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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이들 216 내마음속의 두 주인
이 달의 말씀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오늘도 선과 악의 전쟁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그 전쟁의 판도는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 중에 누구를 섬기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전쟁에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되거나 그 왕국이 세워지는 일의 성패가 판가름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승리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왕국이 확고하게 세워진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앙기사 1부_마음과 전쟁터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쉬임없는 전진의 생애입니다. 그리스도인 생애는 다 이루었다 할 지점이 없고, 다 다다랐으므로 휴식을 해야 할 지점도 없는, 중단없는 승리의 연속으로 이어져야 하는 길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항상 주님의 능력 안에서 항상 주님의 임재 안에서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만 이어져야 하는 생애,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생애입니다.
한번 시작한 경주를 미완성인 채 끝낼 수 없고, 그렇게 끝내서도 안 되는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끝없이 치러야 하는 영적 전쟁이 존재합니다.
마음속에 투쟁과 씨름과 선택의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늘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기에 평안과 안식의 길이며, 화평과 기쁨과 승리의 길입니다.
이번 호 신앙기사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갈 때에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과 그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봅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모든 분들께 이 글을 드립니다.
-편집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
이 우주에 죄가 시작된 이래, 선과 악 사이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영적인 안목을 떠서 보면 거기에는 쉬임없는 전쟁이 연속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빛과 흑암 사이에, 의와 불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 싸움을 어떻게 치르는가에 따라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구원이 결정지어집니다.
1) 이미 시작된 전쟁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선과 악의 쟁투는 시대가 바뀌고 세태가 달라짐에 따라 점점 더 치열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인식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이 엄청난 싸움의 현장에서 어느 한편에 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일어난 영적 전쟁의 서막은 다음의 성경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인류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내리신 이 선고는 일종의 선전포고로서 이미 시작된 영적 전쟁을 알려줄 뿐 아니라 그 전쟁의 결과까지 알려주는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에 미치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참가할 대쟁투를 미리 보여줍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두 적대적인 세력은 사탄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알력관계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 원수가 되게 하리”라는 이 원수 관계는 선천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고 범죄했으므로 그 본성이 악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탄과 조화되고 반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인과 죄의 창시자인 사탄과는 본질상으로 아무런 원수 관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둘 다 반역으로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출현과 그 참 백성들과 사탄 사이에는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적대적인 관계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적대적인 관계는 세상 끝날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2) 마음, 전쟁의 격전지
그렇다면 그 영적 전쟁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전쟁터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대치하는 치열한 격전지는 곧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매일 매 순간 끊임없는 싸움과 갈등과 선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승리를 얻어야 할 곳도, 실패와 패배로 슬픔과 갈등을 겪게 되는 곳도, 선과 악이 대치되어 그 세력을 뻗치는 곳도 모두 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싸움을, 고린도 가까이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렸던 유명한 경주에 비교하였습니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성행하는 모든 경기 중에서 이 경주는 가장 유명한 경주였습니다. 그런데 이 경기에는 매우 엄격한 규칙들이 있었고, 이 경주에 그 이름을 등록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엄격한 준비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경주에서 승리하고 상을 받기 위해서는 해로운 식욕의 방종이나 지적 혹은 육체적 활력을 저하시키는 어떤 것이라도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경주에 승리하기 위해 사람들은 근육을 강하고 유연하게 훈련하고, 정신과 신경들을 잘 통제하며, 체력을 최고의 수준에 달하게 하기 위해 최선의 힘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대한 상징으로서 이 경기를 언급한 바울은 경기에 임한 경주자들의 성공에 필요한 준비와 예비 훈련인 절제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경주자들이 체력을 약화시킬 모든 방종을 버리고 엄격하고도 계속적인 훈련으로 근육을 강하게 훈련시켜 경주에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얻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은 경주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시드는 월계관을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승리한 이에게 주어질 불멸의 영광의 면류관과 대조합니다. 바울은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합니다. 헬라의 경주자들이 썩을 상을 얻기 위하여서 어떤 고생이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귀중한 상, 영생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우리의 모든 수고와 힘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노력을 기울여 하는데, 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누가 패권을 잡는가에 따라 우리의 운명도 판가름이 나기 때문입니다.
신앙기사 2부_어떤 전쟁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선과 악 사이에 투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그리고 의와 불의가 대치하는 치열한 전쟁입니다. 그리고 그 패권을 예수 그리스도가 잡는지 아니면 사탄이 잡는지에 따라 그 판도가 완전하게 달라지는 싸움입니다. 매일 일어나는 내면의 전쟁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싸움터와 같아서, 하루에도 여러 번 수많은 적들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우리를 돕는 하늘의 용병들도 수없이 방문합니다. 이 싸움은 우리의 영생을 판가름하고 불멸의 상을 얻는가 얻지 못하는가를 가르는 전쟁입니다.
