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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1-6.2 1박 2일 부산대연라이온스클럽 대마도 단합대회
부산국제여객선 터미널 11시 출발
전현규 제12대 회장님(1985.7-1986.6)과 사모님
우로부터 제21대 문영주회장님, 제25대 강호충회장님, 제36대 강상권회장님
제41대 회장 필자 김승조와 제3부회장 송유택
부산북항대교
영도
일본 대마도 도착
일본 나가시키현에 속하는 섬으로 일본어로서 '쓰시마'라고 쓰며, 한국에서는 대마도라 부른다. 대한해협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하나의 큰섬이었으나 섬이 남북 둘로 나누어진 것은 1672년 오후나코시 운하, 1900년 만제키 운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며 3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쓰시마는 아소 만과 만제키 운하로 섬이 양분되는 지형이기 때문에, 크게 북쪽을 가미지마(上島), 남쪽을 시모지마(下島)로 부른다.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좁은 시가지가 분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곳은 남쪽의 이즈하라와 북쪽의 가미쓰시마의 히타카스이다.
본토 사가 현 가라쓰 시 하도 곶 에서 북서쪽으로 82 km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에 위치한 이키 섬까지의 거리는 47.5 km이고, 한반도와의 거리는 약 49.5 km이다. 섬 크기일본에서 면적으로 10위 권에 들고, 남북으로 82 km, 동서로 18 km이다. 섬 넓이는 약 695.9㎢로 제주도 면적의 1/3크기이며 인구는 2017년 기준으로 35,115명이다. 농경지는 전면적의 3.3%이며, 섬전체 면적의 대부분인 80~90%가 산지이다.
현재는 관광산업이 주업이지만 20년전만해도 농업이 위주였다고 한다. 인구는 저출산+젊은 층의 유출 크리로 1970년대 이래로 계속 감소 중이다. 연 평균 500명 정도씩 줄고
있다.
역사적으로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 고려 창왕 2년 박위가 이끌었으며, 제2차 대바도 정벌은 1396년 조선 세종 1년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세종실록 1년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이하생략
" 포즈담 선언에서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했으므로, 불법적으로 점령된 대마도도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도착한 남쪽항구 이즈하라
대연라이온스클럽 박윤성회장님과 회원과 레스 일동의 단체사진
조선통신사 벽화부조
조선 후기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믿음(信)을 전제하여 통(通)하는 사신(使)'을 의미하지만, 실제 당시에는 '통신'에 믿음을 통한다는 뜻은 없었으며 '국왕의 뜻을 전하는 사절단'이라는 뜻으로 통신사란 명칭이 된 것이다 보통은 1607년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만 가리키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에 파견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하며, 실제로 실록을 태종대부터 '통신사' 가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
한일 양국은 이것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공동 등재를 추진하여, 2017년 10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초기(17세기)에는 쇼군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사용한 비용이 100만 냥이나 되었다. 당시 막부의 1년 수입은 76만~77만 냥에 불과했다.
정사, 부사, 종사관 등의 삼사(三使)와 당상역관 미만의 하인 등은 정해진 수가 없어서, 각 사행마다 총 인원은 제각각이었다. 역대 최소 인원은 1624년 사행 당시의 300명, 최대 인원은 1711년의 500명이었으며, 보통 4백명 대의 많은 인원이었다.
나카라이 토스이
나카라이 토스이는 1860년 이즈하라에서 집안 대대로 소(宗)가를 섬기는 의사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부산의 왜관에서 일하다 귀국 후 1882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의 현지보도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1884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이 전후 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1882년 6월 ‘계림정화 춘향전’을 아사히 신문에 20회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는 일본에서 발표된 한글 고전문학 번역본의 효시로 손꼽힌다.
이즈하라 정의 나카무라(中村)에 있는 생가 터에 나카라이 도스이 관(半井桃水館)이 서 있다.
5 천엔권의 인물은 히구찌 이찌요(桶口一葉 1872-1896) 타케쿠라바 등의 작품을 쓴 명치시대의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24세에 요절한 여류작가다.
