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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
글쓴이 : 친절한시선
2010-05-18 (화)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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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전주이씨이나 고종정부로부터 왕위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하여 평민화된다. 젊은 시절 서당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스무살 될 무렵엔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배재학당의 교육방식은 철저한 세미나식으로 이승만은 이곳에서 연설능력을 키우고 훗날 독립협회의 반고종 거리연설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미국 선교사 알렌은 한국에 개신교를 들인 선교의 아버지같은 사람으로 본업은 의사다. 원래는 중국으로 파견갔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조선으로 넘어 왔다. 개항이후 관세관리능력이 없었던 조선왕실은 뮐렌도르프라는 독일인을 영입하여 한국최초 외국인 관리로 등용한다. 뮐렌도르프는 비싼 독일 기계를 들여 화폐를 새로 주조하는 등 조선 경제의 핵심으로 파고 든다. 뮐렌도르프 등장에 가장 조바심을 느낀 것은 김옥균류의 급진개화파였다. 조선을 돕는 나라는 일본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조선도 일본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고종은 알렌에게 갑신정변 주도자 홍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쓰라 내어 주고, 이름을 광혜원이라 하였다. 이후 제중원(현재 한국에서 드라마 방영중)과 세브란스병원 그리고 현재 연세의료원으로 이어진다. 같은 시기에 조서에 입국한 아팬젤러는 교육을 통한 선교를 목적으로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이라 이름의 중등교육기관을 세운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고, 가장 유명한 졸업생이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사람들과 고종정부를 심하게 비판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결국 종신형에 처한다. 을사늑약이 있을 무렵, 고종과 민영환은 일본의 눈을 피해 이승만을 미국으로 밀파한다. 이 때, 큰 돈을 쥐어 주었다. 별다른 외교적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귀국하는 대신 대학을 다녔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제목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요약하자면, 약한 국가는 미국같은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중립국가가 되어야 연명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미국은 훗날 이승만을 최전방에 내 세워, 일제가 물러간 공백을 미제로 채우게 된다. 이승만이 박사학위 취득한 그 해가 경술년으로 조선은 일본에 병탄된다. 해방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 독립투사와 임정인사들은 암살하고, 해방후 무정부 상태 속에서도 평화롭게 질서를 구축해 가던 인민자치위원회 등의 자발적 시민단체를 강제 해산시킨다. 취약한 국내 세력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 온 자들을 중심으로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직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한다. 서북청년단은 북한 서북지역에 살던 지주계급이자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일제시대를 조선에서 잘 살아내기 위해선 지주이거나 종교인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토지 정비를 위해 땅을 몰수하자, 그들은 남하하여 극도의 반공세력이 되었다. '인민'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빨치산 사냥, 4.3 제주항쟁시 제주양민 학살 등의 주역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 치하에서 어용 개신교들이 구성된다. 아펜젤러와 배재학당으로 이어지는 그의 한국 개신교 정통성과 미국 본토 경험은 개신교를 세력화 하는데 큰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박정희는 일제시대 군인으로서 성공하려는 꿈이 무산되어 고향인 공주로 돌아 와 있었다. 미국이 창설한 조선경비대에 2기로 입대하였다. 6.25가 일어나자 장교가 부족한 국군에서 고속 진급하여 다시 군인으로서 성공할 기반을 마련한다. 전쟁 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가 시작된다. 한국인들은 똑똑하고 뜨겁고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승만의 악랄한 사람사냥과 정치적 무능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대통령이 독재를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미국이라는 백그라운드, 그리고 돈의 장악이었다. 아래에 http://2kim.idomin.com/1537 에서 얻은 정보를 참조한다. 우선 당시 대한민국의 돈을 틀어 쥐고 있으면서 자유당과 유착했던 기업인과 지주들을 보자. 대한양회(이정림)·태창방직(백남일)·조선방직(정재호)·럭키화학(구인회)·한국나이롱(이원천)·기아산업(이철호)·대한중기(김연규)·고려모직(한태일)·동신화학(현수덕)·삼성무역(이병철)·극동연료(이용범)·부산일보(김지태) 그리고 일련의 특혜와 탈세로 훗날 박정희에게 목덜미 잡힌 사람들을 살펴 보자. 삼성(이병철)·삼호(정재호)·대한(설경동)·개풍(이정림)·이양구(동양제과)·백남일(태창방직)·이용범(대동공업)·구인회(럭키화학)·최대섭(동화산업)·조성철(중앙산업)·정주영(현대건설)·조승구(삼우토건)·김용산(극동건설)·최재형(무학주정) 등. 필자는 72년생이고 30대에 이르기 까지 대부분 부산에서 살면서, 김지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동래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가고, 장면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의원내각제가 실시된다. 1970년 강남을 개발할 때의 일이다. 정부 차원에서 강남에 수십만평의 딸을 헐값에 사 들인 후 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 되판다. 엄청난 시세차익이 박정희 비자금으로 바쳐졌고, 부동산 투기는 정경유착과 함께 청와대 비밀금고를 채우는 주 수입원이 되었다. 그 해에 전두환은 대령으로 진급한 후 연대장이 되어 월남전에 참전한다. 1971년 김대중과의 대선 결전에서 패색이 짙자 박정희는 700억을 쓴다. 