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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 공주 목사(公州牧使) 김공(金公) 묘갈명 무진년(戊辰年, 1688, 숙종 14)
[생졸년] 1585년(선조 18)~1651년(효종 2) / 향년 66세
나는 어릴 적부터 김공 효성(金公孝誠)이 광해군 때를 당하여 유생의 신분으로 항거하는 글을 올려 세 적신(賊臣)의 목을 벨 것을 청했다는 말을 익숙히 듣고는 일찍이 무릎을 치고 기개를 돋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금 장성하여 또 공이 과장(科場)에 응시하여 지은 ‘가철애군부(歌徹愛君賦)’를 얻어 읽어 보니, 문장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비록 일찍이 공을 뵙지는 못하였으나 공이 문(文)과 질(質)을 구비하여 찬란한 군자임을 평소 알고 있었다. 지금 공의 손자
진규(震奎)가 공의 묘갈명을 나에게 부탁하였는데, 내가 생각건대 공의 묘갈명을 짓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여겨져서 삼가 그 가장을 받아 다음과 같이 쓴다.
공은 자가 행원(行源)이니, 계통이 신라의 국성(國姓)에서 나왔는바 관향이 광주(光州)이다. 고려조 이래로 벼슬한 분들이 서로 이어져서 세상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선고 휘 수연(秀淵)은 벼슬이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선비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좌승지에 추증된 희룡(希龍)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서 노성(老成)하다는 칭찬이 있었는데, 2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 7)에 적신인 정조(鄭造), 윤인(尹訒), 이위경(李偉卿) 등이 광해군의 뜻에 아부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원수로 삼자는 의논을 선창하였는데, 승상 이원익(李元翼)이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말씀을 올렸다가 죄가 장차 측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이에 분한 마음을 발하여 눈물을 흘리며 동지들을 거느리고 상소문을 올리려 하였는데, 친족들이 굳이 만류하였으나 공은 못 들은 체하였다. 상소할 시기가 되자, 함께 약속한 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가서 3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약간 명을 규합하여 대궐에 나아갔는데, 잘못하여 사헌부의 청사로 들어갔다.
사헌부의 아전이 큰 소리로 “대관이 장차 도착할 것이다.”라고 꾸짖자, 공은 말씀하기를 “나는 국가를 위해서 바야흐로 너희 대관(臺官)들의 목을 베려 한다. 내가 죽는 것도 피하지 않는데 어찌 대관을 피한단 말이냐.” 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놀랐다. 상소문이 들어갔으나 답이 내리지 않았는데,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서로 이어 상소를 올려서 대벽(大辟 사형(死刑) )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공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려 하였는데, 마침 사형수가 고변하여 요로에 있는 사람들을 널리 끌어들였으므로 스스로 구제하는 데 급급하여 국문이 중지되었다. 공은 길주(吉州)로 귀양갔다가 진도(珍島)로 옮겼는데, 흉악한 무리 중에 최공망(崔公望)이라는 자가 일찍이 상소하여 공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그가 전라도 도사를 맡게 되자, 기어이 공을 살해하고자 하여 벽파정(碧波汀)을 건너려 하였는데 그때마다 풍랑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원년) 봄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을 하고 역말을 보내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불러 올렸는데, 도중에 청안 현감(淸安縣監)에 제수되고 연달아 지헌(持憲)과 좌막(佐幕)에 의망(擬望)되었다.
을축년(乙丑年, 1625, 인조 3) 사직하여 체직되고 병인년(丙寅年, 1626, 인조 4) 호조 좌랑으로 있으면서 호패(號牌)의 일을 겸임하였으며,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 대가(大駕)를 따라 강도(江都)로 갈 적에 대비(大妃)께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위로하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으니, 이는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 7)의 일을 생각해서였다.
금구 현령(金溝縣令)에 제수되었는데 본조(本曹 호조 )에서 유임시킬 것을 아뢰어 무진년(戊辰年, 1628, 인조 6)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나 당상관과 서로 합하지 않는 말이 있어 괴산 현감(槐山縣監)으로 좌천되었는데, 또 병사(兵使)와 뜻이 합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임신년(壬申年, 1632, 인조 10)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계유년(癸酉年, 1633, 인조 11) 체직되어 돌아왔으며, 갑술년(甲戌年, 1634, 인조 12)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에 제수되고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으로 옮겼다가 면직되었다.
다시 형조 정랑(刑曹正郞)이 되고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옮겼으며,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으로 옮겼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군기시 첨정(軍器寺 僉正)에 제수되었다.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임명되고 기묘년(己卯年, 1639, 인조 17)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승진하였는데, 언로에 있는 자가 남의 사주를 받고 공을 탄핵하였다.
