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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14일(주일) 사순절 네 번째 주일낮예배♣
성경:고린도전서13:5(신279P)
제목: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합니다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헬, 것을
서론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며 '주안에서 하나이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이러한 단어들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나타내 주는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기에 서로 사랑하며 위해주고 한 분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당연히 서로 한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가야 할 교회에서 상처받는 일들이 일반 사회보다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나이 어린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을 없신여기며 무례히 행하여 상처를 주는 경우들이 많습니다.교회 각 기관에서 봉사하면서 다른 부서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깍아내리고 비난하고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에서 사랑은 커녕 원수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교회에서 위로 받고 기뻐해야 되는데 오히려 상처받는 일들이 왜 일어날까요? 이것은 올바른 신앙관이 정립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예의를 지키는데서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마음을 느껴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또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데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주님을 본받는 자라면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며 예의를 지킬 때 기쁨으로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시리즈 오늘은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들으시는 중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What:사랑은 예의 범절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의 사랑의 정의는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면 예의바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출발은 서로에 대한 존경에서부터입니다. 예의바르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성경이 사랑에 대하여 기록하다가 왜 갑자기 예절에 대해 말하는지 의아해 합니다. 하지만 무례히 행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한 두 가지의 예의범절을 지키는 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무례히 행함은 희랍어로 ‘아스케모네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희랍어 스케마에서 온 것이고 이 스케마는 영어 scheme의 어원으로서 형식, 틀, 예법, 방식 등을 뜻합니다.
거기에 "아" 라는 부정접두어가 붙어서 스케마가 없이 행동한다는 뜻이 아스케모네이의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뜻은 사랑은 규모, 예법, 도리, 규범, 이런 것들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 안에서 끓어오르는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놀라운 질서를 지향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질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무례함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의바른 사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언급합니다. 특히 성만찬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거의 매일같이 가정교회에 모여서 떡을 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모일 때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먹을 음식을 싸가지고 왔습니다. 부유한 자는 많이 가져왔고, 가난한 자나 일터에서 오는 사람은 음식을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져온 음식을 다 함께 나누는 것이 초대교회의 성만찬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중 어떤 부유한 자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먼저 성만찬을 먹었습니다. 이들은 취하도록 먹었고 또 음식들을 남김없이 먹었기 때문에 늦게 온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 했습니다. 먹는 것에서 소외되는 것보다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단호하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11:22).
사도 바울은 이들의 무례함을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예의 없는 짓이라고 책망합니다.
이런 무례함의 결과 사도 바울은 성만찬의 엄숙함이 훼손되었고 그 때문에 병들고 죽은 자도 적지 않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11장 29,30절입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예수님의 경고대로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고린도 교회는 먹는 것에 예의를 지키지 않음으로 작은 소자들을 실족하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를 향하여서 이렇게 처방을 내립니다.
고전11장 33, 34절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교회 안에서도 조심할 일입니다. 내가 한 무례한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 때문에 사람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아무리 가깝다고 부부간에도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무례하게 되고 상쳐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위대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의바르다는 것은 사람의 이러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것이 무례함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 없이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함 없이 그저 자기 생각과 세계 속에서 자신이 모든 우주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고인 것입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기 전에 벌써 내가 여기서 중심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무례한 생각과 행동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장하고 가르쳐야 하며 내 말에 다른 사람이 따라야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이미 무례한 지경에 와있는 것입니다. 무례함의 특징은 자신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사자라도 된 것같이 방자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침공한 앗수르의 산헤립왕의 신하 랍사게는 유다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지 않았으면 내가 너희에게 왔겠느냐.”
