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륙지도 한(韓)민족의 고대국가가 대륙에 있던 것을 [桓國의 歷史]에 나오는 포스트를 읽으면서 자주 인용되는 대륙의 성(省)지명을 기억할 수 있게 지도를 올립니다
대륙의 성(省)지명도
블로그 > 자료로 정리해본 한국고대사 지도10. 고구려高句麗)등의 건국지
- AD 55년의 대륙
가.고구려의등의 건국지
졸본(卒本) (1)섬서성 빈현(陝西省 彬縣) [고구려의 건국지 BC58]
눌견(눌見) (2)섬서성 순읍현(陝西省 旬邑縣)[고구려의 도읍지 BC27~ AD2]
국내성(國內城) (3)섬서성 순화현(陝西省 淳化縣)[고구려의 도읍지 AD2 ~ AD209]
평양(平壤) (4)섬서성 동천시(陝西省 銅川市) [고구려의 도읍지 AD247 ~ AD342]
험독(險瀆) (5) 섬서성 주지현(陝西省 周至縣)
위례성(慰禮城) (6)산동성 비성시(山東省 肥城市)[십제의 건국지 BC18]
한산성(漢山城) (7)산동성 태안시(山東省 泰安市)[백제의 도읍지 BC5~ AD371]
서나벌(徐那伐) (8)섬서성 자양현(陝西省 紫陽縣)[서나벌의 건국지BC57~BC36]
금성(金城) (8) 섬서성 자양현(陝西省 紫陽縣)[서나벌 계림의 도읍지BC36 ~AD101]
나. 고구려의 요서 12성
1.석성(石城) 섬서성 고관현(陝西省 固關縣)
2.건안(建安) 섬서성 봉상현(陝西省 鳳翔縣)
3.안시(安市) 섬서성 천양현(陝西省 千陽縣)
4.건흥(建興) 감숙성 진안현(甘肅省 秦安縣)
5.요동(遼東) 섬서성 미현(陝西省 眉縣)
6.한성(韓城) 감숙성 정서현(甘肅省 定西縣)
7.풍성(豊城) 감숙성 청수현(甘肅省 淸水縣)
8.옥전보(玉田堡) 감숙성 벽옥현(甘肅省 碧玉縣)
9.택성(澤城) 감숙성 감곡현(甘肅省 甘谷縣)
10.요택(遼澤) 섬서성 보계현(陝西省 寶鷄縣)
11.백암성(白岩城) 섬서성 농현(陝西省 농縣)
12.통도성(桶道城) 감숙성 북도구(甘肅省 北道口)
다. 후한의 건국지
낙양(낙陽)(가)감숙성 서화현(甘肅省 西和縣)[후한의 건국지AD25 ~ AD191]
장안(長安)(나)감숙성 임하현(甘肅省 臨夏縣)[후한의 도읍지AD191 ~ AD19]
<--책 뒷편에서 발췌 책 뒷편에 참조바람! >
신라의 건국 시기와 강역
신라는 BC 57년 혁거세 거서간이 서나벌이라는 국호로 건국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그 시기를 믿을 수 없다고 무시하고 있다. 제도권 사학자들은 신라가 한반도의 경상도 경주에서 건국했다고 믿고 있지만, 그 근거는 전혀 없다.
다만 신라의 유물이나 유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 경주 지역에 많이 있으므르 이를 근거를 신라의 한반도 존재설을 신봉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신라의 것임을 확증하는 것은 없다.
경주 부근에는 거대한 무덤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 중 어느 것도 신라왕의 것임을 입증하지 못하고 지금부터 2000년 이전의 유물도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틀렸거나 아니면 신라가 한반도에 있던 나라가 아닌 것이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한반도 경주 지역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금성,월성, 명활성의 자취가 없고 궁궐로 추정할 수 있는 건축 유지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월성에는 박朴, 석昔, 김金의 세 성 씨의 신라 왕족들이 거처하던 궁궐이 20여 개가 있다고 하는데 한반도 어디에 그 유적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7세기 말 이후 한반도가 신라의 영향권이었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지만 한반도가 신라의 도읍지가 있던 중심 강역은 아니었던 것도 분명하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신라의 건국지가 한반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재야 사학자들 중 몇 몇 분들은 오래 전부터 신라의 건국지와 도읍지가 대륙에 있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그 정확한 위치와 강역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만간에 대륙신라의 건국지 도읍지, 그리고 그 강역은 뚜렷하게 증명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서서에 나타나는 신라의 건국지와 도읍지 그리고 그 강역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 다르면 BC 57년 서나벌(지명에서 유래)이 건국한다. 서나벌은 진한의 도읍지였는데 진한 사람들은 선도산仙桃山에서 태어나서 진한으로 온 박혁거세를 거서간居西干으로 추대한다. 진한의 도읍지인 서나벌은 섬서성 자양현이다.