당시 국가 예산의 10%에 달하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초반개표에서 김대중에게 밀리자 전국 여러 개표소를 정전시키고 투표함을 교체하는 등의 수법을 써 가까스로 김대중을 이겨낸다. 그리고 곧장 김대중 암살 작전을 펼친다. 그 해에 전두환은 장군으로 진급하여 제1공수특전단장이 된다. 전두환은 육사11기다. 조선경비대가 11기를 뽑을 때 부터 4년제 정규교육이 실시된다. 그래서 육사11기는 육사 1기 노릇을 한다. 박정희 구테타의 주역들은 조선경비대 8기들로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필이다. 1979년에 10월 26일 저녁에 심수봉 노래를 들으며 한 잔 걸치던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고 급사한다. 청와대 비밀금고를 정리할 틈도 없었다.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2월 12일에 전두환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점령한다. 너무 갑자기 서울을 점령하고나서 일을 당장 수습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며 여러 달이 지났다. 그러나 5월 16일에 심재철은 후퇴를 명한다. 이 때 유시민은 강하게 진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심재철을 비둘기파 유시민을 매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당시 유시민도 심재철과 같은 류였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심재철은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고 유시민은 국민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하였다. 5월 17일. 등골이 오싹했다가 절호의 찬스를 맞은 전두환은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협박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시킨다. 5월 18일 새벽 2시에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의 주요 정치인들을 가택연금 혹은 연행한다. 그리고 그 새벽에 6백여명이 넘는 교수, 학생 그리고 민주인사들을 체포 구금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그리고 각 대학 휴교령을 내린다. 5월 18일 아침이 밝았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전남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전두환은 모든 언론과 매체를 봉쇄하고 광주를 고립시킨다.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폭력진압을 시작한다. 지나가던 행인들조차 무차별 폭행했다. 대학생들만 진정시키고 돌아갔으면 되었을 일을 과잉진압하는 바람에 거대한 시민봉기와 내전으로 확대 되었다. 그날을 회고하는 사람들 중에 시민군이 북한 간첩망과 연계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시민군이 탈취한 무기가 거의 정규군 수준이었다 하는 증언도 있다. 그래서? -------------- 전두환은 8월초에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8월 중순에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였다. 8월 말에 단독으로 대통령 출마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에 선출된 후 9월에 취임하였다. 미국 레이건은 전두환을 지지하였고, 전두환은 박정희가 이어오던 핵탄두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청와대 금고에서 6억을 꺼내 박근혜에게 전한다. 박근혜는 그 일을 회고하면서 전두환이 생계비조로 전달한 것이라 한다. 그 때 육억이면 지금 돈으로 약 300억이다. 81년에 전두환은 민정당(민주정의당)을 세운다. 훗날 민정당에 김영삼과 김종필이 합류하여 민자당(민주자유당)이 된다. 그리고 그 민자당을 한나라당이 잇는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실패 후 완전히 몰락할 뻔한 한나라당을 박근혜가 부활시킨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자체경선에서 이명박에게 근소한 차이로 밀려 지난 17대 대선후보로 나서지 못한다. 토사구팽이라며 반발할 수도 있었으나, 영민한 박근혜의 참모들은 그녀로 하여금 와호장룡이 되라한다. 그리고 그들은 곧이어 실시된 총선에서 '친박연대'라는 희대의 코미디 정당을 만들어 히트를 치고 정치생명력을 잇는다. 그리고 박근혜는 포스트 이명박 시대의 중추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 대한미국은 두 축이다. 한나라당과 반한나라당? 아니다. 이명박과 노무현? 아니다. 민주와 반민주? 아니다. 친북과 반북? 아니다. 전두환과 박근혜다. 1억 보다 10억, 10억 보다 100억, 100억 보다 1천억, 1천억 보다 1조, 1조 보다 10조, 10조 보다 100조, 100조 보다 1000조, 1000조 보다는 1경이다. 삼성의 이재용은 개인 재산이 15조인데, 과연 전두환과 비교하면 누가 이길까? 지금 금융경색으로 투자처를 잃고 떠도는 돈만 800조다. 800억 아니고 8000억도 아니다. 옆을 지나가다 툭 떨어지는 먼지만 주워 모아도 수억이다. 이것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이유다. 일례로, 문화부장관 유인촌은 이명박 대통령 집권 초기에 "나같으면 지금 주식을 사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있을 때 주식을 처분하여 1주일 만에 30억을 벌었다. 변절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5.18은 권력의 아귀가 된 군인들이 벌인 단순한 살육극이 아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들이 보고 자란 바로 그것들이다. 진보? 보수? 민주주의? 통일? 교육? 문화? 경제?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 그들은 이미 타협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소통이 부재하다라고 하면, 소통이란 것이 존재하는데 다만 그들이 행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겐 애초에 소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한 번 좀비가 된 괴물은 결코 사람으로 돌아 올 수 없다. 그들을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 오호라. 그래서 투.표.라 부르는 것이었구나. 5.18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5.18은 투표다.
출처, 베를린리포트. 자유게시판 글쓴이 친절한시선 |
첫댓글 전두환 같은 것은, '자연사'하게 놔두면 안 됩니다.
지금의 맹박에 진흙이 튈까바 전략적으로 고이 고이 뒤깐에 숨어있는 박근혜....역시 영리하죠? 저 근혜양은 어쩐다죠?
분명히 밀가루 손에 바르고 나..엄마야...하고 2년반 후에 낼름 나타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