그리고 히스기야 왕과 유다백성을 이간시켜서 유다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을 봅니다. 매우 무례하고 방자한 일을 행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인양 이와 같이 거짓행위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무례해지는 것일까요? 영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상태가 좋다면 우리는 절대 무례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어떻게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한 사람이 어떻게 무례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교만과 판단이 무딘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한 상태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루어야 될 모든 일들을 분별하며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행위는 옳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틀렸다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영적 판단의 무딘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나드 옥합을 깨어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예수님의 발을 씻는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그 향유를 팔아서 300데나리온에 값을 받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좋지 않겠느냐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을 생각을 해야지 자신의 것을 내어놓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헌신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모습, 그러나 그 마음에는 실제는 그 돈에 대한 탐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내 욕심 때문에 내 탐욕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이와 같이 힐난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열등감이나 그 열등감이 과시욕으로 투사될 때 우리는 무례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열등감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하고 그것이 과시욕으로 드러나 다른 사람에게 나를 휘두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않아도 될 것을 자랑하며 남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무례하게 행하는 것은 사단에게 휘둘려 있는 영적인 혼미의 상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단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영적 일관성도 없고 또 자기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런 경우에는 믿음과 사랑이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무례함으로 결국 그 피해를 누가 받습니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피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피해를 받고, 주변사람들이 피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가 피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이 가장 큰 피해의 대상자가 됩니다. 결국 인격에 파탄이 이루어지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손대어 그를 치유하시고 고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큰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례하다는 것은 내 자신을 잊고 하나님 자신을 잊고 그리고 마음대로 사단의 손에 이끌려져 다니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정말 우리 주변에 보면 무례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무엇인가 휘두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을 봅니다.
생각없이 말하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후련해하는 이와 같은 경우를 봅니다.
히브리어로 무례라는 단어는 “철이 덜 든 개, 또는 훈련이 덜 된 개”에 비유할 때 자주 사용했습니다. 훈련이 덜 된 개를 풀어놓으면 천방지축 엉망진창이 연결됩니다.
바로 무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입니다. 무례한 자가 나타나면 훈련이 되지 않아 주위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끼칩니다.
2.Why:왜 사랑은 예의 범절을 어긋나게 하지 않게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이 무례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덕적 영적 우월감이 그를 극도로 무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청년이었을 때 벌써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청년으로 무례한 지도자 대제사장에게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랬던 그가 사도가 된 후 돌변했습니다. 무례는 그의 삶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는 새로운 차원에서 신학적 깊이와 도덕적 탁월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를 더 이상 무례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고전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빌립보서 3:18을 볼까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의 눈엔 눈물이 마를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원수들에게조차 무례하지 않았고 눈물로 호소함으로 그들을 소중히 받들었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무시당하고 버림당하고 짓밟히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오죽하면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겠습니까?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 변화시켰을까요? 사랑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온유하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처음 대면했습니다. 위협과 살기를 뿜어내고 있던 무례한 사울에게 예수님이 다가와 하신 것이라곤 빛으로 그를 두르신 후, 겨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질문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그의 인격과 존재를 존중하셨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후 바울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 깊이와 높이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변하여 사랑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례는 그의 삶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배추가 소금에 속속들이 저려지듯 우리 존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푹 적셔질 때, 비로소 무례함을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에게 데려와 예수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고 거기에 걸리도록 무례하게 행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십니까?
예수님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결코 무례하게 대응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서 땅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셨습니다.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내용 보단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조용히 땅에 뭔가를 쓰신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무례를 촉발시킬 수 있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다그치자 예수님은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양심의 정곡을 찔러 도전하시되 결코 무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인격과 양심을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도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 하던 모든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곤 질문을 던지십니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인은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답을 하면서 여인은 얼마나 마음의 안도를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여인을 무리들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의 인격을 존중하여 조심스럽게 다루시고 계심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안도시킨 다음 예수님은 중요한 권면을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를 정죄할 자격이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를 짖지 말라고 진지하게 권면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언제나 그 누구도 심지어는 사단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철저히 싸고도십니다. 주님 자신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만 진지하게 권면해주십니다.
'가서 이제부터 새 출발해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똑 같은 죄를 짓고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똑 같이 대하십니다. 우리가 마침내 주님의 사랑과 인내에 감복하여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반복된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몸에 베이기 시작하면 우리도 꼭 그만큼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사랑으로 점점 변하여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꼭 그 만큼 우리는 무례함을 극복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람마다 성숙의 속도에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단번에 무례함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숙의 과정에서 태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 길을 끈기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사람마다 무례해지는 경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한 부분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약한 부분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도록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무례한 지도자들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보며 이렇게 탄식합니다(렘 5:30-31):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유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 탄식합니다(고후 11:20):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오늘 한국교회 건강회복이 어려운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무례한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개혁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무례는 우리가 진지하게 싸워야할 실로 무서운 적입니다.
우리 스스로 어떻게 무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무례한 권위를 분별하여 그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3.How:우리가 무례히 행치 않으려면 우리는 어떤 각오와 행동을 이루어야 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야합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어도 내가 기뻐 합니다.