상은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은 시비를 따지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신사년(辛巳年, 1641, 인조 19) 죽산 부사(竹山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계미년(癸未年, 1643, 인조 21) 그만두고 돌아왔으며 갑신년(甲申年, 1644, 인조 22) 공주 목사(公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정해년(丁亥年, 1647, 인조 25) 역적을 토벌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 正三品 당상관)의 품계에 오르고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에 제수되었다. 금성 현감(錦城縣監)으로 나갔는데 도백(道伯)의 마음에 들지 못하여 체직되어 돌아왔으며, 기축년(己丑年, 1649, 인조 27)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경인년(庚寅年, 1650, 효종 원년) 북쪽 사신을 대응함에 미비한 것이 있다 하여 구금되고 삭탈관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어 오위장(五衛將)이 되었으며, 신묘년(辛卯年, 1651, 효종 2) 칠곡 부사(漆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오위장에 제수되었는데, 병환이 위독해지자 약물을 물리치고 자력으로 정침에 이르러 옷을 갈아입고 반듯이 누워 서거하니, 춘추가 67세였다.
공은 평상시 집안에 거처할 때에는 행실이 순수하고 구비되어 새벽이면 반드시 관을 쓰고 띠를 매고 가묘에 배알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적에는 청백하고 근신하여 모두 아홉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비석을 새겨 공덕을 칭송하였다. 문예가 화려하고 민첩하여 동류들보다 뛰어나 향시(鄕試)에서 번번이 선두에 있었으나 끝내 한 과거에도 이름이 오르지 못하였다.
벼슬하던 초기에 청현직(淸顯職)에 통망되었으나 원한 관계에 있던 귀한 가문의 자제에게 저지당하였다. 만년에 상서(尙書) 이식(李植)과 상국(相國) 이시백(李時白)이 서로 조정에 천거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사헌부의 관직을 제수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 상서가 마침 벼슬을 내놓아 시행되지 못하였다.
아, 이 모든 것이 어찌 재주가 운명에 제약받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이 청안(淸安)에 부임했을 때에 귀한 가문의 종 두 명이 현(縣)의 경내에 있으면서 세력을 믿고 침탈하니, 아전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으나 잡아오지 못하였다. 공이 직접 가서 포박하여 온 경내에 조리돌린 다음 곤장을 쳐서 죽였다.
공은 갑신년 명(明) 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재신(宰臣)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소복을 입어서 명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부쳐야 할 것입니다. 비록 북극성과 같은 천자국의 조정은 없어졌으나 반드시 남쪽으로 건너온 군신(君臣)이 있을 것이니,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을 대번에 끊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 일이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듣는 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배위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예조 판서 증(增)의 손녀이고 병조 좌랑 경류(慶流)의 따님이다. 공과 같은 해에 출생하여 공보다 22년 뒤에 별세하였다. 부인은 공을 따라 임소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계집종과 모시는 자들을 경계하여 관청에서 가져다가 사용한 기물들을 모두 반환하게 하였으며, 집에 이르러서는 아전들이 오는 길에 사용하다가 남은 물건을 바치면 물리치고 받지 않으며 말씀하기를 “이는 공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아들을 따라가 전성(專城)의 봉양을 받은 것이 세 번이었는데 항상 해진 장롱 두 개를 가지고 갔다. 아들이 이것을 바꿀 것을 청하자, 부인은 허락하지 않으며 말씀하기를 “내가 부자(夫子 남편 )가 계실 적에 30년 동안 여러 고을에 고을살이를 하였으나 가지고 간 것은 오직
이 물건뿐이었다.
