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공개적으로 담배를 태우는 C.S. 루이스와 두 권의 주요 저서
작가 C.S. 루이스가 20~21세기 서구권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20세기말부터는 한국 교계에도 널리 소개돼 왔다. 그런데 루이스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띄운 쪽은 모국인 영국이기보다 오히려 미국이다. 그의 작품들은 생시보다 죽고 나서 훨씬 더 많이 팔렸다. 1억 권을 훨씬 넘는 물량이 소화됐다.
연전에 개봉된 영화 '나니아 연대기-사자, 마녀와 옷장'의 원작자로도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C.S. 루이스는 목사/사제도, 학자도 아닌 평범한 성공회 교인. '단순 기독교'(Mere Christianity) 등을 읽는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석학'으로 평가하는데 좀 우스꽝스런 단정이다. 옥스퍼드 강사였을 당시 일개 여대생(훗날의 엘리저벹 앤스콤 교수)과의 철학 논쟁에서 논리적으로 철저히 패배했음을 자인한 사람이기 때문.
루이스가 대 석학이려면 어떻게든 앤스콤에게 합리적 답변을 했어야 했다. 이 사건을 일생 일대의 쓰라린 대 수치로 여긴 루이스는 그 후 신학/철학에 관한 책을 전혀 쓰지 않고 픽션과 아동 대상 작품으로 선회했다! 그러므로 그를 '인기작가'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다.
'단순 기독교'란 책 제목 자체가 타 종교와 갈등을 일으킬 만한 소지는 다 빼버린 나머지만 주로 다뤘다는 암시다. 그런데 미국/한국 복음주의권에서 호들갑을 떨 만큼 그렇게 루이스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대 변증가', '기독교 작가'이냐는 데는 다시 문제가 따른다.
루이스의 글을 곰곰히 뜯어 읽어 보면, 그는 사실상 그런 굉장한 타이틀을 원치도 않았을 뿐더러 '복음주의자'도 아니고 속설과는 달리 심지어 거듭난 참 신자도 아니었기 때문! 어떻게 속단하냐고? 필자의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참고로 이 글은 변증가 잔 라빈스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루이스 자신의 글도 그로부터 재인용 된다.]
23년간 옥스퍼드대 강사였고 카나다 밴쿠버 리전트 대학의 챈슬러를 지낸 제임스 휴스턴 박사는 말한다. "(루이스는) 복음주의자들과 아무 문화적 연계가 없었다. 복음주의적 친구가 없었다..친구라고 해야 성공회인 아니면 천주교인이었다. 루이스는 물론, 미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수납돼 왔지만 그가 (살아있다면)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들과 연계된 적이 없고 자신을 그들 중 하나로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도 복음주의권에서 루이스가 폭 넓고 열렬히 받아 들여지고 있음을 보면 그의 신학사상은 응당 복음주의적이거나 거기 가까워야 할 것이다. 정말 루이스의 사상이 복음주의적일까. 루이스가 과연 성경대로의 신론/인간론/죄론/구원론/성경론/정부론/사회론 등을 믿었는지 물어 본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
루이스가 현존해서 만약 복음주의신학협의회(ETS)에 가입하련다면 성경의 무오성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루이스는 성경 무오성에 정면 도전한 사람이다! 진짜 복음주의자인가는 둘째치고 ETS 회원 가입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란 얘기다.
루이스는 성경 진리만을 가르치긴커녕 오히려 성경과는 배치/모순된 교리를 두루 뿌렸다. 씨와 가라지를 섞어 뿌린 것이다. 그는 예수 크리스토가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으신 대속적/속죄적 구속 교리를 거부했다.
몸의 부활에 관해서도 괴상한 자기 나름의 견해를 내세웠다. 그래서 라빈스는 단언한다. "기독교신학의 구석구석에서마다 루이스의 견해는 비성서적, 적크리스토적이었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루이스의 실체다!