선한 사람은 내가 어떻게 되어도 다른 사람이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다 내뱉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상하더라도 내 마음을 정화시켜 거치고 거쳐 마침내 정화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하는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고 민감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지 유익을 주는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례한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지 피해를 주는지 구별조차 못합니다.
내가 늘 내 기분에 맞고 내 마음 원하는 대로 해야 편안하다 하면 이것은 빨간불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결국 마지막 자기 마음까지도 상합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과 상황은 도저히 내 마음을 마음대로 채워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자연에 우리는 자연히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원해도 원치 않아도 계절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변화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살 수 없습니다.
3월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때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왜 계절의 섭리에는 결정하고 계절의 섭리에는 따르는데 왜 하나님의 섭리는 못합니까? 자연은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 가장 중요한 투사체인데 왜 자연은 따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섭리에는 따르지 못합니까?
결국 우리는 계절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계절에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내 마음을 순복시키고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끌어내려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맞춰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상처받고 마음 괴롭고 눈물 흘리고 어렵다면 벌써 그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 삶 가운데 무례히 행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성도는 무례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 중에 무례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평안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늘 다른 사람에게 ‘무익한 종이다’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늘 ‘다른 사람에게 유익과 도움을 주고 있어’ 생각하면 이것도 빨간 신호입니다.
결국 우리는 늘 내가 부족하다 생각할 때 이때가 내가 남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관리, 말관리, 행동관리’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싶지 않잖아요. 그런데 무례히 행동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첫째, 마음을 관리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천국이 돼야 합니다. 지금은 "주님이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한없는 감사를 주시는 구나" 라고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평안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평안이 깨지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평안입니다.
‘샬롬’ 하고 인사를 합니다. “평안이 있으라. 평안하십시오. 평안 합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평안한 것입니다. 평안이 깨지면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진 상태인 것입니다.
평안하지 않으면 지금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자유롭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축복해주고 싶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축복해주고 싶어야 합니다.
미운 사람 있거나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내 마음이 사단에게 지배받고 있다고 분명히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속히 그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이 주시는 천국을 이루고 주님의 은혜의 꽃밭이 돼야 합니다.
둘째로, 언어관리를 해야 합니다.
말의 관리 언제나 그 말에 감사가 넘치고 세움이 넘치고 감격과 감동이 넘칩니다.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건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 기쁨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는 것보다 우선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무엇인줄 아세요? 다른 사람의 기쁨으로 내 마음으로 기쁘게 할 수 있을 때 나는 진정한 행복자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으로 내 마음이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으로 내가 마음에 기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되 웃는 자들과도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자들과 함께 마음으로 다 행하여 낮추되 잘되는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고 그것 때문에 기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진정한 인격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안양대 추태화 교수의 글입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을 규정하는 개념에 원자화(原子化)라는 말이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몸을 부비며 살아가지만 실상은 제각각의 궤도와 운동 법칙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원자 같다는 말이다. 휴대전화가 울리면 이 용어는 사실로 확인된다.
서로 깊은 마음을 나누듯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등 돌리고 딴청을 피운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버린다. 그 순간 대화는 단절되고 상대방은 머쓱해지고 상황은 싸늘해진다.
이런 광경은 직장에서도,거리에서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 함께 대화하던 상대방의 인격은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말하는 자아만이 있을 뿐이다.
내 말만 하겠다는 간접적인 폭력이요,이기적인 일방통행이다. 여기에서 예의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리더십 저서 가운데 ‘배려’라는 개념이 다시 등장한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얼마나 상대방의 입장에 서지 못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한다.
예의는 인터넷 상에서도 위기상황에 처한 듯싶다. 오래 전 모 양의 비디오라는 말로 네티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던 사건은 후안무치했다. 예의없는 집단관음증의 한 유형이었다.
얼마전 개똥녀라는 댓글이 사진과 함께 인터넷을 떠돌더니 그도 잠시 된장녀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이들 신조어의 공통점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점점 실종되어가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세인들은 이제 인식하게 된듯 싶다. 우리가 예의없는 사회로 돌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10여년 전 ‘저지 드래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너무 자유로워 무법천지가 된 뉴욕의 치안을 다스릴 엘리트 집단에 관한 것이었다. 비슷한 발상의 영화가 한국에도 등장하였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예의없는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무차별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작가 공지영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점잖게 소설로 권유했지만 앞으로 예의없는 것들은 정말 몸조심해야 한다. 영화에서처럼 언제 ‘킬러’가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안전불감증,위생불감증,안보불감증 등등 불감증에 대해 소리를 높였다. 이제 한 가지 더 고뇌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그것이다. 인간이 원자처럼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서로에 대한 서로의 사랑과 존경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겠는가.