1) 가장 큰 싸움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며 진군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지금껏 싸운 싸움 중에 가장 큰 싸움은 자아와의 싸움입니다. 자신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야말로 인류가 일찍이 싸운 싸움 중에 가장 큰 싸움입니다. 영생을 얻고 영적 왕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흑암의 왕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거듭나지 않은 본성의 힘이 자신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로 기울어지려는 육신적인 성향과 유전적으로 타고난 연약성과 후천적으로 배양된 악의 습관들이 항상 우리를 대항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이기심과 교만은, 죄에 대해 어떤 지적을 받을 때 그것에 굴복하는 대신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려고 일어납니다. 우리는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 악한 욕망과 습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얻어야 할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가 요구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인류가 지금껏 싸운 가장 큰 싸움은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곧 우리의 마음을 사랑의 주권에 바치는 것입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옛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유전적 성향 곧 이전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의지의 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와 또 자신의 의지와 습관을 정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동의와 협력이 없으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이 주장하는 것처럼 강압적인 굴종이나 무리한 압박 아래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성과 양심에 부드럽게 호소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는 말씀은 창조주께서 피조물들에게 하신 호소이자 초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의 의사를 강제하시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원하여 우러러 나오는 마음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하지 않는 경배는 받으실 수 없습니다. 억지로 굴종하는 것은 마음과 품성의 진정한 계발을 방해하고 사람을 한갓 로봇이나 자동인형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력의 극치인 사람이 가능한 최고의 한도까지 발달하기를 원하시어 최고의 축복을 우리 앞에 놓으셨습니다. 그 축복은 바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자유의지, 곧 선택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금단의 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실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데, 만약 그렇게 하셨더라면 하나님의 율법은 독재적 율법이라는 사탄의 비난이 인정을 받게 되었을 것이며,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의지의 참 힘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는 지혜력이고 결정력이며 선택력입니다. 모든 것은 이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권을 주셨으므로 우리들은 이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선택력을 주셨으므로 임의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지만, 그분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를 그분에게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바치게 되면, 그분께서는 올바른 길을 택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3) 의지를 바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 위해 우리 자신을 당신께 바치기를 청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의 속박에서 놓이고 못 놓이게 되는 것은 우리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에게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은 일체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하셨습니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은 주의 것이 되고 반은 세상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발걸음마다 열렬히 기도하며 자아를 낮추는 일 없이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에 억지로 협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사탄의 요새가 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목적과 욕망과 성향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지만,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인데, 심지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 10: 5) 하기까지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2:12,13)신다는 말씀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앙기사 3부_두 주인과 은혜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바울은 로마서 5장과 6장에서 우리 마음속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두 왕, 두 세력, 두 주인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를 다스리는 왕으로 의인화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한 종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으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이 되는 것은 곧 사단의 종이며 사망에 이르는 결과를 거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바울은 우리를 다스리는 또 다른 세력인 은혜와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순종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될 때에 영생에 이르게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두 주인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눅 16:13 참조). 사람이 주인을 가졌을 때 주인은 그를 완전히 통제합니다. 주인을 가진다는 것은, 그 주인을 섬기고, 그 주인의 말을 듣고, 주인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복종하는 주인은 우리가 누구의 노예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나는 나의 한 부분은 이 주인을 섬기고 다른 부분은 저 주인을 섬기겠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미워할 것이고 다른 쪽을 사랑할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영적 영역에서 성립됩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의 종이라면, 그는 죄를 지을 것이고, 만일 그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봉사할 것입니다. 죄와 하나님은 상호 배타적인 주인입니다. 우리는 양쪽 모두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6장 14절에는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배하다”는 단어에서 보는 것처럼 죄는 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배하다”는 뜻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왕이 되다” 또는 “왕의 역할을 하다”는 의미입니다. 죄는 우리의 육체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우리의 행위를 조종하려고 합니다. 죄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롬 5:21)하고, 우리를 죽게 만들며(롬 7:13), 우리를 주관하고(롬 6:14), 각양 탐심을 이루며(롬 7:8), 죄인을 속이고 죽입니다(롬 7:11). 그래서 바울은 죄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죄가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통치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멸망에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에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에서 “사욕”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욕망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지배할 때 욕망은 우리로 좋지 않은 것을 원하게 만들며, 죄의 욕망들은 악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스스로 욕망과 싸우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죄는 마치 난폭한 독재자와 같아서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 12절 앞에는 “그러므로”라는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앞절 10~11절의 내용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 앞의 내용은 옛 생애에 대해 침례를 받고 옛사람이 죽은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사람은 동시에 죄를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의 비유에서 바울은 한 주인을 섬기는 것은 다른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어느 주인을 섬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주인을 섬깁니까?