BC 39년 변한(사천성 양중시)이 서나벌에 항복함으로써 서나벌은 변한을 병합하고 서나벌 가까운 곳에 금성을 쌓고 BC36년 금성으로 천도한다.
서나벌은 AD 55년 국호를 계림(시림始林)으로 국호를 바꾸는데 계림(섬서성 자양현)은 지명으로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곳이다. 김알지는 서나벌의 4대 왕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의 세자였으나 왕이 되지 못했다 김알지은 황룡국黃龍國(섬서성 장가천현)의 유민이었다. 황룡국은 옛 고죽국孤竹國의 땅이었다.
AD 101년 계림은 섬서강 자양현에서 안휘성 회원현인 월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AD 300년에는 조위가 점령했던 섬서성의 지역인 낙랑(섬서성 서안시)과 대방帶方(섬서성 상주시)의 항복을 받는다. AD 309년 계림은 신라로 국호를 바꾼다. 신라도 지명으로 낙랑樂浪(호북성 형주시)의지명이다. 신라는 AD 475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고 명활성으로 천도한다. 이곳이 안휘성 잠산현이다. AD 488년 다시 월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와 같이 신라는 섬서성에서 건국했는데 동쪽 안휘성으로, 다시 말하면 먼 곳으로 천도했던 것이다. 신라가 도읍지를 옮기지 않았다는 인식은 대륙의 지명을 반도로 이전시켜 놓은 반도사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 역사의 강역을 너무나도 사실과 다르게 축소시킨 나머지 그렇게 조작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대륙 안휘성 회원현에서 811년 동안이나 도읍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즐비하다. 한반도 경상도의 경주에는 금성, 월성, 명활성의 유적이 없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귀족들의 대저택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한반도 경주는 근세조선 초(AD 15세기 초)의 인구가 6,000명 정도인데 이곳이 17만 호가 있었다는 월성일 수 없는 것이다. 신라는 AD 689년에 도읍을 달구벌達丘伐로 옮기려다 실현시키지 못한다. 신라의 달구벌은 사천성 달천시인데 신라는 이곳을 당唐에게 빼앗기고 지명을 안휘성 수현으로 옮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의 동생 거득공車得公이 문무왕의 명을 받고 전국의 현지 실정을 알아보려고 여러 공을 돌아 보았는데 이때 무진주(호남성 상덕시를 말한다. 이곳이 고려의 해양海陽이었다)에서 안길安吉이라는 그 지역 관리의 신세를 진바 있다고 전한다. 고마움을 느낀 거득공은 안길에게 월성에 오면 자기집으로 들르라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를 자세히 가르쳐 준다. 이 때 거득공은 자기의 집이 월성안에 있는 황룡사黃龍寺와 황성사皇聖寺의 사이에 있다고 가르쳐 주는데 나중에 안길이 월성으로 찾아가보니 그곳은 궁궐이었다고 한다. 한반도 경상도 경주시 일원에는 황성사는 흔적도 없고, 황룡사는 경주시 동쪽 산 속 깊은 곳에 있었다는 아주 자그마한 절터로 전해지고 있다.