야고보 사도는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약3:2-12).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우리가 말들의 입에 1)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헬, 굴레 씌우는 것은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2)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또는 큰 수풀을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에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행동의 관리를 해야 합니다.
벌써 영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눈과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행동하면 그때는 실수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실수할 때, 실수를 만회하려고 자꾸 무엇을 덧붙이면 더 큰 실수만 됩니다.
정말 실수했을 때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깊은 묵상과 침잠 속에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회복하고 그 다음에 말하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우리 실수할 때 자꾸 그 실수를 만회하려고 이러저러하게 또 덧붙이면 더 어려워지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인가 실수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빨리 중단해야 합니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뭔가를 덧붙이면 그 순간 실수가 계속 확장되어 가고 계속 넓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 내가 무엇인가 무례히 행하고 있고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즉시 침잠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삶에서 뭔가 잘못하는 것은 일단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갈등이 있고 내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는 것은 내가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 성품이나 모든 행동도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은 우선 영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4what then:결과
왜 무례한 행동이 나옵니까? 이것은 사랑하는 대상의 입장에 서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 자신의 의, 자신의 주장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에 무례히 행동하고, 자기유익만 구하고, 그리고 성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아름답고 성숙한 것이 되려면, 그 기준이 내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편에 있어야 합니다. 가령,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인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성취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 늘 서 있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입장에 항상 서 계시는 사랑을 가지셨기에 그분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나의 가정이 병들거나, 또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힌다면, 그것은 바로 내 입장에 서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께나, 아내나, 남편에게나, 이웃에 대하여 무례하고 자기의 유익만 구하고, 분노하며 성내는 것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대상의 입장에 서 보십시오. 그러면 병든 사랑에서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카운셀링에서 상담치료 효과를 위한 방법중 ''role-playing''(대역놀이)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역할을 바꾸어 대역해봄으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함으로 곧 자신의 병든 모습을 고치는 치료법인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의 입장에 서서 행하는 사랑은 우리의 병든 사랑을 치료합니다.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 서있는 사랑은 건강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을 이룹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는다"이것은 사랑의 작은 태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도 성공하는 길 중에 특히 대인관계에서 예의 바르고, 절도 있고, 바른 몸가짐을 갖는 것은 아주 작은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신사답고 숙녀다운 행동과 인품을 갖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의바른 행동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축복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예의 바르게 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고대로 우리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공적인 자리에서는 예의를 지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무례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예의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내가 생활하는 가운데 상대방에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고치도록 힘쓰세요. 아주 작은 내 습성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화)
한국일보 주필이며,한국연우포럼 회장인 임철순이라는 사람이 쓴 칼럼 중에 "무례한 한국인"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 보면 이런 귀절이 나옵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그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사람에게 부대껴야 하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는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만들고 성가시게 괴롭히는 사회다. 한국인들 중에는 천박하고 무례한 사람들이 많다. 공공의 예절에 어둡거나 무지하다"라고 썼습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임철순이라는 칼럼리스트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분이 쓴 글에 대해서 댓글쓴 것을 몇가지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캐나다 여성교포 :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타국에서 한국인들을 볼 때마다 그 무례함에 너무도 창피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싫었습니다. 일본 이민국에서 입국 절차를 밟을 때 휴대폰 전화로 떠들고, 남편 마누라를 큰소리로 불러댑니다. 공항에서도 줄 설 줄 모르고 짐 카트를 통로에 세워 놓고도 미안해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박물관에서는 초등학생들이 만지지 말라는 표시를 무시하고 소장품을 만지고,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녀도 단 한 명의 교사도 나무라지 않는 모습에 거의 경악을 하였습니다.
또 30대로 보이는 남녀는 문화재인 돌거북에 앉아 사진을 찍습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보십시오. 거의 모든 엄마들이 내 자식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도 자기 자식을 감싸고 돕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의 자녀 교육의 현실태인 것 같습니다.
또 TV방송극을 보면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남에게 신경 쓰지 않고 휴대폰으로 얘기하는 사람, 벨을 크게 울리게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드라마 작가가 쓴 드라마에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드라마 작가들부터 예절교육을 시켜야 하겠습니다. 공공의식이 무엇인지, 학교와 가정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한숨이 나올 정도입니다.