2) 은혜와 해방
성경은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길에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서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거나 순종의 노예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범주 중 하나에 속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초래하는 죄의 노예이거나 또는 의로움을 가져오는 순종의 노예입니다. 그런데 매우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벗어날 길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셨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왕 노릇을 하여 죄의 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구원하며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은혜는 우리 안에서 왕노릇 할 수 있습니다.
은혜란 무엇일까요?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마(charisma)”인데, “카리스”(charis)에서 파생되었으며 “은혜의 행위”, “은혜의 선물”을 뜻합니다. 바울은 “은혜”라는 용어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은총과 인애를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나 공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고 전적인 그분의 선물로서, 죄된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의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16)인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란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나 용서하심을 가리키는 것뿐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이며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인간 안에 역사하여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 사람의 마음속에서 왕 노릇 하고, 마음을 변화시키어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힘으로 역사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진리에 순종하게 하며,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게 하여 죄에서 탈피하게 만듭니다. 이것이야말로 은혜가 그 힘을 발휘하여 우리 속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죄의 종에서 벗어나 의의 종이 되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죄를 승리하게 하는 힘입니다!
바울은 “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며 죄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될 것이며 순종으로 의의 종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승리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데, 그것은 계명이 그 마음에 새겨지고, 성령님이 항상 그 걸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죄를 이기고 극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으며,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아, 옛 사람을 장사 지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오는 모든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그의 삶의 보좌에서 죄가 물러나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그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은혜로 죄에서 해방되고 죄의 다스리는 권세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아래 산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로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앙기사 4부_선택이 만드는 차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하셨는데,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지, 순종의 종이 되어 영생에 이르든지 그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어떤 주인을 섬길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죄를 섬길 수도 있고, 영생에 이르는 의를 섬길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간지대는 없으며 절충의 여지도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영생하든지 영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선택과 순종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여 어느 것에 자신을 바치는가에 따라 방향과 노선이 달라집니다. 죄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죄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의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종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죄의 다스림을 벗어나 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은 너무나 커서 죄가 왕 노릇 하는 데서 우리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영혼을 꽁꽁 매고 있는 죄의 사슬을 벗어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은혜 앞에 죄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문제는 사람이 너무 죄의 포로가 되어 죄에서 떠나지 않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즐거움을 더 누리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죄의 권세를 깨뜨려 주십니다. 우리는 순종하기로 선택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힘으로 더 이상 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육체대로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될 수 있도록, 즉 의의 종이 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율법은 완전한 의를 요구하지만,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죄와 사망의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전에 살았던 것과는 다른 새롭고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서입니다. 주님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해줄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체를 따라 걸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죄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된 후로는 이제 성령을 따라 걷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창조하시는 의로 채워집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육체를 따라 걷는 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따라 거하고 걷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말뿐 만의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성령을 따라 걷는 죄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2) 참된 믿음과 새로 남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이 신약에 자주 나옵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는 개인적 관계의 친밀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그분을 의존한다거나, 단순히 그분의 추종자 또는 제자가 된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는 연합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한 “저 안에” 거한다는 뜻이고, 이 연합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표현되었습니다(요 15:1~7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생명을 주는 성령의 능력을 얻고,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친교와 연합의 경험을 통하여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죄를 이길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여 죄를 승리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부지불식 간에 쓰러져 실수하거나 이따금 죄를 범하는 것과 죄 가운데 빠져 사는 것은 다릅니다. 죄 가운데 사는 생애는 믿음과는 전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기꺼이 예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며, 구세주에게 그렇게도 큰 고통을 주었던 죄를 미워하고 그것에서 돌아섭니다. 의를 바라면서 동시에 옛날의 죄된 길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거듭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증거는, 이제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새로 남으로써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법과 일치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하므로 이따금 어떤 죄에 빠질 수 있다 하더라도(요일 2:1 참조),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났다는 증거는 그가 더 이상 죄짓기를 계속하지 않는 것, 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바울이 묘사하는 대로 그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으며, 죄의 다스리는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기사 5부_승리의 비결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5~7).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들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죽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만이 사람을 죄의 속박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종이 죽으면 주인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된다는 명확한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하여 죽을 때에 죄의 통제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는 우리의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옛 사람은 우리의 옛 성격이며, 죄의 경향에 종속되고 죄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의 옛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와 단합되어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속에 죄는 통치자로서의 힘을 잃고 무력해졌습니다. 이것은 죄가 멸절되거나 그것이 끝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그 권력은 깨졌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불의의 도구로 우리 몸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죄의 몸이 멸하여”에서 “멸하다”는 헬라어 단어는 “katargeo” 입니다. 