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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 상좌부불교(南方上座部佛敎)
1. 개요
불교는 크게 남방불교(南方佛敎)와 북방불교(北方佛敎)의 두 흐름이 있다.
남방불교는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 그 곳을 근거로 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진 불교로서 남전불교(南傳佛敎),
혹은 테라와다(Theravāda)불교라고도 한다.
북방불교는 북전불교(北傳佛敎)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 서역(중앙아시아)을 거쳐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전파돼,
다시 중국에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전해진 불교를 말한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주된 차이는 북방불교는 초기불교의 교의를 확대 해석한
대승불교(大乘佛敎, Mahāyāna buddhism) 중심인데 비해,
남방불교에서는 초기불교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가
전해졌기 때문에 테라와다(Theravāda)라 하며, 엄격한 계율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인 북방불교권에서는 남방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 Hinayana buddhism)라 폄하해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남방불교 국가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일부이다.
북방불교 국가는 중국, 한국, 일본, 몽골, 베트남과 티베트 등으로 알려져 있다.
단, 인도네시아는 원래 남방불교국가였으나 지금은 회교국가이며,
티베트는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북부에서 대승불교가 직접 전해졌다.
남방불교의 거점인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다양한 전설이 있지만
대체로 붓다 입멸 후 서서히 전해졌으리라 짐작되고,
본격적인 전도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에 의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인도문명을 탐구하려면,
제일 먼저 부딪치는 난점이 역사자료의 부족이다.
특히 기록유산이 드문 것은 고대 인도인들에게 희박했던 역사의식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중요시하는 민족성 때문에
인도인들은 과거기록을 남기는데 소홀했다.
거기에다가 문자 자체를 불경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으로 인해
성전(聖典)을 문자화하는 일을 기피해, 여러 성전을 암송(暗誦)으로
전승하는 것이 고대인도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불교 전파 내력이나 불경성립 혹은 불교사를 탐구하는데
큰 곤란을 겪는다. 각종 불경의 성립배경이나 대승불교 흥기과정에 대해 논란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러한 사료의 빈곤 때문에 확실한 근거를
찾기 어려움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인도 남쪽의 섬나라 스리랑카엔 고대역사서가
일부 전하고 있다. 그것이 도사(島史)로 번역되는
<디파방사(Dipavamsa)>와 대사(大史)로 번역되는 <마하방사(Mahavamsa)이다.
<디파방사(Dīpavaṁsa, 도사/島史)>는 빠알리어로 쓰인
스리랑카 최고의 편년체 역사서로서, 불교를 중심으로 해서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작성됐으며,
전체 22장(章)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제 1~8장에는 불교성립부터 아소카 왕 시대에 이르는
인도 정치사ㆍ불교사가 기록돼 있으며, 제9장 이하에는
스리랑카 건국에서부터 마하세나왕(4세기 중반)시대까지
스리랑카 정치사ㆍ불교사가 언급돼 있다.
그리고 <마하방사(Mahavamsa, 대사/大史)>는 빠알리어로 쓰인
불교를 중심으로 해서 작성된 스리랑카의 고대 역사서로서,
전체 37장(章)의 게송으로 돼 있다.
스리랑카 왕 다투세나(재위 460∼478)의 숙부인 비구승 마하나마(Mahanama)가
왕명에 따라 5세기 중엽에 역사서 <디파방사(Dīpavaṁsa)>를 수정해서 편집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서의 도움을 받아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한
남방불교의 전모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불멸 후 300여 년경인 BC 3세기 중엽에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Maurya dynasty) 전성시대의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재위 BC 270년~BC 230년)은
독실한 호불군주로서 그에 의해 불교가 인도 전역에 퍼져
불교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때 제3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시 외도(外道)들이 의식(衣食)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가짜 불교도가 돼 불교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었으므로
아소카왕은 이를 바로잡아 외도들로부터 불교를 보호하고,
국론통일을 기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는 한편
제3차 불전결집을 단행했다.
※제1차 불전결집(BC 5세기)---제1차 불전결집은 불멸 직후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주도로 이루어진 결집을 말한다.
이때 주로 경장과 율장이 결집됐다.
※제2차 불전결집(BC 4세기)---불멸 후 100여년 경 계율의
해석문제를 놓고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논쟁과 대립을 계기로
보수파 주도로 이루어진 결집을 말한다. 이때는 주로 율장이 결집됐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보수파인 상좌부와 진보파인 대중부로
분열(근본분열)돼 소위 부파불교가 시작됐다.