왜 그런데도 루이스가 미국 복음주의 서클에서 이처럼 살갑고 뜨거운 환영을 받고 있을까? 추론컨대 미국 복음주의권이 이제 더는, 복음주의적이 아니라는 진실의 반영이 아닐까. 미국의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16세기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리 역사적 분기점, 개혁신앙의 공동 구호였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의 대 명제를 믿지도 강조하지도 않는다.
이런 현상은 지난 십년간 찰스 콜슨(교도소선교회 대표) 등이 주도해 온 '복음주의자-카톨릭 연대'(ECT)를 통해 증명돼왔다. 콜슨은 자신의 에큐메니컬적 활동의 바탕을 C.S. 루이스의 영향에 돌려 왔다. ECT의 핵심 신학사상의 바탕이 바로 루이스와 빌리 그래엄이다!
독자들 가운데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안 믿고 축자적 무오 교리를 거부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의 바탕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 봐도 그렇게 돼 있질 않다. "바로 이 [구원의] 신앙에 의해 신자는 말씀 속에 나타난 것은 무엇이든 참되다고 믿는다. 하나님 당신의 권위로 거기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 신앙고백은 사도 요한의 책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거나 시편기자가 '사탄적'이라거나 성경기록들 사이에 '모순'이 있다거나 구약의 일부가 '신화'라거나 하질 않는다. 구원을 얻는 신앙의 대상은 단순히 크리스토 자신 뿐 아니라 그 분이 하신 일(성경 기록 내용)도 포함된다!
C.S. 루이스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의 자전적 수기 '기쁨에 경탄하여'(Surprised by Joy)에서 단신론(monotheism)으로의 개종을 자랑스레 밝혀놨다. 그게 뭐 대수인가. 사도 야코보는 악령들조차도 그렇게 믿는다고 지적한다(야코보 2:19). '기쁨에..' 끝 장에서 루이스는 자신의 기독교 개종을 간단히 기술한다. 엄격히 말해서 이 개종조차도 기독교로의 개종이 아니라 "예수 크리스토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앙으로의 개종이다. 그게 뭐 대수인가, 악령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고백한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마르코 1:24)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단지 메시아 또는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도 구원엔 충분치 않다. 사도 파울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크리스토의 신성까지 믿는 유대인들을 할례주의/율법주의 탓에 저주한 바 있다. 그러니 루이스가 제 아무리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은들 그가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고 하는데 무슨 소용인가! 결국 루이스의 신앙이란 건 악령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게 무슨 복음주의인가.
설령 루이스의 마음 속에 '복음주의'가 자리잡았었다 한들 그의 책은 복음주의적이 아니다! 루이스의 공언들이 복음주의적이 아닌데도 그가 신자인가? 사도 요한은 분명히 모든 영을 검증해 보라고 했건만 그만은 아무 검증이나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우리의 동료 신자로 넉넉히 수용되는가?
천국에 가려면 적어도 기본적/성경적인 믿음이 요구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인류 모두를 사랑하시니 개인의 신앙이야 어떻든 모두들 100% 천국에 가도록 돼 있는가? 독자의 생각은 어느 쪽인가? 지난 약200년 동안 미국 교회를 주도해온 아르미니안주의에 기본적으로 보편구원론이 내재된 것인가? 어떤가?
C.S. 루이스의 기가 찬 성경관루이스는 "모든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그 모든 부분들이 다 똑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넌지시 여유를 보인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성경의 어느 부분은 딴 부분과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다르다는 얘길까?
루이스는 1959년 5월 7일자로 클라이드 킬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모든 선하고 온전한 선물이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온다면(야코보 1:18 참조) 모든 참되고 교화적인 저작물은 성경이든 아니든 어떤 의미에서 영감받았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이 막연한 '어떤 의미에서'를 통해, 그는 '모든 참되고 교화적인 저작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즉 성령의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의도가 엿뵌다.