한반도 경주를 아무리 신라의 월성이라고 주장해도 근거가 없다. 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고려에 실재했었다는 신라 때 창건한 절들이 지금 한반도에는 한 군데도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일연 스님은 대륙에서 태어나서 대륙에서 돌아가신 분이다. 대륙에 있던 절들이 한반도에 있을 까닭이 없다. 우리는 경주의 불국사,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 구례의 화엄사, 영주의 부석사 등이 신라의 절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 절들과 같은 이름의 절들이 대륙에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사찰들이 신라의 사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기록과 일치하는 불국사와 석굴사는 안휘성의 천주산 부근인 안경시의 태호연과 종양현에 남아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이 순교할 때 갑자기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온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설이 이루어진 배경이 한반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실제로 신라의 월성이 있던 안휘성 회원현은 북위 33도이고 한반도 경주는 북위 36도로 대륙의 월성은 한반도보다 온난한 지역이다. 삼국유사 천룡사天龍寺 조에는 계림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객수는 타지역으로부터 흘러오는 강이고 역수는 이 객수와는 거꾸로 흐르는 강을 말하는데 한반도 경주 시내를 흐르는 강과 물즐기가 다른 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가?
대륙의 월성 지역 주변에는 호수가 산재해 있어 물줄기가 거꾸로 흐르는 강이 있다.
..........
17. 신라의 영토확장
- AD 6세기 중반의 대륙-
가. 신라등 열국
<신라>
월성(月城) (1)안휘성 회원현(安徽省 懷遠縣)
명활성(明活城) (4)안휘성 잠산현(安徽省 潛山縣) 낙양(洛陽) (10)섬서성 남정현(陝西省 南鄭縣)
여수(麗水) (13)호북성 의창시(湖北省 宜昌市)
금성(錦城) (14)호남성 장사시(湖南省 長沙市) 전주(全州) (15)호북성 의성시(湖北省 宜城市)
청도(淸道) (16)호북성 마성시(湖北省 麻城市)
김제(金堤) (17) 호북성 형주시(湖北省 荊州市)
금성(錦城) (20)호남성 장사시(湖南省 長沙市)
진주(晋州) (21)강서성 남창시(江西省 南昌市)
<고구려>
평양성(平壤城) (34)섬서성 서안시(陝西省 西安市)도읍지
요동성(遼東省) (35)섬서성 미현(陝西省 眉縣)
안시성(安市省) (36)섬서성 천양현(陝西省 千陽縣)
부여성(扶餘省) (38)감숙성 평량시(甘肅省 平凉市)
졸본성(卒本城) (39)섬서성 빈현(陝西省 彬縣)
국내성(國內省) (40)섬서성 순화현(陝西省 淳化縣)
동황성(東皇城) (41)섬서성 대려현(陝西省 大려縣)
<백제>
웅진(熊津) (48)산동성 곡부시(山東省 曲阜市)
한산성(漢山城) (49)산동성 태안시(山東省 泰安市)
나.신라의 구한(九韓)
1.단국(丹國)[선비(鮮卑)]감숙성 영등현(甘肅省 永登縣)
2.탁라 한반도(韓半島)
3.중화(中華) [하화(夏華)]감숙성 임하현(甘肅省 臨夏縣)
4.여적(女狄) 섬서성 연안시(陝西省 延安市)
5.말갈(靺鞨) 영하자치구 고원현(寧夏自治區 固原縣)
6.예맥(濊貊) 하남성 안양시(河南省 安陽市)
7.응유(鷹遊) 사천성 낙산시(四川省 樂山市)
8.오월(吳越) 사천성 합천시(四川省 合川市)
9.왜(倭) 복건성 천주시(福建省 泉州市)
다. 진흥왕 순수지(眞興王 巡狩地) [AD540~576]
(가)마운령(摩雲嶺) 섬서성 직라진(陝西省 直羅鎭)
(나)한산(漢山) [숭산(嵩山)] 하남성 등봉시(河南省 登封市)
(다)창녕(昌寧) 사천성 영창현(四川省 榮昌懸)
(라)황초령(黃草嶺) 산동성 제성시(山東省 諸城市)
라.제 . 진(AD550~589)
장안(長安) (더)감숙성 임하현(甘肅省 臨夏縣)
건강(建康) (머)사천성 내강시(四川省 內江市)
6) 신라의 영토는 어디까지인가?
