이다.그것을 외골격이라 하지만 나는 단단한 피부라고 생각한다.인디아 잉크와 징크 옥사이드로 외피를 완성한다.크롬 그린이 합류되며 거미는 이제 완벽한 외골격을 갖춘다. 살갗에 묻은 잉크와 피를 닦아내자 문신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골리앗거미는 풍요로운 식사를 마치고 밀림 속에서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하다.나는 어느새 밀림 속에 숨은 한 마리 거미가 된다.가느다란 여덟 개의 다리로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투명한 거미줄에 미끄러지듯 걷는 거미.발끝에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부주의한 청색 나비 한 마리가 내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린다.청색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가 나달나달해지기까지 조용히 기다린다.그리고 다리에 난 섬세한 털로 남자의 몸을 애무하듯 먹잇감을 부드럽게 감싼다.주사바늘을 꽂듯 나비의 몸통에 촉수를 박는 그 순간. "기집년들이 보면 환장하겠는 걸?" 남자가 내 어깨를 치며 말한다.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내 몸의 모든 기가 거미의 촉수로 빨려간 것 같다.나는 담배를 피워 문다.남자도 담배를 입에 물고 암홍색 골리앗거미를 들여다보고 있다.남자는 이제 손바닥만한 외피를 얻었다.남자가 손바닥만큼 더 강인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 형사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미륵암 주지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일간 경찰서에 참고인으로 출두해 달라고 거침없이 말했다.미륵암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서 날개치듯 퍼덕였다. "듣고 있습니까? 김형자 씨가 어머님 맞죠? 김형자 씨가 미륵암 주지를 죽였답니다.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데,왜 이리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박영숙 씨가 김형자 씨를 만나 보셔야겠습니다.여보세요? 듣고 있습니까?" 문 형사는 내게 계속 대답과 반응을 요구하고 있었다.그러나 내 혀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미륵암 주지,김봉환을 아십니까? 그 뭐야 법명은 아,현파.현파스님이라고." 김봉환이라는 이름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그러나 현파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서 거센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이루며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그리고 나는 복숭앗빛 피부의 스님을 기억해 냈다.스님의 삭발한 머리는 하나하나 깨끗이 손질된 느낌을 주었고,히끗히끗 올라오는 하얀 머리털은 은회색 모래가 반짝이듯 아름다웠다.스님이 입은 낡은 승복조차도 언제나 희게 빛이 났다.그런 스님과 죽음이라니. 나는 전화기 코드를 뽑아 버렸다.검고 긴 전화선이 꼭 불길한 해충이 나오는 통로처럼 느껴졌다.한복 저고리를 바느질하던 엄마의 손은 옷감에 새겨진 고급 손수 같았다.그리고 엄마와 스님과 함께 하던 차시간,다기에 그려진 대나무보다 곧고 부드럽던 엄마의 손을 따라 떨어지던 옥빛 찻물.그런 손이 정말 스님을 죽일 수 있었을까? 마치 내가 노사의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못이 박히고 투박한 손을 들여다보았다.그러나 부모에게 결정적으로 거부당한 사람이 그렇듯이 나는 곧 냉정해졌다.보통 때처럼 아침 청소를 하고 밥을 먹었다.구입해야 할 잉크 목록을 만들고 냉장고에 남아 있는 생수를 확인했다. 거대한 곡물 창고를 방불케 하는 대형 마트에는 카트를 밀며 쇼핑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생수 한 묶음과 독한 술 몇 종류를 바구니에 담고 곧장 육류 코너로 향한다.얼리지 않은 돼지 삼겹살 부위와 아롱사태를 덩어리 채,살이 제법 붙어 있는 돼지 등뼈를 고른다.쇠고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떡심이 있는 등심,스테이크용 안심을 한 팩씩 골라 담는다. 나는 양념하지 않은 고기를 먹는다.손가락 두께로 썰어서 피가 살짝 날 정도로 구운 쇠고기나 마늘과 양파를 많이 넣고 삶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상추와 같은 야채를 곁들여 먹지도 않는다.구운 고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채소류가 아니라 하얀 쌀밥이다.쌀눈이 살짝 비치도록 말간 밥알에 약간 검어진 육류의 핏물이 스며들 때,고기의 맛은 정점에 이른다. 육류 코너를 떠나다가 쟁반 위에 올려진 붉은 살덩이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둥그런 모양의 고깃덩어리는 꼭 삭발한 스님의 머리를 연상시켰다.말끔하게 정리된 스님의 머리통은 곧 솟아오를 태양과 같았으며,그 위엄이 넘쳐 어찌 보면 동물적인 냄새가 나기도 했다.그래서 때론 동그랗고 단단해 보이는 스님의 머리통에 마오리족의 혈흔문신을 새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삭발한 머리통에서 보였던 동물적인 느낌이 내 뒤틀린 성욕과 함께 희석되어,고운 여자의 손이 스님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정사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곤 했다. 냉동고에서 서늘한 바람이 몰려온다.다리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하다.잊고 있던 감각이 저릿저릿 온몸을 자극하고 있다.배와 가슴을 따라 급속 냉동되듯 마비증상이 오고,결국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드러눕는 간질병.그 병을 고치기 위해 엄마의 손을 잡고 미륵암을 향해 오르던 비탈길.엄마의 끊임없는 절과 스님의 목탁소리.주문처럼 온몸을 휘감던 엄마의 염불.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마트에서 빠져나온다.생수와 고기팩들,생활용품 코너에서 생각없이 집어넣은 변기 청소용 솔이 든 쇼핑봉투가 제법 무겁다.집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빨라진다.빨리 집에 들어가 커다란 들통에 고기를 삶아 입안 가득 육질의 맛을 느끼고 싶었다.이 사이로 새어나올 뜨뜻한 육즙이 벌써부터 입안에 가득 고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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