바로 자신이 탐닉해 온 신화/전설 등을 '참되고 교화적인 저작물' 범주에 편입시키려는 숨은 어젠다다! '나니아 연대기'는 그런 어젠다를 바로 어린이 대상으로 적용해 본 게 아니겠는가. 즉 어린이들을 자신의 "참되고 교화적인" 신화/전설 계몽의 희생양으로 삼은 셈.
루이스 연구학자 마이클 크리스텐슨은 말한다. "루이스는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성경에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를 문학 명작 속에서, 딴 종교 속에서, 고대 세계 신화 속에서, 인간 이성과 통찰 속에서 인식한다. 기독교가 진리인 것은..단지 성경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숱한 딴 방법으로, 그러면서도 크리스토를 통해 으뜸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길 택하시기 때문이다."
크리스토를 어떻게 오류 없이 알 수 있는가란 근본적인 물음에서 성경과 십자가는 루이스에겐 아예 고려 대상조차 되지를 않는다. 대신 ▪ 크리스토의 신성, ▪ 신조의 진리, ▪ 기독교 전통의 권위에 관한 물음으로 국한시켜 버린다. '오직 성경'이란 개혁신앙의 원칙을 배제해 놓은 것. 책
'기독교적 성찰'에서 그는 성경을 단지 '전통'에 포함될 수 있다고만 할 뿐 성경을 신학의 바탕으로 삼지도 않았다.
성경 영감에 관한 미국 휘튼 대학의 진술서를 논평해 달라고 킬비가 요청한 데 대한 회신(1959년 5월7일)에서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경의 신적 권위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어떻든 다음 사실들을 고려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1. 성 파울이 코린토a 7장에서 "나 아닌 주님"과 "주님 아닌 내가 말합니다" 사이의 구분
2. 마태복음 1장, 루카복음 3장의 (예수) 족보 기록 사이,
(이스카리옽) 유다의 죽음에 관한 마27:5과 행1:18~19 사이의 차이와 모순점.
3. 성 루카가 어떻게 자기 재료를 확보했는지에 관한 설명.
4. 폭 넓게 인정돼 온, 최소한 성경(비유들) 속의 일부 해설의 비 역사성(물론 제 얘기는 '허위'란 얘기는 아니지만). 요나, 욥 까지도 확대해 볼 수 있음.
5. 모든 참되고 교화적인 저작물은 성경이든 아니든 어떤 의미에서 영감받았음이 분명함.
6. 요한11:49~52. 영감은 악인의 마음 속에서 부지중 작용할 수 있고 무고한 사람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자신이 의도한 비진리를 말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진리(신적 희생물)와 함께.
루이스는 위의 '팩트'들이, 성경에서 따로 뺀 어느 한 구절이 다른 구절과 엄격히 동일한 의미에서 무오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생각, 예컨대 부활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하기 때문에 구약 상의 군대 숫자는 통계적으로 정확하다는 식의 생각을 배제시킨다고 단정한다.
루이스는 매우 주관적인, 거의 신정통주의적인 성경 영감론을 갖고 있다. "성경의 총체적 작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독자(독자 역시 영감이 필요하다)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나는 폭 넓게 믿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객관적 영감을 부인한다. "그것(성경)이 또 그(독자)가 물을 만한 모든 물음에 대한 참된 해답을 준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요구하는 바로 그런 유의 진리는, 내 견해로는, 고대인들이 상상하지도 않던 것이었다." 라빈스는, 여기서 루이스가 '그런 유의 진리'가 뭔지조차 설명하지 않는 탓에 또다른 인식론적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지적한다.
이상만 봐도, 루이스가 심플한 진리 차원에서 성경은 완전한 진리임을 부정했다는 게 명백해진다.
시편기자들은 죄다 야만인들?루이스의 견해로는, 사도 요한이나 제임즈 보즈웰(18세기 스코틀란드 변호사/문필가. 사실주의 전기 '새뮤얼 존슨의 삶'으로 유명하다)이나 사실 제기에 있어 차이가 없다. 이것(요한복음)은 보도물-비록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사실 근접에 있어 거의 보즈웰에 가깝다."