신라의 강역을 제대로 찾아서 확인하는 작업은 감추어진 우리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관건이며,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들의 핵심 과제이기도 하다. 신라가 당과 연합해서 AD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AD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리고 당과 영토 분쟁으로 전쟁을 치른 결과 백제의 옛 강토는 차지했지만, 고구려의 영토는 후 고구려와 후고구려를 이은 대진大震이 건국되어 발해로 이어져 당도 신라도 고구려의 강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도읍지였던 장안성 즉, 평양성平壤城(섬서성 서안시)은 AD 675년부터 멸망시가지 줄곧 강역으로 편입, 그곳에 패강진을 설치하고 제후를 임명하고 비중있게 통치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륙에는 신라, 발해, 당의 삼국이 정립하게 된다. 이들 세나라는 신라와 당은호북성과 섬서성, 호남성과 광동성 지역에서 접경했고, 신라와 발해는 산동성 산서성, 섬서성에서 접경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삼국시대가 된다.
19. 당(唐)의 안동도호부, 5도독부
가. 안동도호부
1>.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1)섬서성 서안시(陝西省 西安市) [장안성(長安城)AD668~676]
2>.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2)섬서성 미현(陝西省 眉縣) [요동성(遼東城) AD676~677]
3>.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3)섬서성 보계시(陝西省 寶鷄市) [신성(新城) AD677~684]
4>.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4)감숙성 진안현(甘肅省 秦安縣) [평주(平州) AD714~743]
5>.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5)감숙성 청수현(甘肅省 淸水縣) [영주(營州) AD743~755]
나. 5도독부
1.>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가)산동성 곡부시(山東省 曲阜市) [AD663~675]
2.>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바)섬서성 봉상현(陝西省 鳳翔縣) [건안(建安)AD675~713]
마한도독부(馬韓都督府) (나)산서성 하택시(山西省 하澤市)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다)하남성 제원시(河南省 濟原市)
금련도독부(金連都督府) (라)하남성 신양시(河南省 信陽市)
덕안도독부(德安都督府) (마)하남성 상덕시(河南省 常德市)
다.후고구려 . 당. 신라
<후고구려>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6)섬서성 동천시(陝西省 銅川市)도읍지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 (7)섬서성 인유현(陝西省 麟遊縣)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8)섬서성 대려현(陝西省 大荔縣)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 (9)섬서성 순화현(陝西省 淳化縣)
<신라>
월성(月城) (14)안휘성 회원현(安徽省 懷遠縣)
울진(蔚珍) (15)강소성 회안시(江蘇省 淮安市)
양주(良州) (16)안휘성 화현(安徽省 和縣)
우산(于山) (17)산동성 유산시(山東省 乳山市)
청도(淸道) (19)호북성 마성시(湖北省 麻城市)
진주(晋州) (22)강서성 남창시(江西省 南昌市)
함안(咸安) (23)강서성 길안시(江西省 吉安市)
고성(固城) (24)절강성 온주시(浙江省 溫州市)
탐라(耽羅) (29)호남성 형양시(湖南省 衡陽市)
금성(錦城) (28)호남성 장사시(湖南省 長沙市)
대마(對馬) (27)중화민국 대북시(中華民國 臺北市)
<당>
상도(上都) (버)감숙성 천수시(甘肅省 天水市)
장안(長安) (어)감숙성 임하현(甘肅省 臨夏縣)
하남(河南) (카)섬서성 남정현(陝西省 南鄭縣)
강릉(江陵) (거)사천성 노현(四川省 노縣)
남해(南海)(머)광서성 유주시(廣西省 柳州市)
광주(廣州) (러)광동성 광주시(廣東省 廣州市)
라. 수양제의 5운하
1. 광통거(廣通渠)[대흥(大興)지역]감숙성 천수시(甘肅省 天水市) <->감숙성 북도구(甘肅省 北道口)
2. 영제거(永濟渠) [낙양(洛陽)지역]섬서성 면현(陝西省 勉縣) <->섬서성 양현(陝西省 洋縣)
3. 통제거(通濟渠) [한중(漢中)지역] 사천성 도강언시(四川省 都江堰市) <->사천성 덕양시(四川省 德陽市)
4. 한구(한溝) [한중(漢中)지역]사천성 팽산현(四川省 彭山縣) <->사천성 금당현(四川省 金堂縣)
5. 강남하(江南河) [건강(建康)지역]사천성 내강시(四川省 內江市) <-> 사천성 노현(四川省 노縣)
신라는 그 강역을 9개주로 나누었다. 이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도읍지인 월성을 중심으로 하는 직할 지역이 있어 10개 행정 구역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직할 지역도 어느 한 주에 못지 않았다.