이 단어는 "효과가 없거나 힘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으로 말미암아 사탄과 죄의 권세는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탄이나 죄가 영원히 제거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생활에서의 사탄의 권세와 죄의 권세가 붕괴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고, 우리를 지시하는 힘은 깨졌습니다. 그것은 아직 소멸되지 않았지만 우리 속에서 다스리고 군림하는 권위는 사라졌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육체”는 바로 “옛 사람”과 같은 동의어입니다.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십시오! 우리는 그와 함께 죽고 이제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2) 부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권세와 지배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죽었고,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새 자아가 살아 있습니다. 즉 죄와의 관계에서는 죽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의식을 옛 자아와 새 자아로 따로 나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으로 옛 자아를 계속해서 죽이고, 새 자아를 살리는 일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의무가 없습니다. 죽은 자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되었다는 헬라어 단어는 보통 "의롭다 함"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 "죽은 사람은 죄에서 의롭게 됨"이라고 읽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은 것처럼 우리도 단번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자신이 죄의 지배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처럼 간주해야 합니다. 즉 새롭게 부활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신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그 경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계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사십시오
비록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죽을 몸” 속에 있으며, 이 세상의 욕망과 갈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죄는 여전히 하나의 권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허용한다면, 죄는 여전히 우리를 지배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육신의 세속적인 욕망들을 근절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우리를 죄의 지배를 성공적으로 저항하도록 하늘의 높은 권세와 능력 안에 살도록 해줍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우리의 충성을 죄에 바칠 것인가 그리스도에게 바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새로운 회심”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어제의 경험이 오늘을 위해 충분치 못합니다. 비록 어제는 죄에 대해 죽었다 해도, 우리의 “옛 사람”이 오늘 다시 그 추한 머리를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자아를 끊임없이 그리고 완전히 죄에 대하여 죽도록 지킴으로써만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대하여 살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논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우리의 삶도 바꾸어져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밖에 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사탄이 이끄는 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거하실 때에 심령은 그의 사랑과 그와 더불어 교통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항상 예수님을 그리워서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명상하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요구를 응하기 위하여 최소한도 얼마를 바쳐야 할는지를 묻지 않고 또한 가장 낮은 표준을 원하지 않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완전히 일치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없이 그분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것은 한갓 말뿐이요 무미건조한 형식과 힘든 고역이 될 뿐입니다. 죄의 통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며, 죄와 더 이상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우리에게 절대 실패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예수님과 계속 연합하여 사는 가운데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리라는 승리의 약속을 매일 주장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신앙기사 6부_죄를 극복하는 단계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죄를 승리하는 문제는 우리 삶 속에서 매우 실제적인 체험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극복되고 이기는 경험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누구이든지, 여러분의 투쟁과 유혹이 무엇이든지, 승리는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죄를 극복하는 단순한 단계들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1)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십시오
죄를 극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야기하십시오. 정직은 죄를 승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모든 설명과 변명을 그만두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죄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된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오! 그 죄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당신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진실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면 죄에 대한 더 예민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 앞에서 정직한 자세로 임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이 위에서 말한 것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에라도 잘못이 있으면, 그는 자기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레 5:5 새번역).
변명하지 말고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지도 말고, 그 죄를 정확하게 집어낸 다음, 정직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받으십시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참된 고백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숨기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설명이나 변명을 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면 됩니다!
2)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죄의 유혹의 순간 바로 그곳에 세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1) 여러분은 단지 굴복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2) 극복하려는 의지를 설정하고 자신의 힘으로 유혹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3) 저항하는 은혜(힘과 능력)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모든 유혹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가진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도와주세요, 예수님!”이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때 그분은 거기에서 벗어나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3) 결정하고 죄에 반하는 행동을 하십시오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아무라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까지라도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한 남녀들을 죄짓게 만들 수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의지의 방향을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는 마음과 방향의 의도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180도 방향을 트는 것을 말합니다. 죄에 대항하기로 결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과정을 밟아 행동하기 시작하면, 뇌 신경학적으로 새로운 시냅스 회로가 즉시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실제로 새로운 형태를 취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성경에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표현합니다. 회개하는 새로운 마음의 틀이 생기고 계속 유지됨에 따라 새로운 인격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됩니다. 새로운 틀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각, 감정, 행동으로 사는 것이 매일 점점 더 쉬워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결정해야 합니다. 매 순간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설정하고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4) 죄를 이기기 위한 능력을 계속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솔직하게 여러분의 죄를 고백했다 하더라도, 또 여러분이 죄를 대항하기로 아무리 단호하게 결심했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의지력은 모든 것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약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의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힘이 아닌 특정한 어떤 종류의 힘이 꾸준히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 힘은 신비스럽거나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기적적인 행동이나 마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능력,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는 그 힘을 계속적으로 구하고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은 너무나 강하여 모든 불의한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5~6).