그런데 아소카왕 때 제3차 불전결집(BC 3세기)을 위한 집회는
1,000여명의 대표들이 모여 무려 9개월간에 걸쳐 개최됐다.
아소카왕은 그의 종교적 스승인 목갈리풋타 팃사(목건련제수/目健連帝須) 존자로
하여금 주관케 했고, 목갈리풋타 팃사는 아소카왕의 지지를 받아 불교계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상가를 숙정했다. 이때, ‘분별설(vibhajjavada)’을
기본으로 하고, 자기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만든
논서 <논사(論事, Kathavatthu)>를 제시하면서 정법을 복원했다.
‘분별설’이란 모든 것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단정(一向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
현실은 그러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섞여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별(분별)해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분별설’의 입장이다.
그리하여 목갈리풋타 팃사에 의해 정비된 상좌부를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āda)라 했다.
이 분별설부 교의가 스리랑카에 전해졌다.
이 집회가 수도 파탈리푸트라(波陀利佛城, 華氏城 -
현재의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 부근)의 계원사(鷄園寺)에서 행해져서
이를 ‘아소카결집’, ‘파탈리푸트라결집’, ‘화씨성결집(華氏城結集)’,
혹은 ‘일천결집(一千結集)’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때 불경어를 빠알리어(Pāli)로 통일하고,
교의는 상좌부 분별설부(分別說部) 것으로 통일했다.
이렇게 해 산만했던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이
<빠알어 삼장>이라는 경전 형식으로 정리가 됐다.
그리고 제3차 불전결집은 매우 엄정해서 아소카왕은
외도들뿐만 아니라 상좌부의 분별설부 이론을 반대하고,
공성(空性)을 주장하는 대중부(大衆部) 승려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모두 흰옷을 입혀 교단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제3차 불전결집 이전까지를
대개 초기불교(원시불교)라고 한다.
2. 남방불교의 전개과정
1) 스리랑카로 불교전파
스리랑카 불교는 역사가 매우 유구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왕(Ashoka, 阿育王)에 의해 불교가 전래됐기 때문이다.
불멸 후 200년경(BC 3세기경) 아소카왕의 주선으로
제3차 불전결집이 열려 상좌부 분별설부(分別說部) 교의로 통일을 했다.
그리하여 제3차 불전결집이 끝난 후 아소카왕은 자신의 통치이념인
불법에 의한 정복을 실현키 위해 주변국으로 전법사(傳法師, 포교사)를 파견했다.
이때 아소카왕의 후원을 받은 상좌부계통(분별설부) 불교가
남방 스리랑카에 전해졌다(물론 이때도 아직 경전의 문자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므로
암송으로, 즉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아소카왕은 자신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딸인 상기밋다 비구니를 스리랑카로 보냈다(BC 3세기).
이에 스리랑카 국왕 데바낭삐아-티사(Devanampiya-Tissa,
재위 BC 250~207)는 이들을 맞이해 스스로 마힌다 장로에
귀의함으로써 불교신자가 됐다.
그리고 마힌다 장로 일행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전(口傳)으로 전수받기 위한 경전편찬회의가 열렸다.
이때 모인 인원은 16,000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일단 <빠알리어 삼장>이 구전으로
스리랑카에 전해지고 정착된 것이다.
또한 수도인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최초의 사원인
마하메가바나(大雲林) 사원을 세워 그들에게 기증했는데,
이 사원이 정비돼 마하 비하라(大寺, Mahavihara) 사원이 돼 남방불교의 거점이 됐다.
이것이 스리랑카 상좌부의 분별설부(分別說部) 기원이다.
이처럼 스리랑카에는 불교가 별다른 저항 없이 처음부터 왕실의 지원으로 정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전해진 남방불교는 교학사상이나 수행의 전통 및 계율의 준수 등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초기경전인 <빠알리어 삼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북방불교권에서는 대승불교 우월적인 발상에서 이들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하지만,
이는 잘못된 오해이다. 오히려 남방불교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초기 교단적인 전통이 남방불교에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따라서 남방불교란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각국의 불교로서,
이들은 오로지 석가모니 가르침만을 따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순조롭게 불교가 발전하던 스리랑카에 BC 1세기 무렵
불법(佛法)의 단절이 우려될 만큼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됐다.