신라의 강역은
1)경도京都:안휘성 회원현을 중심으로 하는 안휘성 중북부 지역,
2) 양주梁州:안휘성 화현을 중심으로 하는 안휘성 남동부와 강소성 중남부 지역,
3)상주尙州:절강성 구주시를 중심으로 하는 절강성 지역,
4) 진주晋州: 강서성 남창시를 중심으로 하는 강서성 지역,
5)웅주熊州:산동성 곡부시를 중심으로 하는 산동성 중동부지역과 하남성 동부 지역,
6)전주全州: 호북성 의성시를 중심으로 하는 하남성 남동부 지역과 호북성 지역,
7) 무주武州: 호남성 상덕시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성 전역,
8) 한산주漢山州: 산동성 태안시를 중심으로 하는 하북성 남동부와 산동성 북부 지역,
9) 삭주朔州: 하남성 안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하북성 남부와 하남성 북부지역,
10)명주溟州:하남성 삼문협시를 중심으로 하는 하남성 북서부와 산서성 남부지역으로 모두 10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신라는 섬서성 자양현(서나벌)에서 건국했고 안휘성 회원현 월성)으로 천도했고, 안휘성 잠산현으로옮겼다가 다시 월성으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지도 20 침조 <--책 뒷편에 지도가 있음 참조!>
20. 신라, 대진(大震), 당 -AD 7세기말의 대륙
가.신라 경도(京都)(1)안휘성 봉양현(安徽成 鳳陽縣)도읍지 <>중원경(中原京)(2)감숙성 예현(甘肅省 禮縣) <>서원경(西原京)(3)감숙성 유중현(甘肅省 楡中縣) <>남원경(南原京)(4)호북성 죽산현(湖北省 竹山縣) <>김해소경(金海小京)(5)안휘성 귀지시(安徽省 貴池市) <>북원경(北原京)(6)하남성 신향시(河南省 新鄕市) *우수주(牛首州)(7)하남성 안양시(河南省 安陽市) *명주(溟州)(8)하남성 삼문협시(河南省 三門峽市) 송악(松嶽)(9)산동성 치박시(山東省 淄博市) 동주(東州)(10)산동성 덕주시(山東省 德州市) *한산주(漢山州)(11)산동성 태안시(山東省 泰安市) *웅주(熊州)산동성 곡부시(山東省 曲阜市) 한성(漢城)(13)하남성 등봉시(河南省 登封市) 평양(平壤)(14)섬서성 서안시(陝西省 西安市) 양평(襄平)(15)섬서성 미현(陝西省 眉縣) 래주(來州)(16)섬서성 보계시(陝西省 寶鷄市) 대흥(大興)(17)감숙성 천수시(甘肅省 天水市) 등주(登州)(19)감숙성 북도구(甘肅省 北道區) 울진(蔚珍)(51)강소성 회안시(江蘇省 淮安市) 우산(于山)(20)산동성 유산시(山東省 乳山市) *전주(全州)(21)호북성 의성시(湖北省 宜城市) 곡성(谷城)(22)호북성 곡성현(湖北省 谷城縣) 여수(麗水)(23)호북성 의창시(湖北省 宜昌市) *양주(良州)(24)안휘성 화현(安徽省 和縣) 명활성(明活城)(25)안휘성 잠산현(安徽省 潛山縣) 청도(淸道)(26)호북성 마성시(湖北省 麻城市) 무풍(茂豊)(27)호남성 장가계시(湖南省 張家界市) 영광(靈光)(28)호남성 회화시(湖南省 懷化市) *무진주(武珍州)(29)호남성 상덕시(湖南省 常德市) 라주(羅州)(30)호남성 장사시(湖南省 長沙市) 탐라(耽羅)(31)호남성 형양시(湖南省 衡陽市) *강주(康州)(32)강서성 남창시(江西省 南昌市) 아시촌(阿尸村)(33)강서성 길안시(江西省 吉安市) 고령(高靈)(34)강서성 경덕진시(江西省 景德鎭市) *상주(尙州)(35)절강성 구주시(浙江省 구州市) 고성(固城)(36)절강성 온주시(浙江省 溫州市) 천주(泉州)(37)복건성 천주시(福建省 泉州市) 양양(襄陽)(39)산서성 영제시(山西省 永濟市) 홍주(洪州)(40)산동성 운성현(山東省 運城縣) 대마(對馬)(38)중화민국 대북시(中華民國 臺北市) <>5소경(五小京) *9주(九州) 나. 