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을 이틀 앞둔 월요일이었다. 소한에 찾아왔던 혹심한 추위는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아침 식후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남선교회를 지나 사림동으로 건너갔다. 주택가 정원의 목련과 매실나무 꽃눈은 움츠려 있었다. 창원천변 따라 걸어 창원대학 앞으로 갔다. 대학 앞은 방학이라 한산했다. 대학 구내는 학과별로 공무원 시험 합격과 취업이 확정된 졸업생 명단이 걸려 있었다.
근래 창원대학은 부산대학과 통합설이 나왔다. 한때는 경상대학과도 짝짓기하려는 얘기가 오갔다. 그간 국립의 온실에서 앞으로는 법인화의 들판으로 나와야 하는 대학들이다. 방학이라 겉은 조용했다만 속으로는 경쟁이 치열한 대학이라 여겨졌다. 지방 소재 대학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대학인들의 몸부림은 절절할 것이다. 대학본부 곁 운동장에다 중앙도서관을 신축하고 있었다.
나는 사회과학대학을 지나 학군단 쪽으로 갔다. 학군단 건물 뒤는 상촌마을 옛터비가 세워져 있었다. 대학이 들어서기 전에 살았던 주민이 떠나면서 세운 비석이었다. 빗돌 뒷면에는 떠나는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바깥양반 성함을 새김이 일반적인데 상촌마을은 달랐다. 특이하게도 집집마다 안사람의 택호를 새겨두었다. 부녀자들의 택호는 대개 친정마을 이름에서 취하였다.
학군단 뒤에서 정병산 독수리바위로 오르는 등산로는 일시 폐쇄시켰다. 산허리로 뚫리는 경전선 철로와 25호 우회 국도의 터널공사 때문이었다. 나는 학생생활관 뒤로 난 소나무 숲 산책로로 들어섰다. 송전탑을 세우느라 장비가 지나면서 자연스레 길이 났더랬다. 잣나무를 심어 생태를 복원해두었다. 바깥에서 볼 때는 눈에 띄지 않아 호젓했다. 정병산 허리에 해당하는 둘레 길이었다.
산허리를 한참 돌아 나간 곳은 소목고개였다. 고개에는 오래된 무덤이 많았다. 상석과 빗돌에 새긴 글에 순흥 안씨가 더러 보였다. 나는 고개 쉼터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산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나는 정병산으로 오르지 않고 봉림사지로 향했다. 골프장 능선으로 들었다가 시누대 숲이 나온 갈림길에서 다시 산봉우리로 올랐다. 최근 생견난 등산로였다.
산정에는 패러글라이딩 이륙장이 있었다. 몇몇 사람이 운동기구로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 나는 내려서면서 봉림사지로 들었다. 봉림사는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한 가람이었다. 산정에서 내려갔더니 절터 뒤 볼록한 혈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있는 무덤이 두 개 나왔다. 동일한 봉분 모양과 망주로 보아 같은 집안인 모양이었다. 상
석에 새긴 글씨가 희미해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절터에는 보물자리 새김 돌이 있었다. 당시 봉림선문을 개창했던 진경대사의 보월능공탑과 탑비는 일제시대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중앙박물관 후원에 있다. 봉림사 삼층석탑은 산 아래 상북초등학교 화단에 있다. 진경대사는 이 가람에서 열반하면서 ‘모든 법은 다 빈 것이고, 온갖 인연은 다 고요한 것이니, 세상에 산다는 것은 완연히 떠가는 구름과 같다’는 임종계를 남겼다.
갈대가 서걱거리고 대숲이 무성한 절터였다. 누군가 바윗돌 아래 깨진 기와조각을 주워 모아 단을 쌓고 아기불상 세 개를 놓아두었다. 앞에는 향로와 촛대로 세워두었다. 신심 두터운 사람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는 모양이었다. 임도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만 나는 약수터로 올라와 등산로를 찾았다. 나는 예전 없던 새로 난 길 따라 숲길을 내려갔다. 내려간 끝에 보현선원이 나왔다.
봉림지구는 택지공사가 한창이었다. 한쪽에선 아파트가 들어설 터를 고르고 한쪽에선 문화재 시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십여 명 인부들이 겹겹 황토층을 조심스럽게 갉아내고 있었다. 내가 한 노인에게 다가가 어디 소속이냐고 물었더니 한국문물연구원에서 나왔다고 했다. 군데군데 횟가루로 선을 그어 발굴지점을 표해 두었다. 삼사 세기 부족국가 시절 사금파리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10.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