싱할라왕조가 세운 최초의 도읍지 아누라다푸라는
남인도 타밀족(Tamil族)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말미암아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국왕인 왓따가마니 아바야(재위 BC 43~17)는
타밀의 침략을 받아 한때 아누라다푸라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와신상담 14년 만에 아누라다푸라를 되찾고
왕좌에 복귀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그런데 왓따가마니 아바야왕은 자이나교 사원을 부수고
거기에 새로 아바야기리 비하라(무외산사(無畏山寺)를 건립해
마하팃사(Mahatissa) 장로에게 기증했다.
이때 마하팃사는 동조자와 함께 아바야기리 비하라(無畏山寺)를 근거로 새로운 상가를 조직했다.
이리하여 스리랑카 불교는 전통과 계율을 중시하는
대사파(大寺派)와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한 진보적인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로 나누어지게 됐다.
대사파는 상좌부계통 분별설부불교를 고수했는데 비해,
무외산파 마하팃사 장로는 계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등
기존의 상가 입장으로 봤을 때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대사파는 무외산사파를 견제하고 경원하게 됐다.
이렇게 돼 이후 아바야기리 비하라 승단(무외산사파)과 상좌부 전통을 고수하는
마하 비하라 승단(대사파) 사이는 대립 경쟁 관계를 형성하며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됐다. 이런 관계가 부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부파의 발생과 오랜 갈등은 상좌부계를
더욱 단결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2) 제4차 불전결집(알루비하라 결집)과 <빠알리어 삼장>의 편찬
① 제4차 불전결집(알루비하라 결집)
이와 같은 시대 상황에다가 무외산사파의 저항까지 결합돼
대사파에서는 상좌부 법맥이 흔들리는 극한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좌부불교를 지키기 위해
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불전 편찬사업을 실행하게 됐다.
즉, 정법이 왜곡되고, 불법이 단절되고 잊혀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암송에만 의존하던 불법의 전승을 문자로 남기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립과 어지러운 환경 속에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貝葉經)’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낳게 됐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2000여 년 전, BC1세기 당시 스리랑카에는
국내외의 혼란과 흉년에 의한 기근 등 엄청난 시련이 있었기에
자칫 부처님 가르침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해 그런 시련 속에서도
경전편찬 작업에 착수 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 고려시대에
몽고침입으로 힘든 고통 속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하겠다.
그리고 이 사업의 전개를 위해 대사파에서는 먼저 제4차 불전결집을 단행했다.
<마하방사(Mahavamsa)>에 따르면, 마힌다(Mahinda) 장로 일행이
스리랑카에 불법을 전한 후 150여 년이 지난 BC 1세기 중반에
다시 경전편찬회의를 개최하게 됐는데,
남방권에서는 이를 ‘제4차 불전결집’으로 공식화하고 있다.
이 편찬사업이 당시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남쪽으로 100여 킬로 떨어진 마탈레(Matale) 지역의
알루비하라(Alu Vihara) 석굴사원에서 열렸기 때문에
이 경전 편찬회의를 ‘알루비하라(Alu Vihara) 결집’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이 편찬회의는 마하테라 라키타 장로가 주재 하고,
상좌부계통 분별설부 교의를 고수하는 500명의 학승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들은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그때까지 스리랑카에 전해오던
상좌부계통 분별설부의 모든 교의를 총망라한 경(經)⋅율(律)⋅론(論)의
<빠알리어 삼장(三藏), Tipiṭaka>을 완성하고,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빠알리어 삼장 일체를 종려나무 잎을 말려 거기에 문자로 기록했다.
이로써 불교사상 처음으로 완성된 <빠알리어 대장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스리랑카의 알루비하라(Aluvihara)에서 <빠알리어 삼장>이 문자화 되고
이를 종려나무 잎에 적은 것을 패엽경(貝葉經)이라 하는데,
알루비하라 사원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 있었다고 한다. -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그리고 제작된 패엽경은 알루비하라(Aluvihara)사원의 석굴에 보관했다.
※패엽경(貝葉經)---고대 스리랑카에서는 야자수나무(종려나무/多羅樹) 잎을 말려
그 잎을 종이 대신 사용했다. 외떡잎식물인 야자나무 잎은 바탕이 곱고 뻑뻑하며 길고,
잎맥이 고르며 섬유질이 많아 편편하면서도 질기다.
또한 습기를 잘 빨아들이지 않으므로 자연 상태에서 거의 썩는 경우가 드물어
당시로는 종이 대신 최적의 재료였다.
글을 쓰려면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르는데, 너비 6.6cm, 길이 66cm 정도 크기로 잘랐다.