지금 사람과 물건이 모두 노쇠했으니, 어찌 차마 이것을 버리겠는가.” 하였다. 아, 이것을 본다면 또한 공의 교화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영국 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으로 준례에 따라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부인과 묘소를 달리하였다가 무오년(戊午年, 1678, 숙종 4)에 함께 이장하여 마전군(麻田郡) 청전동(靑田洞, 경기도 연천군 관내)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합장하였다.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 세정(世鼎)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이고, 딸은 생원 안지망(安之望), 금산 군수(錦山郡守) 변명익(邊命益), 김화 현감(金化縣監) 신항(辛), 학생 권훈(權勳)에게 출가하였다. 승지는 2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바로 공의 명문(銘文)을 청한 자이고 막내는 명규(命奎)이며,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수십 여 명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았으나 / 不位于朝
세상의 걱정을 자임하였고 / 任世之憂
가혹한 형벌을 당하여 / 臨于鼎鑊
기꺼이 몸을 희생하려 하였다오 / 甘以身投
어두운 밤에 촛불이 되어 / 在夜爲燭
그윽함을 밝혔다오 / 亦晣于幽
윤리 강상을 붙들어 / 扶倫樹紀
몸은 곤궁하나 이름은 아름다웠네 / 身阨名休
성군이 나오자 만인이 우러렀는데 / 聖作物覩
표창하여 부름이 먼저 이르렀네 / 褒召先及
장추전(長秋殿)에서 음식을 하사하니 / 長秋饋食
중사(中使)가 이것을 갖다주었다오 / 中貴是押
내직과 외직을 두루 지내니 / 歷官內外
은혜와 영광 또 흡족하였네 / 恩榮且洽
굽히면 반드시 펴지니 / 有屈必申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았도다. / 如支之合
재주가 이미 넉넉하였으나 / 才之旣優
운명이 오히려 부족하였으니 / 命則猶靳
어찌 공경의 지위에 올라 / 胡不公卿
쌓은 경륜 다 펴지 못하였는가 / 俾悉其蘊
공의 굳센 의리를 가지고 / 將公矯矯
괄하지 않고 은하지 않았네 / 不栝不檃
세상이 옹색하여 / 抑時之隘
큰 재주를 펼치기 어려웠네 / 材大難奮
저 청전을 바라보니 / 瞻彼靑田
공이 묻혀 있는 곳이라오 / 惟公之藏
이미 견고하고 또 편안하니 / 旣固且安
후손들이 이에 번창하리라 / 後嗣是昌
내 좋은 시 지어 / 我作聲詩
아름다운 자취 기재하여 / 載其遺芳
바른 돌에 새겨서 / 刻于貞珉
아득한 후세에 보이노라 / 庸眎茫茫
[각주]
[주01] 세 적신(賊臣) :
광해군에게 상소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할 것을 주청한 정조(鄭造), 윤인(尹訒), 이위경(李偉卿)을 가리킨다.
[주02] 지헌(持憲)과 좌막(佐幕) :
지헌은 지평(持平)의 딴 이름이고, 좌막은 비장(裨將)을 이른다.
[주03] 역적을 토벌한 공로 :
전년(前年)인 인조 24년 4월에 모반한 유탁(柳濯)을 토벌한 일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04]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 :
오위(五衛)의 위장(衛將) 가운데 서무(庶務)를 관장하던 위장인바, 정 3 품의 문신으로 2명을 두었다. 조사는 벼슬에 갓 임명되어
경험이 얕은 사람을 이르는 말로, 위장은 원래 2품이었으나 조사오위장은 3품이었다.
[주05] 북극성과 …… 것이니 :
북극성(北極星)은 하늘의 중추(中樞)로 천자를 비유하며, 남쪽으로 건너온다는 것은 북쪽 오랑캐를 피하여 양자강 남쪽으로 옴을
이르는바, 동진(東晉)과 남송(南宋)이 모두 여기에 해당하며, 명 나라 역시 잠시나마 남쪽 해도(海島)에 임시정부를 세웠었다.
[주06] 전성(專城)의 봉양 :
한 성 곧 한 고을을 모두 바쳐 봉양하는 것으로 고을살이하면서 부모를 봉양함을 이른다.