대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41)섬서성 동천시(陝西省 銅川市)도읍지 부여부(扶餘府)(42)감숙성 평량시(甘肅省 平凉市) 솔빈부(率賓府)섬서성 빈현(陝西省 彬縣)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44)섬서성 인유현(陝西省 麟遊縣)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46)섬서성 대려현(陝西省 大荔縣)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46)섬서성 순화현(陝西省 淳化縣) 박평(博平)(47)산서성 임분시(山西省 臨汾市) 중산(中山)(48)산서성 평요현(山西省 平遙縣) 안릉(安陵)(49)하북성 석가장시(河北省 石家莊市) 연주(延州)(50)북경시 동성구(北京市 東城區) 동평부(東平府)(52)섬서성 농현(陝西省 隴縣) 다. 당 만년(萬年)(가)감숙성 화정현(甘肅省 和政縣) 낙양(洛陽)(처)섬서성 남정현(陝西省 南鄭縣) 연주(兗州)(나)사천성 광원시(四川省 廣元市) 서주(徐州)(다)사천성 달천시(四川省 達川市) 청주(靑州)(라)사천성 영산현(四川省 營山縣) 한중(漢中)(마)사천성 도강언시(四川省 都江堰市) 성도(成都)(바)사천성 낙산시(四川省 樂山市) 양주(揚州)(사)사천성 합천시(四川省 合川市) 회계(會稽)(아)사천성 부릉시(四川省 涪陵市) 강릉(江陵)(자)사천성 노현(四川省 노縣) 번주(番州)(차)귀주성 귀양시(貴州省 貴陽市) 남해(南海)(머)광서성 유주시(廣西省 柳州市) 소주(韶州)(버)광서성 남녕시(廣西省 南寧市) 광주(廣州)(서)광동성 광주시(廣東省 廣州市) 화주(化州)(저)광동성 화주시(廣東省 化州市) 경주(瓊州)(어)해남성 경주시(海南省 瓊州市) 은주(銀州)(카)감숙성 영창현(甘肅省 永昌縣) 하중(河中)(타)감숙성 민현(甘肅省 岷縣) 낙도(樂都)(파)청해성 서녕시(靑海省 西寧市) 천수(天水)(하)청해성 평안현(靑海省 平安縣) 무위(武威)(거)감숙성 무위시(甘肅省 武威市) 장액(張掖)(너)감숙성 장액시(甘肅省 張掖市) 주천(酒泉)(더)감숙성 주천시(甘肅省 酒泉市) 돈황(敦煌)(러)감숙성 돈황시(甘肅省 敦煌市)
1,000년 가까이 지속되는 동안 전쟁으로 인한 지리적 변동이 있었는데 도 내용은 지명으로 남아 있다. 삽량주삽良州, 상주上州, 하주下州, 강주康州,청주菁州, 서원경西原京, 중원경中原京, 정천군井泉郡, 신주新州, 패서도浿西道 등인데 섬서성, 감숙성, 사천성에 있던 신라의 지명이다.
삽량주는 사천성 양평현, 하주는(완산주라고도 했다.) 사천성 영창현, 상주는 섬서성 자양현으로 금성이 있던 곳이다.
고구려, 백제, 당과 각축했던 곳이다. 강주는 복건성 천주시, 청주는 광동성 광주시로 신라의 영토였으나 당의 강역으로 편입된다. 서원경 감숙성 유중현, 중원경은 감숙성 예현으로백제, 고구려, 당, 발해가 다투던 곳이다. 정천군은 섬서성 한성현으로 발해의 강역이었다. 신주는 감숙성의 예현 지역, 패서도는 고구려의 장안성(섬서성 서안시)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가 차지했던 곳이다.