글자를 새길 수 있는 이 나무 잎을 산스크리트어로는 ‘파트라(pattra)’라고 하는데,
파트라를 중국 한자로 번역한 이름이 패다라(貝多羅)이다.
패다라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뒤 먹물을 먹인 다음 닦으면 글씨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자른 패다라 잎 끝 두 군데에 구멍을 뚫어서 몇 십 장씩 꿰매어 묶어 책으로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패엽경은 각각 경전, 계율, 논장으로 나누어져서 3개의 광주리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서 ‘바구니’라고 하는 의미의 ‘장(藏, pitaka)’이라는 용어를 쓴 것에 유래해서
<대장경>이라 할 때 바구니 장(藏)이란 글자를 쓴다.
원래 인도와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에서도 불법을 구전으로 전승됐다.
비구들이 모인 집회에서 편집 정리된 성전을 함께 합송(合誦)해 - 외워서
그것을 불설로 승인함으로써 경전(經典)이 성립되는 형식이었다.
그렇기에 패엽경(貝葉經)의 탄생은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아바야기리 비하라(무외산사파) 승단에 맞서기 위한
경쟁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당시 외적의 침입과 최악의 기근으로 인해
자칫 전승되던 불법이 산실될 우려마저 있어 붓다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대사파(大寺派)의 결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는 AD 1세기에 대중부,
그리고 AD 3세기에는 대승불교를 각기 받아들여 대사파와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상좌부계통의 대사파 출가자들은 대승불교운동을 일종의 ‘불교타락’으로 봤다.
그리하여 <빠알리어 삼장>에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간주해 배척했다.
그리고 그들의 상좌부불교가 대승불교로부터 오염될 것을 걱정해 <빠알리어 삼장[패엽경]>과
주석서 원본을 잘 보존하기 위해 빠알리어 경전을 다시 싱할리어로 번역해 가두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싱할리어 문자로 기록한 <삼장(대장경)>과 그 주석서를 수정 없이
고스란히 전승했기 때문에 원본의 훼손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 AD 4세기경 마하세나왕(Mahasena, 재위 334~362년) 집권 시에는
대사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무외산사파에 의한 대승불교의 황금시대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사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청정한 상좌부(분별설부)의 교학과 계율을 잘 유지했고,
결국은 대사파(大寺派)의 상좌부불교가 압도하게 됨에 따라
대승불교는 사라지고 스리랑카엔 초기불교가 고스란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경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싱할리어로 가두어둔 것이 수백 년간 그대로 지속되다가
스리랑카 내에 대승불교의 기세가 꺾이고 상좌부불교가 승리하면서
이를 다시 빠알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즉 AD 5세기에 이르러 붓다고사(佛音, Buddhaghosa, 4세기 후반~5세기 생존) 승려가 등장해
싱할리어로 된 삼장인 패엽경을 도로 빠알리(Pali)어로 번역하고 주석서를 썼다.
그리고 그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도 바로 이때 집필했다.
이리하여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는 AD 5세기에 미얀마로 전래 됐고,
미얀마에 의해 다시 태국 등 동남아 일대에 전파됐다.
이렇게 해서 남방 상좌부불교(소승불교)가 오늘날까지 번성하게 된 것이다.
붓다고사는 인도에서 태어나 출가한 후 마하나왕(재위 409-431) 때 스리랑카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그 당시 번창하던 무외산사(無畏山寺)에 머물렀으나
대사(大寺)파 쪽에 순수한 법통이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옮겨와서,
싱할리어로 된 삼장을 도로 빠알리어로 번역하는 한편,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싱할라어의 서적들을 수집해 삼장에 대한 완전한 주석서인
<청정도론(淸淨道論)>을 빠알리어로 편찬했다.
이것은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이 용이하면서 시적인 정서를 느끼도록
노력한 하나의 작품으로서 그의 업적은 대승불교에서의
나가르주나(龍樹)에 버금간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금 보는 <빠알리어 삼장>은 원본 훼손 없이
부처님 당시의 원음에 가까운 경전을 그대로 보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 후 AD 7세기말경 남인도에서 성립된 밀교의 한 흐름이 스리랑카에서 전해져서
스리랑카가 한때 밀교의 중심지로까지 발전해
전통적인 상좌부불교가 몰락할 위기에 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밀교의 신비주의는 결국 종교계를 혼돈의 상태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이에 밀교는 무지한 이들이 믿는 가르침이라 해 거센 비판에 부딪치게 됐다.