루이스 딴에는 요한을 추켜올린 것이지만 '신자'라는 그로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경을 보즈웰에 견준 것은 성경/성령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다! 하물며 성경은 추호도 가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성령의 영감을 강조했던 사도 요한임에랴(계 22:18~19 참조).
루이스에게 사도 요한은 구약 시편기자들에 비하면 장미꽃 냄새가 나는 존재다. 루이스는 그의 '시편묵상'(제24쪽)에서 시편기자들을 통째로 싸잡아 "흉폭하고 자기연민적, 야만적인 인간들"(ferocious, self-pitying, barbaric men)이라고 규탄하고 시편들을 "치명적 혼동", "싸탄적", "비열하고 쌍스런" 것들로 격하/폄훼시킨다.
이 역시 성령모독, 성령훼방 죄나 다름없다. 루이스를 존중하는 독자도 시편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시편 기자들 중엔 메시아를 예언한 성군 다윗과 모세도 있음을 기억한다면. 루이스 말대로 시편 기자들이 '야만적', '싸탄적'이라면, 루이스 자신은 문명적, 성령적이라는 전제를 달고 하는 소리일터. 자신은 절대로 싸탄적일 수 없다는 얘기인가? 그야말로 어리벙벙해지는 적반하장 격 황당발언이다.
[성경=하나님 말씀] 등식 완전 부정 그는 성경의 다른 책에 대해서도 이런 황당한 수식을 멈추지 않는다. "고지식과 오류, 모순, (시편의 저주 등의) 사악함마저도 [성경에서] 제거되지 않았다. 그 총체적 결과는 모든 구절 그 자체가 흠잡을 데 없는 과학이나 역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란 것이다. [단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있다.."
루이스에 따르면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을 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참 말씀은 크리스토 자신이지 성경이 아니다. 성경은 올바른 심령과 선한 교사들의 지도에 따라 읽으면 그 분께로 이끌어 준다."('C.S. 루이스의 편지' 428쪽). 즉 성경 자체는 말씀하지 않으며(말씀할 자격도 없고) 오직 해석자들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이스는 '올바른 심령'이 뭐며 선한 교사들이 어떤 누구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신화/전설/팬터지/매직에 사로잡힌 루이스 자신 같은 심령과 교사들이 아닐까 싶다.
이것을 확인해 주는 듯한 그의 말을 보자. 어떻게든 최소한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해 그것(말씀)을 바랄 때면 "특정 성구가 바로 번역됐는지 또는 신화인지(물론 영적 진리를 담은 수많은 신화들중 하나님이 특별히 고르신 신화) 또는 역사인지..를 알게 될 터.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우리 선조들이 너무 자주 저질렀듯 그렇게) 무슨 백과사전처럼 그 본문들을 무기처럼 사용하려고 끄집어 내어 써선 안된다."(같은 책, 같은 쪽).
위에서 루이스는 성경구절이 '신화'일 수도 '역사'일 수도 있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성경 본문들을 무기로 삼아선 안된다고 엿장수 맘대로 떠벌린다. 그러나 에페소 6:17만 봐도 루이스의 무식과 무지가 드러난다! 예수님은 시편 말씀을 무기 삼아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사실을 기억하는가.
그러므로 루이스는 성경의 축자적 영감은 물론 축절적(verbal)/전체적 영감을 모두 부정했다. 루이스의 황당 발언을 검토한 독자는 '영감'이나 '하나님의 말씀', '성경'(거룩한 책)이 뭘 가리키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루이스의 '개종'과 전무한 칭의/의인 개념루이스의 소위 '개종'에 관하여 '기쁨에 경탄하여' 등에 있는 그의 자전적 기록을 뜯어 보자.