삽양주는 양주(안휘성 화현)로, 상주는 상주尙州(절강성 구주시)로, 강주와 청주는 진주晋州 (강서성 남창시)로, 서원경은 청주(산동성 요성시)로 중원경은 충주忠州(산동성 래무시)로 하주는 강서성 의춘시江西省 宜春市로 옮겨진다. 신라의 대륙의 강역은 한반도의 6배로 정도로 추산되는데 대륙의 산동성과 하남성의 전역, 산서성의 남동부 일부, 섬서성의 남동부 일부, 안휘성, 절강성, 강서성, 강소성, 호남성의 전역, 호북성과 복건성, 광동성, 그리고 한반도였다.
산동성에 우산于山(산동성 유산시), 호남성 남부에 탐라耽羅(호남성 형양시) 한반도에 탁라가 있었다. 신라가 삼한(부여조선의 삼한, 대부여의 삼조선을 뜻함)을 통일하고자 했을 때의 상황은 신라의 북쪽과 북서쪽으로 고구려가, 백제의 서쪽으로 당이, 신라의 남쪽으로 왜와 임나가 있었다. 신라의 월성에 있던 황룡사皇龍寺 구층탑에는 구한九韓이 표기 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라가 이들과 접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단국丹國, 중화中華, 여적女狄, 말갈靺鞨, 예맥濊貊, 응유應遊, 탁라, 오월吳越, 왜倭 였다. <지도 17 참조 <--책 뒷편에 있음 참조!>
단국은 영하자치구와 감숙성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 중화는 감숙성 임하햔을 중심으로 하는 한족漢族, 여적은 후대의 여진女眞으로 섬서성 연안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부족이었고 말갈은 감숙성의 회령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부족, 예맥은 하북성 남부와 하남성의 북부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응유는 사천성 중서부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남조南朝의 한족, 탁라는 한반도를 지칭하며, 오월은 사천성 합천시를 중심으로 한 양자강 유역의 부족들이었으며, 왜는 광동성과 복건성 지역에 있던 나라였다.
이들이 모두 신라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접했던 지역에 있었다. 신라와 당, 백제와 왜는 같은 혈통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진한辰韓 때에 진秦의 유민들이 감숙성에서 섬서성의 서나벌로 이주했고, 섬서성과 사천성의 신라인들이 당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백제가 중기 이후에 진출한 호북성과 호남성은 원래 왜倭의 강역으로 왜의 상당수가 백제로 편입되었고 또 산동성과 하남성의 백제 사람들이 호북성과 호남성을 거쳐 광동성과 복건성 지역의 왜로 또는 일본 열도로까지 건너갔던 것이다.
신라의 김씨 왕조와 가락의 김씨 왕조의 조상은 하한족의 조상과 같다. 신라와 당이 군사적으로 연합했고, 백제와 왜가 서로 도운 것은 전략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혈통이 같다는 점도 무시할수 없다. 신라의 강역은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확인 할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삼국사기>의 판본은 고려 때 인쇄된것이 전혀 없다. 근세조선 중기 이후 인쇄된 것이 전하고 있는데 고려 때 인쇄된 판본과 근세 조선 때 인쇄된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가 저술된 곳은 대륙에서였기 때문이다. 근세조선은 건국은 대륙에서 했지만 곧바로 한반도로 이전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저술 당시의 판본에는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방향을 나타내는 동서남북으을 바꾼다든가 바다를 건넜다는 도해渡海 등의 글자를 삽입한다든가 하는 일이 벌어진것이다.
근세 조선 초기에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로 이동시켰기 때문에<삼국사기>의 원본이 그대로 전해지면 우리 역사가 대륙에서 이루어졌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근세조선의 집권층은 우리 역사 특히 고려의 역사가 마치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위장 하기 시작했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역사서는 금서로 정해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도록 했고, 더 나아가서는 모두 없애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역사를 위장하거나 감추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 우리는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서 잃어버릴 뻔했던 우리 역사의 제모습을복원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