- 호주 교민 : 호주에서도 낚시터에 가면 바위 구석 구석에 소주병, 라면봉지, 빈 초장병 등등이 버려져 있고 골프장에 가면 내기 골프하다가 싸우는 소리, 공항 대합실에서의 고스톱 판, 노래방에서 터져 나오는 고성방가 등등 너무나 무례한 짓을 범하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약간 양해를 구하면 오히려 고함으로 응대하는 뻔뻔스러운 사람들….
- 27년째 미국에 사는 교민 : 1년에 두 세 번 한국을 다녀올 때마다 느끼는 저의 마음을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주필님의 글을 많은 한국인들이 읽고 좀 달라진 모습의 한국민을 보고 싶습니다.
- 30대 초반 전문의 : 20년 전 2년간 미국에서 생활하고 귀국한 후, 선진국의 공공질서와 상호 존중의식에 대해 교육을 받았으나 한국, 특히 제가 사는 지방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례함과 실례들을 보아왔습니다. 선진국 일류화로의 진입을 위해서는 계몽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주부 : 은행 창구에서 출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제 옆으로 바짝 와서 물끄러미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암호 노출의 위험이 있어서 "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뒤에서 기다리세요" 했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편이 하는 말이, 그 분이 물러나면서 머리 위에 손가락을 빙빙 돌리더랍니다. 제가 미쳤다고요.
- 교직경력 35년인 서울의 초등학교 교장 : 가장 근본 문제는 교육, 그 중에서도 초등교육입니다. 고등교육, 입시교육이 더 큰 문제로 대두되어 진짜 중요한 어릴 때 교육은 처절하리만큼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초등학교에서는 더 이상 어릴 때 습관화되어야 할 기본생활교육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손을 놓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왼쪽으로, 한 줄로, 조용히' 라는 피켓을 들고, 등교하는 아이들과 아침 눈인사를 나눕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한 번에 가르칠 수 없습니다.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 천 번쯤 말하고 모범을 보여야 좋은 습관이 들 수 있습니다. 아이들 교육은 끈기의 싸움이라고 봅니다. 교사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누가 이기나 하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느나라의 온천장에서 한국사람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는 보도나 유럽 어느나라의 유스호텔에서는 한국의 배냥족들은 안받는다는 보도는 불쾌한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기독교화 되고 서구화되고 세계화 되고 현대화 되는 것이 교양을 버리고, 예의범절을 버리는 것인줄로 착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인 것입니다.
얼마 전, TV에서 히말라야원정대의 'Clean Mountain'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원정대가 산에서 수거한 수십자루의 쓰레기 중에는 한글로 씌어진 우리나라 라면과 과자봉지 등이 다량 발견 되었는데 그걸 보고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비웃었을까요?
호주나 뉴질랜드의 호수가에는 한국산 라면봉지며 소주병, 그리고 초장 그릇이 널려 있다는 소식은 우리를 한 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이제 우리는 대단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례한 일들을 계속하면 결국은 세계인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외모에 자신이 있던 어떤 여자가 외국에 나가서 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눈길을 자꾸만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외모는 외국에 나와도 인정을 받는구나 생각을 하고 더욱 멋진 포즈를 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안내인이 정중하게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출입구입니다. 좀 비켜서주시지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부끄럽고 챙피스러웠는지 몰랐다는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 배운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무례를 행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례라는 것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결론
"직장 안에서 이런 크리스천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는 질문에 크리스천들이 가장 심각하다고 꼽은 것은 역시 "비인격적인 태도로 직원들에 존경받지 못하는 크리스천 상사" (4.07점)였고, 다음으로는 "종교 얘기만 나오면 싸울 듯 달려드는 사람"(3.78점)이었다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무례한 크리스천에 대해서는 "많은 성경지식을 자랑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불 장군 형"을 가장 부담스러워했고(4.01점). 다음으로는 "봉사는 열심히 하면서도 인간적으로 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볼 때" (3.92점),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지우는 사람을 볼 때" (3.84점) 등의 순이었고, "사람들보다는 사역과 일의 결과에 더 관심이 있는 일군에게도 상당한 짐을 느끼고 있었다(3.54점)하며 기타 의견으로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자신이 모든 일에 중심인 것처럼 사역해 나가는 모습 역시 무례한 모습으로 지적되었다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니 언어생활에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마음으로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행동으로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공적으로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권위를 존경하고 인정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