하나님의 사랑은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과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른 힘으로는 죄를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와 그 능력만이 우리로 죄를 승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서 죄를 추방하는 데 사용하시는 대리자입니다. 우리는 죄를 승리하기 위하여 매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안에서 그 은혜의 능력을 활용해야 합니다.
마치면서
오늘도 선과 악의 전쟁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그 전쟁의 판도는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두 세력 중에 하나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승리에 따라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되거나 그 왕국이 세워지는 일의 성패가 판가름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승리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왕국이 확고하게 세워진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현재의 승리가 마지막 끝날의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이 시합, 그리스도인 싸움을 모두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주의 타락하지 않은 거민들과 무수한 하늘의 천사들이 이 싸움의 구경꾼들입니다. 그들은 누가 성공적인 승리자가 될 것인지, 그리고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열심히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늘의 천사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 경주에 참여한 자들을 주목하여 보며 그들의 자아 부정과 자아 희생, 그리고 고통스러운 노력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고 말합니다.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 경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 2).
우리는 매 순간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과 굴복이, 우리의 회개가 날마다 깊어지며, 우리를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매일의 승리를 가져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경 Q&A_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유
Q.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탄에 이끌려 가신 것이 아니었군요?
A.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눅4:1)셨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막1:12),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라”(눅4:2).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시기 위하여 광야로 이끌리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에게 이끌리셨습니다.
아담이 식욕의 힘에 굴복했을 때 전 인류는 잃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던 구주께서 아담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거의 6주일 동안의 끔찍한 금식을 견디셨습니다. 광야에서 금식 중에 주님은 대적자에게 저항할 만한 준비를 위해 아버지께 계속 기도드리므로 배고픔을 거의 못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밀실에 들어가 열렬한 기도로 원수를 대적할 힘을 구하셨으며, 인류를 위해 자신이 맡은 모든 일을 수행할만한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보증을 간구했습니다. 마주할 전투에 대한 생각 때문에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마치 오늘날 시험 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청하면 생명의 떡으로 먹여 주시듯이, 주님의 영혼도 생명의 떡으로 배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을 받고 있을 때 그분은 사람들에게 전할 그 진리의 말씀을 먹고 사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유혹을 받고 타락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탄의 권세가 깨어지는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희망 잃은 자들을 위로하고, 낙담하는 자들을 격려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해 계획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분은 40일의 금식이 끝날 때까지 조금도 배고픈 줄 몰랐습니다.
이제 이상은 사라지고 주님의 인성은 음식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식물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제는 사탄이 공격할 기회가 왔습니다. 사탄은 빛의 천사 중 하나처럼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는 가장 적절한 때에 아버지께서 음식물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음으로 알았습니다. 혹독한 시련 중에서도 자신에게 할당된 시련의 일부를 조급하게 줄여보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궁지로 몰렸을 때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위해 기적을 행할 힘도, 고통이나 통증을 없앨 힘도, 원수를 누르고 이길 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인류를 시험해서 스스로를 입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믿는 그들의 믿음과 확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그들을 자주 시험의 자리로 이끌어 품성을 계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생애는 완전한 하나의 모형으로, 언제나 교훈과 모본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의지이시며 믿음과 신뢰가 그분 안에 있어야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율법은 불공평하고 순종할 수 없다며 아담의 범죄를 증거로 제시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과 같은 인성으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혹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 몸과 마음에 충만한 활력과 에덴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날마다 하늘의 천사들과 교통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죄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탄과 상대하려고 광야에 가셨을 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4천 년간 인류는 체력과 정신적, 도덕적 가치가 퇴보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퇴보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심으로써만 인류를 쇠퇴된 깊은 구렁에서 구원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세상에 와서 사기꾼 사탄의 힘을 벗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악의 모든 연합 세력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분이 걷는 인생길에 배치되어 그분에게 싸움을 걸어서 할 수 있는 대로 그분을 이기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광야로 들어가 사탄을 만났을 때 그는 사람이 유혹을 잘 받는 바로 그 점에다 시험을 걸어왔습니다. 우리의 크신 대리자시요, 보증인이신 그분은 아담이 걸려 넘어진 바로 그 지점을 통과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걸려 넘어지셨을까요? 