이리하여 국왕 비자야바후(Vijayabahu) 1세(재위 1059~1113)가 밀교를 탄암하고
미얀마의 상좌부 장로를 초청해서 어지럽던 스리랑카 불교를 다시 상좌부 법통으로 잇게 했다.
그리고 12세기에 비자야바후 1세의 손자이자
스리랑카 최대의 영주(英主)로 일컬어지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1153~1186)에 의해
대사파로 통합돼 이후 상좌부 불교의 전통은 다시 확립돼,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는 이웃 미얀마와,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로 전파됐다.
결국 12세기에 이르러 스리랑카는 마힌다 장로로부터 전래된
정통 상좌부계통의 대사파(大寺派)로의 회귀를 택했고, 1
200여 년간 대립 긴장 관계에 있던 아바야기리 비하라 승단(무외산사파)도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은 서로 자국 불교가 쇠퇴하면
이웃나라 장로를 초청해 법통을 잇는 관계였다.
이것은 같은 상좌부 불교로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나라이므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만큼 불교 법통을 존중했기 때문에
붓다고사(Buddhaghosa) 같은 승려가 등장할 수도 있었다.
3. 남방불교의 특징
① 소의경전---상좌부계통의 빠알리어 경(經)ㆍ율(律)ㆍ론(論)의 삼장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어서,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등 북방의 대승경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② 신앙대상---남방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오로지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뿐이다.
따라서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혹은 관음보살, 문수보살과 같은 여래나 보살은 남방불교에는 없다.
③ 지계(持戒)---계율을 엄수하는 초기불교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출가자 중심의 교단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지계(持戒)가 엄격한 비구는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태국에는 남자는 일생에 한 번은 출가수행승이 돼야 한다.
④ 비구니 교단---비구니 교단은 11세기경에 그 맥이 끊긴 채로 단절됐으므로
남방불교권에서는 여승이 없다.
⑤ 테라와다불교---‘소승불교’라는 말은 부파불교시대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이 흥기할 때 처음 등장했다. 당시 대승불교도들은 그 이전의 불교,
즉 부파불교의 실천법을 경멸해 소승불교란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현대의 남방불교 국가들은 불방불교권에서 저들을 소승불교라 호칭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남방불교권에서는 스스로를 '테라와딘(Theravadin)'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테라와다(상좌부)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 테라와딘, 즉 남방불교도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초기불교의 정통성을
순수하게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강해서, 오히려 대승불교를 변질된 불교로 생각하고 있다.
⑥ 출가자 중심---남방불교는 고대로부터 타 종파의 불교를 훌륭하게 막아냈고,
재가불자들이 현실 신앙생활 문제를 잘 해결해주었으며,
현재도 재가자들이 해결해주고 있기 때문에 승려들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걱정 없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다.
반면 민중은 스님을 존경하고 믿고 따르며, 기복적 행위 같은 비불교적 행위가 적다.
오랜 세월동안 초기불교의 순수성을 잘 지켜왔기 때문에
남방불교의 동남아 국가들은 비록 경제발전에는 뒤쳐져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재가불자들이 바치는 정성으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이 매우 안정적이다.
⑦ 스리랑카 불교 3대 보물---스리랑카 불교의 3대 보물을 아는 게
남방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패엽경---알루비하라 사원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오늘날 알루비하라는 도서관과 학교 등을 갖춘 비교적 규모 있는 사찰이다.
알루비하라의 도서관에는 패엽경의 자료들과 제작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제작된 최초의 패엽경과 5세기 경 이곳에 머물며
주석서를 집필한 붓다고사(Buddhagosa) 스님의 저술 등의 원본은
1848년 영국과의 전투 도중 영국군들이 절을 파괴하면서 소각됐다고 한다.
• 보리수---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의
여동생 상기밋다 비구니가 스리랑카로 올 때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남쪽 가지를 꺾어 와서 심은 것이 현재 남아 있는
세계 최고령 보리수나무인 스리마하보디트리(성보리수나무)이다.
이 보리수나무는 스리랑카 불교인들에게 살아 있는 부처님 분신으로 칭송되고 있으며,
불상, 법당, 탑과 더불어 중요한 신앙대상이 되고 있다.
• 불치제(佛齒祭)--스리랑카 국민이 목숨처럼 아끼는 보물이 부처님의 왼쪽 송곳니이다.