나카라이 토스이를 연인으로서 사모했고 스승으로서 연모의 대상으로 삼았다.
돌담은 방화벽이다
지도를 반대편에서 볼 수도 있어야
한국과 중국이 일본열도에 의하여 포위당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사의 저택과 방화벽 역활 높은 돌담이 있는 ▶중촌지구 나까무라 무사가옥지구◀
나카무라지구는 하치만구 신사에 인접한 거리로 헤이안시대에 만들어 졌습니다. 무로마치시대는 아비투 씨에 이어 소 씨가 지배합니다. 당시의 쓰시마도주 10대 사다쿠니는 거점이었던 미네마치 사가를 떠나 후추(현, 이즈하라)로 옮겨와서 오닌2년 1448년에 새 저택(성)을 현재의 쓰시마남경찰서 부근에 세웠습니다. 이 저택은 이후에 나카무라저택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섬의 중심지로서 후추의 마을정비가 진행되게 됩니다. 현재의 나카무라지구 모슷ㅂ은 간분시대 (1660년대)에 무가저택마을로서의 마을 만들기 계획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며, 지금도 남아있는 많은 돌담이나 무가저택의 문 등이 그 당시 무가저택의 분위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으로 유명한 소설가 나카라이토스이나 메이지미녀전(메이지시대 미인들의 일생)에 이름을 남긴 아라이가미노오츠마 등 저명 인사가 이 지구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나카이무라지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마을 정비에 힘쓰고 있습니다.
일본의 주택은 목재로 되어있고 대마도의 경우 택지가 좁아 다닥다닥 붙여 지음으로 불이나면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됨으로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높은 돌담을 쌓아 불이 옮겨붙는 것을 방지했다.
대마도주 宗義智 상
소 요시토시(宗義智.종의지.1568~1615 초대 대마도 번주)
조선 선조때의 제19대 대마도주(초대 대마도 번주). 1588년에 도주(島主)가 되어 조선에 대한 도요토미의 수호 요청에 따라 1589년(선조 22) 조선에 건너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1590년 황윤길을 통신사, 김성일을 부사로 일본에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제1진으로 침입해 왔고, 조선 정부와의 강화를 두 차례나 요구했으나, 화의를 이루지 못하였고, 명 나라와의 화의마저 깨지고 명 나라 이여송이 지휘하는 군대가 진주하자, 평양성을 불지르고 고니시와 함께 패주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도 도요토미의 명을 받아 가토오ㆍ고니시 등과 함께 침입해 왔다.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으로 종군했지만 조선에서의 관직도 같이 갖고 있었다. 조선 조정이 내려준 소 요시토시의 관직은 예조참의 격이었다고 한다. 현재 직급으로 보면 차관보 정도로 볼 수 있다.
그의 영지가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끼어있어서 행여 조선이 쳐들어오면 가장 먼저 공격을 당하기 때문인 데다가, 무역의 거의 전부를 조선에 의지하는데 도요토비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의지가 너무나 확고해서 어쩔 수 없었고 소 요시토시 자신도 대마도의 다이묘(大名)이기 이전에 히데요시 아래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인 상태라 입장이 곤란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국서위조 끝에 1607년이 되어서야 일본은 조선에게 용서를 받았고 다시 외교를 시작했으며 조선 측에서도 1607년부터 다시 일본에 조선 통신사 기유약조를 맺어 인삼, 비단 등 부산 왜관을 통한 교역도 이백여 년간 거의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팔번궁 (八幡宮) : 하치만 신궁
여기도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했다고 해 놓았네
신사의 상징인 도리이(鳥居)가 보인다. 신사는 원래 모리라고 불렸는데 이는 숲을 뜻한다.
신사란 원혼에 제를 지내는 전문적인 위령의 역활을 하는 데 825년 지진 853년 천년두로 민심이 흉흉하던차에 863년 독감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귀족과 승려들이 참석하여 독경과 염불, 음악연주, 굿이 벌어지고 마지막엔 성대한 여흥까지 곁들여 지는 성대한 위령제를 올렸는데 전문적인 신사의 출현이다.