주님은 사탄의 공격에 번번이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되받았고, 사탄은 정복당한 원수로서 그 전쟁의 들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담의 치욕스러운 실패를 설욕하고 완전한 순종의 품성을 완성하시고 인간 가족들에게 한 모본을 남기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그분의 모본을 그대로 모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약 주님이 하나님의 율법과 관계있는 곳에 단 한 점이라도 실패가 있었다면 온전한 제물이 못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은 단 한 점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돕기 위해 타락한 인간의 약점을 몸에 그대로 지닌 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아 맞서야만 하셨습니다(히4:15). 그분은 인성을 취하시고, 인류의 연약성과 퇴화된 모습을 그대로 갖고 계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주님이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분은 우리를 도우실 수도 없습니다. 항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유혹은 유혹이 아닙니다. 만약 주님이 실패할 가능성이 없으셨다면 인간이 시험 당하는 것같이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실 수도 없었습니다. 그분도 아담과 모든 사람처럼 시험대 위에 올려진 자유 행위자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싸우러 오셨다는 것은 진실로 엄숙한 사실입니다. 그분이 당한 유혹과 승리가 말해주는 것은 인간은 그 모본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왕은 주님께서 오랜 금식으로 배가 몹시 고프실 때 찾아와서는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그리스도가 배고픔과 가난과 기타 인간의 모든 경험적 측면을 다 알아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힘으로 유혹을 저항했습니다. 그분은 믿음의 손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꼭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와 꼭 같은 도움을 얻지 못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유혹과 시련 중에 인간이 무익한 자신의 능력을 결코 의지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분의 능력의 근원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 되려고 오셨고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인간은 정욕으로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함으로써 예수님처럼 신성의 본성(the divine nature)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벧후1:4). 사탄은 구주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혔지만 구주의 영혼에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해 그분의 머리는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본으로써 인간도 완전하게 설 수 있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악을 저항할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땅도 죽음도 지옥도 정복할 수 없는 능력이며,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같이 이길 수 있는 곳에 그들을 처하게 하실 능력입니다. 신성과 인성이 그 사람들 속에서 연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한 사람의 모본이셨습니다.
행복한 가정_성경말씀을 원칙으로 둔 가정의 거룩한 감화
믿지 않는 사회에서 하나의 가정이 예수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 산 편지가 되도록 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이 사명은 두려운 책임을 내포합니다. 질서 정연하고 잘 훈련된 가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설교보다도 그리스도를 더욱 많이 증거합니다. 그런 가정은 부모들이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데 모범이며 또한 자녀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증거를 보여 줍니다. 그 가정의 감화는 더 성장할 것입니다. 하늘의 교훈과 감화는 남에게 나눠 주면, 받은 이들이 또한 남에게 나눠 주기 때문입니다. 이웃들은 그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이생과 영원한 세상을 위하여 부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은 주를 섬기는 일에 종사하여 그들의 경건한 모본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 곧 하나님의 아름다운 양 무리와 함께 살면서 하나님께 신실하고 참되게 살도록 감명을 받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이 통치하는 가정을 종종 방문할 것이며 그런 가정은 거룩한 은혜의 능력 아래서 피곤하고 싫증난 순례자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곳이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며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믿음이 키를 잡고 온 집안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형제간의 원칙은 그런 가정의 거룩한 감화 아래서 더욱 널리 인식되고 준행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을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금석은 가정의 감화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품성의 모본입니다. 가정생활은 경건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고백보다도 더욱 크고 분명하게 증거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보시기에도 질서 있고 훈련된 가정은 정금보다도, 오빌의 순금보다도 진귀합니다.
가정생활의 중요성과 가치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예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본이 되고 스승이 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오셔서 30년 동안 나사렛에서 가정의 한 식구로 지내셨습니다. 그 기간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매우 간단합니다. 큰 이적들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도 않으셨고 열광적인 군중들이 그분을 따라다니거나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한 사명을 완수하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들 중의 한 사람처럼 가정생활에 동참하고, 가정의 훈계를 받고, 가정의 의무를 이행하고, 가정의 무거운 짐을 지셨습니다. 비천한 가정의 보호를 받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동일한 경험을 하면서, 그분께서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눅 2:52)었습니다.
사랑가득 건강식탁_천사채 샐러드
천사채.. 이름처럼 신비하고 생소한 재료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천사처럼 선하게 될까요? 왜 이름이 천사채인지 오리무중입니다. 저는 천사채 요리는 아무나 먹는 것이 아닌 줄 알았답니다. 자주 접할 수 없는 재료라서 더욱 그런 생각을 했었나 봐요.그러나 다이어트 때문에 먹는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천사채 라는 재료를 잘 아실 겁니다. 왜냐하면 칼로리가 정말 낮거든요. 본격적으로 더워지면서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살들이 쉽게 눈에 띄는 계절이 돌아왔으니 천사채로 다이어트 음식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간단한 한 끼 식사로도 괜찮거든요. 거기다가 불을 쓰지 않는 로푸드 요리라 여름 음식으로 제격인 것 같아요.