[주07] 공의 …… 않았네 :
괄(栝)과 은(檃)은 모두 나무를 휘는 도구로 곧은 것을 구부리는 것을 은이라 하고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것을 괄이라 하는바, 강직
하여 의지와 기개를 굽히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백효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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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金孝誠 墓碣銘[南九萬]
余自幼少時, 稔聞金公孝誠當光海朝, 以儒巾抗章, 請斬三賊臣, 未嘗不擊節增氣。 稍長, 又得公應科所作《歌徹愛君賦》讀之, 詞采曄然, 有足觀者。 以此雖未嘗拜公, 素知公有質有文彬彬君子人也。 今公之孫震奎以公之碣銘託余, 余以爲銘公可無愧色, 謹受其狀而敍之。
公字行源, 系出新羅國姓, 籍光州。 自麗朝以來, 冠冕相承, 爲世望族。 考諱秀淵, 官襄陽府使, 贈吏曹參判。 妣金海金氏, 贈左承旨希龍女。 公幼有異質, 有老成名。 年二十九, 中生員。
歲乙卯, 賊臣鄭造、尹訒、李偉卿等阿光海意, 倡爲讎母后之論, 李丞相元翼有匡捄言, 罪將不測。 公發憤涕泣, 將率同志陳疏, 親黨固止之, 公若不聞也。 及期, 同約輒散去, 凡三易日, 始糾若而人詣闕, 誤入臺廳。 臺吏呵之曰: “臺官且至。” 公曰: “吾爲國方欲斬爾臺官, 吾死且不避, 安避臺官!” 見者皆驚。 疏入, 不報。 館學相繼投疏, 請置大辟。 下禁府將鞫問, 會有死囚上變, 廣引當路人, 故急於自救, 寢鞫事。 竄吉州, 遷珍島。 凶黨有崔公望者, 嘗疏請殺公, 及任全羅都事, 必欲害公, 將渡碧波汀, 輒爲風浪所阻, 不得逞。
癸亥春, 仁祖改玉, 馹召以義禁府都事, 道拜淸安縣監, 連擬持憲、佐幕。 乙丑, 辭遞。 丙寅, 以戶曹佐郞兼管號牌事。 丁卯, 從駕江都, 大妃遣中使勞賜酒食, 念乙卯事也。 除金溝縣令, 本曹啓留。 戊辰, 陞正郞, 與堂上有違言, 左授槐山縣監, 又與兵使不合, 棄去。 壬申, 拜沔川郡守。 癸酉, 遞歸。 甲戌, 拜繕工監僉正, 移漢城府庶尹罷, 復刑曹正郞, 轉軍器寺僉正, 遷中樞府經歷, 未幾遷授器僉。
丁丑, 拜礪山郡守。 己卯, 陞南原府使。 言路受人惎劾公, 上不許。 公不辨, 投紱歸。 辛巳, 除竹山府使。 癸未, 罷歸。 甲申, 除公州牧使。 丁亥, 以討賊功, 陞通政陞, 拜曹司衛將。 出錦城縣監, 失方伯意, 遞歸。 己丑, 拜淸州牧使。 庚寅, 坐北使策應未備, 有拿命削職, 敍復五衛將。 辛卯, 除漆谷府使, 不起, 還拜衛將。 疾病却藥物, 自力至正寢, 易衣正臥而逝, 春秋六十七。
公內行純備, 晨必冠帶, 謁于家廟。 居官淸愼, 凡歷九邑, 民皆刻石以頌之。 文藝華敏, 拔出流輩, 發解輒居前列, 而終不登名於一第。 發軔之始, 名通淸顯, 而爲貴近家子弟修郤者所尼。 晩年, 李尙書植、李相國時白交薦于朝, 將大用, 有先除憲職之議, 而李尙書適去位, 不果。 嗚呼! 凡此豈非才制於命故耶? 公之莅淸安也, 有貴近家二奴在縣境, 倚依侵奪, 發吏捕不得, 公自往縛致, 徇一境杖殺之。 甲申, 聞皇朝覆亡, 與宰臣書曰: “宜有縞素之擧, 以寓思漢之心。 雖無北極朝廷, 必有南渡君臣, 天意人事, 未可遽絶。” 事雖不行, 聞者韙之。
配韓山李氏, 禮曹判書增之孫, 兵曹佐郞慶流之女, 與公同年生, 後公二十二年而歿。 其隨公任及歸, 戒婢御悉還器用之取辨於官者, 及家, 吏以行廚用餘獻, 却不受曰: “此非公志也。” 從子養專城者三, 恒以二弊籠隨身, 請易之, 不可曰: “吾於夫子時, 徧諸邑三十年, 所隨唯此物。 今人與物俱老, 何忍棄之!” 噫! 觀於此, 亦可以知公之敎也。
公以寧國從勳, 例贈大司憲。 初與夫人異窆, 歲戊午, 竝遷合葬于麻田郡靑田洞先塋之下。 一男世鼎, 文科, 承旨。 四女: 生員安之望, 錦山郡守邊命益, 金化縣監辛
, 學生權勳。 承旨二男: 長卽請公銘者, 季命奎。 內外曾玄數十餘人。 銘曰:
不位于朝, 任世之憂。 臨于鼎鑊, 甘以身投。 在夜爲燭, 亦晰于幽。 扶倫樹紀, 身阨名休。 聖作物睹, 褒召先及。 長秋饋食, 中貴是押。
歷官內外, 恩榮且洽。 有屈必申, 如支之合。 才之旣優, 命則猶靳。 胡不公卿, 俾悉其蘊? 將公矯矯, 不栝不檃。 抑時之隘, 材大難奮。
瞻彼靑田, 惟公之藏。 旣固且安, 後嗣是昌。 我作聲詩, 載其遺芳。 刻于貞珉, 庸示茫茫。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