일본의 국교는 신사다. 전국에 약 8만 1천개의 신사가 있고, 분사까지 합치면 약 14만개의 신사가 있다. 최초의 신사는 가마쿠라막부시대(1192-1333)의 무사의 수호신사인 츠루오카하치만궁이다. 정초에 약 8천만명이 신사를 참배한다고 한다.
神宮, 宮, 大社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신이 수십만개다. 수신, 산신, 풍신, 하늘, 강, 산, 땅. 바위, 숲, 나무, 돌,벼의 생장, 풍어의 신, 싸움의 신, 공부의 신, 입시의 신, 동물, 조상, 사람, 개, 말, 등 등도 생전 또는 사후에 가미(神)으로 숭배되고 제사받는 등이다.
장사번창, 복덕개운, 학업성취, 합격필승, 기예상달, 결혼, 부부화합, 자식점지, 교통안전, 가내행복, 액댐, 무병장수 등등 지극히 현실적인 현세기복을 비는 것이 목적이다.
도쿄의 야스구니신사는 천황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자들과 2차대전 당시 전범을 합사하여 가미, 즉 신이되어 숭배받고 제사받고 있는 신사다. 일본 수상이나 지도자가 신사참배를 하는 데 왜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을 질타하겠는가? 일본은 스스로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을 신으로 추앙 존경함으로 인하여 한국, 중국 등 동양 식민지하의 국민들을 분노케하는, 양심을 저버리는 후안 무치한 행동을 스스럼 없이 하더라도 죄책감을 전혀 가지지 않는 이중적이고 아주 잔악한 습성이 있는 민족이다.
전사한 장병과 도오조오 등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을 합사할 것이 아니라 분사하여 장병들에 대한 참배는 인정하겠다고 해도 일본은 끝까지 분사하지 않고 전사장병과 전범을 합사하고 아베 등 일본을 대표하는 자들이 전범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참배를 하고 한국
중국 등의 항의를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신공(神功) 황후 신라 정벌을 마치고 ∼∼∼
신공황후의 신라정복설, 임나일본부설을 계승한 일선동조론이다. 일선동조론은 일제의 한일합병을 합리화시키는 이념으로 우리 민족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동화정책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일본은 신공황후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없으나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 지방을 지배했었다고 믿는 사람은 많다고 합니다
용의 모습을 닮았다는 용나무 :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돈이 엄청 들어온다는데 돈 마니 많이 버시게 되기를 ∼∼∼∼∼
한편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 참수당하자마자 소 요시토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고, 그녀와 그녀가 낳은 아들을 버려 버렸다.
한편 후에 소 가문에 괴변이 일어나자, 이를 쫓겨난 고니시 마리아와 고니시 만쇼 모자의 원혼 탓으로 여겨 신사를 세워 그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을 숭배하는 야궁(若宮)신사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는 종의지의 아내였다 원래는 종교가 없었으나 장인의 권유로 카톨릭으로 입교,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운 훗날 신부가 되었다.
1912년 조선국 제26대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14살 때 강제로 일본 유학생활을 지작했다. 20세 때인 1931년 5월 종무지공과 원치않는 결혼을하여 동년 11월에는 대마도를 방문했다. 옛 대마도주 종가당주(소 다케유키)가 조선의 왕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대도하였음으로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이 비는 두분의 성혼을 축하하여 대마도민들이 헌사하여 세우고 싶었던 기념비와 철죽이 지금도 잘 남아 있다. 결혼생활은 딸 정혜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으로 잠시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결혼이후 15년 간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을 앓게 하였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갈등이 심하여 두분은 1955년에 이혼하였으며 무지공은 1985년에 덕혜옹주는 1961년에 귀국후 1989년에 별세하였다. 이제 역사에 묻혀있던 이 기념비를 재건하여 두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가정집인데 한 7-8평 될까 정말 빈틈없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점심식사
일본의 개천 물고기가 엄청 많다
일본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합성세제도 함부로 쓰지 않음으로 환경보전에 대하여 세계적 모범국가다
저녁 숙소로 돌아와서 숙소앞 전경
저녁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