천사채 샐러드 재료: 천사채 2컵 분량, 마요네즈 7큰술, 소금 1/3작은술과 꿀 2작은술, 초록채소 (오이, 어린잎..),홍&노 파프리카, 옥수수
캐슈마요네즈 재료(200cc 분량): 생 캐슈넛 반컵(60g), 두유(물)2큰술, 꿀 2큰술, 올리브유나 기타 식물유 2큰술, 레몬즙 2큰술반, 소금 반 작은술, 마늘 1작은술, 양파 25g
캐슈마요네즈 만들기:
생 캐슈넛은 30분 정도 물에 불려요.
모든 재료를 넣고 곱게 갈아요. (식성에 따라 소금과 꿀은 가감하면 됩니다.)
잘 밀봉하여 냉장고 보관하면 5일 정도는 보관이 가능해요.
천사채 샐러드 만들기
천사채는 물에 씻어 물기를 뺀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요.
초록 채소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오이, 깻잎, 케일..) 그런데 천사채가 국수 모양이니 다른 채소들도 곱게 채를 썰어주셔야 해요. 저는 세발나물과 빨강 & 노랑 파프리카, 옥수수를 준비해 보았어요. 색색의 다른 채소들도 좋아요.
모든 재료에 마요네즈를 넣어 잘 버무려 준 다음 부족한 간은 소금과 꿀로 보충하시면 됩니다.
mom’s tip
특별한 맛은 없으나 꼬들꼬들 씹히는 재미가 좋은 천사채는 사실 양념 맛으로 먹는 것 같아요. 대부분 마요네즈나 겨자 소스에 버무리지요. 이현맘표 캐슈마요네즈를 만들어 놓으시면 마요네즈를 사용하시는 여러 요리에 대체 가능합니다. 그라탕이나 피자에 치즈 대용으로 사용하거나 각종 샐러드에 사용해도 좋지요~
mom’s note
천사채는 다시마의 알긴산을 추출하여 꼬들꼬들하고 반투명한 국수 형태로 만든 것인데요, 장 운동을 촉진시켜 변비에 좋고 지방의 흡수를 낮추며 저칼로리라 다이어트 식품으로는 유명한 재료랍니다. 중금속, 유해물질 흡수를 방해하여 신속히 몸 밖으로 배출시킨다니 미세먼지가 심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주 먹어야겠어요.
힐링스토리_오렌지와 자몽
오렌지: 영양분이 많고 맛이 좋은 오렌지는 많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과일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오렌지의 칼로리는 100g당 약 42kcal로 매우 낮으며 지방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오렌지에는 비타민C가 100g당 40~60mg 함유되어 있고 섬유질과 비타민A도 풍부해서 감기 예방 및 피로 회복에 좋습니다.
<효능>
1) 스트레스 해소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오렌지의 비타민C는 코르티솔 호르몬 분비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여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줍니다.
2) 빈혈 예방 오렌지에는 혈액 속에 있는 적혈구의 구성 성분인 철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서 빈혈 예방에 좋습니다.
3) 피부 미용 오렌지에는 피부 미백에 좋은 과일산과 비타민C가 풍부하여 색소침착 예방, 피부탄력 유지, 주름 예방, 기미 주근깨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4) 변비 예방 오렌지에 풍부한 식이섬유인 펙틴성분이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주어서 변비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5) 혈관질환 예방 오렌지에는 플라보노이드의 일종인 루틴, 항산화제인 헤스피리딘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서 혈관 기능을 향상시켜 주고 피를 맑게 하여 심장질환과 뇌동맥 막힘 예방에 도움을 주는 효능을 합니다. 프랑스 폰트샤이우 대학병원연구팀은 오렌지처럼 비타민C가 풍부한 과일을 섭취하면 오렌지 속의 플라바논이라는 항산화 물질이 출혈성 뇌졸중 발생 위험을 낮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또한 브라질 파울리스타 주립대학 연구팀도 오렌지와 레몬 등 감귤류 속 항산화 물질인 플라바논이 비만, 간질환, 당뇨병 등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비슷한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6) 면역력 강화 피로 회복과 항산화 작용에 뛰어난 비타민C는 면역력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비타민C가 풍부한 오렌지는 우리 몸의 면역력을 증진시켜 줍니다.
7) 요로결석 예방 오렌지의 구연산 성분이 결석의 칼슘과 결합하여 결석 형성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소변을 알카리화 하는 효과가 있어서 요로결석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8) 암 예방 오렌지 안쪽의 흰 껍질에 들어있는 리모넨이라는 파이토케미칼이 암 예방에 효과적입니다.
새콤달콤 자몽: 시중에 파는 주스를 오렌지 주스 중에서 orange juice와 grapefruit juice로 표기된 것이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몽은 후자인 그레이프 푸르츠로서, 포도와 비슷한 향을 가지고 있고 포도송이처럼 가지에 달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오렌지와 달리 표면이 부드럽고 가죽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옅은 노란빛의 즙액이 나오는 것이 원조입니다. 흔히 보이는 분홍색 과즙의 자몽은 개량종입니다.