이것을 왕궁의 담마차카라는 곳에 안치하고 일 년에 한번 무외산사로 옮겨
성대한 <불치제>라는 행사를 베푸는데, 불치보호장관(佛齒保護長官)이 있을 정도로
관리에 힘을 쏟고 있으며, 몇 개의 모조품을 만들어
과거 외국의 침입과 약탈 속에서도 진품만은 지켜올 수 있었다고 한다.
⑧ 남방불교의 수행체계---남방불교에는 부처님 당시에 계발된 수행체계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남방불교는 북전불교처럼 교의의 확장 없이 초기불교교의를 고수하고 있어서
수행체계 역시 변형이나 확장 없이 초기불교 당시의 수행체계 그대로이다.
불교수행에서 명상은 결코 추상적인 과제가 아니라 붓다에 의해
그 완전성이 드러난 고(苦)의 해결 방법이다.
이것이 남방불교의 핵심이자 불법의 근원적인 정수이다.
남방 상좌부불교는 수행에서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를 잘 구별해 발전시켰다.
그리고 사마디(samadhi)와 쟈나(jhana, 禪那, 禪)의 수행체계도 특징적으로 발전시켰다.
따라서 오늘날엔 불방불교권에서도 남방불교의 수행에 관심을 기울여 배우고 있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큰 차이는 자기를 돌아보는 수행법이
얼마나 발전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 같은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선(禪)수행이다.
불교의 선(禪)수행 중 남방 상좌부불교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위빠사나(vipassana- 觀)이고,
다른 하나는 사마타(samatha- 止)이다.
• 위빠사나(vipassana-觀) -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는 수행에 있어서,
불교의 선(禪) 수행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선 수행 중 위빠사나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 상좌부 불교국가들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수행법으로, 빠알리어 경전인 <디가 니까야 - 장아함(長部阿含)>의
<마하 사티파타나숫타>,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aya - 중부아함(中部阿含)>의
<사티파타나숫타-염처경(念處經)> 등에 자세히 소개돼 있는 방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 직접 수행했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위빠사나는 바른 관찰을 통해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하며,
이 인식을 통해 집착할 것과 집착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방법으로,
이 깨달음은 스스로를 최고의 평온상태로 이끈다.
염처(念處), 즉 사띠(sati)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을 의미하며,
몸, 느낌, 마음, 법의 염처 네 가지가 있다. 사념처(四念處)를 포함한 모든 수행의 단계를
37조도품(助道品)이라 해 37가지로 나타낸다.
이에는 사념처 ‧ 사정근(正勤) ‧ 사여의족(四如意足) ‧ 오근(五根) ‧ 오력(五力) ‧
칠각지(七覺支) ‧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이 수행을 하는 스님들은 마을의 사찰이 아닌 숲속의 사찰에서 별도로 수행을 하는데,
웬만한 사원은 대부분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 사마타(奢摩他,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 śamatha) - 집중명상을 말한다.
어떤 대상에 고도로 몰입돼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집중명상은 주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착시키는 것이다.
집중이 깊어지면 사마디(Samadhi, 三昧)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사마디는 집중의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돼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대상이나 대상을 인지하는 의식마저도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의역해 지(止), 적정(寂靜) 등으로 번역한다.
사마타란 모든 분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허망함을 깨달아서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마음이 적정(寂靜)한 상태가 돼,
사념망상(邪念妄想)이 일어남을 막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삼매에 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을
그치므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4. 남방 상좌부(南方上座部)의 논서(論書)
북방불교에는 부파불교의 대표적인 논서로 7론이 있는데,
남방 상좌부에도 7론이 조성돼 전하고 있다. 즉, ①법집론(法集論), ②분별론(分別論),
③논사(論事), ④인시설론(人施設論), ⑤계론(界論), ⑥쌍론(雙論), ⑦발취론(發趣論)이다.
이들 7론은 BC 250년 무렵부터 BC 50년 사이 200여년에 걸쳐 성립됐는데,
북방과 달리 남방 상좌부에서는 7론을 단순한 논서가 아니라 경전 수준의 성전으로 꼽는다.
그리고 7론을 거쳐 붓다고사의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를 실현했다.
이 이후 나타난 논서는 대개 난해하고 복잡한 <청정도론>에 대한 해석서들이다.
그리고 칠론 외에 <지도론>, <장석론(藏釋論)>, <밀린다팡하(Milindapanha)> 등
세 가지 논서가 더 있다. 이것들은 아비달마 논서라고 할 수 없지만
내용상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서
남방에서는 특히 중요시 되고 있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