"나의 얘기의 마지막 무대인 단순 유신론으로부터 기독교로의 전이과정은 나로서는 최소한도로 아는 내용이다..내가 유신론자가 되자마자 주일날은 교구교회, 주중엔 우리 대학 채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독교를 믿어서라거나, 그것과 단순 유신론과의 차이가 적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착오없이 명백한 간판으로 자기 깃발을 휘날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교회출석은 단순히 상징적이고 잠정적인 관습이었다. 그것이 과연 나를 기독교적 방향으로 옮겨가도록 도왔는지는 그제나 이제나 모른다.(중략)..이제 문제는 단지 가짜인 천 가지 종교들 중 오직 참된 종교를 찾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종교의 참된 성숙인가? 모든 이교신앙의 실마리가 성취된 지점이 있다면 어딘가?" 하는 것이다. 이교신앙은 종교의 유아기 또는 예언적 꿈일 뿐이다. 그것이 완전히 자란 것은 뭘까? 또는 그 깨달음은 어딜까? 오직 두 해답이 가능했다. 힌두교이거나 기독교이거나.."
"그 종착점에 언제 다다랐는지는 잘 알지만 어떻게는 좀체 모른다. 어느 일요일 아침 윕스네이드(동물원)로 이끌려 갔다. 떠날 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았고 동물원에 갔을 때는 믿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깊은] 생각 속에 그 여행을 한 건 아니었다."
위 글에서 루이스는 자신의 '개종'을 간증하기보다 되도록 움츠리며 말을 아끼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개종'이란 건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성육신 교리의 수용 정도다. 그것이 구원의 신앙인가? 만일 그렇다면 크리스토의 신성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의 신성을 받아들이고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 안에도 있다! 마지막 심판 때 크리스토를 "주님"이라고 시인하고도 지옥 갈 사람들이 많다(마7:21~23). 그러니 루이스 정도의 '개종'이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
묻고 싶은 것은 루터 이하 모든 개혁가들이 목청 터져라고 강조했던 이 성경적 칭의(justification) 개념을 C.S. 루이스가 믿거나 가르쳤냐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기독교를 '변증'했다는 책 '단순 기독교'엔 눈 씻고 봐야 칭의 개념이 없다! 신학자나 대 석학은커녕 주일학생 만큼의 신앙적 지식도 없었음을 자증해주는 대목이다. 라빈스의 지적에 따르면, 'C.S. 루이스 독자 백과사전', 'C.S. 루이스 백과', 'C.S. 루이스 참고서' 등 4권의 방대한 분량의 루이스 관련 참고서에도 '칭의' 개념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사도 파울은 기독교의 불가결한 필수요건(sine qua non)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이하 '칭의')를 강조했다. 그는 갈라티아 서신에서 이것 말고 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저주했고 로마서에서는 이 교리를 자신의 토론의 바탕으로 극대화했다.
칭의 개념은 'C.S. 루이스 인덱스' 딱 한 군데에 언급됐는데 그것도 용어만 사용됐을 뿐이다. 인도에서 사냐시(도사)가 되어 평생 도를 닦다 간 베네딕트파 수사, 관상가이며 종교다원주의자인 비드 그리피스(=스와미 다야난다)에게 보낸 편지(1941년 12월 21일)의 일부다. [그리피스에 관해선 본 사이트에 있는 필자의 글 '헨리 나우웬과 뉴에이지 영성' 뒷부분을 참조하라]
"제가 이 라디오 담화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단지 뭐가 아직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종교]공동체의 벗들로부터의 '검열통과증'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귀하 말고 딴 반대자는 믿음에 의한 칭의에 관해 제가 말해 준 게 없다고 지적한 한 감리교인입니다."
구원/신앙/의에 관한 루이스의 언질은 단 하나도 칭의와 연계되지 않았다. 이렇게 기독교의 핵심 기본 진리에 근접도 않은 그가 '기독교 변증가' 또는 '기독교 작가'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