<효능>
1) 감기 예방 자몽에는 비타민C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면역력을 강화시켜 주므로 감기는 물론 각종 질병을 예방하는 데 좋다고 합니다. 특히 천식, 폐렴 등 기관지 질환을 예방하는데 좋다고 합니다.
2) 다이어트 효과 자몽은 약 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열량은 100g당 30kcal로 매우 낮으며 오렌지와 마찬가지로 지방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쉽게 포만감을 주며, 수용성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 예방에도 효과적이므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특히 자몽의 씁쓸한 맛을 내는 성분인 나린진이라는 성분은 체내의 불필요한 지방을 연소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데, 나린진은 모든 감귤류에 들어 있지만 특히 자몽에 가장 많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3) 혈관계 질환 개선 자몽에 함유되어 있는 식이섬유는 체내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고, 칼륨 성분은 혈압을 낮춰주기 때문에 고혈압은 물론 동맥경화와 같은 혈관계 질환을 예방하는 데 좋다고 합니다.
4) 피부미용 효과 자몽에는 피부에 좋은 성분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비타민C와 바이오플라보이드 성분이 있습니다. 단순히 피부미용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과도하게 분비되는 기름기를 잡아주고 모공을 조이는 역할을 합니다. 자몽은 박테리아 등 유해 미생물에 강력한 살균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여드름 등 피부 트러블을 다스리는 데도 좋습니다.
5) 뼈 건강 자몽에는 칼슘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성장기 아이들은 물론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섭취하면 골다공증을 예방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6) 빈혈 예방 자몽에는 엽산과 철분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빈혈을 예방하고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7) 모발 건강 자몽에 함유된 비타민A와 C는 모발 성장에 도움을 주며, 손상된 모발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줍니다. 직접 자몽즙으로 모발을 헹구어 주는 것도 매우 좋습니다. 두피가 건조해지면 비듬이 생기기 쉬운데 자몽주스는 비듬균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8) 노화 방지 자몽에는 레티놀이라는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손상된 피부를 회복하고 주름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자몽에 함유되어 있는 스페르미딘이라는 성분 역시 피부 노화 방지에 좋다고 합니다. 자몽즙을 마신 후에 조금 남은 즙으로 팩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자몽 팩
자몽주스 1/2컵, 꿀 1Ts, 오트밀 1/2컵
<주의>
고혈압 약을 복용하고 계신 분들은 전문의와 상담하여 오렌지와 자몽을 먹는 것이 좋습니다. 일부 고혈압 약의 경우, 오렌지주스, 자몽주스 등과 함께 섭취하면 심장박동이 빨라질 수 있고 약 성분이 분해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새하얀 오렌지꽃은 순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경우, 결혼식 때 신부의 꽃다발로 오렌지꽃을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하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충성된 신부로 매일 하루하루를 지내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건강보감_건강은 가정에서부터
오늘날의 인류를 괴롭히는 질병과 불행과 범죄의 대부분은 올바른 건강교육의 결핍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악한 습관으로 건강을 잃은 자들을 치료하고 개혁시키기 위한 인간의 많은 노력과 각종 건강사업과 치료기관을 통하여 많은 시간과 자금, 치료 활동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너무도 미약하며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사람도 무척 적은 형편입니다. 선천적, 후천적 성벽을 방지하기 위한 인간적 방호벽은 마치 급류를 막으려는 모래 둑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생기를 주는 능력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공격하는 안팎의 유혹을 저항할 수 있습니다. 심령과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이신 주님은 싸우는 정욕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이 완전한 품성을 소유할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영혼을 부패케 하는 육신적 경향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해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께 굴복할 때, 사람의 마음은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사람은 자유롭게 되며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는 것은 완전한 사람으로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인간의 정욕과 감정으로부터의 구출을 뜻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정복자, 자기 자신의 성벽의 지배자,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에 대한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건강교육이 가정에서보다 더 필요한 곳은 없고, 가정에서보다 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암처럼 사회를 좀먹고 있는 부절제와 무서운 힘이 되고 있는 악한 습관과 악의 파급을 방지하고 자녀들의 습관과 품성을 선하게 형성시켜 줄 능력이 부모들에게 있습니다. 부모들은 습관과 품성의 기초를 놓는 일을 해야 합니다. 건강 개혁 사업은 육체적·도덕적 건강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들을 자녀들에게 제시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세상을 멸망으로 쓸어 넣고 있는 악에 대한 유일의 안전책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세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순종과 범법 중 어느 하나의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본과 교훈에 의하여 가정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꼴지어주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